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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 연연해 안타까워, 수상자 없음 결론”

 

 

당선작 없음

 

시는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다.자유롭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을 써야한다.이번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는 스스로만 아는 언어로 표현된 작품이 많았다.전위적인 작품으로도 평가하기 힘들었고 산만하고 흐트러진 부분이 많았다.시에도 유행성이라는 것이 있다.사람들이 너무 시류에 연연하는 것 같다.이해가 어려운 전위성 속에서도 시 정신과 인간의 사유나 시대를 반영되기 마련인데 대체적으로 가독이 불가하거나 의미,문학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특히 젊은 사람들은 문학적 시류에 민감한 부분이 있지만 이것을 좋다고 하면 시가 망가질 수도 있다.때로는 절제가 필요한 부분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써내서 당선되기 보다는 경각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당선작을 뽑지 않기로 했다.말들이 모여 행이 되고 낱말 하나 하나와 그것들의 연결이 중요하다.꼭 이렇게 쓸 수 밖에 없다는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납득이 돼야 감동이 나온다.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떠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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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목록


저수지에 개 하나 놓여 있다

트루먼이 연기하는 것이다


어두운 관객석 사람들 웅성거린다 너는 지루한 득 턱을 괸다 우리는 지정석에 앉았고 우리를 기다리는 개가 있고 이 모든 건 가까스로 완벽하


흰 가루가 된 외할머니를 가로수 아래 묻었지 사대강 사업으로 거대하게 꾸면진 영산강 공원에서 공원인데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맞담배를 피우자 했지 아직 미성년자인데 자꾸만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다 그런 게 뭘까 외삼촌의 불을 받으며 생각했다

가로수는 더 크게 자라겠지 한겨울의 바람이 불고 사라진 잎사귀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외할머니가 죽을 힘을 다해 우리를 비웃는 거야, 형이 말하고

돌아가는 장례 버스에서 외가 사람들은 잠깐 슬퍼해줬다 돈을 세던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는다 왜 슬픈 얼굴들은 다 배가 고파 보이는 걸까

자꾸 침이 고여 괜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일 부턴 학교에 가야 하는데 형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하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버스의 창문에 나란히 강이 비친다 저건 강이 아니라 저수지다, 아버지가 말하자 외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반박하고


긴터널을 지나왔다


일년에 한번

극장에 갔었지

먼 친척의 부고가

해마다 한번은

들려오던 것처럼

정한 적 없는 약속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형과 내 이름을 자주

헷갈려 하던 사람과 함께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옆에 있는 호수를 보며 걸었지


형은 강이라 했고

나는 호수라 했는데

둘 다 아니었지

깊고 어두웠지

지금 당신이 밟고 

서 있는 그것처럼


그런다고 누가 알아 줄 것 같아요?

죽어봤자 다 까먹는다고요


트루먼이 연기를 하다 말고 우리를 본다

연기가 아니라 분명 우리를 보고 있다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연기라고

너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관객석의 어둠은 지나치게 깊다

이것을 저수지라 말하기에는


개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집에 돌아와 네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닫는 일을 나는 자주 앓는다


저 트루먼이라는 사람

어딘가에 익숙하다,

너는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빛이 눈을 껌벅인다

무서운 빛이다


트루먼은 알고 있겠지

트루먼만이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저수지를 바라보는 트루먼이

점차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암전

총소리

개의 신음


무대 위에 트루먼

트루먼을 관통한 트루먼

사라진 어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지는 것


아직 박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등 뒤에 구겨둔 외투를 꺼내 입는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너는 알았다고 다음엔 더 좋은 곳을 가지고 말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수프와 숲


베란다에서 거실로 화분을 옮기던 여자를 나는 여름의 숲에서 잃어버렸다


남겨진 식탁 위에 매일 숲이 자랐다 머리맡에 나무를 옮겨 심는 꿈을 궜다 숲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쫓다 잠에서 깨면 늘 혼자였다


몰래 훔쳐본 여자의 성격 속 메모를 떠올리면

두려움이 무성해지는 여름


"어떤 믿음은 너무나 울창해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죽은 나무들로 지어진 성당에 다녔지 도기를 움켜쥐듯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배웠어 어린 내가 고목을 찍어내릴 상상을 할 때마다 여자는 수프를 끓였다


