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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검프 / 문석암


  사랑이라 믿었던 순정한 것들이

  명치끝을 통과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명치 속 검붉은 멍을 쪼며

  자라던 가엾은 유리새들

  길바닥에 깨어지고

  나, 검은 짐승처럼

  이 생을 뛰어넘고 싶었다.

 

  넘어져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던

  어린 날처럼

  울음 뒤에 오는 평화를 홀로 일으켜 세우며

  나는 달린다.

  달리면 달릴수록 내 몸 안에 버려둔 발짝들이

  흘러넘쳐 나를 데리고 강으로 가고

  강가에는

  ‘프랑스제과’ ‘가람서적’ ‘정든다실’ 같은 산 그림자 흘러내려.

 

  나는 빠르게 은어떼 사이로 미끄러진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열병보다 빨리 달려 병을 떨어뜨린다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말씀 같은 것.

  어둠은 고양이의 발톱처럼

  캬릉!

  뒷목을 할퀴려고 하지만

  하!하!

  나는 강낭콩보다 푸르게 튀어오른다.

 

  달리면서 바라보는 것들 속엔 심장이 뛴다.

  새벽을 달리는 불자동차는 불타는 심장이

  흰 우유를 가득 싣고 달리는 자전거에는 밀초 같은 심장이

  감청빛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는 레몬 같은 심장이

  탁탁, 어둠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두드려라

  모든 것들이여

  전봇대를 두드려 전나무를 만들고

  가로등을 두드려 꽃을 만들고

  폐가를 두드려 카페를 만들고

  불행을 두드려 사랑을 만들어라.

 

  그리하여

  더이상 두드릴 것이 없을 때

  나를 두드려

  더 먼 곳으로 가게 해다오.

 

  다시 나를 일으키는 불행이 있는 곳

  그래서 더 멋진

  천치 같은 행복이 있는 곳.

 

  그제서야

  천 개의 다리를 벗어버리고

  깃털처럼 고요히 차오를 듯 차오를 듯

  가라앉게 해다오.





지옥도(地獄圖) / 문석암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졌어 강물은 핏빛 흐르지도 않았어 해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허옇게 사위어갔어 우우 천산남로(天山南路)로 몰려가는 혼령을 보았어 길들은 길을 잃고 쓰러지고 아무리 태엽을 감아도 시계 따윈 움직이지 않았어 허공중에 걸린 숟가락이 달의 속을 파고 있었어 뇌수를 긁어내듯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삶을 송두리째 도려내고 있었어 머리를 붙안고 거리를 헤매다녔어 인적은 없었어 가는 곳마다 쥐들이 우글거렸어 나와 눈이 마주쳐도 도망가지 않았어 쥐가 내 집을 갉아먹고 있었어 내가 집이 되어 소리쳐 울었어 그러자 더 많은 쥐들이 몰려왔어 나는 도망쳤어 한참을 왔다고 생각해 뒤돌아보자 나보다 큰 쥐가 달려들었어 나는 쥐의 목구멍으로 빨려들었어 아아 한도끝도없이 떨어졌어 캄캄한 어둠 속이었어 누군가 노래를 불렀어 끔찍한, 소름끼치는 소리였어 시체가 나무에 붙어 말라가고 있었어 바람이 시체를 휘감자 두 눈을 부릅뜬 시체가 내는 소리였어 고목이 울부짖는 것 같은 그건 레퀴엠이었어 나는 시체의 두 눈을 감겨주고 싶었어 가까이 다가서자 시체가 벌떡 일어섰어 그리고 제 등에 박힌 도끼를 들어 도망치는 내 등에 꽂았어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핏빛 강물에 등을 비추자 도끼는 보이지 않고 날개가 돋아나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이미 날고 있었어 세상이 불타고 있었어 아니 다 타고 스러져가고 있었어 내가 살던 곳이 어디쯤일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애 그러다 그만 무엇엔가 부딪혀 떨어졌어 그건 아주 커다란 브라운관이었어 그 속에 수많은 혼령들이 불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을 감지 마라’ 누군가 말했어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수많은 영혼들이 낙엽처럼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보고 있어야만 했어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울고 있어야만 했어





봄의 인사 / 문석암



  푸르게 빗질하는 세월 앞에…… 고개 숙여 인사하네…… 아파트…… 계단…… 팬지꽃…… 민들레에게도…… 안녕…… 골목…… 모퉁이…… 검은 꼬리…… 감추는 겨울아…… 안녕…… 할머니 등에 업혀 잠든 아이…… 아이의 젖은 속눈썹에게도…… 안녕안녕…… 이웃의 낯선 문패…… 뒤꿈치 들고 선 후박나무…… 봄을 감고 오는…… 삽상한 제비의 날개…… 그 날개가 그리는 봄 하늘의 애처로움…… 그 아래…… 마분지 같은…… 시장 사람들…… 바다로 가지 못하는 붕어빵들…… 파…… 한 단 놓고…… 이정표처럼 조는 할머니…… 말간 접시를 파는 중년 사내…… 그 접시를…… 운명의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아낙들…… 통유리에 갇혀 사는…… 기쁨약국 약사…… 머리를 짚고…… 두통약을 사는 사람들…… 제일은행 유리문에 비친…… 파란 불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아…… 산호 같은 봄나무들…… 온 골목을 뛰노는…… 봇물 같은 아이들…… 소리…… 그 소리를 안고…… 둥글게 구부러지는…… 아지랑이…… 온몸이…… 흙빛으로…… 멍들며 지는 백목련…… 그…… 그늘진…… 한 귀에도…… 나 야윈 손을…… 꺼내 흔드네……





