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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레비 스트로스의 청바지 / 김도언


물경 101세로 세상을 떠난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 Levi Strauss)가 무질서와 우연에 기댄 삶의 샘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같은 리바이스(Levi’ Strauss) 청바지를 입고 유인원의 유골을 채집하는 여행을 떠났다고 상상하자. 그에겐 제임스 딘 같은 늠름한 동행자가 없다. 그의 배낭 속엔 여벌의 청바지와 가죽신발, 지식의 풍속, 상상력의 논문집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인원의 유적을 찾는 데 성공했다. 통곡하는 열대와 희희낙락하는 냉대 사이에서 우리의 잠은 누구에 의해 보호되는가라고 물었던 유인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는 인류가 불면증에서 구원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인원의 불면증이 다음 날 자신의 치부를 무엇으로 가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시작됐을 거라고 추정했다. 레비는 자신의 생각을 친한 시인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그는 내 형제들과 부모들이 나누었던 언어가 해방시킨 것은 슬픔밖에 없다고 말한 유인원의 기록도 찾아냈다. 레비가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을 때 청바지 자락이 천막처럼 펄럭였다. 보풀이 일었다. 바람이 관통하는 세계 속에 얼마나 풍부한 결핍이 있는가, 얼마나 무한한 부재가 사는가. 레비는 청바지 호주머니에 유적지에서 채집한 작은 볍씨와 눈썹과 각질 조각을 넣었다. 그러자 청바지에 불룩한 푸른 힘줄이 생겼다. 레비는 죽기 직전에서야 리바이스를 벗었다. 문화의 근육으로 단단해진 청바지의 빛은 어지간히 바래 있었다.




스티븐스의 아침 / 김도언


스티븐스는 자전거를 닦는다

차가운 겨울 아침

스티븐스가 털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닦는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닦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일 테지만

스티븐스에겐 가장 스티븐스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털모자를 벗고

자전거 바퀴에 달라붙어 있는 거리들의

혈액을 털어낸다

혈액이 반짝인다

스티븐스가 지나간다

스티븐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가 닦은 자전거가 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자전거를 닦는

스티븐스의 아침은 겨울의 외부에서 돌아왔다

스티븐스가 털모자로부터 멀어진다

낙엽이 어슬렁거린다

스티븐스의 자전거는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다

그걸 이해한 자 역시 스티븐스뿐이다


 


K의 장애 / 김도언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K는 우울증과 관련해 그 어떤 징후도 가져보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콤플렉스를 꺼내 체중계에 달아보곤 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콤플렉스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나무의 고독을 경외하고 가족과 불화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 그것이 그의 고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동료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으며 우연히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에게 격렬한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K는 물론 가족에게 전화 같은 걸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착한 아이들을 칭찬하지도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날 때는 탁구장에 가서 탁구장 주인과 내기탁구를 쳤다. 그것이 그에게 있는 유일한 융통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잃어버렸다. 식초와 매운 것을 좋아했고 구두는 검은색만 신었는데 너무 자주 빨리 걷는 바람에 구두굽을 자주 바꿔야 했다. 언젠가부터는 식초에 흥건히 젖은 구두코를 빨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그는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병적으로 강을 좋아했다. 특히 수변에 지어진 수영장을 좋아했다. 수영장에 딸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젊은 여자들의 이름을 상상하다 보면 지루한 계절이 금방 지나갔다. 가끔 그의 상상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언어가 태어나곤 했는데 그는 그것들을 모두 시에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K는 가끔 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의 미각과 그의 상상력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시는 언제나 열심히 역부족이었고 그의 인격이나 건강을 호전시키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나쁜 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나쁜 시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젊고 어리석은 시인 몇몇은 그의 나쁜 시에 열광했다. K는 나쁜 시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K는 오랫동안 슬픔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경멸하고 조롱했던 것들을 용서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한테도 용서받지 못했고, 그것은 그를 용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그가 난폭하게 척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힘껏 용서에서 도망쳐 장애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너는 / 김도언


두 마리의 개가

차바퀴에 깔려 죽은

비둘기의 날갯죽지에 코를 박고

존재하지 않는

하늘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리고 너는

황홀하지 않아서

발가락이 시렵다

사랑 앞에 놓인 전치사를

지우던 밤

큰 눈이 내린 도시의 까마귀들처럼

불편한 신경질 때문이라고

그리고 너는

나를 바라보던 마지막 눈을 닦고

그리고 너는

귀를 파다가 죽었지

죽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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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계속 웃어라 외 4편 / 임승유


계속 웃어라


팬티를 뒤집어 입고 출근한 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이 한 말이다
귤처럼 노란 웃음을 까서 뒤집으면 하얗게 들킬 것 같아
오늘은 애인이 없는 게 참 다행이고

너는 왜 자꾸 웃는 거니
공장장은 그렇게 말하지만 예쁜 팬티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팬티 같은 건 수북하게 쌓아놓고 오늘은 꽃무늬 내일은 표범무늬 어제는 나비를 거느리고 다녔다 결심을 유보하느라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식물처럼

내가 딴생각에 빠지면
손목이 가느다란 것들은 믿을 수가 엇어 공장장은 중얼거린다

나에겐 아직 애인이 없고
공장장과 함께 밥을 먹는다

팬티 속을 만지면 울어본 적 없는 울음 설명할 수 없는 오후
번지듯 피어나는 꽃잎을 물고 나비는 날아가버리고

그걸 알아봐준다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고 어떻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걸까

애인은 어떤 식으로 생기는 걸까



주유소의 형식


나는 네모의 형식
팔다리를 접어 울음을 가두고 길가에 앉아 있다
누군가 지나가다 툭, 친다 해도 괜찮아
그건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점