오래도록 휘저으며 바라본다

팔팔 끓는 수프 위를 떠다니는 표정과

말없이 그 표정을 흔드는 하얀 손


나는 매일 일기장을 찢었다


식탁 위에서 식어가는 수프 겁이 번진 얼굴을 지워주던 하얀 손에 박힌 못들의 세례명은 손잡이였지 깊숙이 흐르는 마음을 움켜쥔 채 매달리는 것들


굳게 잠긴 울창함 속에서 구멍을 세는 아이

아이의 낡은 벽지 같은 등을 본다

이곳은 분명 숲이다 숲은 멀어지니까

맨발을 가졌으니까


멀어지던 아이가 구멍 속에 발을 담근 채 둥글게 몸을 말 때면 궁금해진다 방 안 가득 무너지는 것은 왜 혼자가 아닐까


숲에서 홀로 수프를 긇이다가

곰팡이처럼 떠다니는 표정들을 뒤섞는다


몸 안에 고인 빛을 쏟아내는 전등 아래

그림자와 그늘을 구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것들이 뒤섞여 흉측하게 뭉쳐질 때까지 어디선가 종은 울리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숲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못


하굣길에는 갈대밭에 들러 혼자 울었지 아이들은 끈질기게 따라와 시체장사하는 애비자식이라고 놀렸다 나도 한명 쯤은 자신이 있어서

주머니 속 대못을 움켜쥐었지 교복바지 속에서 그것은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은 홍수가 잦아서 매일 밤 아이 하나 정도는 쉽게 떠내려갔다 급히 거리를 떠도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꿈틀거렸고

마을의 하나뿐인 뒷산 위 골동품처럼 쌓여 있는 무덤들 사이 아버지는 매일 대못을 박는다고 했다

교회도 없는데 마을에는 한동안 종소리가 났지

아버진 내게 보여준 적 있다 미리 파놓은 누군가의 묫자리, 비가 고여 큰 못이 된 그것이 찰랑거리던 모습

장의사는 마을에 하나면 족하다고 그 일을 너도 맡게 될 거라고 언젠가 벽에 걸린 작업복을 보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하루 종일 손가락이 아팠지

빈손을 자꾸만 쥐어서

밤마다 몰래 아버지의 삽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팠지 주변에는 내가 매일 파놓은 구멍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

무딘 칼질 같은 장대비 소리

온 마을을 뒤흔들 것처럼 컸다


구멍들마다 물이 차올랐다 못처럼 박힌 구멍들이 징그러워졌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삽을 버리고 도망칠수록 더 길을 잃게 되는 산속에서

더는 그곳과 멀어질 수 없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뛰었다 숨이 찰수록 자꾸 무언가를 움켜쥐게 되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다시 갈대밭이었다


젖은 주머니 속 무언가

서서히 나를 찌르고 있었다









친구는 수련회에 다녀온 후로 말수가 줄었다 뾰족한 것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튀어나온 게


운동장에 야구부 아이들이 줄줄이 엎드려 있다

뭉쳐진 그림자 위로 고이 튀어오르다

빈 유리병 같은 가을 속으로 가라앉고


빛이 보서지는 소리가 운동장을 메운다 더 잘하겠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듯 아이들은 간절해진다 땅을 짚은 팔목들이 나란히 휘청거리는 저녁


창문 속 어둠을 가로지는 불빛들 사이로

불에 타고 있는 집을 꿈꾸곤 했다


지난여름 우리의 캠프파이어


사각의 거대한 불 위로 튀어오른 불씨들 공중에서 흩날린다 흰 종이에 무엇을 적어서 냈냐고, 물어도 친구는 아무 말이 없고


불을 둘러싼 채 우리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밤하늘에 녹아내리는 불씨 같은 춤을,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며


거대한 불 속으로

서서히 멀어져가는 집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저지르는 사람은 없지, 그것은 모두가 아는 마음 때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를 잠갔다 우리는 경쟁하듯 더 빠르게 원을 돌고


이 노래가 끝나고 난 후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실은 

모두 같은 홈을 향하고 있는 걸

그라운드 위의 아이들처럼

우리에겐 집이란 건 멀리 있으니깐


캠프파이어의 불이 꺼지고

우리는 재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반 안에 누워 있고 나는 작은 창문으로


베이스를 잃어버린 아이가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꺼져가는 전광판의 불빛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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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말 속달 우편