제기(祭器) / 문석암


  울 함메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놋그릇을 닦습니다 지푸라기에 기왓가루 묻혀 녹을 닦습니다 경인(庚寅)년 팔월 스물다섯 날 돌아간 할베 제(祭)를 기리기 위해 산에 들에 푸성귀 뜯어놓고 장에 북어 두어 마리 사다 놓고 팔십 평생을 구비구비 놋그릇에 실어 닦습니다 바람 한 점 없던 그 여름 만파창해(萬波滄海)를 끌고 온 바람이 골 깊은 주름살 속으로 스르릉 지나가고 늘어놓는 그릇마다 황금햇빛이 부서지고 차례차례 정한 음식이 담겨졌더랬죠 그래도 그중에서도 내가 젤루 좋아했던 것은 냉이콩국

  서른을 통과하며 내 몸이 놋그릇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닦지 않으면 푸르게 녹이 끼는…… 하나님, 내 죄는 무엇으로 다 씻을 수 있을까요 내 죄에 내가 눌려 기도하는 순간 놀라워라 녹은 떨어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몸 그리하여 이 빈 그릇에 담아야 할 것은 오직 헌신 경건 감사 같은 사랑의 말들뿐 어린 날 울 함메 놋그릇 닦듯 나 매일매일 자라는 내 안의 녹을 닦습니다 놋그릇처럼 무거워지는 몸을……





등대를 위하여 / 문석암


  별똥별

 

  무수한 별들이

  바닷속으로 떨어지던 유년 시절

  우리집보다 더 큰 별을 굴리며

  내 꿈속으로 들어오던

  예쁜 고래 한 마리

  

  서오능

 

  왜 사람들은 무덤으로 가는가

 

  둥근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들고

  둥근 원반을 날리며

  둥근 테이블에 앉아

  둥근 말들을 날려보내며

  둥근 왕릉 같은 평화에 기댄 사람들

 

  솔숲에 앉아

  둥글게 몸을 만 내가

  둥근 무덤 속을 들여다보네

 

  어린왕자

 

  너의 말은 얼마나 단순하고 정직했니

  사막 위의 별처럼

  방울뱀의 독(毒)처럼

   

  예수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던 그

 

  침묵으로 그린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달고 바다로 간다

   

  금붕어 꽃 새

 

  저녁이면

  하릴없이

  동네 어귀에 앉아

  바라보던

  집

  금붕어 꽃 새 있습니다

  그 집 앞

  늘 푸른 기운이 넘나들고

  지느러미를 단 사람들이

  입에 꽃을 물고 흘러가더라


※ 노트 주 : 작품 「등대를 위하여」의 소제목 글꼴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문과 소제목의 구분을 위하여 굵게 처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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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해산 / 박은희


  집에 돌아와 혼자

  불을 켠다

  세계는 일찌감치 어두웠다

 

  해질 무렵 하늘을

  풀어놓는 해를 보았다

  땅이 아프도록 흥건해지고 있었다

  젊은 어머니 나를 낳던 시간,

  하늘은 붉게 사라지고 있었다

 

  피에 잠기는 온몸이 아프다

  어두운 구석 오랜 동안

  나는 아이를 낳은 듯하다





죽지 않는 방 / 박은희


  늙어가는 나무들은

  무덤을 남긴다

  수액을 따라 오르던 땅이

  숨을 거두고 노랗게

  맺힌 해가 무너진다

 

  집을 나간 너는 돌아와

  얼굴을 들여다본다

  싸움질이 잦은 동네에서

  네 어깨는 늙어가고 있다

 

  네가 떠나오던 그대로

  낡은 방은 침묵을 흘린다

  늙어가는 복병으로 가득한 방에

  맺힌 해가 살충제 냄새를 풍긴다

 

  죽지 못한 복병의 어깨를

  떼어 하나하나

  길에 버린다 너는

  늙어가고, 방은 죽지 않는다

 

  방은

  네가 집을 떠나리라는 것을 안다





해가 지고 있다 / 박은희

  

시간의 눈썹에 매달린 마지막 창살

  을 돌아나온 의자들은 어두운 얼굴로

  잠이 든다

 

  오후 여섯시가 보이는 창가에서

  책은 입을 다물고

  하늘이 한 올 한 올 풀린다

  숨을 수 없는 바다

  너머 노란 사막이 보인다 창문 없는 바다가

  하나하나 밀려들고 있다

 

  수평선이 서서히 찢어진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 박은희


  늙은 나무가 서서히 오그라진다

  맨 윗서랍에선 아버지의 검은 바다가 쏟아져나온다

  목이 긴 외국인 선교사가 잠 속에 익사한 물고기를 건져올린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미워한다 아들에게 구멍 없는 어항을 선물한다

  파란 물고기는 어항을 버리고

  무중력의 하늘을 날아올라 죽은 목사가 된다

  바람의 틈새로 깨진 과거가 좌그르 흩어진다

  아버지를 폐교 처분한 아버지의 아버지는

  잡풀 무성한 사막을 낳는다

  물결치는 사막에서 집들이 죽어간다 날개를 달고

  딸은 죽은 박쥐 시체를 죽은 목사 곁에 묻는다

  시체를 쌌던 헝겊만 남기고 새벽이 슬픔처럼 사라진다

  어린 딸은 폭풍주의보가 내린 바다를 걸으며

  검은 등대를 토한다

  찢어진 무릎으로 희디흰 나무가 오그라진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딸에게 손을 흔든다





