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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 이병일

 

 

누이야, 혁명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지는 말자. 군인들 팔둑에 돋은 힘줄이 도드라진 오월, 죽음을 탁발하는 누이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그때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은 깨져 피가 별처럼 고이고, 군화는 내 머리통을 밟고 지나가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큰 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목적없이 와불이 되었다. 돌멩이와 풀은 어둠과 햇빛과 상관없이 어둑어둑해지고 죽음은 살덩어리로 발견되었다. 커튼이 쳐진 방 안의 귀머거리들은 큰 죽음을 모른다. 작은 죽음도 잘 모른다.

 

지평선의 목구멍에 걸린 해는 극락강 수면에 일몰의 저녁을 토해낸다. 알 수 없는 곡소리가 들리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노 젖는 시간만이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이름 없는 모덤을 찾아간다. 큰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팽나무 아래의 새들이 퍼덕거리지 않는다. 군인들은 계속 행군 중이고, 저녁의 낯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러나 더 이상 밀려가는 벼랑이 없는 나는, 뱀눈 그늘나비와 춤을 빌려와서 꿈을 꾸고 있는 세상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내 몸에서 그림자가 엎질러진 날이기도 했고, 꿈을 벗으려고 하면 총 맞은 자리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지는 오월이기도 했다.

 

 

 

 

나무는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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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찔레꽃그늘에 앉아서 나를 솎아내고, 앵두나무그늘 접어서 나를 섞어보고, 나는 나를 방정식으로 풀어보듯,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서 초록이파리가 빽빽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쓰는 시가 허구의 세계지만 그 안에는 허황되고도 아름다운 것들이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향 진안에 내려가서 부족한 일손을 돕다가 앞 산 넘어온 비를 바로 마중 나가는 뒷산의 그림자와 젖은 빗방울이 발밑의 묵묵한 목숨들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작은 날숨들이 만들어낸 오월의 들녘 속에서 5.18문학상의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작년 시월에 사내아이를 얻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아이와 아내에게 좋은 선물 하나 해줄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이는 지금 말문을 트기 위해 옹알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합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시에게 말문을 트기 위해, 시에게 가기 위한 배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호기심을 갖듯이 그런 눈빛으로 사물들에게 사랑의 말을 걸어볼까 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 이소연과 아들 이서진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의 여리고 작은 사물들의 비애를 꿰뚫어보는, 그런 촉이 예민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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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금년도 5․18문학상에 대한 시 예심자는 다음 사항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예심을 진행하였다. 먼저 5․18기념재단에서 평가 기준으로 제시한 예술성, 대중성, 독창성, 문학성, 주제의식을 기본적 참고 사항으로 삼되, <5․18문학상>이 기존의 신인문학상과 달리 ‘5월’의 시대정신 구현과, 광주정신의 참다운 재현을 이룩한 작품이어야 하며, 이 때 신인으로서의 언어적 참신성, 신선한 패기, 기존 5월시의 시적 성과를 뛰어넘는, 예술적 수월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응모작 중 5월의 주제의식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고, 시적 성과를 뛰어넘는 신선한 시적 발상을 보여준 작품을 위주로 예심을 진행하였고, 예심자의 그러한 소망을 담아 본선에 총 28명의 응모작을 올리기로 하였음을 밝힌다.

 

예심통과작

파도 속에 떠도는 섬 외 스펙에게 외 춤추는 병정 외
그래서 나는 빨갱이였나 보오 외 낙화2 외 오월은 외
망월동 연가 외 광주의 눈물 외 광주 외
1980. 5. 18. 외 서로서로 굳게 손잡아 외 맛의 기억 외
오월의 햇살 외 솟대의 꿈을 꾸는 철새 4월 20일 Pm 8:34-혈흔 외
묵상의 늪 외 맹 외 민둥산의 밭 외
어떤 말에 관한 기억 외 비계공을 위한 서시 외 희망의 사막 외
마그마 외 통곡 외 봄동 외
뿌리론 외 염원 외 때는 5월
칸의 나무배트 외    

 

5·18, 벌써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날을 직접 겪은 이들은 나이가 들었다. ‘그날’은 영상물이나 교육이나 그것을 직접 겪은 어른들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오늘 우리는 스물여덟 분의 168편의 시를 심사하여 한 편의 당선작을 가려냈다. <오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5·18이 이제는 생생한 기록화가 되기도 어렵지만 먼 풍경화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5월의 정신이 오늘에 어떻게 살아있는가이다. 투고작은 전체적으로 5월을 과도하게 의식해서 설익고 관념적인 어투의 시를 뽑았다. 시각의 참신성, 수사의 활달성, 삶의 구체성, 역사적 건실성을 구현하려는 시적 진정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도 현실인식의 튼실성, 5월의 구체적 형상성이 뛰어난 작품을 골랐다.