매일 죽음도 불사하는 숙련된 기수여야 함

고아 환영*


달리던 기수의 뺨에 벌레가 앉았다 그것을 만지자 힘없이 부서졌다 바람에 죽기도 하는구나 야생 선인장이 많은 고장을 지나고 있었다 식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매일 잠들기 전 기수는 그날 만난 바람을 필사했다 그것은 잘 썼다고도 못 썼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기였다 달리는 기수와 조랑말의 모양만큼 매일 바람은 일그러졌다 사무소를 출발한 기수는 열흘 이내에 동부의 모든 마을에 나타났다 기수는 작고 왜소해서 말에서 내리면 가장 먼 곳으로 심부름을 떠나온 아이 같았다 기수는 가끔 다른 지역의 기수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다 쓴 편지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스스로 배달하기도 했다 기수는 늘 휴대용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였다 기수는 매일 잠들기 전 누워 사무소에서 배운 대로 성호를 그었다 가슴 위로 그의 작은 손짓이 만든 바람이 잠깐 불다 사라졌다


* 조랑말 속달 우편(1860~61) 기수 모집 공고






그것의 단위


길 위에 버려진 신발들은 언제나 한 쌍은 아니였다 무수한 바람이 그곳에 발을 집어 넣어ㅆ지만 신발은 자기보다 빠른 것은 한번도 태워본 적 없었다 신발은 사실 혼자 있으면 한 발자국도 걷지 않았다 신발 한짝이 저곳에 놓일 수 있는 경우들을 상상하고 그중 가장 슬프지 않은 것을 믿기로 한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하구나 그러나 상상과 믿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느니깐 나는 누구도 의심하지 말아야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신발은 맨발이었겠지 이 고장에는 장례식장이 너무 많아 나는 가야할 곳을 찾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곳을 들러 명복을 빌었다 육개장은 짰다 그곳은 많은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어지러워지는 대역을 수시로 정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발은 가지런히 놓일 때 더욱 죽은 사람의 것 같이 보인다 영혼을 세는 단위를 켤레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영혼을 위해 신발을 벗고 잠시 영혼이 되어 준다 그곳에서 아무도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 잠시 사람이 아니었던 동안







미래의 자리


너는 매년 가족들과 몇 기의 무덤을 돌보러 그 산에 갔는데 너는 그것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의 모든 비석에 너의 이름이 있어서 너의 무덤도 그곳에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너는 그곳에 가면 오래 풀을 뽑았다 왔는데 잔디와 잡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몰라서 의심이 가는 풀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느라 네가 만진 ㅍ 풀은 모두 중간에서 잘려 있었다 수풀 속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벌레들이 그곳에 많았는데 한 번도 벌레를 본 적은 없어서 그것은 너의 가족들이 속으로 하는 말 같다고도 너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그 산에 올라 네가 누울 곳을 미리 바라보기도 하였다 한 명의 자리에 같이 누워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숨소리도 메아리가 되었다







수경


어제처럼만 하면 돼 분홍색 한복을 입은 수경이 말했ㄷ 너의 왼쪽과 오른쪽 얼굴을 반복해서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완성하는 춤을 추었다 그래도 겁이 나면 한 명의 엄마를 같이 바라보자


너의 어깨를 짚는 나의 자세를 너는 돌아보지 않고 손질해준다 너의 몸이 커질수록 매일 조금씩 이동하는 너의 지점


하나의 책상을 나눠 가지는 사람들이 커서 하나의 아이를 나눠 가지는 사이가 되는 것으로 알았고


우리는 책상에서 매일 새로운 무늬를 발견했다 나뭇결은 나무가 한때 격렬하게 춤추었던 흔적 새로운 무늬를 발견하지 못한 날에는 무늬를 새겨주었다    


너는 모든 것을 리본으로 접을 줄 알았다, 수명이 다한 것들만을 접었다 공중에서 잠자리의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잘린  날개가 잠자리보다 오래 날았다 너는 그것을 주워 접다가 더 잘게 찢어버렸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때 춤은 완성된다 우리의 몸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새로운 춤을 출 수 있다


잠자리를 묻고 내려가는 숲길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오래 헤맸고 만약 더 어두웠다면 숲속에서 빛을 내는 것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눈을 감자 우리 모두 밤을 만들 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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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캠프 / 김지연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그렇게 생각한 아침에도

손을 뻗으면 허공에서는 손이 자라났다


그런 아침에도 이불을 떠나고


이것 좀 봐,

자꾸 옆을 돌아보며 걷게 될 때


손안에 들어와 갇히는 풍경이 많았다 손안의 세계를 움켜쥐고 걸었다 그것은 너무 가볍고 너무 작아서 작은 틈새로도 줄줄 흐르기 쉬워서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아야 했다