지평선 위의 집 / 박은희


  지금은 어두운 이름들이 지평선에 가 닿을 시간

  모래 지평선에 바람이 불어

  식탁 없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어머니는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바깥으로 나간다

  깨진 그릇 조각이 귓속에 박혀 있다

 

  나는 마루 틈새에 눈을 대고

  눈 못 뜬 새끼 고양이를 염탐한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를 핥다 말고

  밀정의 눈을 노려본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왜 소리를 지른 것일까

 

  추운 11월의 아침에는 처마마다

  새들이 떨어져 있다

  식탁을 마련하지 못한 새들이 지평선을

  꿈꾸면 이름 없는 사물이 된다

 

  나는 흔들리는 지평선에 집을 지었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지금도

  문 밖에 있다 내가 가둔 어둠이

  내내 이름 없이 맴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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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소년의 외출 / 김근


1


누가 어미의 장사를 지내줄 것인가 누가

어미의 육체를 장엄하게 썩게 할 것인가

내 갈라진 혀는 여태도 길고 사나우니

내 날카로운 독니로 찢고 발긴

어미의 살점은 또 어느 허공에 뿌려질 것인가

어미이기도 하고 어미가 아니기도 한

아들이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기도 한

암소이기도 하고 수소가 아니기도 한

이 질긴 슬픔의 그나풀을 누가 끊을 것인가


2


무릎이 까진 채 버려진 나무 아래

오누이가 울고 있다 울면 안 돼

울면서 오라비는 우는 누이의 뺨을 때린다

돌아오지 않아 아무도 영원히

오누이의 눈물방울들이 무거운 공기 안에 멈춘다

쉭쉭거리며 나는 혓바닥을 내밀어 눈물을 맛본다

암염처럼 딱딱한 눈물방울들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거란다

내 몸의 모든 비늘이 가늘게 떨린다

비늘이 고요해지자 나는 오누이를 긴 몸통으로 휘감는다

몸통 안에서 오누이가 으스러진다 으스러져 한데 엉긴다

사라지는 것은 그저 비늘처럼 적막해지는 일일 뿐

무릎이 까진 채 버려진 나무처럼

나는 우는 법을 모른다

긴 몸을 풀었으나 오누이가 보이지 않는다


3


태를 묻지 못했으니 고향도 없다

몇 차례 허물을 벗었는지는 잊었다

허물을 벗어도 허물 안의 기억은

허물 바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

어느 것이 허물 바깥의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안인가 바깥인가

몇 차례 허물을 태우면서

한때 번들거렸으나 이제 푸석해진

한 生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삶인가 죽음인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돌 하나 붙박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돌의 고향인지는 묻지 않았다


4


주름 자글자글한 소녀를 만난 적 있지

어제가 오늘과 살짝 옷을 바꿔입는 구멍 앞에서

그 늙은 소녀가 자꾸 풀을 꺾는 것을 지켜보았어

나는 풀들의 꺾인 뼈를 맞추며

늙은 소녀와 내가 아기를 낳으면

뱀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한

할미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

아기가 태어날지 궁금했다구

저녁이 한번 부르르 진저리를 쳐

긴 몸통에서 새빨간 성기를 꺼내 나는 오줌을 갈기지

길이 풀어지고 풀어진 길을 거슬러 늙은 소녀가

훠이훠이 구부러진 허리로 걸어와

이 길은 주름이 너무 많아 네 성기처럼

나 늙은 소녀의 늘어진 살가죽을 벗겨내

벗겨도 벗겨도 늙은 소녀는 늙은 소녀야


5


몸을 벗고 말을 벗고 어미가 누워 있네

나는 어미를 모르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다 어미네

뻣시디 뻣신 띠풀을 뽑아내

어미를 지고 나는 거기로 미끄러져들어가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네 몇천 년 미끄러지네

누군가 구멍으로 거기를 들여다보네

말이 아니라 비로소 그가

내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나가네






* 蛇福不言 : <삼국유사> 의해편). 사복(蛇福)은 사복(蛇伏), 사파(蛇巴) 혹은 사동(蛇童)으로 불리나 모두 ‘뱀아이’다. 그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삼국유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월 / 김근


 그리 깊지도 않은 내 몸속 어딘가에 현악기가 하나 들었나봅니다 밤이 되면 텅 빈 내 몸은 커다란 울림통이 되고, 차고 딱딱한 어둠으로 가득 채워지지요 좀처럼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들은 늘 따로따로 제 울음이 깃들 현들을 더듬거린답니다 소리를 찾지 못한 어둠들은 가끔 눈이 되어 내리기도 하구요


 한 번도 켜지지 않은 그 낡은 악기에는 활대도 없답니다 (날개가 없는 것들에는 활대가 필요하지요) 어두컴컴한 늑골 언저리 웅크린 악기의 둔중한 떨림이 느껴질 때는 아픈 등불만 깜박깜박거렸구요 누가 내 몸속에 악기를 넣어두었을까 의심하는 사이 또 한 켜의 먼지가 내려 쌓이고 먼지에 못 이기는 이월, 자주 몸을 눕히고 싶었습니다


 이따금 그 불쌍한 현악기에 잎이 돋는 꿈을 꾸곤 한답니다 악기를 버리고 나무가 되는 꿈 말이지요 (퉁겨지지 못하는 현들은 모두 잎이 되는 모양입니다) 무성한 이파리들이 한꺼번에 몸을 흔들면 불협화음으로 솟구치는 새떼들의 날갯짓이 보이는 듯도 하지요