사람들이 가벼워진 연료통을 끌고와 줄을 섰다
견고한 내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싱싱한 울음을 채운 사람들이
끌고 온 길을 접으며 달려 나갔다
말하자면 나는 바깥에서부터 흩어지고 있었는데

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울음이 빠져나오고 있다
멀리 보냈던 울음들이 활활 타오르며 옆구리에 달라붙고 있다
내부를 향해 몰려드는 바깥들

우린 언젠가 같은 종류의 울음을 나눠 가진 적이 있고
출렁이는 울음을 만지작거리며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렸다
갈 데까지 가서
울음은 바닥이 나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럴 때 우리는

길가에 웅크려 앉은 자세



우산


사탕을 녹여 먹고

글라디올러스
아스파라거스
발음을 하는 동안에도 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오늘의 날씨에 안감을 대고
단추를 만지작거리지
단추는 구멍이 한 개
단추는 구멍이 두 개
구멍이 네 개일 대는 외로움도 어려워져

오늘의 날시에 안감을 대면
앞다투어 아이들이 뛰어 오고
뛰어오면서 녹는다
키스처럼

신발을 어디서 벗었는지 기억하지 않기로 하자

망고를 먹으면
망고의 기억을 갖게 되지
서로의 기억속에 이빨을 박고
서로의 이빨을 빛나게 닦아주면서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이터를 살 때마다
어딘가에 두고 온 내가 생각났다

나는 화요일마다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을 감쪽같이 감아버리고
에스컬레이터의 내면에는 서랍이 얼마나 마낳을까

나는 목요일의 술자리에서 속삭였지
싱고늄 종아리가 하얗게 얼고 있는 걸
본적이 있냐고
누군가를 부둥켜안고 싶은 적이 없었냐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사건은 일어나고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들
그 기분들을 다 써먹지도 못했는데

누군가는 결정적으로 신문을 장식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심과 함께
서랍 속으로 사라졌다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
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

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 세우려면
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
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
입술이 끌어 모으는 결심은 너무 늦거나 빨라

화요일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마다
칸칸마다 서랍을 열고
잘 있었니?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고



아버지는 아침마다 산딸기를 따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저기 대문을 잠가줘요

말랑하고 빨갛고 냄새가 나고 손으로 문대면 으깨지는 산딸기의 성장이 두려워 산딸기를 씹어 먹었다 내 이빨과 혀가 나의 성장에 관여했다

잇몸을 드러내며 아버지는 웃었다 나는 왜 고함을 쳤다라고 적지않고 웃었다라고 적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들어올 때는 불을 끄고
방문을 반쯤 열어줘

어디서나 짙푸른 멍처럼 풀들이 자라나고
잇몸이 가려우면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아버지만 뜯어 먹고도 이렇게 살아 있다니
성장이 징그러워요

입을 작게 벌리고도 훌륭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메뚜기도 괜찮고 개구리도 괜찮고 방아깨비는 좀더 우아하지
쇠죽솥 가득 우아하게 저녁을 삶고 있는 엄마
나는 잘 크고 있다

아버지의 입안에서 맴돌던 냄새가
내 입안에서 맡아진다
자꾸만 내 이빨이 무시무시해진다

 

 

 

당선자 프로필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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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가방 / 황혜경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가방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떠오르던 실내
뒤집어도 볕이 들지 않던 실내
안을 떠올린 건 그날뿐만은 아니었다
헌책방 구석에 앉아 누군가 그어놓은 븕은 밑줄을 읽다가
애인여기(愛人如己)를 발음할 때도
서랍 안의 얼굴들 서로서로 겹쳐보였다
남을 내 몸같이 깊이 사랑한 적 있었나
쌍둥이 자리는 질투를 배제하는 별자리라는 걸
비서 아가씨 k가 내 좁은 서랍을 뒤져 읽어주던 그날 오후
눈을 돌려 바라본 밖의 문양들은
뒤늦게 누가 누구를 감싸주는 형태였고


수선집 아줌마는 바지의 앞면과 뒷면을 잘라내고 붙여
겉과 겉을 맞대거나 속과 속을 이어 붙여
바지의 겉과 속으로
가방의 안과 밖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는 그 곁에서 외부와 내부에 대해 생각한다
외부에 의해 내부가 내부에 의해 외부가 결정되는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생일에 출생할 나는 방 안에서
부고(訃告)란을 맡아 쓰는 아저씨와 밤새 안과 밖의
사람의 붉은 부위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또, 잘린 케이크와 시든 꽃 사이로 핏물인지 꽃물인지
얼룩진 치마를 입고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다가 밖으로 사라질 것이고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어려운 가방에 무심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지구본을 슬쩍 넣어본다
무엇이 무엇을 감싸고 무엇이 무엇을 담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주위가 깜깜해지고 곧 밝아오기도 하니까
상호적인 것들은 모호하기도 하니까
안과 밖의 배후를 갖게 된 가방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만들어준 모호한 가방을
나는 하나 갖게 되었다

 

 


 게더링 드럼(gathering drum) / 황혜경

 

 

  게더링 드럼을 주문하고 혼자 받는 것은 오류였다
  모임이나 집회, 채집이 생각나 둘이 아닌 것이 떠올랐으니까
  설명서에는 '여럿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타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럿이 두드리며 강약 조절하기
  속도를 다르게 두드리기
  도구를 이용해서 두드리기
  혼자의 손바닥은 두 개


  의식과 관련된 인디언 놀이를 함께 하라 하시면 아마존으로 가겠어요 차라리 여인 부족을 따라 치난니 버섯*을 따러 가겠어요 탐스러운 육체를 탐하자, 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려한 수렵風을 모르는 사람이지요 우물우물 맞은 편에 앉아 먹고 있는 입이 노려보고 있다면 지나서 나무를 섬긴다는 야루보족의 숲 속으로 '통과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강줄기의 아랫부분 과거가 됩니다