언제였더라 우리는 서울숲을 함께 걷고 있었지

뿔도 없이 동그랗고 작은 머리를 가진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쫗아왔어


녀석의 등을 쓰다듬으면 얇은 가죽 아래 움직이는 가느다란 여러 개의 뼈가 느껴졌지


손가락에 닿는 손허리뼈를 어루만지며 걷는 동안

잘못 뭉친 눈송이처럼


손을 떠난 순간 바스러질 것 같던 그 등을 생가괬다


러시아에서는 사슴을 만나면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래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그냥 사라진다면 함께 길을 걷기에 좋은 가볍고 따뜻한 손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으며 옆을 돌아볼 수 없는 마음으로 걷다가 앞으로만 향하는 눈빛으로 걷다가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피 흘리는 사슴 한 마리가 도로에 누워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나여야 했어


사슴을 껴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도는 등 뒤의 길을 지웠다


사슴의 굳어가는 몸이 풀을 쓰러뜨리고 있다 발보다 먼저 길을 만들고 있다 누운 풀 위로 발이 겹쳐지고 있다 사슴의 아직 따뜻한 피는 내 발자국으로 굳어간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닷가 별장에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둘러 앉자

바닷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


손을 잡으면 손목의 끝에 매달린 인간의 무게는  분명하고 묵직했다








전망대


우리는 빛 대신 꽃을 들고 만났다


오늘은 누군가 집어 던진 돌처럼

깨진 창문 안쪽에 놓여 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빛을 내는 얼굴을 보면서

봄밤 흰 목련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꺼지지 않는 빛을 위해

새 건전지를 넣던 손으로


향을 피우고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지는 꽃잎은 우리의 발밑에서 악취를 풍기며 문드러지고

목덜미에 붙어 흰빛으로 피부를 비춘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듯이


거울이 없던 시절의 인간은 어땠을까 강물에 비친 일렁이는 얼굴이라면 미워하지 않기도 쉬웠을까


철문에 기대어 흔들리면서 한강 변을 달리는 무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본다 불빛과 겹치며 흔들리는 얼굴을 본다 불빛은 너무 많고 너무 작아서 도무지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고


여기는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들만 가득해

손을 대면 아름다운 것이 자꾸 죽었다


우리의 끝은 다 바스라졌다

이런 식으로도 영원은 만들어진다


누운 이불에서는 아늑하게 들이 베겼다

공원에서 모래를 잔뜩 묻히고 돌아와 잠든

작고 늙은 루*의 곁처럼


빛을 들고 섰을 때 우린 다 늙어버린 것 같았지


꽃을 들고 선 우리는

몸통에 붙은 팔다리가 자기 것인 줄도 모르고 무서워서

몇 시간 전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 장모 닥스훈트 소형견 이름 








중력과 은총*


깃털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깃털이 옮겨붙은 채로 걸었다


여름 바닷가였다

너는 개를 싫어하는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

기다리라고 말했다


흰 발등을 가진 사람들이 오가는 해변은 검은 발자국으로 자욱했다

돌아보는 얼굴과 흔들리는 꼬리로 가득한 해변에서

발이 없는 것처럼 기다리는 그런 개를 두고 걸었다


기다리는 개의 마음은 다른 개들을 쉽게 지운다

너의 개는 한아름 광안리에서도 유일한 개가 되어 엎드릴 수 있다


너무 큰 날개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천사 이야기를 알아?

걸음마다 모래에 빠진 발을 꺼내면서

나란히 비틀대던 네가 물었다


신발 끝에서 모래가 흩어졌다

모래에 섞인 것들이 해변의 불빛을 쪼개고 있다

수평선 근처에서 터지다 만 불꽃들은 달빛과 뒤엉키고 있다


바닷가에선 싸구려 불꽃도 이상하게 아름다워

사진으로 본 아름다운 것들은 다 잊자


기다리는 것이 오리라는 것을 그 개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 같았다


보도블럭이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병 조각이며 마른 밥알, 깃털이 섞인 모래알이