 상한 소리들이 휴지처럼 너저분한 아침이면 내 몸을 빠져나간 야윈 길들은 내내 얼었다 녹았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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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 김충규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을 털었다 털에 묻었던 모래알들이 낙태처럼 떨어져내렸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숲엔 무수한 뼈가 있다 / 김충규


머리칼 서로 엉켜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나무들 하체가 희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곰팡이가 나무들의 음부 속에서 제 일생을 꽃피우고 있다 숲속을 서성거리다 끝내 길 못 찾고 스러져간 자들의 뼈가 낙엽들 위에 뒹굴고 있다 썩지 않는 뼈들이 낮밤 없이 인광(燐光)처럼 반짝거린다 언제였던가 숲속에 들어갔다가 헤맨 적이 있었다 내 뼈를 하나씩 뽑아내어 던졌다 반짝이는 내 뼈를 딛고 숲을 나온 적이 있었다 몸 속의 뼈를 버리고서야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은 낮밤 없이 무수한 뼈들 중에서 제 뼈를 찾으려는 자들로 시끄럽다 뼈 없는 내 몸이 잔바람에도 휘어질 때 나는 내 뼈를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또 길을 잃을까 두렵다 더이상 뽑아낼 뼈가 없다

 

 



이별 후의 장례식 / 김충규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겠다고 쓴 네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다. 편지를 읽기 전까지 나도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찢으며 봉분을 다졌다. 나를 지켜보고 선 살구나무가 풋살구를 톡톡 떨궜다. 풋살구를 한 입 깨물었다. 한때 너는 나의 나무에 열려 있던 붉은 살구였다, 지금은 서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먼 하늘가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제 몸을 잘게 찢었다. 우우우―, 미친 늑대처럼 빗줄기가 울부짖었다. 내 몸은 빗줄기에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내 속의 무덤은 빗소리에 흠뻑 젖었다. 한순간, 내 속이 자궁으로 변했다. 망할 것, 나는 너를 낳고 싶었다.


 

 


그곳에 가려는 자들 / 김충규


그곳에 이른 자 아직 없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자들이

그곳을 향해 집을 떠났다

가다가 지쳐

주저앉아 그대로 돌이 된 자도 있다

돌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는 순간

돌의 울음소리에 놀라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자도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혼자만의

지도를 몸 속에 지니고 있다 또한

나침반과 가득 채워져 있는 물병,

짊어진 배낭 속엔 한줌의 소금

그러나 안내자는 없다 그곳에 이른 자 없으므로

집을 떠나온 자들은 오직

홀로 걸어갈 뿐이다

군데군데서 만나는

돌이 된 자들의 울음소리에도 끄떡없이

무심히 걸어가는 자도 있지만

그곳이 과연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워

막 신던 신발을 벗어놓는 자도 있다

 

 



그 집의 창문 / 김충규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창문을 열려고

넝쿨 장미가 틈새로

숨 가쁜 향기를 쏟아 붓고 있다

다산병(多産病)에 걸린 오월의 대지가

제 속의 것들 남김없이 출산하고도

자궁 흥건하여

자궁을 햇볕에 말리고 있을 때

지독하게 독이 오른 목련나무는

침묵으로 몸 씻고 있는 중이다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 굳게 닫혀 있지만

가끔 피아노 소리 흘러나온다

피아노 소리에 의해

그 집 정원의 식물들은

기쁨과 슬픔에 길들여졌다 피아노 소리 뚝 멎으면

한낮인데도 무겁고 어두운 고요에 몸을 떤다

창문의 틈새로 향기를 쏟아 붓고 있는 넝쿨 장미,

잦은 빈혈로 바람 없이도 흔들리고

제 몸의 독을 어쩌지 못해 목련나무는

남들 꽃 피우기 전에 이미 꽃 다 뱉아버렸다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을 부숴야 한다,

그 집의 정원을 한 번이라도 밟아본 자들은 안다

그 집의 내부와 정원의 유일한 경계는

창문뿐임을


 

 

 



[심사평]


  ’98 하계 문예공모에 접수된 시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시를 시이게 하는 가장 큰 정체성의 하나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인데, 바로 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고지에 육필로 쓰던 시대에서 워드프로세서 시대로 옮아오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넘어가버리기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응모작의 ‘많은 말’들은 시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써낸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죽음, 섹스, 사랑, 사이버 공간, 실업문제 등 소재들은 다양하지만, 그 소재들을 안으로 끌여들여 시의 언어와 문법으로 육화시키는 노력들이 부족해 보였다. 독백이 아니라 배설에 가까운 시들이 적지 않았다.

 「집의 기억」 외 6편을 낸 신우현씨의 시들은 형상기억합금 같은 어떤 원형적 이미지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미지들이 부유하고 있는 방, 집, 물 속, 벽 속은 상당한 보편적 환기력을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것들이 응집력의 결여 때문에, 탱탱한 긴장감 없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모든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몇 개의 산만한 문장들을 한마디로 요약해줄 수 있는 보다 정확한 이미지들을 건져올리는 것일 게다. 시란 무엇보다 경제인 것이다.

 「덧칠 기법」 외 9편을 낸 채필녀씨의 시들은 좀 색다르다. 시에 대해 접근하는 그 태도가 특이하다. 말하자면, 시에 대한 태도랄까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색다름, 신선함이 시를 읽어나감에 따라 색다름이나 신선함이 아닌 진부함 쪽으로 자꾸 가까워지는 이유는 그 기법 때문일 것이다. 시작(詩作)에 대한 아이디어의 특색은 그 기법의 뒷받침을 받을 때만 성공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심한 불구의 시가 되는 것이다.