 

- 심사위원 예심 이승철 / 본심 정희성 · 김용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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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들

  

나는 모른다네

 

창밖을

너구리를

개와 고양이의 꼬리 사용법을

장미꽃이 가장 간지러운 순간을

예수의 손바닥에 박힌 못의 크기를

탄성을 자아내는 여러 가지 체위를

당신의 혀에 돋은 새빨간 돌기의 감촉을

여름에 어울리는 머리색을

열매가 부풀어 오르는 아픔을

지금의 바람과 내가 몇 번째 대면하고 있는지를

허기가 나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을

 

창밖에서

권투선수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내려치네

빗나간 훅

 

설령, 설령

디귿의 마음으로

당신은 나를 함부로 이해하네

나의 긴 갈색 머리

웃고 있는 칠월의 책상에 걸터앉아

갈겨쓰네

갈겨쓰고 있네

디귿, 디귿, 디귿이라고

 

함부르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처럼

찍찍찍

세상이 내 것인 것처럼

갈겨쓰네

 

사랑을 아십니까

길에서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 없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나의 다리들

다리들

다리의 다리들

 

책장 위를 우아하게 걷는

열 개의 다리를 가진

고양이의 자의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시도하네

 

비명처럼 길고 긴

기차

검정 거울

나는 모르네

어퍼컷 혹은 라이트 훅

내 몸을 빗나간 뼈들

바닥을 뒹구는 뼈들

 

               *

 

옆 집 오빠는 키가 작지만

여러 가지 표정을 가졌고

나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짓네

캄캄한 주머니 속

그의 그림자

자꾸만 길어지는 그림자

디귿의 심정으로

난간에 기대

화단에 핀 장미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인사를 나누네

 

그와의 대면이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모르핀의 투명함

분침이 툭 하고 내려앉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나는 배고파요

 

주머니 속의 주머니

주머니 속으로 삼켜지는 주머니

주머니와 주머니들만의 어둠

인사처럼 텅 빈

권투선수의 꽉 쥔 주먹

부풀어 오르는 손톱자국

 

나는 가장 단순한 사람의 얼굴로

오빠를 바라보았네

턱을 괸 채 킬킬대는 칠월의 꽃들

너구리가 디귿을 물고 골목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네

 

 

 

샹주망 아버지

  

   도마뱀. 물을 핥는 두 개의 뾰족한 빨강. 육교 아래를 질주하는 새벽의 차들. 불빛들. 샹주망. 샹주망. 부릅뜬 눈. 눈두덩을 쓸어내리는 손. 아버지 당신은 아래가 젖은 채 침대에 누워 계시네요. 부르르 떨며. 제 손목을 움켜쥐시네요. 당신은 양서류. 나는 가장 어두운 물 밑을 헤엄쳐요. 산호를 찾아.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입을 벌려요. 차들. 차들. 육교를. 내 아래를 관통하는 차들. 불 위를 떠다니는 배. 주머니 안에 숨겨진 손. 당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아버지. 춤을 추고 싶어요. 물속에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시멘트의 높은 육교 위에서. 너무 먼 차들. 손끝을 모으고. 샹주망. 샹주망. 물 위를 걷는 도마뱀. 당신의 손톱이 팔뚝을 파고들어요. 땅 밑으로 나를 끌어내려요. 아버지 아파요. 아파요. 떨고 있는 쇠 난간. 속을 흐르는 피. 차가운 밤의 불빛이 나를 얼려요. 보내줘요. 혀의 움직임. 혀의 속도. 혀의 방향으로. 물을 그러모으는 손들. 샹주망. 샹주망.

