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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결혼식 / 이정하

한국에 온지 4년째 되는 쁘띠와
다카의 신부 리나의
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
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꺼비마냥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

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
한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
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
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
기역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하는데
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
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
마을 까지*의 설교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
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
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
거, 요새는 전화로도 섹스를 한다는데, 이 참에
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
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

비비기 전 갓 엎은 공깃밥처럼 리나의 꿈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이슬람 종교 지도자 직위 호칭.







엑스트라 

- 만적의 난

나무깽이와 죽창을 틀어쥔 채
흡반같은 카메라 앞에서
만적의 난을 재현하는 새벽

자정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태풍에 밭뙈기를 잃은 만적
불황에 일자리를 잃은 만적
경마에 처자식을 잃은 만적이가
씨벌헐 씨벌헐 무릎을 찧어가며
31시간 혁명을 일삼는 중이다.

왜 없는 놈들은 역사를 통틀어
엑스트라인가
쉴 새 없이 죽창을 휘두르며 나는
노비 혁명을 주도한 만적이가
최충헌의 家奴였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차별이 차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혁명이 혁명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지만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봉수대처럼 집채는 불 타 오르고
보조 출연자들은 똥돼지처럼 소리치는
반장의 악바리에 똥줄기가 빠지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우리들 만적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깨동무로 싸맨 채
봉기의 창끝으로 冬天을 가른다.







엑스트라2 

- 서대문 형무소에서

스탠바이, 감독의 지시에 400번대 죄수복을 입고 우리는 감방 안으로 들어선다. 버짐나무껍질처럼 하얗게 부스러진 형무소 내벽 페인트 찌끼들, 비스킷 자르듯 뚝뚝 쪼개며 우리들은 서로 손병희다, 이정재다, 흰소리를 한다. 이윽고 주인공이 시구문으로 끌려가면 우리들은 감방 문을 두들기며 환호작약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환호하는 만큼의 아우성과 수당일 뿐.

캇, 스텝들이 옥사 밖으로 사라진다. 조명이 꺼지면 폐쇄된 우물처럼 젖어드는 고요.

문득 환호소리가 비명이 되어 나를 옥죈다. 마루에 주저앉자 비로소 손톱자국과 수십 년 묵은 먼지가 제 뼈를 드러낸다. 차마 알아볼 수조차 없게 흘려 쓴 글귀들 生生히 남아 압정처럼 고무신 신은 내 발을 찌른다. 용수를 쓴 채 이 곳을 지났을 사내들, 그들 역시 엑스트라에 불과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머리를 짓찧으며 죽어갔을까. 일당 삼만 칠천 원을 허리춤에 끼워 넣으며 나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형무소의 뼛가루를 공원에 뿌린다.

행인 1, 2 무심히 홍예문을 지나면 용수를 벗어던진 패랭이꽃 하나,
祝文처럼 묵묵히 조명을 켠다.







두루마리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두루마리를 뜯는다. 잠시 전에 내 몸이었던 것이 홀연히 떨어져 나와 두엄더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 한 점 한 점 두루마리의 살점을 뜯어 내 남은 몸을 닦는 동안 어느새 나와 두루마리는 한 몸이 되어 조심스레 풀어지기 시작한다. 가슴 속 한 잎 물방울 속 대롱 타고 쪼르르 내려와 기스락에 매달린다. 톡톡 새살 터지는 소리, 宇宙는 어디서부터 비워지는 것일까. 문틈 이마 위로 청솔모 한 마리 앞 이로 개암을 탁 터뜨리자 내 속이 환하게 열린다. 다 풀어낸 두루마리의 종이깍지처럼 몸속의 텅 빈 주름이 훤하다.

벽에서 배내똥 냄새가 하얗게 묻어난다.







탄피를 캐며

이 마을 사람들이 몰래 약초 캐러 사격장에 다녀간 사이, 사격 연습을 마친 우리들은 彈皮를 캐러 산에 들어갔습니다.
사람 손 밟은 풀들의 무릎이 흩뿌려져 있던 자리,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인형의 머리를 뚫고 온 탄피의 뜨거운 살갗 뿐.

우리는 서로에게 묻힌 파편을 캐내며 보았습니다.
사격장 山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
밤에는 먹지로 자신을 칠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문득 서로의 검은 얼굴을 들어 맞은편에서 탄피를 캐고 있는 이들을 훔쳐보았습니다. 저들의 머리와 우리 머리와의 거리,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공간을 지뢰를 품은 풀들과 크레모아 앞에 선 산짐승들이 메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콜록이며 애써 기침을 나누었습니다. 스적스적 바람에 실리어 떠가는 풀빛… 우리는 무엇의 껍데기일까, 우리가 이제까지 뚫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빈 탄창에 탄피를 채워 넣으며 우리는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불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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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들 / 이성진

 

밤은 우주의 성격이다

 

누나들이 손을 잡고 걸어온다

학교 앞 문방구 창문 불이 꺼지고

백색 줄무늬 검은 나무들의 손을 잡고

바람 부는 방향으로 기린이 되어 걸어가면

남서풍이 북동향에서 불어온다

이것이 언덕의 학교로 들어가는 비밀번호

 

바람 부는 언덕을 따라

학교 운동장에서 폭죽놀이 하는 누나들

폭죽을 다 써버리면 누나들은 긴 머리카락을 잘라 창()을 만들고

운동장을 휘감은 검은 공중을 향해 던져버리면

하늘이 하얗게 찢어지고

누나들의 수줍은 보조개도 하얗게 탈색된다

운동장은 흑과 백만 남으면

누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는 법을

새들에게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곳은 언덕의 학교 아래

이제 문방구도 사라지고 아무도 걷지 않는 골목

누나들은 검은색 가터벨트를 입고

가슴을 내놓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동그랗게 말아 쥔 왼손의 동공 안에서 옛 애인이

웃고 울고 흑과 백이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이 광경을 관음하는 문신사(文身士)

귀까지 찢어진 입을 씰룩거리며

전자회로를 바늘로 촘촘히 쪼고 신음소리가 완성되면

누나들의 늑골 속에 삽입된다 그러면

방 안의 절벽에서 밀봉됐던 우는 새들이 폐수로 흘러나오고

누나들의 눈빛은 반짝이지 않는다

혓바닥 속에 하나씩 박힌 피어싱 위로 있는 힘껏

목구멍을 넘어오는 마지막 계절풍을 불어보지만

난쟁이들은 기다렸다가 망치로 모조리 박살낸다

 

미처 흑 혹은 백이 되지 못하고

회색으로 살아버린 누나 K가 주변을 살핀다

라디오를 틀고 염산 같은 햇볕을 멀리서 쳐다보며

응달에 몸을 말리다가 누나의 머리채는

곧 근육 소년단에게 부여잡히고

문신사와 난쟁이들이 킥킥대며 구경한다

라디오와 영화 음악과 디제이와 스피커가

사각형의 다른 꼭짓점에 서서 보고만 있다

세상은 흑과 백인 줄 알았다며 누나 K는 울어보지만

절벽 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바위에 묶여 아래로 던져진다

 

누나 K가 즐겨 듣던 라디오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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