잔뜻 따라붙은 날개의 천사가 똑바로 걷고 있다


잠에서는 깃털 하나하나가 새라도 된 것처럼 날아다녔다


* 시몬 베유








글라스 하우스*


눈동자는 눈앞의 풍경을 비추고 연인의 눈동자는 등 뒤의 풍경을 비춘다 여름 숲에서 연인의 눈 속은 유리창 너머 실내처럼 무성한 나뭇잎 사이 한 줌의 어둠으로만 보인다


인간의 불안은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발생하는 풍경의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치과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의 연인은 말했다


그는 여름 내내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만 보다가 유리로 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벽 대신 네 개의 커다란 창을 가졌다 눈동자의 실내 같은 그 집에서는 안팎이 사라지고 옆만 남았다 두 사람은 옆이 되어 포개진 풍경이 모두 같은 질감으로 요약되는 세계를 어루만졌다


유리에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오후의 햇빛은 우리의 얼굴처럼, 나뭇잎처럼, 이불처럼 매끄럽고 차갑게 보이는 모든 걸 만질 수 있다면 보이는 대로 믿게 되겠지

그런데 왜 왼손이 쥔 옆의 손은 오른손이 만지고 있는 눈앞의 손가 다를까


믿음을 넘치는 온도가 두 사람의 손안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믿음을 넘치는 것을 가장 믿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어린 마음


눈빛은 사물의 뒷면을 깸녀서 나아간다 연인의 눈빛은 피부를 투명하게 만든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자욱하게 천장을 떠다니는 사물의 뼛가루를 헤아리며 어린 마음은 부서질 ㅅ 없는 뼈를 가진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웃는다


이제 우리는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눈에 비친 풍경으로만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네

눈동자에 포개진 붉은 빛 위로 같은 붉은 빛의 눈동자가 겹치고 있어

투명한 피부의 연인을 안으면 팔이 녹았다


불타는 숲을 비추는 유리는 얼린 불꽃처럼 펑펑 깨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불꽃이 찬란하게 쏟아진다


큰 숲과 숲의 모든 것이 불탄 여름이었다

잿더미 사이를 걸으며 흩날리다 더 깊은 데로 가라앉는 검은 잎들을 본다


미래 바깥에서 어린 마음이 낡고 있다

어린 마음은 무성한 유리 조각 속에서 자꾸 태어나는 것처럼 누워 있다


*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사면이 유리로 된 주택







흰 개


어디에나 해가 넘치는 오후였다 해가 넘치는 어디에서 해가 우리를 넘치고 그것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지친 우리의 이마 위로 넘치는 해가 빛났다


물결 위로 해가 넘치고 난간 위로 해가 넘치고 이것이 어떤 오후라도 넘치는 해 아래서 물결은 빛나고 빛나는 물결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빛나는 물결 너머 흰 개의 엎드린 등은 희게 빛난다 그것은 곁에 두기에 곁을 주기에 좋은 빛이다


흰 개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흰 개다 발등 위로 나를 좋아하는 흰 개가 턱을 기댈 때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것을 기댈 때 우리의 머리 위로 해가 쏟아지고 우리는 함께 빛나고


넘치는 해는 흰 개의 검은 눈으로 넘치다 그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어둠이 내릴 것이고 빛나는 검은 눈 속에서 그 빛은 끝없이 넘치고 흐르고 그것은 모든 것이 어두워진 다음에도 계속될 빛이어서


넘치는 빛 속에서 일어나 발을 털었다 보얗게 이는 흙먼지도 발등 위 흰 개의 흔적도 모두 반짝이는 것이었다


작고 약한 짐승의 놀라운 온기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라도 곁을 주기에 곁에 두기에 좋은 온기로 거기에 있다 흰개의 눈 속에서 그 비좁은 무한에서 모두가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곁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온기를 느끼다 믿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될 것이고 끝없는 처음으로 눈이 내릴 것이고 모든 눈송이가 빠짐없이 상냥할 것이고 우린ㄴ 상냥한 흰 눈을 나눠 맞으며 희게 빛나는 세계를 바라보겠지 바라보면서 갓 지은 흰밥을 나눠 먹겠지 그런 희고 빛나는 온기를 나눈다는 것


넘치는 빛 속에서 모두 빛나는 것이었고 눈이 부신 일이었다고 모든 것이 곁에서 일어난 눈부시게 빛나는 일이었다고 흰 빛을 띠면서 희게 빛나는 눈밭에서 더 흰 빛으로 환해지는 흰 개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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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절 하얀 꿈