 

 

* 샹주망Changement : 발레 동작 중 양다리의 장딴지를 부딪히며 공중으로 도약하는 자세를 말하며, 프랑스어로 변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박쥐

 

   긴 꼬리 구둣발 소리 미간을 찌푸린 오월의 빛 친하게 지내자 꽃봉오리를 쥐어뜯는 왼손 끈적이는 보도블록 슬로우 다운 슬로우 다운

 

   벗겨지지 않는 피 냄새. 굳게 입을 다문 밤의 냄새가 난다 길 끝에서 두 남자는 주먹질을 하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고 냄새를 맡으며 냄새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교 아래서 비를 피하며 물 뜯는 소리를 듣지 차는 멈추고 차창을 내린 하얀 얼굴의 남자는 묻지 찢겨진 입술을 찾아줄까? 묻지 떨고 있는 오월의 난간을 붙들고 가방끈을 꽉 붙들고 고개를 숙이지

 

   슬로우 다운 아버지처럼 웃는 밤거리의 남자들. 뒤집힌 괴물들 세상에서 가장 뻔한 노래를 부르지 슬로우 다운 차창을 내린 얼굴처럼

 

   발톱 오늘 밤의 발톱 셔터가 내려진 꽃집 앞 화분들 발톱에 걸린 긴 소매들 병뚜껑을 모으는 취미 출처가 불분명한 다리의 멍들 뭉개진 꽃잎은 손안에서 끝없이 끈적이고 있지 슬로우 다운

 

 

 

————

백은선 / 1987년 서울 출생. 201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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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청년*

  

이란 사는 파란 남자는 베이지색 배 안에서 가능성이다

둘 중 한 쪽은 반이 추는 노란 춤일 것이고

자궁이 좁아 옆이 붙어버린 샴의 형일 것이며

엄마는 파라솔의 알록달록 아래 자주 눕고

태양의 정면을 쳐다보는 이란의 유일한 베이지다

파란 것은 배고파 어떡해 자꾸 묻는 아이의 느낌이고

노란 것은 스미고 번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파란 옆인데

 

둘이 붙은 것은 파라솔 근처의 태양 때문임을

로션 바른 베이지가 알고 있다

먹힌 것은 그래서 노랑

동생의 배로 잡혀 들어간 트윈의 형

파랑의 움직이는 반

예뻐 죽기 직전인데

 

왜 청년은 임신인가 노랑을 품었으므로

 

형은 손톱이 자란 노란 손을 굽힌 채 내내 있었을 것이고

형은 치아가 솟은 노란 입을 모은 채 파란 놈의 내장이 되는데

놀랍지 여기서 노랑을 유지해 이건 형의 고발인가

노랑의 극단적 위장 파랑

 

사실 살인은 청년 베이지가

파랑노랑 분명하지 못한 놈이

누구에게 배웠나 멋으로 옆을 갈랐나

몸 작은 형은 곱슬거리다 죽지도 못하고 어쩌다 죽지도 못했는데

아니라면 임신이지 그러니까 약간 유머야 배 배 배

내 배 속에 형이 들어 있다

 

꺼내봐 네 형

죽었나 살았나 몇 살이야

 

동갑이군 여전히 노래

네놈은 파랑인데 위장이고 형이 노랑이고 아 참

형이 넌가? 너 이란이야 청년이야 이거 알록 아냐?

 

그러니까 이게 배 안에 두 배가 붙어 한 배가 한 배를

왜 먹었지요?

 

 

* 22세 이란 청년의 몸에서 태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 시신은 청년이 엄마의 태내에 있을 당시 함께 자라던 쌍둥이 형의 몸으로 밝혀졌다.

 

 

 

 

아버지 딸뱀

  

소녀의 이름은 외자, 뱀이다

줄거리는 몸 쓰는 놈으로 섭외하고

누린내가 퍼지면 인물들 움직인다

그는 앉아 있고 단 한 번, 푸드덕댄다

백발을 감아올려 뱀을 세운 딸은

아비 앞에 선 채로 생리를 쏟아내고

기름이 다 빠진 뱀은 다리가 휘어진다

타닌 타닌 타닌*을 외치는 소녀

불현듯 안구를 꺼내 눈구멍을 비우고

멀미 오른 몸은 뒤를 건드리며 부드러워지는데

 

아비는 지금 무엇을 하나

나는 시력을 잃었으므로

 

어제 아비는 울었다 어제의 아비는 이제

아비의 어제

이제 나는 영영 아비를 알 길이 없고

 

한낮 어둑한 후방의 얼굴

깜깜한 얼굴을 삼키며 몸을 불리던 나는

곁이 없어 마른 접시에 든 낙지처럼

배 붙일 곳이 필요하므로 뒤로

뚱뚱하다

 

(팽팽하고얇은측백잎날렵한근육한점)

 

정사도 없이 부푼 몸이 나는 어지러운데

왔다 몸 쓰는 놈 이명을 다스리는

개들의 돌림노래

 

