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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생명 / 이재일


오늘 하루도 바지랑대끝에 질긴 목숨 걸었다

무리하게 당겨진 련악기의 줄처럼 긴장한 사위가

핑핑 쇠울음 운다

산다는 게 그런 게야

너무 당겨지면 줄도 푸른 날이 서서 심장 베이고

느슨하면 희미하게 녹이 슬어버리지


누울 자리 찾아 가파른 산길 오르던 아버지 헉헉 폐기종 고단한 사람 등굽은 세월을 떼까치 물고 간다 뒤를 따르던 눈에 산색이 짓물러 내려 앉았다 길이 아니었다 가시덤불, 칡넝쿨, 남은 세월 질긴 고리 시퍼런 낫날에 피 푸른 피 뚝뚝 흘리며 널부러진다 만들어진 길을 가다가 마지막으로 작은 길 하나 내는 것이다 부러진 길 이어 붙이고 패인 길 메우며 무슨 후레자식 부귀 영화 꿈꾸며 아버지는 저리도 가파른 산을 마냥 눕히려 하는가


바지랑대끝 긴장한 목숨이 핑핑 현울림소리 낸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소리

떠날 자와 남아 있을 자를 구분하는 저 울부짖음에

산이 돌아눕는 사이 쨍하니 하늘에 금이 간다

위태한 목숨이 움찔 놀라 허공을 움켜 잡는다







[은상] 모슬포 기행 / 윤혁


1

5월 모슬포는 밀감꽃 머리 꽂은 열세 살 계집

눈빛 한 번에도

가슴을 다 여는 부끄러움바닥까지 누가 시켰는지 쪽빛 화장

언제부터였을까 모슬포의 첫사랑은

감귤향기 피워올려 기웃거린 한라산

제 가슴에 비치면

지난 밤

선녀가 내려 온 백록담을 살포시 껴안고

휠휠 벗어던진 비단잠옷 안개 때문에

아니다

5월에 펼쳐 찬미하는 유채꽃에 수정반지 끼워주면

안달이 난 모슬포는 하얀 물보라 일으켜

속치마 뒤집는다

변덕쟁이 제주바람도 모슬포 짝사랑에 깊이를 몰라

덩달아 포구를 갈아엎는다


은갈치 기행 때문에

마지막 일기예보 '파고주의' 설친 밤잠


모슬포에서 늦은 아침상의 칙사 대접은

하얀 면사포 쓰고

엉덩이 펑퍼짐한

다소곳 쟁반에 앉은 은갈치 뿐이라

순하디 순한 그녀 옷고름을 풀고 살맛을 보았을 때

밤새껏 풍랑과 싸운 어부의 일기 한 토막

황송스럽다

안개비는 점차 무겁게 오다가

제주 삼다와 부딪혀 외항 쪽으로 이동하더니

포구에 막대기 두 개 하나는 비스듬히 걸친다

저녁 무렵을 알 리 없는 나는

언제쯤 안개비가 한라산으로 올라갈까요

안달에

주인장의 느긋한 미소


2

통통배의 뱃길은 따로 없었다

이제부터 광대놀음 줄타기가 시작되고

파도의 골 따라 미로같이 헤맨 지 

육지는 망망대해가 삼켜 버렸는지 어둑한 자녁

어부의 넋을 찾아 헤매던 바다새도

깃을 접으려 우도로 가며

왔던 길 잊지 않으려는 박음질소리

통통거리는 발동기소리만 풍랑 위에 한 마리 새가 된다

이어도 어디쯤 생과부 애달픈 청승소리에

출항할 때 아낙이 실어준 가슴에 멍울

이끼 대신 멍울을 던질 때마다 바다가 요동쳤다

무표정한 어부의 주름살골마다 바다의 깊이가 새겨져 있어

마음 한 구석마다 바다와 닮지 않은 곳 있으랴만

은갈치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선할까요 계면쩍은 질문에

이빨에 끼인 질긴 소리로 은갈치의 혼백만 건질 때가 많지요


방랑자처럼 떠돌다 멈춘 곳

심청을 달라고 떼를 쓰는 풍랑

지난 날 대신 뛰어든 젊은 어부의 아낙만 서러운

집열등 창백한 바다 가장자리

마술하듯 집열등 선체를 감추면

삼각 파도에 숨어 붉은 눈알로 은비를 다듬다

날씬한 몸매

어부의 삶보다 더 날카로운 낚시에 걸리고

어부는 액자에 들어갈 사진이 좋아야 한다며

파도를 물고 있는 허연 은갈치를 번쩍 들어올린다

집열등 마지막 혼백이 바다에 빠지고

해신이 있기는 한 지

집집마다 매달아 논 오색 깃발 그 흔들림의 수평선에 붙박이가 된 아낙

수평선 먼동 속에 아스라한 차전이 온다

은비늘 만선

모슬포는 파시가 될 때까지 물새들 축하 비행

모슬포는 외도다

늦은 아침을 먹으면 은비늘 접시에서 내내 풍랑이 이는 것 보인다


* 갈치 : 비속어로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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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순암順菴의 빛 / 조선의

새들은 내려앉는 자세로 텃골을 선회했다
고여 있는 시간이 안개로 일어서다가도
돌아서면 사라지는 방향으로 꿈틀거렸다
침묵의 겉옷에 가려진 상처처럼
쉽게 배설할 수 없는 감정의 조각들
한 뿌리 제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장마다
허기진 물음 같은 오래된 정설을 찾아
각기 다르게 예속된 수 세기 연대를 더듬었다
명분을 가진 꽃들의 과장된 수식어만큼
첨예한 빛깔로 대신할 수 없는 주장은
전지의 양날에 놓인 운명과 같았다
의례에 어긋나면 시비가 따른다*
야사는 무른 혀처럼 복선이 깔린 낭떠러지
정사를 펼쳐내는 힘은 가감 없는 기록에 있었다
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대의大儀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순암의 일필휘지
순례의 첫발을 떼듯 어둠을 무릅쓴 빛이
새들의 날개보다 가볍게 떠올랐다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금상] 근본을 찾아가는 길 / 박성훈

이택재의 향기, 숨결 보란 듯 그대로일 테니
초서롱 저서롱 넓고 깊은 가르침 미쁘기 가없고
내어 준 밑동 잘리는 고통도 순순히 참아내면
몸뚱어리 차마 어쩌지 못해 새순은 그렇게 돋아날 테지

까치발로 들어 올린 위태한 세상 홀로 짊어진 채
존재하지 않던 길 정답 찾아 헤매던 날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곧게 걸었던 그 길 위엔
눈물 한 방울 없는 조문객의 서러운 곡소리

설핏 사람을 속여도 세상까지 속일 수 없듯
선뜻 선을 양보해도 인까지 양보할 순 없는 법
갈래갈래 알 수 없는 길, 배움의 길 걷다 보면
나를 이겨 도를 행함에 찾기지 않던 길 찾아낼 테지

속이지 못한 양심을 속인 우매함을 경계하나
묻고 또 물어봐도 누구 하나 올곧은 대답 없으매
본 것 없고 근본 없는 속물 될까 두려워
애오라지 글 밭 매고 일구어도 겉멋 드니
이녁은 어느 세월 오묘한 이치 깨칠 날 있을까.






[은상] 수택(手澤)*의 기록 / 이미영

희미한 과거는
종이에 묻은 사람의 지문을 닮았다
동심원 한 쪽이 무너졌기에
옛사람들의 행적을 찾는 일은
그래서 더 궁글고 아득하다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간을
일일이 백지에 옮겨 적는 선유(先儒)
중심에서 멀어지는 생각들이
조급해진 붓놀림을 재촉하고
종횡무진, 뻗어가는 이야기를 쫓느라
그의 낮과 밤은 점점 짧아진다
무뎌진 직관과 유순한 이성이
되살린 숨소리를 잡아두느라
붓의 깃이 닳고 벼루에 구멍이 났다
태도의 흐름을 안쪽으로 모으고
틀림과 다름의 갈래를 짚어내느라
대하의 방점을 한참동안 미뤄둔 지 오래
사료를 모으고 실증을 더할수록
근본 없는 속설은 갈피 밖으로 밀려나고
책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은 지문이 생겼다
길고 긴 시간의 책장 속을
수없이 뒤채었을 순암*의 손자국들
20권 20책, 동사강목으로
역사의 오롯한 인장이 되었다

* 수택(手澤): 손이 자주 닿았던 책이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
* 순암(順菴): 안정복의 호










[심사평] 