그 절에서는 

도자기 그릇을 팔았다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고들 했다


비 내리고 천둥 치던 날

절에 갔다


먼 길을 걸어온

손과 발에선

흙냄새가 난다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눈을 떠보니 텅 빈 방이었고


죽지 않고 도착해서 기뻤다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곧 내가 찾는 것을

찾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고


밖에서는 여럿의 사람들이

나직이 이야기하는 소리


그들은 즐겁다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언어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구나


겨울이 도착하고 있다

얼었다 녹고

다시 얼어버리는 눈

미끄러지는 사람들


나는 순간 황홀해진다

눈발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양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햐얀 눈

정직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다시 빈방에 남겨져 있다


인기척이 들리고

흙냄새가 가득한






순무는 순무로서만


너른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87년식 오토 밴의 갖은 소음과 진동 속에서 우리는 순무에 대해 말했다. 난 순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순무를 좋아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큼 순무에 대해 잘 알진 못했다. 나는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순무를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사랑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순무와 함께 온천을 가거나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며 우유 거품이 올라간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는 63도이며 그 이상은 질겨진다는 것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고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순무라면 뭐든 좋다고 한다. 질기든 맵든 삭아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순무를 찾기 위해 차를 멈추고 순무밭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순무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휩쓸려 우리도 순무의 파란 머리를 쑥쑥 뽀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순무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 순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


함께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들은 모두 혀를 찼다. 하지만 순무들은 우리의 손에 놓인 채 가만히 침묵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것이 순무들이 기분이 좋다는 신호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순무의 속은 당최 모르는 거라며 침울한 표정으로 깍둑썰기를 하였다. 아주머니들은 작게 조각난 순무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버무리더니 우리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아직도 모르겠냐고.


우리는 잇따라 입을 벌리며 더 달라 칭얼 댈 뿐이었다.


* 사뮈엘 베케트, <충분히>, <죽은-머리들/소멸자/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자들>







박태기나무아래서 벌어진 일


은영이와 찬영이로

다시는 함께 불리지 않는다


우리는 늘 영이었는데

생각은 서로 무한하다


그래서 무슨 생각 해, 하면

이인삼각으로 달리던 우리의 그림자


꼬여버린 다리 세개와

늘 앞서 있던 너의 어깨를


그리고 청기 백기 내려간

텅 빈 운동장에서 나는

단지 미안하다 했을 뿐인데


파벽돌처럼 딱딱하던 네 얼굴

참 예뻐서 갖고 싶었던 너의 치맛자락

끈 풀린 운동화 너의 지랄맞은 친구들까지


전부 다 폭발하던 그때 그 가을 하늘

나는 바닥에 엎드려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그때 그 달빛 아래

아이들이 떠나도 붉은 멍투성이의 나무 하나

잠시 숨죽이더니 계속 자라는 거 있


주렁주렁 홍채 같은 열매들이

사방에서 흔들리고


하지만 언제고 영아

네가 말라비틀어진 내 아래를 지나간다면


그땐 겨울 지나 봄일 것만 같고

나도 초록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고


찬영이와 은영이로

운동장은 가득할 것만 같고

그래도 나는 영이고

영아, 나는 너 다 이해해


그러니 영아, 계속 달려

나 여기서 기다릴께 혼자 꽃피울게


옛날 일은 다 잊었는데

누군가 소원을 물어봐


영아, 기억나지 않는 소원이란

얼마나 오래된 걸까







마당엔 어른들이 모여 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솥을 들여다본다 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어머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 모든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계속 쓴다고 되니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늙은 배롱나무를 들여다본다 나무 아래서 고양이가 죽은 제 새끼를 핥고 있다 언니는 죽기 너무 아까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살아 있는 고양이는 이미 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제 그만 솥을 치우자고 한다 그는 이제 곧 붙잡혀 솥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


쓰지 못한다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연기로 가득해 경보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가장 많은 미움을 쌌던 인물처럼

나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개울에 빠져 죽었다는 그와는 달리;

반대편에 잘 도착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꽁꽁 얼어 있었고

그애는 죽었겠구나


죽은 이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모여 흐르는 땀을 연신 닦다가


미워하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검고 아득해서

바닥이 보이고


돌맹이를 던져볼가


아서라, 죽은 이는 다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연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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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난 웃는 입이 없으니까 조용히 흘러내리지

사람들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

더 아프려고 밥도 꼬박고박 먹고 알약도 먹어

물처럼 얼었다 녹았다 반복되는 하루

친구라도 만들어야 할까? 우동 먹다 고민을 하네

무서운 별명이라도 빨리 생겼으면 좋겠다


약 먹고 졸린 의자처럼 찌그덕삐그덕 걷고 있는데

사람들은 화가 나면 의자부터 집어던지네

난 뾰족하게 웃는 모서리가 돼야지

살아본 적 없는 내 미래를 누가 부러뜨렸니!