  나는 그때 말하는 북을 말하고 있었어요
  통과하는 중이었어요
  어떤 날은 여러 장소에서
  레인 스틱으로 비를 부르는 연주를 하기도 했죠
  리듬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리듬 주머니를 몸에 달지는 못했어요
  그러므로 나는 소리는 나의 리듬이 아니라면서요
  내가 지금 게더링 드럼을 혼자 두드리는 것은
  통과하면서 외로워질 수도 있기 떄문입니다
  함께한 행적, 지웁니다


  두드리고 부르면 천천히 스며드는 남은 빛의 조각들
  혼자 갖고 놀다
  물에 젖은 헝겊새 무겁, 고요 날지는 못하, 고요


  리듬 교육은 제 빰을 후려치는 제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육을 시작하는 생의 싸늘한 손박닥들, 븕은 손자국들,


  엄마의 목소리는 가장 음악적 샘풀이며
  아빠의 목소리도 좋지만
  엄마의 음역이 더욱 아이와 비슷하다지요
  처음의 음색으로 노래부르며 둥둥둥
  가장 아끼는 것을 내줄 수 있을 때까지
  게더링 드럼은 내가 혼자 두드릴 겁니다

  함께 울어야 할 운명이므로
  혼자 외로운 겁니다.

 
  *아마존의 여인 부족인 아루보족이 여성의 본능을 억제, 성욕을 다스리기 위해 먹는 버섯

 

 

 

 문제적 화자 / 황혜경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열심히 하는 중이라 털을 곤두세운 레빗
  헝클어져도 잠들어 있는 내 벗


  느리게 가는 것은 거북이지
  딱, 버티고 서서 가지 않는 거북스레


  두 해에 초 하나는 안 될까 그런 셈으로는 열아홉
  후한 거래상을 만나면 네 해에 한 개도 가능할지 몰라


  나는 홈-스쿨인데 매일의 해답을 필요로 하는 물음인데 뒷걸음치면서 오늘 후지부지 문제를 덮어버리고 가면 내일 소식 불통인데 잘근잘근 나를 분할하는 물음들과 유사한 경험들 나만의 것이 아니겠지


  화자의 콧구멍에 혀를 밀어 넣으려는 문제 많은 사람이 둘 있었다 사랑이라고 했다 그곳은 화자의 영역, 그렇게 침범하는 건 아니지 숨을 쉬려고 입을 열었으나 말하는 화자는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궁둥이를 가진 화자가 열매를 믿던 어느날 날세게 석류 한 줌 훔쳐 입에 털어 넣고 뛰던 날도 있었지만 열매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건 중대(重大)한 화자의 문제, 내다 버린 언니의 시체가 다 식을 때까지 읽히지 않는 메뉴판을 펴놓고 앉아 있던 고집도 문제, 꽃이 되고 싶던 언니에게 화자는 문제, 거추장스런 청각을 주렁주렁 달고 듣지 않는 화자를 언니는 묵인했지만 그건 궁극적으로 화자의 문제였지 과거이긴 하지만 우는 아이를 자루에 담아 남의 집 대문 앞에 두고 사라지는 화자의 엄마들처럼, 화자가 소실(消失)의 미덕을 일찍 알고 있던 것도 문제라고들 해 벗어 둔 허물을 그리워하다 또 껴입고 가는 게 문제라고, 화자가 잃어버린 가방은 주인에게 소용없듯 누군가는 발견하겠지


  빨간 칸나를 먹으면 빨간 똥을 누는 달팽이
  얼음에 박혀서 맴돌지 않는 달과 팽이, 나의 속성
  달에서는 체중이 1/6이라는데 무거운 내가 문제라는데 친족들이 몰표를 주고 논의해야 할 사항들이라고  하지만 강아지는 내 문제의 친구이고 문제를 이해할 때까지 답을 구하고 있을 테지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참자 평균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니까 공식은 없으므로 나는 손들고 섰고 문들아, 머리 들라, 찬송하는 하얗게 굳은 화자의 석고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문제적 화자 때문인가


  위 아래로 쏟으며 냄새를 맡으면서
  화자 언니 손을 잡고 가고 싶었던 곳은
  누드주의자 마을인지도 몰라
  늦게 벗는 인간이라 문제라고 합디다만
  원래 늦되는 아이라 다루기 힘들었다고 합디다만
  없는 주제에 눈동자를 굴리며 침묵을 지키면
  창조작인 인간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합디다만
  코코코, 문제의 납작코를 더 두드리는 화자는 참 나쁜 손가락이었다고 합디다만


  학교에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이
  나무그늘 학교로 모여듭니다 한 자리 비워 둡니다
  작은 의자에, 이제는, 나를 , 앉힐 수도 있는데,


  꽃씨 있습니다 화자를 위해 언니가 나눠드립니다

 

 

 

  우리 / 황혜경

 

 
  서로의 사기술은 우아하다
  "화장을 안 한 너의 얼굴은 아이 같구나"
  "나는 네가 짖는 게 참 좋아"


  너는 몸의 근원이 심장이라 왼쪽을 보호했지만
  모성의 방식이 모두 삭제되어도
  나는 마음 없이 오른손으로 내게 죽을 먹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건 정말 아프고 굶주린 나


  너의 손은 어떤 글씨체를 갖게 될지 미정이었지만
  나는 오블라토*에 먹기 싫은 장미를 싸서
  너를 위해 꿀꺽 삼킨 건조한 입이 된다
  앞으로 축하해야 할 일들 때문이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손바닥을 마주치는 일은 어땠지?
  둘이서 하나의 입으로 앵두를 깨물어 터뜨리는 일과 같았지
  안녕, 터진 앵두들