제2회 안정복 문학상은 총 845편이 공모를 하였다. 1차 내부심사에서 300편을 골랐고, 2차 외부 심사에서 100편을 골랐다. 그리고 최종 심사하에 대상 1명. 금상 1명. 은상 1명. 동상 5명 장려상 5명. 이렇게 13편을 골랐다.
심사 기준은
첫째.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은유와 상징을 통한 보편적인 진리와 가치를 담고 있어. 문학 수용자인 독자들이 공감하는 시여야 한다. 이러한 기존을 바탕으로 심사를 하였고. 함축적인 시어들의 유기적인 상호작용 없이 이미지들만 산만하게 조합한 시들은 배제하였다. 그리고 순암 선생의 업적을 잘 이해하고 소화하여 시로 형상화한 작품에는 가점을 주었다. 13편의 수상작은 중에 대상. 금상. 은상의 결정에는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이미영씨는 세 작품 중 <용정>이 두 작품과 차이가나 은상으로 결정 했으며. 박성훈씨는 세 작품 중 <거미집에 걸린 기억>이 자신의 언어 자체만을 직시하고 있는 느낌을 주어 금상으로 결정했다. 대상으로 결정한 조선의씨는 내재된 언어 감각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 하였다. 앞으로도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화 하는 과정에서 모호한 자기 논리가 감지되지 않도록 경계하면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동력을 꾸준히 가꾸어 나가기를 기대하며. 수상하신 분들 모두 진심어린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강정화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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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고인귀실행 / 정설연 


이택재 현판과 함께

텃골 마을 실개천 물살을 짚던 시선에

말간 소리 읊조림으로 올라오니

티끌 묻은 마음 먹물을 풀어낸다

초서롱과 저서롱의 묵향이

처마 아래 깃들어 있다가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을 받아

문에 빗살을 치며 부지런히 글귀를 찾는다

드림줄을 잡고 있던 빛의 붓질이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한결같은 자태로 서 있는 느티나무,

바람이 와서 일렁임으로 태평무를 추어도

발 디디는 품새 안정적이다

밑동의 껍질 안쪽으로 끌어들인

곧은 시간의 겹들이 두텁고 장엄하다

들풀에 앉아 잠을 자는 나비 깨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후손의 손에 묻어 있는 흙이

헤아림의 구근을 밀어 올린다







[금상] 순암 사론을 기리다 / 송귀영


강목법 세련되게 정통의 부각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동사강목 필생역작

남인의 학맥 계승한 통치덕목 이루었다


당대의 국제질서 조공은 사대교린

전별의 득실 살려 유교이념 매듭 풀고

대록지 임관정요로 성호학파 계승했다


일정한 사문 없이 텃 골에 소옥지어

여택제 강학산실 향지 법을 저술하여

추봉된 광성군 광경 경학 관이 환생한다






 

[은상] 안정복 / 박덕은 


상수리나무 위에

목관 하나 놓여 있다

'

시커멓게 뚫린 등가죽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온기들이 흘러나오는

매미의 빈 껍질


말랑말랑한 살이었던 슬픔이 먹먹해지는 시간은

이제 누구의 몫인지


날개를 얻은 바람의 몸이

초조한 듯 더디게

한때 흙이었던 무게를 구석구석 매만지고 있다


관 밖의 넘치던 말들이

몹시 그립고 낯익은 것에 사로잡혀

노을이 따갑다


적멸로 가는 저 뜨거운 움직임은

젖은 눈의 저녁을 따라

목 끌어 안고 떨어지지 않는 소리 듣는다


허공에 새겨야 할 발자국은 

이파리들의 울음소리에 목메어

자석처럼 붙어 있다


환상인 양 숨쉬던 거뭇거뭇한 손등에

묽어진 어둠이 눈물방울처럼 닿자

추운 하늘이 등을 떠민다

그만 가자고







[동상] 등신불 / 이기은


몸이 편안하면 수행이 더디기에

지하철 역사 야멸찬 콘크리트 바닥에

마음을 뉜다

술잔 마주치는 소리에 공명된 목탁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전하는 울림

세상의 번뇌를 덮으려

오직 한 길 밝혀줋 취중수행

육중한 철문도 벽도 없이

낡은 박스 하나로 구분지은 구도의 벽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 한 닢에도

오체투지로 올리는 감사

죽비보다 날카로운 삭풍의 삿대질

여름옷 한 벌로 곱다시 견디는 동안거

낮은 곳에 엎딘 저 거룩한 이름

누가, 노숙자라 부르는가

화엄을 실천하려 저리 애쓰는 마음

갈고닦아 말간 웃음이 되기까지

고단한 육신에 덧 쌍하가는 고행

천 번을 지나쳐도

그들이 곧 등신불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자조 섞인 눈 빛 모아

가사 장삼을 대신하는가 가난한 부처







[동상] 갈수기 / 임일환


하늘로 배를 두른 두꺼비 한 마리

단에 올린 제물처럼 주검이 장엄하다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는 듯

봄이 다 가도록 비는 내리지 않고

웅덩이마다 버짐꽃이 피어날 때

젤라틴 막 안의 유생들은 끝내

어미를 닮지 못한 미라가 되었다


날마다 열꽃만 피어올라

꽃잎을 내밀 수 없는 창포 늪에

습기 없는 슬픔은 먼지 되어 날리고

갈망의 이유를 잃어버린 아비는

푸석이는 몸 뒤집어 하늘을 외면했다


바람 없이도 소문은 날아가

개미 떼의 추모행렬 길게 이어지고

등걸감 깬 농부의 핏발 선 눈에서

놀 빛 빗물이 흘러내린다




 



[동상] 텃골 느티나무 / 이광재


누군가 말했다

텃골길 49번지 느티나무는 까치발로 서 있다고


무성한 뿌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물을 내어 놓는다


새벽이면 언덕 아래

마을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영장산 아래 한 자리에 서서

퇴칸을 열어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으로 굳게 선

연접한 두 높이가

천년을 서로 윤택하게 지나온

텃골 느티나무 집


새봄이 와도 오랑캐꽃만 지친인 시절

가지째 꺾이고 엎어져

민들레, 족도리풀, 쇠뜨기, 광대나물

작은 생들이 아픈 소리를 낼 때마다

느티나무는 상처를 보듬고

물을 내어 주었다


세상이 온통 그릇된 향로를 답습하고

삐뚤어지게 바람이 불어올 때도

개연히 바로 잡아

이를 깎고 다듬어서

더 높고 더 넓은

하늘을 만들었다


아직도 새벽이면 길을 열어

마을로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느티나무 위로 햇살이 눕고

소복하게 함박눈이 내리고

새들의 종소리가 울린다

그 옛날 바다라고 불렸을

텃골 느티나무는 늘 만조다



 





[동상] 섬 / 윤여송


관념이 퇴적층으로 굳어진 섬에는

푸석불 같은 희망으로 탈출을 꿈꾸는

유배된 언어가 살고 있다


푸른 물비늘을 출렁이며

대양을 활보하던 파도가

고립된 섬에 몸을 부딪혀

하얀 포말로 생의 찬가를 부를 때면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을

비틀걸음으로 걷던 언어는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나 희망을 망상이 되어

무수한 시간을 고립 속에 살아온 섬은

언어를 위한 길을 내주지 않는다

닭 모가지만도 못한 울대를 열지 않는다


바삭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헤 벌린

어두운 동굴 속 핏기 없는 미라처럼

거져 냉랭한 숨소리만 바람으로 헉헉거릴 뿐


파도가 걱정으로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는

침몰한 희망만 부스럼 같은 상처로 남겨져

탈출을 금지당한 언어는 애잔하게 시들어가고

고립된 섬은 점점 더 고립에 빠져들고


기어이 고립을 자유라 항변하며

마른 땅 위를 부유하는 수많은 섬들 속에서

너와 같아 나도 하나의 섬이 되었다







[동상] 석등 / 손숙영


석등의 신열이 밖으로 붉게 번지고

연화문 돌이끼는 묵언을 물고 얼룩이 졌다

한 자락 바람의 보시로

젖몸살 앓았을 꽃망울,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한평생 그 향기 팔지 않았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꽃 입술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으로

어쩌자고 홍매 그렇게 피고.