휘파 피 파 휘 축축한 켄터키 뱃집에 햇빛 비치어

어느 뱀 검둥이 시절 휘파 피 팟 척 척

 

저 해는 긴 뱀을 감아올릴 때 아버지는 벌써 익었다

 

아비를 굴리며 노는 어린 뱀 세상을 모르고 감나

분장할 시절이 닥쳐오리니 치장해라 아버지 딸뱀

 

그리운 아버지 등장하시어 울던 몸 오라며 운 날

척척한 등허리 찢으며 놀자 선지를 튕기며 놀자

 

 

* 타닌(tannin) 무두질 : 타닌을 이용하여 짐승의 생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

 

 

 

똥굿

  

똥이 폭발한다

꿈에서

젖은 하체가 달아난다

고의는 아니었고

하체는 하의 안에 있다

항문들은 줄을 지어 따라가고

사라지고

순식간에 퍼지는 낮잠의 바닐라

똥 싼다

밑이나 열자

항문이 질과 담합하여 새로운 구멍을 내세울 때

머리를 아래로 하고 기름에 튀겨보지

카락 카락 탁탁 튀는 낱개들 몸살들 쏟아지는

내장들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잠 속의 항문 마이크 물면

누구냐 질

너의 스위치를 켜라

띠용띠용

둥둥 떠다니던 잠자던 마초

꿈을 배신하며 기어코 죽어가

마초를 꿈꾸던 대낮의 애인

불 끈 질을 열고 시체를 내보내

항문엔 담배를 물리지

엉덩이를 낮추고 제법 연기도 뿜어

여배우 같아

임신도 했어 영화같이

엄마 이거야 탯줄 대신 숙주나 연결해줘

여자 다산콜센터로 달려가 허벅지를 연다

부탁해요 데친 숙주

120: 어서오십시오미친년 네 똥집이나 한 입 먹어라

여자: 그래요 그래요 정다운 나의 다산콜센타

임신은 아니었고 항문은 돌아왔다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잠이 폭발한다

  

이번 꿈은 액자식 키보드 구성

똥물 쓴 내가 휙 돌아보면

누군가 똥 싸고 있고 그놈 항문 파내면

내 뒤가 쓰라리고 밑을 건드리면 위가 넘어가고

머리칼 튀고 날고 머리통 구르고

엔터엔터 신나게 두드리는데 얼굴에 엔터 똥칠이고

누가 나 좀 말려봐요 쟤 좀 건져줘요

저년 싸겠네 저거 꿈꾸다 구체적으로 웃는 거 봐

굿이라도 해야겠지 똥병이지 저거

거기 똥신이시어

차라리 나 타인 되게 하시오 이 몸 작살에 올릴 테니

제대로 썰어 다시는 붙지 않게 멀리멀리 뿌리시오

워이 똥물 워이 똥 튄다

 

 

 

————

장수진 / 1981년 서울 출생. 2008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연기 전공) 졸업. 2006~2010 극단 〈골목길〉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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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총 368명이 응모한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예년에 비해 100여 명 정도 수가 줄어 기대할 만한 작품이 적지 않을까라는 우려 속에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를 비웃듯 심사위원들을 긴장시키고 설레게 만드는 수작(秀作)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예심을 통과한 이들의 수가 15명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이름을 전부 부기해도 좋을 만큼 작품의 수준과 완성도가 모두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오갈 정도였다. 구현우, 김복희, 김선미, 박수지, 백지은, 송민규, 안희연, 양안다, 유재숙, 이소연, 이진기, 장수진, 정재우, 주완식, 한그린 등은 곧 다른 지면을 통해서라도 만나볼 이름들이다.

   15명의 작품 중 누구를 본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부터 행복한 고심거리였다. 올해의 경우, 심사를 진행하기 전에 심사위원들이 중요한 규준으로 의견을 모은 것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이해를 거부하는 과감한 ‘파격’으로 보일지라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시적 발화를 선보이는 진정한 ‘신인(新人)’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중략)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백은선과 장수진의 시였다. 그런데 그간의 심사에는 없었던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제정된 이후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시 부문의 공동 수상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백은선과 장수진 중 그 누구의 시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백은선의 시는 장황한 말의 집적으로 시를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길게 만드는 요즘의 경향과 비교할 때, 선명한 이미지의 제시와 긴 호흡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유려한 리듬을 통해 한국 시에서 장시의 새로운 미학을 일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예로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드러나는 선연한 상처의 흔적과 세계와 사물을 대하는 부정적 대결의식은 뒷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날카로움 또한 숨기고 있다. 로르카의 민요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감각적 리듬감은 그가 계속 견지해야 할 큰 장점으로 보인다.