  너는 불결한 것이 정결한 것을 속인다고 말했지만 난 그 반대의 상처가 더 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넣지 마 왜 삽입은 흡입이 될 수 없는 걸까 너는 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깊어지는 법을 배우진 않았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 너도 나도 늘어난다는 것을 모르니까 너와 나는 짧았지 네가 명료해질수록 나의 입술은 수축했지만 왜 관계는 꽃잎처럼 가벼울 수 없는 걸까 나는 한번씩 너를 쏟고 너는 내 꿈의 사막을 다 지나 내 피를 쏟으며 곧 너와 나는 작아진다 성별을 뒤바꾸며 우리 쪽으로

 
  여기는 남의 집인데 누군가 다녀가면
  버려진 채 남의 죄를 대신 짓고 있는 것만 같고
  오늘은 지금인데 또 나의 너는 딴생각에 빠져 있구나
  시간 배분을 잘못한 너와 나에게 오늘은 시간이 없다


  우리는 홀몸이니까 듀엣이나 커풀 테라피를 꿈꾸지 않았지만
  너는 속살은 잘 무르지만 금방 회복된다고 속삭였고
  나의 혈액은 너보다 조금 복잡하고 예민하다


  인공 달빛 조명 기구가 우리를 비추고 있지만
  젖지말자, 젖으면 더 외로워지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라 하면
  오랫동안 나는 혼자였지만
  "나는 너를 생략한 우리였다"


  처음부터 나는 우리
  우리는 한팀
  그러니까 덤벼보시지
 

  *먹기 힘든 쓴 약을 싸서 먹는 데쓰는 녹말지

 

 


영향을 끼치는 사람 / 황혜경

 


4인용 테이블의
세 자리를 비우고 밥을 먹는 한 사람 앞으로
당신은 비밀을 신고 오지
신지 않던 오래된 구두에는
더 오래전에 떠난 거미들의 집


어떤 날, 한 사람의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전달되는 목소리들마다 겹으로 들려오기 시작할 때
어딘가에 한참을 못 미친다는 한 사람의 생각들 사이로
부정적인 말에 민감한 아이가 툭, 돌을 집어 던지는 것처럼
느닷없는 결과로 당신이 올 때
아, 당신의 범주 안에 있었던 것이구나, 알게 되지
오래전부터 수묵 담채로 서서히 번져오던 당신의 그림자


여러 맛이 뒤섞여 있어 누가 최초의 당신이었는지 알 길이 없고
어차피 도미노는 과정과 결과를 즐기는 놀이
당신이 쓰러져 만들고 있는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는 원인을 제공해야 하는 놀이를 당신이 하고 있는 중이고
하나의 덧니가 치열(齒列)에 끼치는 영향보다는
덧니의 주인들은 덧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명백하지
본연의 자세를 지녔던 본체 이후, 여러 색을 덧칠하게 된
그 후로 한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는 신자를 하나 믿고 있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섞인 것들은 감미롭지 않아 빠이빠이


한 사람과 한없이 가까워지고도 한없이 멀어지면서
당신은 비밀을 신고 가지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 미스터리 써클을 만들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시간의 간격을 달리하며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한 사람 앞에 앉아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
알게 모르게 어떤 작용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

 

 


황혜경 시인
1973년 인천 출생. 서울 예술대학 문창학과와 추계예술대학교 문창과 졸업 및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심사평

 

_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반영하듯, 올해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는 총 495명이 응모를 하였다. 응모자 수와 작품 수준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예년에 비해 빼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예심을 맡은 세 명의 심사위원은 그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한국문학에 참신한 기운을 불어넣고 고유의 개성적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주목하였던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오랜 숙고 끝에 11명의 작품을 골라내었다.

이 중 최종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김새봄의 「장국영」외 9편, 박지혜의 「센티멘탈왕」 외 11편,

이수현의 「나의 자랑, 아프리카」 외 8편, 진수현의 「묵시록의 기사」외 10편,

혜경의 「모호한 가방」 외 14편이었다.

 

최종 심사에 남은 다섯 명의 작품은 누구를 당선자로 결정해도 무리가 없다고 여겨질 만큼 완성도 면에서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는 평단의 많은 우려 가운데서도 다양한 형식 실험과 혁신적인 시 의식에 힘입어 이전의 시와 확연히 구분되는 형태로 분기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인미답의 지평을 열기 위한 걸음을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다.

 

2000년대 등장한 신진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흐름이 일시적인 세대적 특질로 마감될지, 한국 시사에 또 다른 진화가 모색된 역사적 결절점으로 기억될지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기성 시단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응모자들의 주된 경향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 시의 변화에 깊이 반향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런 현상을 예의 주시하는 입장에서는 ‘영향에 대한 불안’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가령, 유행을 따르듯 앞 세대를 모방하는 아류의 대량 생산은 예상되는 가장 부정적 영향에 속한다. 이번 신인상에 응모된 작품 중 좋은 시의 전범을 2000년대 시에서 찾고, 그것을 무반성적으로 수용하여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가장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의 상당수도 그렇고, 본심에서 거론된 이들의 시에도 2000년대 이후 한국 시의 급진적 변화의 영향은 상당히 농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시적 영향의 개연성과 필연성은 긍정적 효과를 낳고 있는 듯하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의 수준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기존 형식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려는 시적 파격과 그것을 시 내부에서 통어하는 언어의 장악력이 치우침 없이 결합된 것을 이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새봄의 시는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의 층위를 일상이 기묘하게 각인되는 순간과 결부시켜 되살리는 능력이 돋보였다. 산문시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리듬감을 조성하여 이를 서정적 분위기로 환원할 줄 아는 감수성은 앞으로 잘 살릴 필요가 있다.