법당 앞 화강석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지스님 잰 걸음보다 더 재게

해가 덜컥 넘어갔다





[장려상] 이택재 / 안춘예

[장려상] 낚시꾼 / 권덕진

[장려상] 텃골에 뿌리내리다 / 양보영

[장려상] 월식 / 김삼순

[장려상] 어깨에 대하여 / 이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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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내 무릎 좀 고쳐다오 / 심승혁

 

 

나의 어린 시절을 업었던 무릎이 휘었다

 

숨의 무거움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사는 것을 향해 부지런히 꿇었을 그,

 

이마의 주름이 물결무늬로 흘러내려도

하얀 웃음으로 속여왔던 그,

 

무릎이 휘었다

 

가슴에 묻고 지낸 시간을

더 이상은 이겨낼 수 없는 그 한마디가

겨우 무릎뿐일까 싶은 말이 뒤뚱댄다

 

낮은 울음의 허기진 눈물 한 방울

오열의 열꽃으로 팽팽히 그 무릎에 피워낸다면

훌쩍 커지는 당신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말이 뛴다

 

칠십이라는 무게에 눌려 색 바랜 머리를 이고

하얀 침대 위에 얌전히 다리를 모으고 앉아

무엇이 그리도 미안한지

대체 뭐가 그리 죄라고

작고 동그란 눈물이 범람해 나를 무너뜨린 그 말,

 

"내 무릎 좀 고쳐다오"

 

 

 

 

 

수평을 찾느라 흠뻑 젖는 그런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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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노루발 / 이춘희

- 어머니 재봉틀 앞에서

 

 

노루가 뛰어다니던 방에서 자랐다

 

엄마는 늘 뒷모습으로 기억되는데, 들들들 노루발 소리가 자연 숙제의 정답 칸에 자주 뛰어다녔다 방안은 음지였지만 노루발 근처는 언제나 환했다 온갖 천이 노루발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아침이면 집 부근에는 흰 눈을 박으며 간 노루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마도 봄은 그 자국이 끝나는 곳에 있을 것 같았다 옷 모서리가 새로운 방향을 틀 때마다 오솔길과 미끄러운 실개천을 건널 때마다 봄날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사향노루의 꽁무늬향기가 났다 눈 걸친 바람꽃이 햇살에 미행당하는 언덕배기에서 환한 구름을 날래게 내닫다 힐끔힐끔 뒤돌아본다는 노루

 

엄마는 어깨를 숙이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뿔을 양보한 곳에 수컷을 두고 빠른 질주력으로 끝없이 뛰는 노루발을 쫓느라 어떤 날은 계절을 깊이 역류하다가 낯선 모퉁이에서 곤두박질을 쳤다 동굴 같은 구덩이 뚫리고 멍든 살 속에 돌멩이가 박혔다

 

온순해서 풀만 씹으며 느슨한 노루발 같던 엄마는 일생 노루를 잡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무작정 따라 나디고 싶었던 걸까 무심히 풀어 놓은 허름한 나날들을 또 달리 화사한 무늬로 지어놓곤 했지만 선명한 실밥자국 욱신거리는 앞섶들을 떠나 지금은 먼 산 속에 은둔 중인, 노루가 지나간 아침이면 눈발은 한 벌 두툼한 외투가 된다

 

지난 계절을 기운 헝클어진 날씨가

푹신한 옷으로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효 사상 함양과 세계화를 위해 열리는 10회 백교문학상대상에 양승복(65·충북 청주)씨의 수필 남포등이 선정됐다.

 

강릉문화재단(이사장 김한근)과 백교효문화선양회(이사장 권혁승)가 공동주최한 이번 대회 우수상은 심승혁(49·강릉)씨의 시 내 무릎 좀 고쳐다오’,황진숙(44·충남 예산)의 수필 풀무’, 이춘희(68·대전)씨의 노루발이 각각 뽑혔다.

 

대상에 선정된 양 씨의 수필 남포등은 초등학교 교장직을 26년간 지냈고 평생 일기를 써왔던 치매환자 아버지를 돌본 딸의 애틋한 마음이 그려진 작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회한, 그리움을 차분한 필치로 그려낸 점을 호평을 받았다. 대회 측은 맑게 닦은 등피를 씌운 남포등처럼 세상을 밝고 곧게 사신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는 딸의 시선에서 효가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오는 10122018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성화 모자(母子) 봉송을 했던 강릉 경포 핸다리마을의 사모정공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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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암묵적 약속 / 유태양

[우수상] 가방 / 김소나

[장려상] 어제 / 박성애

[장려상] 일기장 / 이희진

[장려상] 가방 사는 낙 / 정서윤

[특별상]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원고제출 / 박미나

[입선] 가방 / 권소영

[입선] 어제 / 류정하

[입선] 어제 / 송영숙

[입선] 가방 / 장은미

[입선] 후카 / 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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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거둬 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쓸어내리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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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기념사업회(이사장 윤석정)가 주관하고 부안군이 후원하는 6회 석정시문학상의 수상자로 신달자 시인이 선정됐다. ‘석정촛불시문학상에는 남원 출신인 이춘호 씨의 시 도마가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운룡 석정시문학상 심사위원장과 박찬선·구재기·최동호·김종섭 시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지난 9일 토의를 거쳐 이 같은 결과를 내놨다고 13일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31일 오후 3시 부안 석정문학관에서 개최된다.

 

석정시문학상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석정 시인의 인품과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4년 제정됐다. 문학의 성과가 높은 국내 시인 중 1명을 선정해 시상하고 상금 3000만원과 상패를 수여한다.

 

신석정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군수 석정문학관장은 최종심에 앞서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석정시문학상후보자 10명을 추천, 본심에 상정했다. 예심에서 올라온 후보자 10명 중 서류 심사를 통해 7명으로 압축한 뒤, 내부 투표를 진행한 결과 신달자 시인이 만장일치 의견을 얻어 수상자가 됐다.

 

심사위원단은 석정시문학상 수상자인 신달자 시인에 대해 초기 시집 <봉헌문자>, <고향의 물>, <모순의 방>, <아가> 등을 통해 아픔의 침묵 속에 헌신하는 진실을 제시하면서 한결 높은 차원으로 인간 생활의 본질과 숙명적 상실감을 노래했다면서 특히 최근 시집 <종이>, <북촌>을 보면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달자 시인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했음과 동시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확고하게 위치를 다졌다고 강조했다.

 

신달자 시인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72<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 <봉헌문자>, <열애>, <종이> 11권을 비롯해 장편소설과 수필집을 다수 집필했다. 공초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춘호 시인은 남원 출신이며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을 받고 시집 <그대 곁에 먼지로 남고 싶습니다>와 산문집 <내일의 태양은 오늘이 빚는다>를 썼다. 현재 한국교통안전공단 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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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정치 / 이영식

 


불, 질러놓고 보는 거야
가지마다 한 소쿠리씩 꽃불 달아주고
벌 나비 반응을 지켜보는 거지
그들의 탄성이 터질 때마다
나무에서 나무로 번지는 지지 세력들
꽃의 정부가 탄생되는 거라

꽃은 다른 수단의 정치*
반목과 대립이 없지
뿌리는 흙속에서 잎은 허공에서
물과 바람
상생의 손 움켜쥐고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네

봄날 내내 범람하는 꽃불을 봐
꿀벌은 꽃이 치는 거지
벌통으로 키우는 게 아니야
코앞에 설탕물을 풀어놓은들
그게 며칠이나 가겠어
검증되지 않은 수입 교배종으로
벌 나비의 복지를 시험하지 마
같은 꽃 같은 향기더라도
오는 봄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행복해 하는 거야

봄날은 간다
꽃의 정부가 다하더라도
후회는 없어
튼실한 열매가 뒤를 받혀 줄 테니까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중 ‘전쟁은 다른 수단의 정치“를 변용함.

 

 

 

꽃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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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올해는 『애지』 창간 20주년을 맞는 해라지요.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만이 당신의 존재증명이라 주창하며 『애지』를 이끌어 오신 주간님과 편집 종사자 모든 분들께 축하인사를 올립니다. 제17회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등단 20년을 코앞에 둔 제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연필을 깎다 보니, 나도 한 자루 연필이 아니었나 싶다. 動亂 통, 탄피처럼 흙바닥에 뚝 떨어진 연필 하나. 시간의 칼날로 매일 나를 깎고 다듬어서 꾹꾹 눌러썼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볼펜과 만년필 틈에서 기를 써 봐도 손톱만 부러진 채 다시 나락으로 굴러 구더기 떼만 들끓던 날들이여. 세상 밑그림만 그리다가 어느새 몽당해지고 너무 작아 쓸모없다 내팽개칠 때쯤 연필심처럼 묵묵한 기다림 속으로 시가 왔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울음이 노래가 되었다. 별도 별사탕도 되지 않는 시를 향한 외눈박이 사랑으로 눈멀어서야 흑심 가득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꽃도 좋고 가시도 좋았다. 기쁨보다는 슬픔을 경작하느라 솔개그늘만한 밭 한 뙈기 품어 본 적 없으니 세상 뜰 때는 몽당연필 같은 시집 몇 권 달랑 메고 참, 가볍게도 가겠다.

저는 불혹도 한참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시인의 마을에 셋방 한 칸 겨우 얻었습니다. 그러니 뭐 내보일 세간살이도 없었지요. 내 머리맡에 놓인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알 두 쪽은 달렸는데 남자가, 대쪽 같은 기개가 없습니다. 한 때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더운피 개천에 풀어 저잣거리에 이름값이라도 한 모양인데, 요즈음은 시 쓰기가 신변잡기 파리채 놀음이나 다름 아닙니다.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습니다, 活語라면 살 저며 등뼈 내놓고 초장이라도 튀어야할 거 아닌가요? 가끔 언어를 비틀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성찬을 베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개다리소반에 찬밥신세입니다. 시인의 모자를 쓰고 보니 어깨가 자꾸 움츠러듭니다.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림자조차 낮은 곳으로 눕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 비틀린 채 땅바닥에 헛바퀴를 돌고 있는 외뿔풍뎅이입니다. 세상의 저녁, 어느 한 불빛이 내 시를 읽고 있는지요. 우리가 상한 날개 껴입고 헛춤을 추는 것은 아직도 추락할 꿈이 남아있음입니다.