  류경일씨의 「비」 「저녁밥을 먹으며」 「천마산 가는 길」 「슬픈 음지리」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기 경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두면서도 언어를 절제하고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스스로 고만고만한 소품에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미 확보한 견고한 틀을 뛰어넘는 시적인 활기를 이 사람의 시에서 만나고 싶다.

 「건조주의보」 「접속」 등의 시를 응모한 송필애씨는 단정하고도 신선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그래서 “집 없는 우산들/주택은행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와 같은 범상치 않은 표현을 곳곳에서 획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상의 신발” “수줍은 구름처럼”과 같은 상투적인 표현들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시를 구기고 있다.

  김경진씨는 「들리지 않는 소리」 「사람 가두기 4」 「좀처럼 나부끼지 않는……」 등의 시편을 통해 넌지시 속삭이는 듯한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시를 자아내고 있다.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살려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재질도 엿보인다. 앞으로 구체적인 세부묘사에 좀더 충실한다면 더 설득력 있는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속리」 외 4편을 투고한 한한슬씨는 비교적 정련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러나 응모작 가운데 3편이 ‘여자’와 ‘밥상’을 소재로 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시세계가 너무 작아 보였고, “멀리 알 수 없는 새떼들이/일제히 신호처럼 날아올랐고”와 같은 몇몇 구절이 낯익었다.

  이채운씨의 시들은 식물성 상상력이 주조를 이룬다. 「씨앗의 노래」에서는 “불룩한 땅의 힘줄을” 간지럽히는 씨앗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18편에 이르는 응모작 대부분이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시가 너무 길다는 흠이 엿보인다. 시어의 남용을 줄이고, 시형식과 내용의 조화에 신경을 쓴다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34편의 시를 보내온 강해림씨는 문예공모 결심에서 자주 보았다. 「비무장지대」 같은 작품은 지난번에도 투고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너무 낯익어서 그런 것일까.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이라는 독후감이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의 습작기를 지배해온 ‘완성을 위한 설계도’를 한번 치워버리는 ‘충격요법’이 필요해 보인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김충규씨의 「낙타」 외 4편, 이영수씨의 「바코드, 자동판매기」 외 4편을 공동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김충규씨의 시들은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서 두드러졌고 전달하려는 바를 잘 버무려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발휘했다. 다만 시에 서사구조를 세워야 한다는 강박증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영수씨의 작품은 싱싱한 상상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들은 “장전되어 있는 기관단총”과 같은 긴장감을 갖고 있다. 문예공모 심사는 과거(언어 운용능력) 못지않게 앞으로의 가능성(새로운 상상력)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영수씨의 작품을 선정했다.


 ―최승자, 이문재,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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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코드, 자동판매기 / 이영수


바코드, 자동판매기


녹슨 쇠 눈꺼풀을

잡아당겨 깡통 속으로 사라진다


(섬뜩한 갑옷을 입고/몇 세기를/미칠 듯 기다리면서)


판매 중지된 물의 기억은 깡통이다

판매 중지된 옹달샘의 기억도 깡통이다

버려지는 구겨짐도 깡통이다

벽 깊숙이 플러그를 꽂고

물의 기억을 저장시키고 있는

꼬리 긴 물의 집도 딱딱한 사각의 깡통이다

두드려도 열릴 줄 모른다

골수 깊숙이 빨대를 꽂아

부서진 별들을 빨아먹은

옹달샘이 벽 속을 굴러간다

발길로 툭 찬다

진공의 샘이 운다

양철 손수건이 붉게 젖고 누군가

달 빠져죽은 깡통을 항문에서

척 건네준다





볼록거울 / 이영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각지역에 서서

그는 날 왜곡한다 얼굴 없이

툭 튀어나온 뱃속에서 날 변조한다

저쪽에서 오는 나를 어느새 빨아들여

반대편에서 오는 차 밑으로 퉤 뱉아버린다

깔린 내 배가 쏙 들어가게 그는

깊숙한 길을 갖고 있다

그 길의 끝이 어디로 통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곡된 내가 변조된 나를

보고도 몰라보고 제각기의 길로 사라지는

사각지역에 서 있는 볼록거울을 믿지 말라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 이영수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맑은 날과 희뿌연 날들의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듯 안경은 그 위험수위를 꼼꼼하게 따져 혼돈으로부터 날 구해준다 내가 안경을 쓰면 안개들이 걷히고 아프리카 코끼리 들소떼가 막 몰려온다 안개가 몰려와 코끼리도 잡아먹고 들소떼도 잡아먹고 아프리카도 잡아먹힌다 내 안경과도 흡사한 대식가의 입 나도 세상을 먹고 있는 거지 걸신들려


 안경을 벗으면 세상들이 안개처럼 빠져나간다 건물들이 흔들리고 서 있는 길들마저 꺼져 도시에는 늙은 바람만 몰려다닌다 내가 통째로 삼킨 아프리카 코끼리가 안경알을 깨고 정글 속으로 달아난다 핏줄을 따라 들소 떼가 빠져나가자 서 있기가 힘들다 나 흔들리고 있는 거니 저 보기 싫은 빌딩들의 정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니? 식인종들의 종친 회의는 누가 해골 지팡이를 집어던져 난장판이 되었지 미친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어느 파가 몰표를 던졌니 그 무식한 족장들의 추격대가 날 발견했을까 안개의 정글은 흰 나무들만 돋보기 안경을 쓴 채 나뭇잎을 읽고 있다