 

박지혜의 시는 허무로부터 발성되는 언어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겪으며, 마치 태고의 주술사가 이 세상에 없는 언어를 지하 밑바닥에서 끄집어내어 자기 육체를 통과시켜 정화하는 듯한 읊조림이 투명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이수현의 시는 화자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공허와 슬픔이 예기치 못한 순간 흘러나와 굳건해 보이는 현실 세계를 모호하고 흐릿한 시공간으로 바꾸는 환상적 찰나를 간결한 언어와 감각적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진수현의 시는 추상적 관념의 감각적 형상화에 능한데, 터부시되는 한자어를 기술적으로 사용하여 숭고한 것의 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래 보기 드문 강건한 진술적 어조가 인상적이었다.

 

황혜경의 시는 생활의 사소한 단편을 비범한 의미를 내재한 존재론적 사건으로 통찰하는 시인의 직관이 빛을 발한 경우이다. 사건의 의미성이 무엇인지 간파하여 그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유일어를 찾아내고, 오직 그러한 유일어로만 이루어진 밀도 높은 시를 빚어내는 힘은 자기 고유의 시 세계를 창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 모두 당선작으로 내어도 좋을 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기에 최종 선택이 어렵지 않을까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당선자인 황혜경의 시가 다른 이들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활동한 기성 시인이 아니냐는 즐거운 오해를 살 만큼, 황혜경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미숙함을 찾아볼 수 없는 완숙한 경지에 달해 있고, 그것을 세련되게 제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기 시의 문법을 어떻게 주조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가 터득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덧붙여 그의 시가 2000년대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단점과 아쉬움을 한 단계 극복하면서 그만의 정수(精髓)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는 평도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시 쓰기에 자기 전부를 걸었을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_시 예심: 강계숙 송종원 조연정 본심: 강계숙 이광호 우찬제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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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사회》제9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_ 박성준

 

돼지표 본드 (외3편)

 

   박성준

 

 

 

유리잔에 깨진 손잡이를 붙이다가
본드의 빵빵하게 부른 배를 만진다
벌러덩 뒤집힌 코를 잘 막아두지 않아
폭식성에 찌든 누런 군침들이 본드 입구에 말라붙어 있다
짧은 다리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길
돼지가 무거운 발을 내딛고 있는 걸까
누런 고무 화합물이 살 굽는 냄새로
목 비튼 지문을 간직하고 떨어져 나간다
돼지의 걸음 뒤로 유리잔과 손잡이는
서로 잊었던 시간을 지운다, 감정도 없는
축축한 살을 꼭 껴안고 있다
식탐이 말라붙은 환각 속에서
짧은 목으로 돼지가 먼 하늘을 되뇌어본다
머리 위에서부터 망명한 저 바람은
알프스 동굴까지 외치*―외치! 굳은 몸을 부르며
살찐 미라의 주검 직전 표정을 돼지에게 문질러놓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 잃어버린 웃음들이 흘러나온다
물렁물렁한 살 안쪽을 쭉 쥐어짤 때마다
식육점 갈고리에 두고 온 몸이 달그락거리고
흔들리는 오후 한때가 본드 주둥이 끝에서 굳어가고 있다
저 차갑고 허전한 육체
얼마나 맛있게 굳어갈 주검의 준비 과정인지
돼지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꺼이 틈이 된다
유리잔과 손잡이 사이 얼어붙은 강줄기가
웃다 멈춘 순간의 눈꺼풀만큼이나 단단하다


* 외치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이 찐 미라.

 

 

 

결혼 홈쇼핑

 

 

   주문한 남편을 생각합니다 새벽이 무서워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 들이며 홈쇼핑을 켜지요 몸속에 물관들이 단단히 차오르고 새 남편의 그림자가 잉크처럼 번집니다 세 시간을 잤을 뿐인데 꿈속에서 삼 년을 산 것 같은, 헛것들과 허튼 꿈만 꾸고 놀다 갑자기 밀린 빨래가 생각난 듯, 엉킨 몸들 사이에서 제 몸 찾아 건조대로 가지요

 

     몸에 집게 자국만 깊게 남아도
     잃어버린 것들을 참아내야 할 시간

 

   방들이 헬륨 풍선처럼 떠오르고 있는데 누가 갈비뼈 아래로 꾹꾹 초인종을 누르나요? 어젯밤 새 남편들의 가슴 근육을 누르던 중매쟁이 쇼호스트처럼 띵동― 띵동― 내부로 흐르는 작은 떨림, 수화기를 들자마자 결혼 행진곡을 듣습니다 가라앉은 폭죽 냄새를 휘저으며 금방, 울 것 같다고 온몸 떨지요

 

   구입한 남편 이력이 전국 방방곡곡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전송되면 전화 한 통의 짧은 연애,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그렇게 지불한 시간은 반품도 안 된다지요 사용해보시고 선택하란 말 다 거짓말이야 남편이 쾅쾅쾅 자꾸 문을 두드리는데 두려워, 꽃을 참을 수 없어 활짝 홈쇼핑을 켭니다

 

   문밖에서 새 남편이 패키지로 데려온 작은 손, 딸아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요 자동 주문 전화가 보내준 남편인데요

 

   현관문을 잡고 망설입니다 몸이 열리기도 전에 배달될 남편만 생각하던 새벽 이렇게 꽃물 든 몸속에 집을 짓지요 주문한 절반의 생을 잡지 못해 웃으며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표정, 시들기로 작정한 꽃처럼 휩니다

 

 

 

 

샴!