문장을 갖는다는 것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지요. 詩, 참 오랜 동안 내 곡진한 마음의 情人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할 때는 물고기처럼 잡아 탕을 끓이거나 우려먹고도 싶었고 속이 뻔해 보이는 그의 몸에 붙어 무언가 도모해 보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고백컨대, 시 앞에 혼자이지 못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느라 바람만 들었습니다. 이제, 항복합니다. 시 앞에 무릎 꿇습니다. 끊고, 닫고, 못 박아, 소금 한 줌 속에 녹아있는 열 말의 바닷물처럼 나를 가두겠습니다. 충분히 외롭겠습니다. 혼자인 그 외로움일랑 『애지』와 나누며 살겠습니다. 한 해 동안 발표된 별처럼 빛나는 작품들 속에서 제 시에 꽃을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마음과 곡진한 인사를 올립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애지창간 20년을 이어오며 시 잡지 만드느라 옛날 그 좋던 뚝심 다 내려놓은 반경환 주간님께도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시문학을 통해 지금까지 맺어온 뜻깊은 인연 앞으로도 잘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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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우리 인간의 세상에서 말처럼 굳세고 목질이 좋고, 말처럼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지닌 것은 없다. 말은 상냥하고 심지가 곧고, 언제, 어느 때나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며,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부모형제, 단군, 하나님, 도덕, 종교, 사상, 이념, 가정, 군대, 학교, 경찰, 회사, 국회, 정부, 진리, 허위, 선악, 남녀 등―, 이 모든 것은 말의 꽃이자 열매라고 할 수가 있다. 말보다 키가 크고, 말보다 힘이 세고, 말보다 빠르고, 말보다 높이 나는 것은 이 세계에 없다.말은 명령하고, 말의 명령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말은 모든 것들의 영원을 원하고, 이 생명의 숲을 가꾼다.

 

2019년은 『애지』 창간 20주년이며, 어느덧 제17회 애지문학상을 시상하게 되었다. 2018년 겨울호부터 2019년 가을호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에 10편의 시를 후보작으로 선정했고, 그 결과 송찬호 시인의 「악어의 수프」와 이영식 시인의 「꽃의 정치」를 공동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박분필의 시인의 「자작나무 自敍傳」, 천양희 시인의 「어느 미혼모의 질문」, 이병률 시인의 「그 배를 타기는 했을까」, 고재종 시인의 「길에 대하여」, 김병호 시인의 「누가 괜찮아, 했을까」, 송승언 시인의 「나 아닌 모든」, 서효인의 「종각에서의 대치」, 김기택의 「발바닥」 등은 모두가 탁월한 시들이고, 대단히 안타깝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이영식 시인은 낭만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꽃의 정치」는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의 소산이라는 점에서는 낭만적이고, 「꽃의 정치」는 머나먼 저곳의 정치라는 점에서는 이상적이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꽃의 정치」를 실현시키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꽃은 다른 수단의 정치/ 반목과 대립이 없지/ 뿌리는 흙속에서 잎은 허공에서/ 물과 바람/ 상생의 손 움켜쥐고/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는 꽃의 정치의 목표가 되고, 이 ‘꽃의 정치’는 이상세계와 이상세계의 행복을 보장해주게 된다. 정치란 ‘무보수 명예직’으로 꽃 피어나는 것이지 “코앞에 설탕물을 풀어놓은”것 같은 꼼수와 “검증되지 않은 수입 교배종으로/ 벌 나비의 복지를 시험하지 마”라는 시구에서처럼, 이웃 국가의 정책으로 꽃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진실이 없으면 피어나지 않는 꽃이며, 전국민의 행복이 보장된 ‘꽃놀이패’의 축제를 연출해내기 위해서는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와 전통은 「꽃의 정치」의 토대가 되고, 이 역사와 전통의 토대 위에서만이 반목과 대립이 없는 사랑의 정치가 실현될 수가 있다.

 

꽃의 정치와 꽃의 정부는 우리가 이영식 시인을 통해서 들은 가장 아름다운 말이며, 만인들의 행복의 향기가 천리, 만리 퍼져나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9년부터는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을 다시 부활하여 시상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최종심에 올라온 후보작들을 보고 그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비평가는 사상가이며, 그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한국문학비평의 후퇴는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제17회 애지문학상 공동수상자인 송찬호 시인과 이영식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부디 더욱더 좋은 시 많이 쓰시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글 반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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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 이경림

 

가죽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加恩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 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간대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네. 그 아래, 누렁개 한 마리가 뉘엿뉘엿 먹이를 찾아 다녔네. 아버지는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네. 황금빛 해가 옥녀봉 꼭대기에 우스꽝스레 걸려 있었네. 나는 보았네 멋쟁이 신 선생이 도래실로 가는 모롱이에서 어떤 키 큰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봉암사 상좌승은 시주바랑을 메고 북쪽으로 가는 길 위 놓여 있었네. 나직한 돌담 너머 집들이 비틀 서 있었네
 

나는 보았네 어린 고염나무가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버거운 식구들을. 분홍 양산을 쓴 처녀들은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네. 도랑마다 물이 넘치고 둑방에는 문득 몸메꽃이 피어 있었네 검은 숲이 검은 새들을 날리고 있었네 나는 보았네 바람난 옥자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가 그녀가 날아간 허공에 떠 있었네

*가은, 도래실,-경북 문경에 있는 마을 이름
*봉암사-문경에 있는 사찰

 

 

 

 

급!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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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상을 받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벌을 받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분명 명예로운 일이지만 반면 채찍이며 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라는 괴물이 폐결핵에 심한 공황장애 환자이던 제게 운명처럼 들이닥쳐 머리채를 잡고 30년을 조리돌린 일처럼.

문청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습니다. 정지용의 백록담을 본 것이 초등학교 5학년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후 아버지의 책들 사이에서 오장환 임화 백석 김기림의 시들을 봤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절대 시인은 되지 않겠다 생각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버지의 책상에서 보던 그 책들과 원고뭉치들은 우리의 배고픔에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이과를 선택했으나 가난은 배우는 일 조차 뜻대로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그것은 마치 주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원인불명의 불면이 계속되었고 그 때마다 밤새 받아쓰기 하듯 그것들을 썼습니다. 수면제에 취해 잠이 들면 꿈속에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시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괴로웠으나 황홀했습니다. 마치 오로라 속을 휘몰려 다니는 알 수 없는 기류처럼.

 

시는 광기입니다 불면입니다. 크라이막스 입니다. 섹스입니다. 유토피아이며 타나토스이며 춤이며 거대한 침묵입니다. 침묵을 찢고 나오는 꾕가리 소리입니다. 우뢰이며 번개이며 소나기입니다. 흐느낌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에 머리채 잡혀 끌려온 지난 생은 아름다웠습니다. 시를 먹고 시를 싸고 시를 타고 시로 달리며 시를 노닥거리며 지나가는 저녁을 바라보게 해 준 시에 감사합니다. 해질녘입니다. 황혼이 아름다운 것은 이글거리던 해가 저 너머에서 반추해 주는 노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저녁이 더욱 아름답도록 제 시에 손 얹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저 때문에 기회를 잃으신 저보다 훌륭하신 몇 분의 동료 시인들게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벌을 받는 거라 생각하고 더욱 삼가며 살겠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좋은 잡지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애지의 반경환 주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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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최근 우리 시단은 크게 활력이 떨어져 있다. 한 동안 문단을 휩쓴 미래파의 시들은 애초의 저항성을 상실하고 분별한 아류들의 언어유희로 전락해 있고, 문단 일각에서는 서정성의 부활을 말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떤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고답적 서정의 답습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시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많은 시전문지들은 지극히 사적인 일기장 안의 언어들로 채워지고 있다. 언어의 힘으로 사회와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작품이 많지 않다. 문학상은 바로 이런 작품을 찾아 한 시기 우리 문학의 성과를 확인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근 문학상은 상업성과 문단의 권력화의 수단이 된 지 오래이다. 오직 애지 문학상만이, 우리 문학의 질을 높이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어준 작가나 시인에게 문학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를 지키고 있다고 자부한다.