 안경을 벗으니 배가 고프다 안경을 쓸까 말까





통조림은 유통기한이 문제다 / 이영수


 통조림은 죽는 날짜를 궁둥이나 이마빡에 붙이고 태어난다 수천의 쌍둥이 형제들 포장된 채 어딘가로 간다 쿨렁쿨렁 메스꺼운 속을 토하고 싶어 서로 등을 밀며 건더기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상처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기억 꼭꼭 봉한 채 내 이식된 뿌리들 썩고 있다 진열장에 층층이 포개진 기억의 집도 붉은 반점의 저승꽃 피어 죽음이 스며난다 진공상태로 내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영영 기한이 지나지 않길 빈다 만일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천만 년 후로나 적어 살아 있음을 자유롭게 하리 누가 망상의 내 눈꺼풀을 잡아당겨 눈 속을 들여다본다 그때 내가 처음 물어야 할 것은 포장된 기억에 관한 것일까 내 이식된 외눈의 슬픔이 하늘을 닮아 푸르냐고 묻고 추억이 상하지 않았는지 맛보아야 할까 찌그러진 통조림은 급하게 토한다 너무 오랫동안 숨을 못 쉬었나





붉은 봄날 / 이영수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 붉은 돼지를 죽인 봄날, 개울가에 흘러내리던 핏덩이, 내 일기장은 붉은 산, 너덜겅에 돌 구르는 애기무덤, 열어젖히고 옹기 독을 닦아 흰 문종이에 싸 안방에 놓았더니 혈죽 피어나 달을 베었다


 온종일 내 몸에 붉은 열꽃, 환청같이 들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 내 일기장은 붉은 황토 흙, 쟁기 날에 허연 살들을 뒤집고 튀어나오던 고구마, 삶아서 내게 한 입도 주지 않던 정희, 한밤중에 불러내어 우리는 짚동 사이로 몸을 숨겨 붉은 쥐새끼를 오글오글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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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첩(幻帖) / 김종훈

― 길


길을 잃고 흐르던 몸이 닿은 그곳

내 마음의 집터, 폐허로 남아 있네


어디로 흐르던 길이었나

상처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걸었던 길은

적막하여 오가는 이 아무도 없었네


풀풀 피어오른 먼지

발등을 덮어 절뚝이는 걸음으로

짐승들이 오가던 길 따라,


그대도 모르게 걸었던 세월들







환첩(幻帖) / 김종훈

― 이끼


문 밖이 곧 저승이라 했거늘

줄 끊어진 악기나 풍풍거리며

이제야 겨우 관 뚜껑 하나 짜 맞추고

다시 일어설 자리 찾아 나선 마음

길을 잃었나

밥 먹는 시간 길어지네


흔적 없음이여, 이미 지나간 세월이여


누가 꾸민 음모일까?

어느새 내 몸 이끼 돋아나 사방으로 퍼지네






환첩(幻帖) / 김종훈

― 아지랑이


낮술 퍼먹고 누운 자리

벚꽃 지던가

황사바람 불던가 푸석푸석

사막 펼쳐진 세월아 봄날아


모래를 씹는다…… 환멸의 옛사랑…… 흘러흘러 세월가면 무엇이*…… 상처만이 몰래몰래 쓰릴까…… 무덤 위로 쏟아지는 햇살 말아 마시고…… 환하게 취해서…… 너 왜 울었니?


色情 꾸벅꾸벅 드나드는 물렁한

몸뚱이

타오르는 냄새 아지랑이


* 주: 김수철 노래 중에서






소요산*에서 소요(逍遙)하다 / 김종훈


초여름 비 그치고

자재암 향내 따라 걸으며

바람에게 묻는다


삶은 죽음 밖에서 이루어지거늘

언제나 그 문 열리겠는가


바람은

내리는 폭포나 올려보란다

감은 눈까풀을 간질이며


* 주: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산






묘비명 / 김종훈


―그날 이 글을 기록한 이는 누구인가

바다거북 등껍질에 적힌 글을 옮겨

여기 묘비를 세운다


1


달이 뜨지 않았다.

산이 끓어오르며 숲과 바위를 녹였다.

섬은 기둥 없는 검은 지붕을 마치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머리에 이고 있었다.

고래 기름 횃불을 든 사람들이 침을

뱉어내며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

섬이 가라앉는다 했고, 누군가는 바다 끝

벼랑으로 떠내려간다고 반박했다.

촌장이 급히 세운 제단에서 암소

한 마리가 태워졌다. 자정이 넘어설 무렵,

이미 사람들의 넋은 공포와 입맞춤한 지

오래였다. 늙은 장로들은 뼈마디가 무너지는

한숨을 빠진 앞니 사이로 내쉬었다. 사내들은

모래 속으로 머리를 처박거나 가까이 있는

여인들과 간음하며 혓바닥을 잘근잘근 씹었다.

초경을 막 시작한 계집아이들은 모두

비린 엉덩이를 바다로 향하곤 주문을 외웠다.

사람들 머리 위로 황금 부리 새떼가 고양이

울음소리로 날고 있었다. 눈 없는 물고기들

물 밖으로 기어나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동굴에서 기어나온 뱀들은 앞선 뱀의

꼬리를 삼키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제단의

불이 꺼져갔다.

기어이 촌장이 제단으로 뛰어들었다. 하나 둘

계집아이들이 실성해 넘어지며

깔깔거렸다. 사내들과 여인들은 상대를

바꾸어가는 난교를 풀지 않았다. 장로들은

스스로 목을 매거나 바위를 들어 서로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바다 멀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려왔다.


