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걸친 헬레나* / 최하연
1
손 없는 여자, 발 없는 여자, 머리 잘린 여자, 둔부만 남은 여자, 왼쪽 종아리만 셋 가진 여자, 드물지만 아무것도 안 입은 여자 하나도, 나는 갑자기 쇼윈도 안 마네킹과 결혼하고 싶어진다, 예식 촬영은 이 거리에 자주 출몰하는 커다란 외눈, VJ에게 맞기고 나는 성혼 선포와 더불어 햇빛과 창 사이에 침대를, 창과 먼지 사이에 식탁을, 금빛 가격표 뒤에는 네온으로 찰랑거리는 욕조를 들일 테야, 그녀가 출근하면 하루 종일 침대 끝에 앉아 수만 개의 채널을 돌려가며 TV를 보겠지, 어느 채널이나 다 우리 마누라가 주인공인, 동그란 브라운관이 두 개씩 달린,
2
동물의 왕국, 물고기를 잡아먹는 수초를 보고 있다, 머저리 같은 물고기, 화면 속 물고기의 얼굴이 줌-인 되는 순간, 쇼윈도 안 그녀가 그녀 눈동자 속 나에게 포획된다, 마치 동시화면 서비스처럼, 이 포즈는 어떤가요, 모니터를 부탁하는 그녀, 자세를 바꾸면 바꿀수록 수초의 조건은 까다로워진다, 지느러미를 최대한, 버둥거릴 것, 하체를 버리든 상체를 버리든, 아니 허리 없는 물고기에겐 너무 잔인한 포즈인지 몰라, 햇살이 빼빼로처럼 그녀의 얼굴에 박힌다,
여보, TV는 그만 보고 자꾸 풀어지는 눈동자에 송진이라도 발라주지 그래,
유리 안쪽으로 손을 넣으려는데, 미니 시리즈 예고 자막처럼, 마치 비를 뿌리는 버그처럼, 앵벌이 아저씨 몸통이 한 개, 화면 하단으로 들어왔다 사라진다,
* 모피를 걸친 헬레나 : 루벤스가 자신의 아내 헤레나를 그린 나체화로 모피에 가려진 대퇴부와 허리 부분 사이에 9인치의 오차가 있다고 한다. 루벤스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노는 비정상적 인체 구조를 그린 것이다
무반주 계절의 마지막 악장
바람이 눈을 쌓았으니
바람이 눈을 가져가는 숲의 어떤 하루가
검은 창의 뒷면에서 사라지고
강바닥에서 긁어 올린 밀랍 인형의 초점 없는 표정처럼
나무나 구름이나 위태로운 새집이나
모두 각자의 화분을 한 개씩 밖으로 꺼내놓고
그 옆에 밀랍 인형 앉혀놓고
여긴 검은 창의 경계
얼어 죽어라 얼어 죽어라
입을 떼도 들리지 않는 숲의 비명
뒷면들마다 그렇게 모든 뒷면들마다
입 맞추며 먼 강의 물속으로
가라앉으리
콘체르토
섬이 있다네,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철탑 A를 강 이쪽에 철탑 A′를 강 저쪽에 놓고 이 마름모의 밑변을 강물이라 한다면, 다음 중 고압선의 독백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단, 철탑 A′의 머리는 밑변의 머리를 능히 감당할 만큼 높고 빛나 누울 시간조차 없고 전선 위의 부표는 하루 종일 끝말잇기 중이시다
1) 물고기는 죄다 폐병을 앓고 있고 낚싯대는 속이 허해 지렁이를 물고 있고 떡밥 낚시 금지보다 저렴한 벌금으로 난간 위의 저 원피스 몇 초간은 자유이고 빈 줄에 빈 갈고리 내가 사랑이라 불렀던 그녀는 찌처럼 사라지네
2) 철탑 A의 두 어깨는 늘 혈기 왕성하고 의젓하며 절두산은 도난당한 절벽이고 절벽은 매 천 년마다 얼마짜리 주차 중인지 브레이크를 밟으면 바퀴도 난간이 무섭지 않아, 강변의 도로는 밤낮으로 자폐를 앓고 있고 어제 잘린 머리들은 분리수거 대상이고 망원지구 시민공원은 지금 冬安居 순례 중이시다
3)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은 순례자의 회초리고 새들은 아무 때나 종아리를 걷고 있고 일단 맞으면 구름도 금세 멍이 들어, 매 맞는 소리에 고압선의 허리가 휘고 줄 끝에선 수백만 플러그들 아우성이고 애완견은 쇠사슬이 곧 생의 담보다 노인의 운동화는 더럽게 새것이고 아저씨의 배는 아저씨보다 늘 먼저 뛰어가네
4) 철탑 A 아래 일 분 동안 열세 개의 머리통이 엇박자로 지나가고 여의도의 하늘은 충치를 앓는지 퉁퉁 부어 있고 배부른 바지선 한 척 강 끝으로 가고 있다 강인지 길인지 끝나는 큰 섬에 토사물 가득한 머리통 수억만 개 쌓여 있다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다