 

작년 겨울호부터 올해 여름호까지 <애지>를 포함한 여러 문학지들에 실린 작품 중에서 먼저 후보작들을 선정했다. 시인의 명망성이나 주제의 시의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시인이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인간과 세상을 보는지 또 얼마나 치열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했는지를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먼저 10편을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정채원의 홀로그램, 송찬호의 종이 공주, 윤제림의 달이 즈믄 사람에, 복효근의 그리움의 속도, 이병률의 어떤 걱정, 이경림의 자정, 이영식의 달은 감정노동자, 천양희의 초미금, 양선희의 시를 읽는다, 장옥관의 덜렁덜렁이 후보작이었다. 다들 한 해 동안 우리 문단을 빛낸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많은 논의 끝에 앞서의 선정 취지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이경림 시인의 작품을 선정했다.

 

이경림 시인의 자정은 사색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거 우리의 삶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을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추억이 불러오는 익숙한 정서에 빠지거나 과거가 주는 안온함에 쉽게 머물지 않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삶의 아픔과 비극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슬픔과 고통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가 이런 것들의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는 희망을 함께 보여준다. 이경림 시인의 이번 수상 작품은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고 잔잔하면서도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경림 시인의 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경림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이번 수상을 통해 시인에게나 우리 애지에게나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둘 모두에게 큰 영광이었으면 한다.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글 황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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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환상통 / 김혜순

 

 

하이힐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 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그 콩 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은,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 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려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날개 환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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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와 이형기시인기념사업회(회장 박우담)는 시 낙화의 시인이자 지적 서정시의 대명사인 이형기 시인을 기리는 제9회 이형기문학제 수상자로 김혜순 시인이 선정됐다고 27일 밝혔다. 수상집은 날개 환상통이다.

 

김 시인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현재 서울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심사위원인 정과리 평론가는 김혜순 시인은 한국여성시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존재이다. 최근 김혜순의 시는 더욱 더 나아가 인간에 의해 학대받고 고통받는 여린 생명들의 삶의 형식에 대한 탐구로 확장되었다. 그의삶의 형식의 탐구는 앞으로도 씩씩할 것이며 그의 도전은 우주상의 모든 생명의 진정한 미래를 위한 하나의 밀알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한편 진주 출신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형기 선생(1933.1~2005.2)은 초기에는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서정시를 쓰고, 후기에는 허무에 기초한 관념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적 표현이 돋보이는 시를 발표했다. 20세기 후반 삶과 인간문제를 시로써 탐구한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다.

 

950코스모스’, ‘강가에서등이 추천돼 고교 때인 16세에 등단, 최연소 등단기록을 세웠으며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형기 문학제 시상식은 622일 토요일 오후 4시 경남과기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 이날 문학상 수상자에게는 창작장려금 2,000만원과 상패가 주어진다. 진주시 관계자는 지역사회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시민들의 문학정신을 키워내는 동력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많은 시민들에게 이형기 선생에 대한 홍보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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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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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상] 지게 / 김기호


이젠 지게는 없다

풀벌레 밤낮으로 타전하는 헛간에도

이젠 지게는 없다

지게를 밀고 당기던 옛 산길 동무도 없다

날이 새면 몸을 맡겼던 논도 밭도 더 이상

제기를 부르지 않아

해 떨어지기 오래 전 지게는 도회로 떠났다

지게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랑이 봉천닭 같은

도회의 계단만 오르내리는 것

펜보다 강한 노동의 어깨를 찾아 다닌다

바람 부는 몸 타박타박 끌고 돌아와

나뭇단 묶듯 주발만 여섯 꿰고

외진 농업박물관에 갇혀버린 지게

다가가 몸 구부려 흙에서 잔뼈가 굵어진

내 어깨로 멜빵을 멜라치면

두 다리 힘줄이 불끈 돋울 것 같은 지게

먼저 온 쇠스랑이랑 쟁기랑 낫없이

걸어 나갈 수 없음을 알고도

마디마디 뼈마디 남은 힘주어

담벽을 움켜 잡고 부르르 떨고 있는 지게


창백한 달, 숨 몰아 쉬고 있는 갈 감나무 아래

이 땅 한번도 제대로 서 보지 못한 아버지

별밭으로 슬슬 쓸고 가다 구름 걷히자

들킨 듯 가볍게 날아가는 감잎들, 잎들




 


[금상] 갈대 / 김도선


아버지는 발목가지 젖어 있었다

친구들 대부분 도시로 터전을 바꾸어도

강어귀에서 달빛만 헛그물질하고 있었다

관에서 행하는 일에는 불만이 있어도

입 한번 열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낮은 사람은 굽실거려야만

심줄이라도 붙어 있다며

밤새도록 소주 나발만 불어댔다

바람이 불면 엎드리고

아무도 모르게 빗물에 씻어내야지

사내는 그렁 개똘철학이 싫어서 자주 대들곤 했다

사내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벗어나려

힘껏 발걸음을 떼었다

양복을 입고 출근하고

몸에는 행여나 물비린내가 배여 있을 세라

틈만 나면 향수를 뿌려댔다

그런데 어느 날 목욕 후 거울에 비친 등짝을 보다가

꼬리뼈가 툭 튀어나와 있음을 보았다

아버지는 한 두 사람의 관 공무원에게 굽실거렸지만

그동안 사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숨겨둔 꼬리를 내어 흔들었을까

밑을 보니 아!

사내는 무릎가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속으로만 속으로만 울음 삼키는 

갈대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제 스스로 몸조차 흔들지 못하는







[은상] 엉킴에 대하여 /김성현


발 밑 한번 내려보지 못하고

무엇을 위해 바쁘게 걸었을까

집에 이르러서야

구두끈이 엉켜 있다는 걸 알았다

구두도 주인을 닮나보다

진실을 얘기해도 믿지 않는 어른들을 위해

거짓말을 배우던 유년시절부터

나는 엉켜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엉켜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바르고 곧아서

만지면 소리내어 우는

현악기의 멜로디를 들으면

엉켜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

절망의 칼로 잘라 버리는 이도 있었다

엉켜 있는 것을 애써 풀려고 하기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엉켜 있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엉켜 보지 않고서야

엉켜 있는 것은 엉켜 있는 대로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없듯이

풀리지 않는 것도 없다는

먼저 간 사람들의 노래를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오

어직 엉키지 않은 것들이 엉키지 않도록

진심으로 안아 느껴야지

엉키지 않은 것들의 맑은 소리가 가장 소중하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엉키지 않는 것임을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방긋이 웃는 아이들을 보면 꿈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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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겨울공단 / 임재동


겨울 해는 

애인과의 약속을 기다리는 여공처럼

일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퇴근해 버렸다


종종종

교대 근무를 위해

어둠,

겨울엔 일이 많아

하루에 서너 시간씩 꼭 잔업을 해야 했다


지금 막

교대를 마친

가로등이

일제히 야간 작업에 들어간다


거리를 따라

실직자들처럼 고개 숙인 나무들

정리 해고 당한 낙엽들이

호호 입김 불며

구인 광고 앞을 서성이다 사라진다


이번 달엔

밀린 임금이나마 받을 수 있을런지

주택 부금이며

아이들 학비며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 짓는

공장의 굴뚝들


오랜 철야 작업으로

뿌옇게 시력을 잃은 가로등 하나가

깜빡깜빡

흐린 눈을 부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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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모래의 문장 / 최수안

 

낙타

그 순한 정강이를 세울 때부터

부신 태양 아래 발바닥은 단단해지죠

모래 바람이 만든 결 고운 문장을 따라가는 일이라

등뼈보다 큰 사구들을 마다하지 않았죠

 

바람이 던진 베일이 사막을 훑고 

몽롱한 동공 속 푸른 호수가 깊어지면

소금빛 머금은 속눈썹이 서서히 열려요

발자국 사이 느릿한 관절을 끌고

가시가 지은 묘비를 지나 

현기증 이랑을 몸속에 새겨요

 

터번 쓴 선인장이 생채기를 부르는 오후

갈라진 혓바닥 틈으로 이국의 문장이 버석거리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글자들이

침 없는 나침반을 쥐어주면

낙타, 혹 속에 뜨거운 매듭들이 

풀고 엮고 손톱 긁어 모래경을 또 만들어내요


누천년을 모래에 파묻힌 얼굴

해부되지 않는 내가 그 속에 

산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꿈틀거리며 돋아나는 뒤꿈치가

걷고 걷는 일이 길의 끝이라는 듯


모래 언덕 너머 저 끝도 없는 여백을 더듬어가요

은하가 찰방이며 떨군 받침들 이마에 받으며

 

 

 

 

 

 

[은상] 출석부를 넘기며 / 최정삼

 

그 수많은 날들이 네모 칸으로 들어선

씨줄과 날줄의 사이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어진

작대기들을 건너뛰며

죽어있음도 때로는 아름다운 법이라고

지울 수 없는 시간들을 스스로

다독이며, 앞날을 가늠하듯

출석부를 넘긴다.