2


오오 주문도 번제도 소용없느니

오로지 혼란만이 진정케 하리라

하늘이 모든 빛을 버리고

지층이 울부짖으며 요동치니

모든 뿌리 있는 것들은 뽑힐 것이요

모든 날개 있는 것들은 공중에서 부딪혀 떨어지리라

하물며 뿌리도 날개도 없는 것들이여

오직 살아 있음이 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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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여인숙 1 / 최갑수


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밀물 여인숙2 / 최갑수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지붕 위에는 밤안개가

오래오래 머문다

 

 

 


밀물 여인숙3 / 최갑수


창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뛰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 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 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린다

그 여자도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 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






신포동 / 최갑수


가을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집어등도 이따금 파도에 끊기고

적적한 골목을 내다니는 것이

내 유일한 고단함인 양

어깨를 기울이고 문 밖으로 나서면

느티나무들이 소리내어

손가락을 꺽고 있었다

개처럼 짝짝거리며 하현이 가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바람이

잔잔히 별을 애무할 때

여자들은 온 몸으로 일생을 반짝거리며

방파제 너머로

가느다란 웃음을 던졌다

가을은 이곳에도 깊이 들었구나

아무도 잠들지 않는

자정의 거리

한 차례 소란스러운 비가 훑고 지난 뒤

커튼을 닫고 사내들은

조용히 숨을 들었다 놓았다

나는 왜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하는가

노랗게 불을 흔들며

나를 희롱하는 창문과

되돌려지지 않는 걸음 사이로

수런거리며 안개가 모여들었다

밤에게 엿보이는 내 헐한 가슴에는

시시때때 알지 못할 이름을 외우는

목청이 큰 바다가 있었다







해안 / 최갑수


예인선은

둥근 빛을 흔들고

누군가 동백잎에 물들어

깊은 병을 가질 때

여관집 늦은 가을비는

창가에 온다

밀물 드는 소리에

취객은 마음을 빼앗기고

여자들이 등을 달고

바다처럼 조용히

부풀어오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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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 김혜인 

 

비틀거리는 기억은 술을 먹어야 싱싱해진다

지그시 마음을 감고 투명한 사연을 한잔 마시면

드디어 세상엔 붉은 꽃잎이 하나씩 피어난다

상처 난 가슴을 치료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빨간약을 발라주시는 시간

세상은 요술처럼 붉은 꽃 천지가 된다

내 뜰에도 살며시 왔다 가는 봄

오늘은 꽃들이 다 피기도 전에 술이 떨어졌다

붉은 꽃 몽우리들은 어찌하라고 님은 전혀 기척이 없으시다

붉어 속이 타는 줄은 차마 묻지도 못하고

어쩌자고 눈웃음 저리 치는지

새들도 비밀이 있고 바람도 때로는 거짓으로 우는데

부끄러운 화장을 지우듯 아픈 기억은 잊어야 한다

섬처럼 적막한 그 사랑에 겨울이 툭툭 꽃으로 진다

사랑은 꽃이 져도 버거울 뿐이다

 

 

 

봉숭아 물들이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한 여름을 감시한다

이기적인 태양 아래

꽃밭은 더욱 무성해진다

손톱만한 죄의식도 없는 외로움이

붉은 꽃을 딴다

한바탕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는 계절

손톱위에 펼쳐진 소리 없는 노래가

열 개의 붉은 흔적을 남긴다

친친 동여맨 꿈을 품고

성자의 깊은 꿈속으로 걸어간다

뜨거워지는 열망을 감추고 붉은 무릎을 꿇는다

불러주고 싶은

뒤 돌아 보고 싶은

순진무구한 약속이 점점 빠져나간다

반달만큼 손끝에 걸려있다

 

 

 

샐비어

 

한창 타오르는 연애가 저리 붉을까

이만치 비켜서 볼만큼 뜨겁고 눈부시다

서로 부딪치며 싸움 같은 사랑을 하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종소리

비처럼 쏟아지는 향기가 된다

피처럼 붉은 밀어(蜜語)가 된다

 

미움이 남지 않은 기억은

꿀물이 나오지 않는 꽃술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감동이다

꽉 막힌 침묵을 뚫으려 손끝을 따본 적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꽃잎을 따지 않는다

달콤한 입맞춤을 꿈꾸지 않는다

 

붉은 사랑은 모두 아프다

 

 

 

해바라기

 

태양만 바라보는 것은 잔인한 일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고개마저 꺾고

다 낡은 이름을 붙들고

황소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꽃의 절반은 꿀이 없는 가짜꽃

그래도 살기 위해

꿀벌을 불러야한다

 

꽃이라면

지나는 발길 한 번쯤은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향기와 빛깔과

찬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노을이 가슴에서 지고 있거나

숨겨놓은 비밀 씨앗처럼 익어가거나,

 

해바라기처럼

태양만을 기억한다는 것은 낡고 적막한 일이다

 

 

 

불면(不眠)

겨드랑이 밑의 한 생각이다

구석구석 스멀거리는 가려움

벌레들 기어 다닌다

발등에 몇 마리

무릎 위에 또 몇 마리

등줄기를 따라 꿈틀거리는 기지개

사막에 홀로 남겨진 발자국이다

두개골 속을 걸어가는 바람소리다

하얀 날개가 돋고

지붕에

새 몇 마리

나무 위에

또 몇 마리

바람을 따라 골목을 지나

창문 앞에 서성이는 하얀 달빛이다

화끈거리는 불덩이 강물에 몇 개

하늘 위에 또 몇 개

끝없이 이어지는 불멸(不滅)의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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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느러미 / 김영석

 