   장수진의 시는 자신이 창출한 형식을 스스로 그 내부에서 산산조각 내려는 강력한 자기파괴적 힘을 발하는 요설로 시종일관한다. 흡사 접신의 경지에 이른 무당의 굿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말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독백조의 발화는 단정하고 우아한 정제미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의 시에 내재된 요설의 형식과 거친 리듬은 시대를 조롱하며 비극적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토해내는 자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며, 그러한 목소리가 갖게 마련인 강한 마력으로 독자를 자기 세계로 이끄는 형용키 어려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자기 내면에 도사린 퇴폐와 파멸의 징후를 거침없이 발산하는 그의 시는 한국 시에 또 다른 ‘마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기성의 시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독자적 개성이 빛을 발하는 이들 중 한 사람만을 당선자로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심사위원들은 단 한 명을 선택하는 일을 과감히 포기했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두 명의 새로운 시인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배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한다. 수준 높은 기량의 시편들을 함께 투고해준 응모자 분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한국 시의 미래는 고맙게도, 감히, 여전히, 밝다. _ 이광호, 강계숙(문학평론가)

 

1차 심사: 이원, 강정, 강계숙   2차 심사: 이광호, 강계숙

 

 

            —《문학과사회》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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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입자들 / 민슬기

 

 

남의 집에 구멍을 빌려 지으면서 시작된 식탐이다

무엇이든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업보다

어둠을 갉아먹으며 사람들의 은밀한 말소리를 귀담아듣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으므로 속절없이 칸칸이 들어찬 어둠을 헤맨다

침묵이 답이라 믿으며 썩은 음식물 냄새로 묵묵히 이동할 뿐이다

이따금씩 고양이 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맛본다

눈알은 갖고 있으나 몽유하는 혼령처럼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끊임없이 헤매도 변하지 않는 역마살

어디서 시작되고 끝은 어디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풀벌레가 뱉어내는 소리는 비명 같다

가느다란 수염은 한껏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이다

진술실의 조명처럼 가로등은 꺼질 줄 모르고

쥐가 가는 길을 탐색한다

달이 한 겹씩 탈피를 해도 여전히 같은 곳을 뒹굴듯

보이지 않는 틀 속에서 질주한다

치부를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쓰레기봉투 위에

까닭 없이 올라서 보기도 하며 허무를 베어먹는다

어쩌면 도사리고 있는 덫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도는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막다른 길로 질주한다, 막다른 길이 집이다

 

 

 

 

 

 

[당선소감] “시인의 붓으로 시를 쓰며 내 삶을 증명해 보이겠다

 

나는 침묵부터 배웠다. 문장을 꼭꼭 씹으면 해체된 자음과 모음이 입안에서 굴러다녀서 애를 먹었다.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거울 속엔 아직 덜 자란 저편의 내가 불쑥 울어버릴 것처럼 앉아 있었고 계절을 지나온 지문 투성이 과거들은 쉽게 금이 갔다.

 

타자로서 스스로를 되비추는 과정은 결말뿐이라고 생각한다. 글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어제의 나를 능가할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야 하는 일은 아직도 나의 숙제이다. 간절함에 대해 믿지 않았으나 일기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시는 금세 다가와 주었다가도 뭔가 끄적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다시 어둠 속에 꼬리를 감춰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를 견뎌내는 방식은 배웅과 마중이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다시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시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어쩌면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본 것도 같다. 그 뿐이었다. 나는 아직 시의 손을 잡지 못했다. 입 맞추지 못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던 중 소식이 당도했다. 이른 초여름 햇살이 세상의 녹음을 짙게 하듯, 그렇게 불현듯 가슴 벅찬 순간이 내게 올 줄이야.

 

본인 외에는,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작품에 대해 폄하하지 않게 하시고 시의 광활한 세계를 열어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먼저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앞으로는 쉴 틈 없이 달려갈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늘 사랑으로 다독여주시고 이끌어주셨던 문지원 선생님, 그리고 작품을 발표할 때면 기성 작가처럼 대우해주시며 과감하게 시를 앓을 수 있게 해주신 박찬일 교수님 외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예술대학교에 다니는 예비작가로서 자긍심을 갖게 해주신 교수님들의 지지에 꺾이지 않을 시인의 붓으로 시를 써 보답해드리고 싶다. 사랑으로 나를 빚고 초라한 빈손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나를 아픈 손가락으로 감싸 쥐고 또 다른 부모님처럼 키워주신 이모와 이모부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동생 현기와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최초의 독자가 되어준 모든 친구들과 추계예술대 11학번 문창과 동기들에게도 고맙다.