 

옹색한 종이의 면마다에서

해가 뜨고 날이 저물 때, 세월은

더불어 갈 동무가 없어 외로운 길을

구획하고, 우리들의 삶이 박제처럼

표정 없는 기록으로 남아서, 얼마나

아쉬웁게 살았는가고 물을 때 그러나

소리는 아무데도 없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수수우수수 해먹은 오늘 위로 떨어져 내리는, 희어서

가지런한 기억의 껍질들.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그리움

들을 페이지 책장 구석구석에 깊이 묻은 채로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겠다고

쓸쓸히 기록의 시간들을 돌아 나올 때

신호처럼 불이 나가고, 어둠 속에서

나는 출석부를 덮으며 정말로 방을 나섰다. 그때

별들이 하늘에서 빛나고, 내가난한 삶이

그 별빛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은상] 별들의 비행 / 이초롱 

 

술병 속에서 떠오르는 말벌집이 있다

잠들어있던 벌들이 은빛 날개를 털고 일어서면

한 잔의 맑은 물이 출렁거리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울음소리가 제 몸에 깃드는 줄도 모른 채 눈물을

눌러 담는 벌떼들이 있다 라디오 잡음처럼

 

방 안을 진동하는 날갯짓

오래 틀어놓은 음악과 침묵이 두 귀를 접고 웅크리고 있어

 

유리병 속에서 벌 몇 마리가 사력을 다해 눈 뜬다

부드러운 흙을 털고 날아오르는 빈 몸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거품을 따라

 

숲을 떠돌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별들이 두 눈에 박히는 순간,

벌들이 한 바퀴를 돌면 저녁이 깊어진다

 

물의 지느러미가 흔들리고

빛을 움켜쥔 다리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동안,

빈 벌통에서 바닐라 냄새가 풍겨 나오고

 

버둥거릴수록 차오르는 어둠이 눈앞에 당도한다

궤도를 그리며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흘러넘치는 지문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이름을 버린 몇 개의 영혼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새벽,

뚜껑을 열자 벌떼가 날아오른다 온몸에 박힌 심장들이 두근거린다

 

 

 

 

 

 

[은상] 무화과에게 쓰는 편지 / 이옥래

 

꽃 없이 피어 익어가는 것들에게 쓴다

나는 당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

가지 끝에서부터 초록세포 몇 바람에 부풀리던

꽃도 없이 말이야, 지나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매를 달고 서있던

당신, 나는 열매를 한바구니 담아 그저

떫고도 달콤한 생을 음미할 뿐이었지

물관을 타고 흐르는 골 깊은 말들은

붉은 가르마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까

주름 켜켜이 희고 작은 과육들이

언제부터 지고 피고 영글기 시작했는지

이 촘촘히 박힌 기억들이 입 속에서 희미해지는 동안

펴 본적 없는 꽃잎들이 이미 구름보다

높은 곳을 날고 있는 걸 상상해

그래, 바깥을 모르는 거야말로

꽃 같이 아련한 웃음을 가져다 준 걸지도,

기억장치 무너져 달콤해져가는 무화과 하나

가끔 검은 태풍 사이로 낙과되고 싶었을 테지

이제 하늘 길 몇 갈래 매듭짓는 아침이 오고

 나는 무화과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하다

잊어버리다 하지, 안으로만 폈구나 꽃은

흰 과육이었구나, 되뇌며

시간을 더듬어 내 안에서 말랑해지는 당신

욕심 없이 고고히 매달린 무화과를 올려다본다

어머니, 농익어가는 어머니

 

 

 

 

 

[은상] 지구에 사는 화성인 / 엄정은

 

나는

지구에 사는

화성인.

 

나는

단지 몸만 불편할 뿐인데도

당신들은

나를

같은 지구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말은

장애우(障礙友)

 

현실은

이방인(異邦人).

 

나의 친구는

오로지

나의 어머니뿐.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탓한다

 

지구에

적응하지 못한다며.

 

다가오라 말하면서

정작

다리(橋)는 만들지 않는

정 상 적 인

지구인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사는 땅을 밟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불편해서.

 

다리 하나를 놓으려면

나의 어머니가

무릎 정도는 꿇어줘야 하기에.

 

나는

지구에 살지만

아직도

지구에 사는 법이 서툰

화성인.

 

오늘밤

나의 고향

화성으로 가기 위해

난간에 오른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미

쉬어터진 목소리로

피맺힌 절망만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것은

 

온몸으로 외쳐도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소리 없는 비명.

 

그러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보았다.

 

내 다리를 붙잡고

 

지구인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을

 

피눈물을 쏟고 있는

나의 어머니를.

 

하지만......

 

죄송해요. 

 

내가

허공에

몸을

던지자

 

어머니가

나를

꼬옥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오늘밤

우리는

화성으로 갔다

 

아니

 

쫓겨났다.

 

 

 

 

 

 

[동상] 흙손 / 정수경 

 

만져줘야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흙과 나무의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겠다

여백은 안타까움이었겠다

지친 어깨 다독여주던 손, 지금은 없고

무덤덤하게 외면되는

 

그런 손 말고

 

없거나 무딘 거기를 예리하게 세워

사과를 깎으면

껍질은 섬세한 길을 만들어낸다

후에

계단을 만들고 계단을 구겨 꽃을 피우고

 

지칠 때 손은 층층이꽃처럼 생겨난다

 

입술 너머

 

손끝이 거기에 닿을 때

발견된 적 없는 꽃으로 예리한 국경을 만들었겠다

 

구석에 걸린 그림처럼 만져줘야 살아나겠다

다소 뜨거워 넘어갈 수 없었겠다

 

결국 그런 추측의 세계가 있었겠다

 

껍질을 깎던 손이 마무리되는 세계가 있었겠다

 

 

 

 

 

[동상] 장마전보 / 김유리

 

그리고

투명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방울방울 맺혀

후득후득 떨어지는

비의 부호에는 쉼표가 가득하다

 

어느 어린 여름날

축축히 잠든 이마와

곰팡이 핀 벽지 너머로 들었던

쉼표, 쉼표들

 

그 때 너와 내가 썼던 시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나의 우편함에는

숫자들만 꽂힐 뿐

그 어떤 말들도 찾아오지 않는데

 

해독할 수 없는 장마의 편지들만이

빈 지붕을 두드린다

 

-여보세요, 내 슬픔이 아직 거기에 사나요

 

나는 아직 여기에

우산 없이 서 있다

 

여름이 보낸 수취인불명의 편지들을 흠뻑 안고

 

꼬리 잃은 나의 쉼표들과

헤엄치고 있다

 

 

 

 

[동상] 과매기 / 이영원

 

총망중,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방으로 튄 혈흔을 주워 밖으로 나선다

담벼락 아래 얼굴을 숨긴 사람들, 자욱한 연기

그보다 스무 발자국 쯤 양지바른 곳에 서서 

보이지 않던 총구의 방향을 가늠해본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숙고하는 법의관처럼

선의인지 악의인지 아니면 무지인지

선혈이 튄 방향으로 방아쇠의 의지를 따져 묻는다

만일 사출구가 나침반처럼 떨리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그의 혐의를 입증할 텐데

일소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경지일까

악력(惡力)기라고 부르며 쥐어짜던 

악력(握力)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겨울 공기가 스며들 때

언젠가 다큐에서 보았던 컴컴한 우주가 온다

‘차가움이란 열의 부재일 따름이라

-273도인 절대온도 아래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친절한 해설을 분수처럼 뒤집어볼 때

이 生의 다정은 얼마나 거대할 수 있을까

젖어드는 미열에 눈을 감으면

가본 적 없는 구룡포 앞 바다

나를 민물로 끊임없이 헹궈주는 풍경

내일의 비린내를 없애려면 

오늘의 핏물을 잘 씻어야한다는 속삭임

발을 동동 구르며

어제와 같은 평행봉 위에 오르면

저 먼 수평선

유구한 해풍을 온몸으로 맞는다

날이 차가우면 단단하게 얼어붙고

날이 풀리면 기름기를 뚝뚝 흘리기를

다시 날이 차가우면 더 단단하게 얼고

다시 날이 잦아들면 더 많이 흘리기를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다가

어느새 담백해질 체질

아마도 그러할 미래

감히 서둘지도 분주하지도 않기로 한다

폭력, 권력, 알력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중력은 조용히 속삭이기에

온 겨울 내 평행봉 위에 걸려있었다

길쭉한 봄의 그림자를 그리며

 

 

 

 

 

 

 

[동상] 보수동 헌책방 / 박지영

 

추억을 사러가고 싶어졌다.

 

책곰팡이 냄새

쾌쾌한 나무 냄새

물떡

찹쌀도너츠...

 

난해하기만한

고향 부산의 도로 가운데

어느새

짜증 가득한 표정의 여행객이 되어 앉아있다.

 

덥고 차는 막힌다.

 

다닐뻔한 직장도

버스창 너머로 보이고..