늦은 밤 다림질하는 여자, 손길이 사뭇 진지하다

먼 항해에서 돌아 온 나는 늘 피로에 축 늘어져있다

조심스럽게 때로는 한껏 거칠게 구겨진 깃에 빳빳한 힘을 불어넣고

무뎌진 핏줄을 끌어당겨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세우고는

어쩌겠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발기되지 않는다 솟대처럼 갈망의 높이였다가

펄떡이는 숭어의 생명이었다가 파도에 잘 길들여진 후 부터는

고개를 조아리는 일상이 습관이 되어버린,

관성으로 열려오는 하루 저항 없이 익숙한 물길에 몸을 실으며

이젠 없이도 지낼 수 있겠다 싶을 때 문득

저 달인들 갈 수 있으리라던 갈매기 조나단처럼

젊은 날 푸르던 이상이 생각나는 것이다

긴장을 놓쳐버린 등뼈 그녀의 손놀림은 정확하다

비창조적이지만 팽팽한 시위를 걸어놓는다

내일도 나는 바다로 달려갈 것이다

지느러미 하나 꼿꼿이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건

때론 무력감을 부추겨 외면하고 싶지만 가끔은

죽은 신경을 자극해선 불쑥, 희망을 일으켜 세우기도 할 것이다

다림질을 끝낸 여자가 품으로 안겨온다

그나마 살아있는 동안 좌초된 배처럼 쉽게 기울어질 일도

바다 깊이 가라앉을 일도 없으리란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일어서듯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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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 황인수

 

1

책을 꽂다가 불현듯 돌아서면 성큼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와 찰랑찰랑 발 아래 부서지는 햇살

몰래 다가와 팔 길게 뻗어 유리창을 찢고 서있는

복숭아나무 꽃가지.

난 한참동안 가늠하죠.

나를 위압하고 있는,

나의 빈틈을 찾고 있는,

고개 돌리는 찰라 내 뒤통수를 탁-치고 도망갈 봄날의 깊고 황홀한 눈동자를.

보고 있어도 눈치 챌 수가 없죠.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있는 봄의 짧은 머리카락.

나는 지금 술래죠.


 

2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면서도

난 깨닫지 못했죠. 꽃그늘 속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듯한 그를.

돌아서고 싶지 않아요. 시선을 놓으면 그가

달아나야 하니까요.

나는 잠시 술래라는 사실을 잊죠.


 

3

그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요?

2층 열람실 한쪽 모퉁이가 그의 출발선이었을까요?

시나브로 내 마음의 지도 한 끝에서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

타임!을 외치고 잠시 시선을 접으면 이 설렘이 멈출까요?

책을 꽂다가 휙 돌아서서 그가 없으면

노을 지고 난 뒤의 하늘처럼 우르르

땅거미로 주저앉는 내 마음.

 


4

꽃이 지고 가지마다 엄지손 마디만한 복숭아들이 매달렸어요.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난

그가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는 유리창 이편에 서 있죠.

그의 모자가 바다처럼 푸르네요.

그의 꿈이 출렁출렁 파도치고 있어요.

여자가 보이네요,

그의 옆에 서 있는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의.

두 사람이 웃고 있네요.

곁에 선 단풍나무가 가끔씩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웃네요.


며칠 동안 작달비가 내렸어요.

오래된 책상 위에 남아 있는 빗금처럼

유리창을 긋던 빗줄기

눈물방울처럼 뚝뚝 복숭아를 떨구고 갔네요.

 

일 년 내내 햇살이 푸짐한 도서관 1층.

책을 꽂다가 불현듯 창가로 오면

초록 잎 뒤에 숨어 익어가는 내 심장을 닮은 복숭아.

그는 햇살 속에 서 있고

나는 아직도 헤아리고 있죠.

그의 서가(書架) 한 켠에 비집고 들어가 꽂힐 수 있는, 나를 위한

단지 2센티미터의 좁은 틈이라도 있는지.

그리고 또 생각하죠.

그의 숫자는 무얼까? 그의 자모(字母)는? 그의 분류기호……

그는 모르겠죠. 해마다 이 서가의 책 사이사이마다

분류기호 없이 꽂아놓은 나의 그리움들을.


난 이제 술래가 아니에요.

그에게로 가서 팔을 툭 치며 말할까요?

봄부터 유리창 안에서 당신을 햇살인 양 품었다고.

그가 웃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가 보이지 않아요.

그가 앉아있던 대리석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어요.

그가 피워 올렸던 담배연기인 양 흩어지는 구름.

그가 서 있던 복숭아나무 밑을 서성거렸죠.

익지도 않은 채 떨어져 뒹구는 복숭아.

복숭아의 무게를 기억하는 휘어진 가지는 한동안

제자리를 못 찾고 있는데.

 

찬 이슬이 내렸어요.

그의 푸른 모자 속에서 출렁거리던 꿈처럼

높은 하늘.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고

불현듯 다가온 그의 그림자 인 양 복숭아나무 빈 가지

햇살에 매달려 유리창을 그리움으로 흔드네요.


 

5

뒤돌아 서 있을 때 다가오는 건 숙명이라죠?

사랑은 꼭 그렇게 와요.

밀물처럼

돌아설 때마다 한 뼘씩 다가와 있죠.

내 발목을 적시는 설렘,

턱밑까지 차오르며 파도치는 그리움.

하지만 숙명은 썰물을 등에 업고 오는 법.

돌아서고 돌아본 만큼 멀어져 가죠.

책 위에 남모르게 쌓여 가는 먼지 같은 사랑

책갈피마다 보이지 않게 쓰여 있는 사랑의 이름들

사랑에 있어서, 난 언제나

술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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