피아노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물구나무의 태몽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낚시를 했다, 강물은 묽은 색이었다, 낚시를 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오사카는 베를린에서의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곳, 오사카의 공원엔 오사카의 벚꽃이 피고 난 천삼백 원짜리 와플을 받아들고 비행기를 놓친다, 내 낚싯대엔 바늘이 없다
전화기를 열었다, 아무개 선생님 전화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베를린에 계신데 말씀을 남겨주시면, 성가대는 한 옥타브나 낮은 예배송을 불렀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합동 장례식이 추도식과 한 날 한 시에 열렸다, 낚시 동호회 사람들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줄을 물고 올라온 물고기, 급하게 잡아 탄 택시엔 기사도 없고 안전벨트도 없고 이번에도 또 출발하지 못했다, 공항은 바다 건너 있고 램프 없는 대교 위에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잡힌 물고기는 오래된 위생 랩을 친친 감고 있었다
랩을 푸는 동안 비행기가 왔다 가고, 할 일 없어진 나는 정성껏 랩을 풀어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용광로의 슬래그처럼, 물고기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 전화기의 주인은 누구지? 생각하는 동안 네모난 집에서 나와 동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글루는 덥고 움막은 춥고 망루는 높아 스스로 동그란 집에서 쫓아낸다, 오사카엔 꽃이 피고 베를린에선 전화기의 주인이 아직도 참회 중이다
물구나무 빌라
어둠도 아래층에 있다 망치를 쥐고 무엇을 때려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버스를 풀어놓는다 어둠이 기워놓은 어둠을 입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을 세 논 주인을 만나야겠다 임시고정용 스프레이 풀과 색종이를 싸들고 소풍을 가야겠다 아래층 고양이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
띄어쓸 수 없는 어둠도 있다 그 안엔 쉽게 잘라 쓸 수 없는 허방이 있다 허방 속엔 말라가며 비명 질는 치자꽃이 있다 가위를 들고 무엇을 잘라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수초들을 풀어놓는다 수초 속에는 눈먼 물고기들이 있다 내일은 수초의 망막을 제거해야겠다
갈아입을 옷 하나 없는 어둠과 아무것도 차리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삼키고 있는 어둠이 내 다리를 뜯는 어둠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와 쥐가 난 종아리가 그들의 위장 속에 있다 어둠 한 숟갈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누워 어둠과 oo하고 싶다
산란 3
수영장으로 아기가 들어온다
돌멩이처럼 떨어져
동심원은 다시는 조여지지 않고
여자는 아이의 맨 바깥 라인에 서서
환산 불가능한 속도로
이탈한다 사라진다
겨울 제비가 미련하게 날고
채도 높은 깃털 속
차압당한 방마다
출가한 바람이 쉬었다 가는 사이에도
원의 바깥은
다른 원의 안쪽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기는 여전히 튜브에 꽂혀 있고
웃고 있고
웃음과 함께 붙들린 여자의 비명이
동심원의 마지막과 함께
인화되는 순간,
귀를 막는 하늘
돌덩이처럼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
동심원의 맨 바깥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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