 

내가 탄 81번 버스는 정거장마다 추억을 지나간다 

 

부산역.

중앙동.

국제시장.

 

버스 방송이 알린다.

다음 정류장은

보수동 헌책방골목

 

설레는 마음에

피식 웃으며

부저를 누른다.

 

 

 

 

 

 

[동상] 먹똥 향기 / 김영희 

 

거실창문 열면 노란수선화 향기 날아오고

어머님이 차신 기저귀 열면

먹똥향기 코끝에 스며든다

 

엄니, 쌌어요?

아니! 안 쌌어

냄새가 난디?

 

당신이 주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향기!

내 가슴 깊숙이 애잔하게 퍼진다

 

어느 자식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혼자 살겠다고 고집하시더니

떠나시기 전 꼭! 셋째며느리에게만 주고 싶었을까?

먼 여행길 보내드리기 전 꼭! 받고 싶었을까...

 

하루해가 까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향기에 중독 될 때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이 뿌리 보이며

초승달의 미소를 띤다

엄니, 웃는 모습이 예뻐서 수선화도 시샘을 한다

 

그리운 나의어머님!!!

당신이 주신 먹똥향기는

당신이 떠나신 후에도

커피 잔에 눈물방울 뚝뚝뚝......

 

 

 

 

 

 

[동상] 채식주의자 / 엄영희 

 

붉은 것을 좋아할수록 송곳니가 자라는 꿈을 꾸었다

 

피가 도는 봄날

할머니는 흐르는 물에 나물을 씻으며

애야 푸성귀는 눈이 없어 좋구나

나는 눈이 없어 조금은 덜 아프다는 말처럼 들렸다

 

폭풍우를 이겨내고 자란 몸의 푸른 멍

산나물은 묶은 머리를 풀고 물의 방향으로 맑아졌다

나는 무방비로 탈진했다

할머니는 풀물 든 뭉툭한 손으로 내 눈꺼풀을 열어 보셨다

 

명이 나물을 먹고 귀가 밝아지거나

방풍 나물을 먹고 바람을 이기는 꿈은 전설에서나 가능해요 할머니

모르겠어요 이제 와 봄까치풀처럼 개명을 꿈꾸어도 좋을지

 

애야 다 지나간다 엎드리면 등을 타고 다 지나간다

봄이 오면 할머니는 늘 푸른 밥상을 차리셨다

몸 푸른 것들을 더 푸르게 뿌리째 비비고 버무리는 동안 나도 물이 들었다

 

나는 내가 먹은 이름의 전부이니

나는 내가 아는 눈빛의 전부이니

나물죽 한 그릇이 등을 타고 통과한다

 

충혈된 것들을 흔들어 흘려보낸다

 

 

 

 

 

 

 

[동상] 늦여름의 레시피 / 박형식 

 

양파껍질 같은 얇은 하늘을 창가에 가지런하게 걸어놓으면 한 동안 마른 햇빛 냄새를 맡을 수 있겠지 투명한 하늘은 건더기 없이 국물을 낼 수 있어 좋아 먹기 좋게 발려놓고 썰어놓으면 기름 범벅 밀가루 범벅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네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까르르

 

금방 만져 놓은 구름 반죽이 완성이 되면 프라이팬이 달궈지기 전 이상하게도 그늘 한 장 없는 대낮의 운동장을 냅다 달리고 싶어져 괜히 허벅지에 힘이 고이고 아이라인 같은 레일이 운동장에 능숙하게 그려지지 애초부터 심판은 필요 없어 무작정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큰 나무가 그려져 있어 그곳으로 그냥 달리면 돼 어느 새 기름을 잘 두른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운동장 한 곁에 틀어놓은 수도 속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내밀지 가물어 눌러 붙은 쌍가마 국수 면발처럼 풀리며 다시 터지는 웃음소리 까르르 다음부터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기름진 육즙이 씻겨 내려가면 야채는 겹겹이 밀가루 옷을 입고 쉽게 몸집을 부풀릴 수 있지 다시 양념을 뒤집어쓰고는 균형을 못 잡고 데구루루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 한 바퀴 어느새 담벼락이 노릇노릇 하게 익어갈 때면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던 뜀박질도 이내 시들해지지 시 부문 57 시 때마침 운동장 구석에서 귀에 익은 사이렌 소리 길게 두 번 짧게 한 번 다시 이유 없이 바빠지는 손놀림 주방 천정에 매달린 백열등이 밀가루처럼 환하게 켜지면 타닥타닥 조명 빛에 잘 익어 숨넘어가는 소리 아직 식지 않은 늦여름 햇살이 철봉을 녹아내릴 듯 두드리는 소리 소사 아저씨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가 지들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 모래를 등에 진 바람에 눈물이 먼저 반응하는 소리 문풍지 끝에 옮겨 붙은 곤로의 심지가 석유 냄새에 물소리처럼 번지는 소리 아이들이 엄마손에 이끌려 하나둘씩 멀어지는 소리

 

오래된 굴뚝은 검은 가루가 섞인 쉰 소리를 뿜어내고 불 조절에 실패한 약간의 방심은 모서리가 심하게 그을린 햇살을 한 접시 구워낸다 뒤늦게 게양대에서 내려지는 헝겊처럼 후줄근해진 어느 여름 오후 자 이제 수척해진 멸치는 뭍으로 나와야지 육수처럼 번지는 웃음소리

 

 

 

 

 

 

[동상] 푸른 봄들에게 보내는 편지 / 우상범

 

뽀오얀 배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같은 봄볕

따사로운 손길에 이끌려 꼼지락거리는 아기 싹들

연둣빛 사이사이 소녀들의 웃음처럼 피어나는 꽃들

환한 웃음꽃 위로 춤추듯 팔랑거리는 나비들

그 풍경 속으로 소풍 도시락 매고 가는 사람들

 

그렇게 봄은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봄 봄 봄, 이름만 불러도

통 통 통, 튀어 오를 것만 같은데

늘 봄날로만 여겨지는 너희들의 봄은

사실 불안하리만큼 변덕스럽지 않았던가

 

꽃 피지도 못한 채 후두두 작달비에 떨어지는 겨우내 기다림

피자마자 몰아치는 돌풍에 꽃비 되어 흩날리는 비늘 같은 연약함

다 피어난 꽃 위로 때아닌 봄눈 내려 묻혀버린 서러운 아리따움

온 세상 덮어버리는 느닷없는 미세먼지에 숨 막히는 봄의 정령들

 

돌이켜보라

너희들의 봄이 봄날이었던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 짧은 봄날로 너희들의 봄을 기억하는 것은

한순간을 영원으로 피었기 때문이니

봄날 같은 봄이 사라져간다 해도

 

기억하라

숱한 나날의 변덕스러운 불안이 아니라

단 하루의 피어난 봄날로 봄이 기억된다는 사실을

아침에 핀 꽃이 저녁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너희들의 봄을 힘껏 피어 올려야 하는 이유를

 

 

 

 

 

 

[동상] 곱슬머리 / 이순남 

 

엄마의 엄지를 꼭 잡은 작은 손

손금으로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그 아이의 이마에는

해당화 붉은 꽃잎 피어 있습니다

 

숨결 따라 흔들리는

노란 배냇머리털이

바닷가 갯풀같이 흔들렸습니다

 

옹아리속에서 들려오는 해조음

짭조름한 갯내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아버지의 고향이

실핏줄을 따라 왔습니다

 

 해당화가 지천인

원산 명사십리

 

대대로 내려온 유전의 내력이

시간의 사행천을 따라 흘러 흘러

우리 아기에게도 왔습니다

 

 

 

 

 

 

[동상] 박사장의 몽블랑 만년필 / 조성대 

 

만년필은 자신의 내부에서

묽게 응고된 잉크를,

되살리고 싶어 몹시 울먹인다

신천 하류를 이리저리 떠돌다

부패되어 가는 들고양이의

내장에 걸려 있다 곧

모두 부패되어 함께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이다

 

대구 대원섬유 박사장은 지난주 화요일,

愛馬 뉴그랜저 V6 3000과 신천으로 뛰어들었다

전날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한 자괴감을

만년필은 그의 포켓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막진 못했다

외국바이어의 황금빛 계약서에

자랑스럽게 서명되던

자신의 옛모습을 추억할 뿐이다

박사장의 유품이 되지 못함이

無明이 되어 버림이

못내 서럽다

 

새벽, 박사장의 공장 담벼락에

기대어 핀 나팔꽃 하나

때늦은 弔花로 바쳐지고

만년필은 부활을 꿈꾸며 묵묵히

신천 하수종말처리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동상] 개망초 / 전혜진

 

돌틈 사이에 봄이 온다

나라 망한 게 내 탓도 아닌데

나는 개망초

하나님이 나를 지으실 적에는 깜빡 졸으셨나

망초 망초 개망초

 