 

 

 

   계단이 날마다 옷을 벗어요 꿈틀거리던 척추가 이제 아프지 않죠 계단 중앙을 뚫고 깊어지는 가로등이 구불거리는 등짝에 주홍색 스타킹을 입힐 때마다 벗었다 내팽개치는 다리들 낭자한 빛의 의족들이 골반을 잊는 중이죠

 

   밤은 시퍼렇게 환한데 이 길 걷다가 나만 뜨거워져서 죄다 취소하고 싶은 벽이랍니다 모든 움직임은 뼈를 그리워한 주제가처럼 흘러내리고 모양을 좀체 바꾸지 않던 등짝도 뻐근해져 당신은

 

   감각을 주워다 더 멀리 밀어버리고 있는데 나는 왜 자꾸 당신 척추에 가라앉고 있나요 지독한 길들이 흉부를 꿰매고 또 헐렁한 계단을 꿰매고 태어나기도 전에 포개어진 주홍빛 그늘이 겹칠 때를 찾아

 

   검은 강 흐르지요 모두 거울이 깔린 계단이랍니다 당신과 내가 갈라지면서 할퀴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당신을 딛는 순간 나는 당신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흩어진 허공의 주인들은 여기서 웅성거리는데 여보세요 어디 계세요 내 척추를 찾아도 허전한 이 느낌은

 

   손톱처럼 잘려나간 숨소리가 미리 파놓은 무덤으로 가 눕고 계단이 맨살로 밤을 견뎌요 까닭 없이 나를 버린 통증이 한 번 더 내 빈 곳을 생각하고 있어요

 
* 샴 : 샴쌍둥이.

 

 

 

 

아비 디스크 조각모음記

 

 

   아비의 허리가 덜 바른 시멘트처럼 무너졌을 때 LCD 모니터가 꺼지는 날이었어요 가루로 날리던 굳은 척수가 봄꽃보다 먼저 핀 선산에서, 쓰러진 목소리들이 피어오르는 그런 날이었지요 사뿐히 흐르던 바람이 징검돌처럼 아이콘 몇 개 방바닥에 띄울 때 나, 몰래 가보았지요 그 능선 아래로, 열병 난 컴퓨터가 조각난 아비 허리를 끼워 맞추고 있더랍니다

 

   꼬리뼈부터 간지럽게 아지랑이 피어오르며 분해되는 조각들 몇몇은 휴지통으로 몇몇은 아비가 바르다 만 시멘트 벽으로 풀풀 봄볕 좋아 날리는 마음, 제집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던 소목은 휜 못처럼 척추를 잃어버려 집 안에서도 물렁물렁해졌다던데 그 물렁한 눈빛 속에 들어가 보면 아비만 척추를 잃은 것이 아니더랍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것들이 저마다 곧게 서서 서로가 중심이라 싸우는 꼴이 여간 사나워

 

     저 저 공장 굴뚝 좀 봐라
     불빛을 제 혈관으로 흘려보내는 입간판들 곧게 선 것은 어떻고

 

   하여도, 장지 날 축대 하나 세울 여력 없는 가계는 참 물렁물렁 부드럽고 포근했지요 상여 차가 지붕에 사이렌을 달고 급히 당도한 곳, 정리를 마친 디스크 조각들이 처음 제자리를 찾는 그 빈 곳, 이제 속도를 내고 가시겠군요 내 아비! 날아간 몇 조각이 모니터 속 허공을 채우고 빈자리는 감은 눈꺼풀 속처럼 어두웠던지라 벽을 지고 들어가시는 연체동물, 나는 보지도 못했지요 초기화된 바람이 아비 눈자위에 흰 구름을 불러 모으고 있어요

 

 



박성준 / 1986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 졸업.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재학 중.

 

 


심사평

 
  올해 응모된 시 중 먼저 주목된 것은 정수연의 「숙련공」외, 서동빈의 「연가곡 마리오네트」외, 박도준의 「긍정의 힘」외, 서지석의 「맛있는 홍대, 베이커리」외, 김상혁의 「사랑의 기술」외, 박성하의 「고래잠」외, 박성준의 「돼지표 본드」외 등의 작품이었다. 이 중 최근 시의 경향에 근접해 있어 고유의 개성이 미만하다고 여겨진 경우와, 작품의 편차가 커서 시를 완결 짓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판단된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 정수연, 박성하, 박성준의 시편이었다.


  정수연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있고 일상의 단편들 속에서 시적 모티프를 착안해내어 평범한 삶의 현실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발랄함과 유연함이 돋보였지만, 화법과 어조가 기성의 시인을 연상시킨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우리'라는 복수대명사의 반복적 사용이 특히 그러한 인상을 주었는데, 시적 화자로 '우리'가 제시된 이유와 맥락이 시 내부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심사자들이 당선작을 쉽게 결정하지 못할 만큼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것은 박성하와 박성준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안정된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이 중 한 사람을 택해야 하는 일이 즐거운 고민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박성하의 시는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린 연금술적 기술과 정돈된 탁마(琢磨)가 수려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빚어내어 순도 높은 서정성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박성준의 시는 다채로운 어조를 바탕으로 사물의 이면을 투시하는 시선과 포착된 대상의 특질을 다양한 각도에서 부각시킬 줄 아는 구성력이 시의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오랜 논의와 숙고 끝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택한 것은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더 돋보인다고 여겨진 박성준의 작품이다. 박성하의 경우, 파편적인 언어의 진행을 서정성 가득한 이미지로 끌고 가는 힘이 빼어났지만 시종일관 지속되는 단조로운 톤이 당선작으로 뽑기엔 미흡한 측면으로 여겨졌다. 박성준의 몇몇 시편은 각각의 사물이 언어의 표층에서 작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대상을 허투루 보지 않는 진지함과 숙고의 태도가, 그리고 시를 언어의 정교한 구성물로 만들 줄 아는 정밀함이 최근 시에 드물었던 시적 기량으로 여겨져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투고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모두의 앞길에 문운이 깃들길 기원한다.