약국 가서 망가진 얼굴이나 치장해야지

뒤뚱뒤뚱 못 걸어야지


난 은밀한 데가 조금씩 커지고 있어

몸은 축축해 곰팡이가 넘치는 벽이 되려고 해

사람들이 깨트리기도 전에

계란프라이처럼 하루가 누렇게 흘러내리고

탱탱하게 익어가는 구름들아 안녕

누가 좀 만져주면 좋겠지만


뚱하게 걷다보면 장대비가 내리고

집에 뛰어들어가도 계속 비를 맞는다


터진 수도관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난 자구 흘러넘치는데 바닥을 닦아낼 손이 안 보이는데


갈 데가 없어 혼자 미끄럼틀을 타면

곁을 지나가던 어깨들이 뭉툭 잘려나가지

떨어진 난, 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겠지만







뾰족한 지붕들이 눈을 찌르고 귀마개를 뺏더니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고


세면대 속 출렁이는 비명을 싯어내자

앞니가 두 개나 달아난 내가 뚱하니 서 있네

누구한테 자꾸 털리고 다니니?

내가 나를 털었는데 어젯밤에 발작이 있었거든요

더러워진 손바닥과 구린내 나는 발가락을

우리집 마녀에게 내민다

젖꼭지 캄캄한 엄마가 냄새를 맡고 뛰쳐나와

불심검문처럼 내 몸을 구석구석 더듬다

내일쯤 잡아먹으면 끝내주겠지?

먼지 쌓인 악몽이 내 피를 한 차례 휩쓸다 간다

생각이 엉킬 때마다 머리카락은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검은 수초가 되어 발목을 넘어뜨리고

고무줄처럼 질긴 얼굴을 누가 잡아당기면

늘어나고 찝지기는 나의 일상들

불안을 쪼그맣게 오려서 알록달록 꾸민다

미모를 갱신한 내가 약국으로 놀러간다

내 인생 하류를 통과하는

소화제를 한 움큼씩 집어삼키면

우와 시원하다! 몸에 찍힌 발자국들이 욱신거리고

눈 코 입 깨진 자리마다 후후 불면서

하트 모양 스티커를 붙이면 자신감이 생긴다

예쁜 건 내 잘못이에요!

열등한 건 더 열등한 것들을 만나 해결하라고

화장실 물을 시원하게 내려주면

가난하고 뻔뻔한 걸 낳아놓고

미역국을 사발로 퍼먹은 게 누구더라?

마녀에게 빠진 이를 드러내며 비웃어야지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신나게 밑바닥을 보여줘야지







뒤에서 오는 여름


여러 방향으로 꺾이는 의자에서

책을 읽는다


흔들리는 풍경이 다가오는데


여름 안에서 나 혼자 걷고 있었다 여름이 무성하게 이파리를 뿜어내고 그늘을 만든다 삐뚤빼뚤 자라난 내가 징그럽게 언덕을 뒤덮고


생각을 길게 이어서 하면

펼쳐놓은 들판이 넘어간다 웃음과 비명으로 찝겨 있었다 이파리는 떨면서 바닥에 엎드려 있고, 문장들이 따라붙는 건 모르는 사람의 불행들이지 남의 고통은 문장에게 최고로 인기가 많고


글시들은 다정한데

감당할 수 없어서 조금 미쳐 있었고


살기 이해 나는


줄곧 상처 입고 있었다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면 징그러웠다 겹겹의 헨즈들로 징그러운 내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무서울 게 없었다 두려움을 지나칠 수 있는 슬픔이 더 켜져버려서


뭉개진 새를 곳곳에 심어 두었다


더는 혼자서 버티지 않아도 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래 버려졌던 거니 서늘하게 등 뒤가 젖어 있던 날


지나오던 길목에서 죽은 새 한 마리를 본다


익숙한 문장은 겪어본 일들이었다







프랑켐슈타인의 인기는 날마다 치솟고 너희는 약 맛을 좀 아니


나사들이 미릿속을 맴돌고 있어

불안이 피부 위로 돋아났어


그림자를 주워 입고 노을을 구경하는데

나는 왜 멀쩡한 걸까?