 

마지막으로,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내 어린 시들을 눈여겨 봐주시고 뽑아주신 신경림 시인과 유종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보다 나은 시로 내 삶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심사평]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대변

 

응모작품들을 읽으면서 먼저 느낀 것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은 시를 찾아 읽는 데 게으르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시를 가르치는 대학이나 이른바 강좌의 책임이 클 것이다. 좋은 시를 쓰는 데는 당연히 좋은 시를 읽는 과정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응모작들을 보면 그런 점이 모자란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쓴 것 같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또 응모작들이 발상과 형식에 있어 비슷비슷한 것이 많았는데 이 역시 대학의 시교육과 창작강좌 등의 영향일 터이다.

 

재담이나 비유 같은 것이 너무 뻔하고 낡은 것들, 예컨대 이미 남들이 써먹었거나 가당치도 않은 것들이 많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이 중앙지의 신춘문예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집 시기가 중복되지 않은 데 따른 집중 효과 탓인지 오히려 좋은 작품이 더 많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응모작 가운데서 심사자들은 우선 김나영, 조대식, 민슬기 세 사람의 작품에 주목했다.

 

김나영의 시는 발상이 나이브하면서 순박하다. 다른 응모작들과 선명하게 구별되어 확 눈에 띈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왕따’, ‘어른 대 어른으로’, ‘사랑받을 자격같은 시들은 그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대목을 관찰하여 시의 재미를 맛보게 해 준다. 한데 상이 너무 어리다. 훈련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조대식의 시는 안정되어 있는 것이 장점이다.

 

궁상스럽고 공연히 웅크리고 하는 대목이 전혀 없이 활짝 펴져 있다. 그 중에서도 벚꽃 지는 날같은 시는 독자를 푸근하게 안아 주는, 아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이다. 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안이해서 시의 깊이를 떨어트린다. 작품들이 편차가 심한 것도 문제다. 민슬기의 작품은 좀 답답하고 갑갑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오늘을 살고 그 삶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시한부 목숨일지도, 긴 꼬리로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질주한다는 , 세입자들은 그의 자화상이자 오늘을 사는 많은 젊은이들의 초상일 터이다. 언니의 낙태가 소재가 된 백목련의 그림자가 없다도 우울하고 답답한 내용이지만 현실을 드러낸 한 단면도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변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시의 형식까지 답답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좀더 활기있고 시원스레 시를 쓰는 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 민슬기의 , 세입자들을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위의 심사평으로 충분히 설명이 됐을 것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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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만드는 골목외 4편

 

류명순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처럼 슬픔을 진열한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발걸음을 덮어쓴다

경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켠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한다

 

바람이 갸웃거리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고문은 진화 한다

 

  불시에 나를 구속한 스티븐 존슨*은 희대의 고문기술자다. 눈을 떠 빛을 데려오면 그는 내 장기마다 하루 치의 수명을 부여한다. 오늘은 그가 되돌이표 그려진 악보처럼 나를 연주 한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음표를 벗어난 신음을 뱉어낸 적이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첼로 현처럼 휜 척추로 연주했고, 십 년 전에는 각막에 펼친 건반을 올려 차며 연주를 했다

 

  그가 내게 배려한 유일한 자유는 목숨이다. 나는 사디스트가 되어 나를 때리고 마조이스트가 되어 고통을 충전했으므로 내 목숨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나는 희열이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통증으로 사정을 완성하던 날, 그는 새로운 고문기술을 접목했다. 손톱이 뽑힐 때 음역 밖의 신음을 연주한 것은 실수였다.

 그가 내게서 손톱과 닮은 둥근 각도를 찾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발톱을 뽑아내고 앞니를 뽑아내고 각막을 뽑아내고 결국 양지에서 나를 뽑아 음지에 가두었다.

  눈을 떠도 빛을 데려오지 못하므로 나의 하루는 길이가 없다. 열쇠가 없는 안구의 독방에서 내 묵비권이 완성됐다. 내가 내게 종신형을 언도하자 고문이 멎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열쇠를 목숨에 꽂아놓고 사라졌다.