 

                                                                     _ 《문학과사회》편집동인 | 김동식, 김태환, 박혜경, 우찬제, 이광호, 최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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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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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식별의 원리 / 최원준


  투입된 동전은 검사기에서 금속 함유량에 따른 전류의 크기를 검사받는다 적절한 양의 금속을 함유하고 있지 않은 동전은 전류의 세기에서 차이가 나므로, 동전에 전류를 흘려 일정한 크기의 전류가 흐르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검사를 통과하면 자석과 광센서를 이용해 동전의 종류를 검사한다 동전은 자석의 양 극 사이를 통과하면서 속도가 느려지고, 발광 다이오드가 배열돼 있는 공간을 지나면서 광센서에 의해 크기와 지나가는 속도가 측정된다 만약 측정된 크기와 지나가는 속도가 어떤 종류의 동전과도 맞지 않는다면, 제거기를 통해 밖으로 내보내진다

-[전자식 동전 검사기의 원리]. 자판기에게 물음


적절한 양의 은행 잔고를 함유하고 있지 않은 그는

아파트 창문 열린 틈 사이를 통과하며

잠시 속도가 느려진다

이제까지 본 어떤 종류의 새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그를 발견한 유리창들

일제히 경악의 빛으로 반짝인다

커다랗게 동공에 확대되는

1104호 904호 604호 104호

공중의 투명한 제거기를 지나며 그는

몇 개의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반환된 동전이 그러하듯

짧고 격렬한 떨림 끝에 조용해지는 그


처음 발견한 푸른 제복의 말에 따르면

한쪽 테두리가 움푹 패어

쓸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기계, 2035


 닫히던 문 사이로 팔이 끌려 들어간다 문은 팔목과 소매 사이의 공기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오른팔을 움켜잡는다 거칠게 빼내려고 비틀자 열차 안쪽으로 단추가 떨어진다 그는 왼쪽을 차체에 대고 힘껏 몸을당긴다 천천히 바퀴가 구르기 시작한다 그는 문의 힘을 당할 수 없다 비명을 지르며, 알에서 갓 깨어난 거북이처럼 검은 승강장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헤드라이트처럼 부릅뜬 눈과 펑크난 타이어처럼 일그러진 입, 움직임이 멎을때까지 문은 그를 놓치지 않는다


 - 이상한 현장을 목격한 CCTV의 진술이었습니다 경찰은 청량리 방향으로 달아난 용의자 7238호 차량을 지명 수배하고 각 차량 기지를 중심으로 검문검색을 강화했습니다 /다음은 가정용 컴퓨터들의 파업소식입니다 N195 취재로봇 나와 주세요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며 그녀는 투명하게 포장된다 지하철역 가까운 테이크아웃 커피점으로 들어가 유니폼을 입고 초록 앞치마를 두른다 유통기한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바르며 라테 모카카푸치노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작은 포장들을 건넨다


  눈에 익은 포장이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리며 마주친 적이 있었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 재빨리 그녀는 미소를 얼굴에 바른다 비슷한 포장이 너무 많아, 입구까지 흘러나온 내용물을 안으로 담으며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작은 포장을 건넨다


  커다란 포장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작은 포장을 집는다 가끔 까다로운 포장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대체로 포장들은 온순하다 포장의 생명은 내용물을 드러내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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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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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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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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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걸친 헬레나* / 최하연


1

손 없는 여자, 발 없는 여자, 머리 잘린 여자, 둔부만 남은 여자, 왼쪽 종아리만 셋 가진 여자, 드물지만 아무것도 안 입은 여자 하나도, 나는 갑자기 쇼윈도 안 마네킹과 결혼하고 싶어진다, 예식 촬영은 이 거리에 자주 출몰하는 커다란 외눈, VJ에게 맞기고 나는 성혼 선포와 더불어 햇빛과 창 사이에 침대를, 창과 먼지 사이에 식탁을, 금빛 가격표 뒤에는 네온으로 찰랑거리는 욕조를 들일 테야, 그녀가 출근하면 하루 종일 침대 끝에 앉아 수만 개의 채널을 돌려가며 TV를 보겠지, 어느 채널이나 다 우리 마누라가 주인공인, 동그란 브라운관이 두 개씩 달린,


2

동물의 왕국, 물고기를 잡아먹는 수초를 보고 있다, 머저리 같은 물고기, 화면 속 물고기의 얼굴이 줌-인 되는 순간, 쇼윈도 안 그녀가 그녀 눈동자 속 나에게 포획된다, 마치 동시화면 서비스처럼, 이 포즈는 어떤가요, 모니터를 부탁하는 그녀, 자세를 바꾸면 바꿀수록 수초의 조건은 까다로워진다, 지느러미를 최대한, 버둥거릴 것, 하체를 버리든 상체를 버리든, 아니 허리 없는 물고기에겐 너무 잔인한 포즈인지 몰라, 햇살이 빼빼로처럼 그녀의 얼굴에 박힌다,


여보, TV는 그만 보고 자꾸 풀어지는 눈동자에 송진이라도 발라주지 그래,


유리 안쪽으로 손을 넣으려는데, 미니 시리즈 예고 자막처럼, 마치 비를 뿌리는 버그처럼, 앵벌이 아저씨 몸통이 한 개, 화면 하단으로 들어왔다 사라진다,




* 모피를 걸친 헬레나 : 루벤스가 자신의 아내 헤레나를 그린 나체화로 모피에 가려진 대퇴부와 허리 부분 사이에 9인치의 오차가 있다고 한다. 루벤스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노는 비정상적 인체 구조를 그린 것이다