무서운 말도 장난처럼 찍찍 내뱉을 줄 아는데 의사는 맨날 망가질 거래 조롱하는 입술처럼 젖꼭지가 점점 더 삐뚤어질 거며 나에 관한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면 뒤집힌 물고기처럼

밤낮으로 불안에 시달릴 거래


혀를 숙 내밀고 가로수에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이나 깜짝 놀래키고 싶은데! 날개를 쫙 펼치고 찢어진 흉터처럼 날아다녀야지 시퍼런 가위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전부 오려내야지 목말라서 헐떡이는 사람을 목매고 싶게 만들어야지 켜놓은 가스불처럼 온 집안을 잿더미로 뒤덮어야지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도 삐뚤어지고


버텨야 할 중력이 내 인생을 흙탕물에 풍덩! 빠뜨리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나를 봉인하러 가야지 누가 베어간 콧대를 이어서 붙여야지 입은 왜 달린 건데? 거대한 감옥에 뚫려 있는 쪼글쪼글한 구멍이 무슨 소용인 건데? 갇혀 있던 소문만 새어나와 사방을 더럽히는데 수술대에 오르면 의사들은 링거 색이랑 오줌 색이랑 똑같다고 킬킬거리고 깨어나면 사람처럼 우스운 것들은 절대로 안 믿어야지! 겨울밤이 어두워져 사람이 사람을 닮아가는 줄도 모르고


번호표가 길어지는 병원 앞에서


회복해서 또 사는 게 무섭지도 않니? 알약은 어디서 녹고 있을까 눈을 떴는데도 난 아직 깨어날 줄 모르고 시체 냄새 나는 향수나 칙칙 뿌리고 놀러 가야지 아무나하고 사랑할 땐 흥청망청 뒤로 해야지 표정이 안 보이는 자세가 훨씬 아프고 재미있으니까 나보다 더 망가진 애들만 보면 심심하게 뒤가 간지러워


너덜너덜한 웃음이나 뒤집어쓰고

다 같이 모여서 수다나 떨래?







물 속에서


나는 쭉쭉 뻗어나갈 거야 해파리처럼 서너 토막 난 식물처럼 

목소리가 길게 자라고 있어


혀가 잘려나간 불장난을 앨범 속으서 끄집어낸다 종교를 버리고 밑바닥으로 도망치는 건 어때?


때수건으로 머릿속을 밀다 찜질방 문을 열면

문어처럼 불어터진 여자가 다리 건너 한 명씩 사내들을 끌어 안고 허벅지 살을 씹어댈지도 모르지

그 여자 발바닥에 침이라도 뱉으며

여편네야 밥은 언제 줄 거야? 냉장고 밑구멍 속으서 집어 삼키는 뻣뻣한 치모

계집애야 그건 네 아빠나 좋아했던 청춘이지 미역줄기가 아니란다 목이라도 매달고 싶은 거니?


나는 가위질을 잘하고

사람을 하고 싶지만


매일 밤 직장에서 튀어나와 젖꼭지를 빨아대는 뱀을

엄마에게 빼앗기고 말았지


(흉터투성이 우연이 깡패 같은 우연이 내 거웃에게 떼인 돈이나 받으러 온다면 덜 지루하려나?)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 팬티를 벗어던지고 목욕탕 문을 나서는데 브래지어도 깜박하고 안 했는데

소용돌이 물살처럼

하필 네 자지가 털털거리는 오토바이가

불가마 장수탕 앞에서 뒤집어지는 신기루란


오 분 뒤로 뒷걸음치는 입술

오 분 전에 발생한 사고들은 나를 물귀신으로 만들고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의 일도 오 분 앞에서 꼴까닥 자궁을 찝지고 말았잖아?(내 인생 흔적도 없이 달아나버린 보통명사들이 어때? 용수철을 심장에 박고 완급조절에 실패한 쾌감이지? 죽음보다 싱싱한 치욕이지? 몸밖으로 튕겨나간 너를 붙잡을 곳이 아무데도 없지? 억울해진 혀로 똥구멍을 긋고 달아나고 싶은데)


목소리는 가랑이를 벌린 채

우리에게 일용할 음부를 오르락내리락


(이제 그만 물속에서 슬그머니 놓친 척 해줘)


양칫물 위에서 발버둥치는

옛 애인의 자지는 잘라먹었어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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