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난다 / 박시하
비둘기 날개 한 쌍이 바닥에 깔려 있어
몸은 잃고 상징만 남았네
썩지도 않고 누가 훔쳐가지도 않을 평화가
바닥을 치고 있어
하늘을 날던 몸짓은 타이어에 으깨져서 더욱 가벼워
뒷골목 찌꺼기 먼지 속에서 자라난 깃털
바닥에 자꾸 새겨지고 있어
스릴이 없다면 한순간도 살 수 없지
날아 본 적 없는 아스팔트 위로
날개의 기억이 촘촘히 스캔되고 있어
구구구, 울면서
저렇게 너덜너덜한 비상의 무늬가
혹시 나에게도 있을까?
추락하던 내 날갯죽지가 문득 간지러워
구구구,
내일이 돋아나고 있는 걸까?
날개들은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어서
비상할 수도 있는 거, 맞지?
바닥을 치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거잖아
근데, 저 선명한 날갯짓은
얼마나 더 오래 추락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낮은 곳으로 깔리는 땅거미 구름
구름을 끌고 내려온 그림자
그림자 한구석에 박혔던 돌멩이들과 함께
구구구,
바닥이 떠오르고 있어
백만 송이 장미에 붙인 비밀
엄마, 당신에게 전화를 걸면
백만 송이 장미는 왜 그렇게 서럽게 피어날까요?
엄마, 버스가 나를 그 골목에 내려놓았어요
늘 저녁이어서 깊고 어두웠지요
닫힌 문 앞에 서서 초경하는 여자아이처럼 내가 울고 있을 때
하수구로 쓸려가는 핏물 번진 눈동자들
우르르 배꼽으로 몰려와요
듣고 있나요 엄마,
아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장미가 정말 필까요?
당신을 닮은 나의 자궁에도 백만 송이 그 장미 피어날까요?
당신은 오랫동안 내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쳤지요
긴 저녁을 거슬러 푸르러진 장미의 나날,
내가 삼켰던 백만 개의 꽃잎이
백만 개의 우물 위로 떠오르고 있어요
엄마, 비밀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왜 모든 슬픔은 배꼽에 고일까요?
내 딸이 탄 버스가 그 깊은 골목에 당도하려 할 때
당신의 울음 속에 물결치는
그 꽃잎을 타고
우리 이제 그립고 아름다운 나라로 갈 수 있나요?
―――
* 서가에 꽂혀 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이 부분에 엄마는 밑줄을 쳐 두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W.C 마돈나
우리,
까페 마돈나에서 만날까요?
한구석에 파란 남자와 빨간 여자가 나란히 서 있는
W.C 앞에서
남녀공용으로 남기고 간 생의 결정들
단단하던 몸의 경계를 허물 거예요
냄새들은 언제나 살아있어요
거울 속 시간의 주름살을 들추면
몰래 키우던 마돈나 하나
입가에 애교점을 찍고
웨이브 웨이브 걸어 나오지요
물 내리는 소리는 우아하기가 힘들지만
자, 춤춰요
금발의 마돈나여
변기는 금이 간 감탄을 내뱉고
가물었던 수도꼭지가 부르르 떨어요
더러운 것들이 더럽지 않은 것들을 비웃어요
깨진 기억이 모자이크로 깔린 바닥에서
새로운 사랑 뒤틀리며 피어올라요
까페 마돈나 W.C에 가면
생의 배설이 그린 벽화 위에다
괜히 한 마디 더 남겨놓고 싶어요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달콤하고도 역겨운 생에 대해
삶은 들어갈 땐 무겁고 나올 땐 가벼워져요
지퍼를 잘 올렸는지 확인하고 나서
생의 웨이브를 두고 나오지요
처녀처럼, 수줍게
통(痛)하다
가끔 마음은
깊이를 모르게 출렁인다
오래 된 연잎 몇 장 덮인
검은 연못
오작교를 건너온 푸른 별빛이
수면 위에 닿으면
홍련 한 송이
숨 토하며
제 속의 붉음 열어 보인다
끼익,
문을 연다
서로를 향해 조용히 귀 기울이는
문 밖과 문 안
별이 된 꽃잎과 꽃이 된 별빛의 내통
만남이나 열림은 그렇다
다시 닫지는 않고
환하게 웃으며 부딪히는 것이다
쪽지
겨우내 불면이던 저 산세베리아에게
푸른 밤은 차라리 악몽일 뿐
물 주는 일조차 나는 까맣게 잊고
봄, 기다리다 지치고
봄이 오면, 흐리거나 비 오거나 바람 불어 지치고
봄이 없다면, 그 또한 지치니
미안, 당신에게 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불면의 밤에 쓴 끝없는 편지에 덧붙인 끝없는 쪽지 위에
알약 반 개만한 달이 뜬다
어제의 악몽이 오늘의 엔딩크레딧을 밀어 올릴 때
리보트릴이 신경줄에 구름을 푼다
자낙스는 고통스런 단잠을
꾸역꾸역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
미안, 당신에게 이런 편지 쓰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이런 마음 읽어줄 이도 없으니
기다리다 지쳐 일찍 얼굴 내민 초라한 눈망울
저 산세베리아에게 내어주고
알약 반 개 속에 갇혀 밤새 부비적거린다
분분하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에 실어
마땅히 나 당신에게 드릴 것,
끝없는 이 쪽지들뿐
―――
* 리보트릴, 자낙스 : 신경안정제, 항불안제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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