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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이은정
그해, 컬러텔레비젼 시험방송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우리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컬러로 봄이 오고
있었지만 교실은 흑백에서 흑백의 교과를 배우는 날들이었다
느닫없이 빨간 폭풍이 중계되었다. 방송국이 불타고 흑백의
피가, 붉게 흘러나오던 친구들이 다시 영정 속으로 들어갔다
불행은 흑백이어도 좋았을 걸, 컬러로 만나는 이환한 죽음들
이라니, 불길 속에서 맞서던 검은 연기와 오열하는 흰 연기들,
어떤 진실도 송출되지 않던 컬러텔레비젼 시험 방송기간, 해
가 바뀌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온 나라가 총천연색 봄을 정식
으로 맞이했다
사라진 흑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드문드문 빈 자리의 교
실에서 언제나처럼 단색으로 앉아 있던 우리들, 목련이 지고
라일락이 피고 사라진 친구들이 빨갛게 불리어지던 다음 해인
가 아니면 그 다음 해였던가 교복 자율화가 되었지만 몇몇 친
구들은 여전히 카루란과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컬러를 거부
한 이들은 사각의 틀에 갇힌 지도 수십여 년, 눈물조차 훔칠
수 없는 소매 끝엔 사슬에 묶인 무색의 시간들이 줄줄이 감겨
있을 것이다
흑백의 세월을 천연히 갈아입고도 그 봄은 무슨 자백을 강
요한 것인지, 심실의 문은 혈기 짙은 역류를 막기 위해 끊임없
이 적색 신호를 보내는 것이려니, 그때 알았다 우리 몸속엔
컬러의 피가 속속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은정
강원도 정선 출생. 제6회 독도문예대전 특별상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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