신음을 연주해서 형기를 채워야 하는 내가 고통 없음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을 때,

  나는 외로움을 비틀어 고통을 초대한다. 그가 내 장기를 하나 둘 두드려 깨운다. 나는 목숨에 없는 빠른 박자로 신음을 연주한다. 그가 관장하는 하루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존슨: 약물 알레르기로 눈의 점막을 손상시켜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

 

 

 

 

사람의 품

 

미루나무 껍질에서 나이테의 파동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손가락 한 마디씩 늘인다

이파리가 그늘의 나선을 돌린다

 

넓어지는 그늘에 내가 얼룩 하나로 섞인다

 

내 잠꼬대가 다른 사람 호흡으로 바뀌자 그늘이 확장을 멈춘다

옹이 빛깔의 눈동자가 전생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이 기도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합장의 어둠을 열고 무작정 걸어 들어간다

매일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길 끝에

내 얼룩과 마침맞은 공간이 파여 있다

 

먹는 자세를 하고서야 꿈을 꾼다

한 사람이 손 그림자로 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품에 안긴 내가 그늘의 속도로 자란다

 

아기 발길질에 얼룩이 깨진다

내가 서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내 눈동자에 한 사의 얼룩이 고여 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외우려고 하자 그늘이 나를 팽개친다

그늘이 사지를 숨기며 미루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얼룩을 품으로 키워내면 어머니가 된다

 

 

   

형법 제38조

  

충혈된 눈에 들어온 형법 제38조가 수갑을 채운다

방안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서른여덟을 염탐하는 담쟁이가 방안을 기웃거린다

법전 속에 숨긴 법문이 미궁에 빠져든다

승자독식사회의 알리바이를 밝혀내기 위해

육법전서의 침묵을 몇 년째 추적해 보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제자리 잠복 중이다

 

그림자를 체포해 가는 그믐달이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머니기도를 의심스레 쏘아본다

잠을 취조하는 시계 소리에

별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또다시 법률사전을 비워내야 하는 공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파산선고를 받은 등골뼈들이

호시탐탐 무릎까지 넘보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 사랑을 수첩에 기록하고

날 선 법과사전에 시선을 책갈피로 꽂아두면

두 눈에 고여 있던 하늘이 빛을 흘린다

법복보다 더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고시촌 하늘엔 별도 법문처럼 뜬다

 

 

 

   

무덤으로 가는 앤디워홀

  

나를 버리러 지하로 간다

캔버스와 판화도구 버리러

내가 사랑하던 마릴린 먼로도 버리러

세상의 희롱과 박수까지 버리러

주유소도 편의점도 없는 지하의 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혼자의 길

 

누구 하나 환호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사물들, 구조는 단순하다

주검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도 없는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나를 다녀간 사람들이 기록해둔 필름처럼

기억이 기억을 물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문득, 까마귀가 울 것 같은 적막이 몰려들고

붓을 든 낯선 손을 따라

무덤속이 밀밭으로 변하고 있다

복제된 그림이 제멋대로 불어나 무덤을 밝힌다

 

버리는 것은 끝이 아니고

또 하나의 부재를 달고 새롭게 태어난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린 내 몸이 한없이 추락한다

낯선 내가 나를 붙잡아 콜라병에 담는다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류명순 :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재학 중.

저서 :  잃어버린 20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외 4편

 

김명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나 이제 돌아서려네 고개 숙이고 있던 수은등이 마지막 시선 한 조각을 떨어트리네 당신의 눈길이 차곡차곡 쌓인 골목 내 기다림에 닳고 단 모퉁이 당신의 체온 대신 깨진 벽보 한 장에 기대네 더 이상 당신이 내가 아닌 첫 시간, 눈 감은 수은등 대신 당신의 방을 지키려 하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손을 쥐고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빈손이었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과를 깎는 일과 같더군 손을 베이고 나서야 나를 향해 칼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네 당신을 코르크 마개처럼 빼낼 순 없겠지 하지만 이제 배경이 되어야 할 시간 그동안 고단했을 수은등을 놓아줘야 할 뿐 초승달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네 나와 눈이 마주친 별들이 하나둘 흥건히 떨고 있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이제 당신도 상상이 되려하네

 

 

 

 

한 짝

  