무반주 계절의 마지막 악장


바람이 눈을 쌓았으니

바람이 눈을 가져가는 숲의 어떤 하루가

검은 창의 뒷면에서 사라지고

강바닥에서 긁어 올린 밀랍 인형의 초점 없는 표정처럼

나무나 구름이나 위태로운 새집이나

모두 각자의 화분을 한 개씩 밖으로 꺼내놓고

그 옆에 밀랍 인형 앉혀놓고

여긴 검은 창의 경계

얼어 죽어라 얼어 죽어라

입을 떼도 들리지 않는 숲의 비명

뒷면들마다 그렇게 모든 뒷면들마다

입 맞추며 먼 강의 물속으로

가라앉으리





콘체르토


  섬이 있다네,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철탑 A를 강 이쪽에 철탑 A′를 강 저쪽에 놓고 이 마름모의 밑변을 강물이라 한다면, 다음 중 고압선의 독백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단, 철탑 A′의 머리는 밑변의 머리를 능히 감당할 만큼 높고 빛나 누울 시간조차 없고 전선 위의 부표는 하루 종일 끝말잇기 중이시다


 1) 물고기는 죄다 폐병을 앓고 있고 낚싯대는 속이 허해 지렁이를 물고 있고 떡밥 낚시 금지보다 저렴한 벌금으로 난간 위의 저 원피스 몇 초간은 자유이고 빈 줄에 빈 갈고리 내가 사랑이라 불렀던 그녀는 찌처럼 사라지네


 2) 철탑 A의 두 어깨는 늘 혈기 왕성하고 의젓하며 절두산은 도난당한 절벽이고 절벽은 매 천 년마다 얼마짜리 주차 중인지 브레이크를 밟으면 바퀴도 난간이 무섭지 않아, 강변의 도로는 밤낮으로 자폐를 앓고 있고 어제 잘린 머리들은 분리수거 대상이고 망원지구 시민공원은 지금 冬安居 순례 중이시다


 3)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은 순례자의 회초리고 새들은 아무 때나 종아리를 걷고 있고 일단 맞으면 구름도 금세 멍이 들어, 매 맞는 소리에 고압선의 허리가 휘고 줄 끝에선 수백만 플러그들 아우성이고 애완견은 쇠사슬이 곧 생의 담보다 노인의 운동화는 더럽게 새것이고 아저씨의 배는 아저씨보다 늘 먼저 뛰어가네


 4) 철탑 A 아래 일 분 동안 열세 개의 머리통이 엇박자로 지나가고 여의도의 하늘은 충치를 앓는지 퉁퉁 부어 있고 배부른 바지선 한 척 강 끝으로 가고 있다 강인지 길인지 끝나는 큰 섬에 토사물 가득한 머리통 수억만 개 쌓여 있다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다


 

 


피아노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물구나무의 태몽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낚시를 했다, 강물은 묽은 색이었다, 낚시를 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오사카는 베를린에서의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곳, 오사카의 공원엔 오사카의 벚꽃이 피고 난 천삼백 원짜리 와플을 받아들고 비행기를 놓친다, 내 낚싯대엔 바늘이 없다


  전화기를 열었다, 아무개 선생님 전화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베를린에 계신데 말씀을 남겨주시면, 성가대는 한 옥타브나 낮은 예배송을 불렀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합동 장례식이 추도식과 한 날 한 시에 열렸다, 낚시 동호회 사람들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줄을 물고 올라온 물고기, 급하게 잡아 탄 택시엔 기사도 없고 안전벨트도 없고 이번에도 또 출발하지 못했다, 공항은 바다 건너 있고 램프 없는 대교 위에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잡힌 물고기는 오래된 위생 랩을 친친 감고 있었다


  랩을 푸는 동안 비행기가 왔다 가고, 할 일 없어진 나는 정성껏 랩을 풀어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용광로의 슬래그처럼, 물고기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 전화기의 주인은 누구지? 생각하는 동안 네모난 집에서 나와 동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글루는 덥고 움막은 춥고 망루는 높아 스스로 동그란 집에서 쫓아낸다, 오사카엔 꽃이 피고 베를린에선 전화기의 주인이 아직도 참회 중이다

 

 



물구나무 빌라


  어둠도 아래층에 있다 망치를 쥐고 무엇을 때려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버스를 풀어놓는다 어둠이 기워놓은 어둠을 입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을 세 논 주인을 만나야겠다 임시고정용 스프레이 풀과 색종이를 싸들고 소풍을 가야겠다 아래층 고양이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


  띄어쓸 수 없는 어둠도 있다 그 안엔 쉽게 잘라 쓸 수 없는 허방이 있다 허방 속엔 말라가며 비명 질는 치자꽃이 있다 가위를 들고 무엇을 잘라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수초들을 풀어놓는다 수초 속에는 눈먼 물고기들이 있다 내일은 수초의 망막을 제거해야겠다


  갈아입을 옷 하나 없는 어둠과 아무것도 차리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삼키고 있는 어둠이 내 다리를 뜯는 어둠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와 쥐가 난 종아리가 그들의 위장 속에 있다 어둠 한 숟갈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누워 어둠과 oo하고 싶다

 

 



산란 3


수영장으로 아기가 들어온다

돌멩이처럼 떨어져

동심원은 다시는 조여지지 않고

여자는 아이의 맨 바깥 라인에 서서

환산 불가능한 속도로

이탈한다 사라진다


겨울 제비가 미련하게 날고

채도 높은 깃털 속

차압당한 방마다

출가한 바람이 쉬었다 가는 사이에도

원의 바깥은

다른 원의 안쪽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기는 여전히 튜브에 꽂혀 있고

웃고 있고

웃음과 함께 붙들린 여자의 비명이

동심원의 마지막과 함께

인화되는 순간,


귀를 막는 하늘

돌덩이처럼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


동심원의 맨 바깥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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