신발 밑바닥의 껌 딱지처럼

누구라도 붙들고 싶은 날

인력소개소 앞에서 악수를 청하는

목장갑 한, 짝

길을 베고 때 묻은 얼굴을 붉히며

처음인 듯 서툴게 망설이며

어쩌면 목장갑은 일용직 잡부로 못 박혀

붉은 빨판으로 쇳조각만을 붙잡았을 것이다

만난 적 없기에 더 닿고 싶었을 체온

어느 누구도 왼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관심에 차이는 깡통마저 부러웠을 날들

골판지 상자가 손 잡아 줄 만도 하지만 이미

킬로그램당 백이십오 원이 수거해 갔을 것이다

무관심이 시간당 백오십 미리로 쏟아져

상처난 손가락 끝을 때린다

단물만 뺐기고 뱉어진 내 마지막 퇴근길에

손 내미는 목장갑 한, 짝

 

그래, 악수

 

 

 

 

루어

 

내가 낚싯감이었던 거야

 

빛살이 되어 파도의 속살을 가로질러 덥석

싱싱한 기대 대신 입술을 꿰뚫은 날카로운 착각

몸부림칠수록 미늘은 깊숙히 박히고

부레를 부풀릴수록 낚싯줄은 긴장

비늘을 움켜쥐는 또 다른 바늘들

빼곡한 통점을 털어 버리고 싶지만

그것마저 놔주지 않는 악력

바다를 배경으로 훌라춤을 출렁이던 여자는

산호도 진주도 아닌 루어*일 뿐

 

세상을 사냥할 수 있다는 확신은

결국 세상에 낚였다는 관통상이 되지

아가미를 열어 납추 같은 한숨을 떨어트린다

이젠 먹이의 배경에 언제나 바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나인 거야

온몸을 찢어 바늘과 헤어져야지

이젠 루어를 만들어

촉수를 감춰야 할 나인 거야

이젠 내가 세상을 속여야 할 차례인 거지 

 

나는 루어(淚漁)

 

*루어(lure): 생미끼가 아닌 눈속임용 미끼로 플라스틱이나 금속 재질로 만든다.

 

 

 

 

아내의 시집

 

   아내는 어느새 셋방살이 같은 잠에 빠졌네요 가게부에 밥풀처럼 납작 달라붙어서요 의류수거함 대신 아내 차지가 된 제 뜨게옷의 보플도, 때 넘긴 파마머리도 투정을 거두고 같이 잠들었네요 아내는 쪽잠 속에서도 흥정을 하는지 깎아 달라고 잠꼬대가 졸린 눈을 비비네요 저는 생활정보지를 접고 말을 걸어 봅니다

  -마수걸이라 그렇게는 안 돼요

  -그래도 깎아… 주세요

  된소리를 발음할 때마다 아내의 눈썹 사이가 구겨져요 아내가 젖몸살을 앓으며 걷던 가계부 속으로 눈길을 피해 봅니다 올 나간 우리 가족을 숫자와 기호로 옮겨 놨네요 북쪽 말로 남편은 '나그네'라던데, 저는 아내의 가게부에서 길을 잃네요 매일 생리통을 앓는 가게부는 아내의 시(詩)네요 한 장 한 편 한 편 이미 아내의 시집(詩集)이네요

  -그럼 그렇게 가져가요, 아가씨

  미안함에 선심을 써 봅니다 덤으로 싸 준 아가씨란 말에 에누리 없는 웃음이 커져요 비닐 봉다리에 제 것과 애들 것만 담아 꿈길을 돌아올 아내 저는 꿈에서마저 시를 쓰느라 부르튼 아내의 두 발을 주무르네요 아내의 거친 발톱이 오늘 왜 이리도 제 눈을 찌르는지, 왜 이리도 제 가슴에 박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네요

 

  남쪽 말로 아내는 '가시'라고 하데요

 

 

 

 

생명선 기차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때문일까

빗소리 때문일까

최선을 다해 울어 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누구의 잠도 건드릴 수 없는 물결무늬

몸에 꼭 맞던 잠을 벗어던지고

아이를 건져 올린다

불인한 아이의 손끝이 내 눈을 더듬는

순간, 본다

손바닥을 힘껏 달려야 할 생명선이

시작하자마자 잘려 버린 것을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사이로 아이의 울음이 침목이 된다

창문 너머에서 미안한 듯 서성이는 빗소리

아이도 눈물 자국 같은 생명선을 따라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변명밖에 모르는 처방전에

건널목 차단기를 내린다

나는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

아이의 시든 생명선 끝에

바다를 향해 달릴 철도를

잇고 잇고

또 잇는다 

 

 

김명호:

1977년 서울 출생. 이후 전주에서 성장.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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