골목 골목

미소를 나르는 벚꽃

눈꽃 휘날리는 목련꽃

달큰한 내 퍼지는 라일락

오색영롱 형형색색 꽃 중에

나는

왜 나는

스팸조차 못 된 계란후라이 계란꽃

이럴거면 정말 풀때기로 태어나지

꽃도 아닌 풀도 아닌

망할 놈의 개망초

 

두둥실 날아오르는 민들레홀씨마저

어여쁜데

하늘보며 땅보며

에휴

나를 향한 계획이 있긴 할까

전지전능한 주께서는 왜

 

손틈 사이로 봄이 내린다

눈이 시리다

서러운 햇살이 온다

 

 

 

 

 

 

[동상] 이천일십칠년 군중 / 김향숙

 

살찐 달덩어리 움푹움푹 갉아먹은 아침이 낮을 데리고 왔어

몰래 떼어놓은 어둠 한 움큼 책상 위에 앉히고 정오의 태양을 구겨 넣어버렸지

책갈피 속에서 태양은 말라가고 그렇게 낮을 가두어 외면해버리기로 했어

주인 잃은 정오와 검은 바다를 유영했지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끝없는 좋아요의 향연에 나는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망망대해 그물 속 좋아요가 너무 많아 나는 나의 좋아요를 찾을 수가 없더라

수십 번 던진 그물에 나를 소비한 나는 빈 그물 깊은 바다를 조심해야 했어

설익은 형용사를 삼키며 문장이 번식하는 바다가 퍽이나 낯설더군

나도 내 껍데기를 사랑스럽게 벗기기로 했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때로는 네가 나인 것처럼 벗기고 또 벗겼지

한 번씩 출처예의 없이 다른 사람의 껍데기로 나를 감싸기도 했어

비밀도 아닌 것을 비밀스럽게 말이야

내 껍데기를 계속 내 놓아야 하기에 좋아요는 필수조건으로 만들었지

심연의 깊이까지 알 필요도 없었어

가끔씩 찾아오는 솔직한 직선은 감내해야 할 부끄러운 신경증이었지

백만 개의 너울 위로 자발적인 좋아요와 강요받은 좋아요가 하나인 듯 흘러

다녔어

희극적이었어 말하자면 미세한 행간은 비극적이었던 게지

그마저 지독한 의무였기에 하루 수십 번의 형식적인 사랑이 필요했어

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러니까 시간이 준 덤의 외로운 발자국이었던 거야

바다가 쓸쓸해진 좋아요는 다른 영혼에 섬을 만들더라

나의 섬도 외로워지기 시작했지

나 또한 다른 섬을 기웃거려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돼버렸어

일천구백오십년 리스만이 이천일십칠년 군중을 명명했데

고독한군중1)이라고 했다던가?

난, 돌아가야겠어 시퍼런 잎사귀 너울거리는 숲으로 말이야

정오의 태양이 친절한 동굴에서 잃어버린 나를 헤엄쳐야겠어

 

*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이 1950년에 출간한 <고독한 군중(Lonely Crowd)>에 등장하는 용어

 

 

 

 

 

 

 

[특선] 각설이 / 고승영

 

[특선] 창문 밖 풀꽃 / 김금숙

 

[특선] 미완성 유년 / 오재희

 

 

 

 

 

[특선] 이름들 / 류상헌

 

어떤 단어를 보면 어떤 이름이 생각난다

어떤 이름을 되뇌어 보다가 나지막이 한 번씩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불러도 대답 없을 이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이름이 다시 사물이 되고 만다

마음속 다락방을 들여다보면 풍경처럼

다리가 짧은 책상 위에 잡동사니들이 놓여있다

견출지에 써 붙여도 잘 떨어지는 이름도 있고

대충 손가락으로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도 있다

새벽 세시에 이름들이 내게 주는 무게를 생각하면

책상 다리가 툭하고 부러질 것 같고

눈을 뜨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어나자마자 나지막이 불러보았던 몇 개의 이름들

 

 

 

 

 

[특선] 어머니의 다듬이질 / 김광용

 

 

 

 

 

[특선] 자동기술법 / 최지용

 

소설은 정말 어렵다

문예대전 마감이 코앞이다

아직도 쓰고 있다

수십 페이지를 다시 썼다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저장을 깜빡했다

몇 페이지가 날아갔다

클라이막스였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써

이때다 싶어 시 부문으로 갈아탄다

근데 시는 처음 써본다

그런데 자동기술법이란 게 있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는 작법이라고 한다

그냥 막 써본다

이게 정말 시란 말인가

아무래도 크게 혼날 것 같다

시는 진정 어렵구나

건방진 녀석!

다시 소설로 갈아타야겠다

이런, 곧 마감이다

마누라! 미안해!

 

 

 

 

 

[특선] 개수대 / 노순미

[특선] 나에게 이름이 없을 때 / 조희애

 

 

[특선] 십 삼월의 바다 / 윤빛나

 

십 삼월, 달력 하나를 더 그려놓는다.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노동의 붉은 철책 넘어, 십 삼월의 갯바위에 걸터앉은

당신은 십 삼월의 주주(株主).

한 마리 행복동 고등어를 건져

잠시 멈추어 서야할 십 삼월.

십 삼월의 부두 냄새

십 삼월의 아이들을 위해 빵을 굽는 빵집들.

안개의 풍경 안에

십 삼월에 실려 온 약속이 접안한다.

십 삼월의 오선지 위로 그려진 너의 방법이 있었음을.

십 삼월의 사람을 인정하는

어느 자유의 바다가 안경을 내리면

금방 들키고 말 아름다운 위선(僞善).

십 삼월의 뭉게구름 언덕

친절한 세상, 공짜 커피 한 잔에 취하여

빨간 십 삼월의 주소를 적어 보낸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은 십이월 전장(戰場)의 모퉁이

핑계가 보이는 거울 속에 큰 입을 벌리고

씹어 삼키던 안개의 성역에서

젖은 지느러미를 털어 말리는 십 삼월의 바다

십 삼월의 어미 소 한 마리 종나무 쟁기를 끌어

워낭소리 피워대던 채마 밭 이랑

할머니 늙은 빨래 소리 흘러가는 하늘.

갓 건져 올린 시름 한 솔박.

먼지 나는 이승, 계동(季冬)과 맹춘(孟春) 사잇길에

출렁이는 십 삼월, 훌쩍 도망쳐버린 가슴으로

옛 일들을 비겁하게 용서하던 날

저 창호지 문을 열고 뛰쳐나오면

십 삼월의 주인(主人).

파도는 여전히 상냥하고

위대한 기적의 좌표 위에 십 삼월의 바다.

기계 소리 들리지 않는 사람의 시간.

낡은 미닫이를 삐걱거리며

삼월의 평화가 흘러가는 길.

노동의 총소리 들리지 않는 하늘과 땅에

의사는 십 삼월의 바다를 처방했다.

 

 

 

 

 

[입선] 밤하늘의 위선 / 전유진

 

[입선] 아버지를 품은 사람 / 김도연

 

[입선] 막걸리 판타지전 / 길균아

 

[입선] 너에게 닿지 못할 시 / 성미소

 

[입선] 12월의 서재 / 임정태

 

[입선] 봄! 바람 / 김세리

 

[입선] 향 / 정정현

 

[입선] 울고 싶은 저녁 / 박민경

 

[입선] 청춘경매 / 박소정

 

[입선] 저녁 달 / 안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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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순천만 맛조개 / 김경태

 

맛조개를 캐는 일은

법당에 공양하듯 공손해지는 일이다

반나절 웅크린 고양이처럼

몸을 돌돌 말아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길이다

태양 아래 아무 것도 없는 허허 개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할머니

안동에서 순천으로 시집을 온 후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 속에서 혼자

거친 숨을 쉬었던 할머니

오늘도 맛조개를 캐러 순천만으로 나가신다

맛조개 하나에 시집살이 하나 맞바꾸며

한 세월 모두 바다에 공양하신다

맛의 힘으로 숨어있는 맛조개를 캐는 일은

인생의 쓴맛 단맛 가득 담은 손으로 세상을 캐내는 일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갈대숲처럼

어쩌면 한없이 낮은 몸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권태와 설움을 개펄에다 풀어놓는 일이다

개펄이 곧 세상이었으므로 할머니는

광주리에 인 모든 질퍽한 것들을

맛조개가 먹으라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풀어놓은 것이다

초겨울의 햇살은 오래 전 돌아가신 증조모의 잔소리처럼 간지럽고

방파제에 한가득 맛조개를 풀어놓으면

순천만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개펄을 솜이불처럼 다시 덮어 놓는다

 

 

 

 

 

 

[은상] 이순신 / 김양채

 

1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생각 없이 길을 걷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앉아

통곡하는 사람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

술 한잔에 날려버리고

앞으로 간다 기어서 간다

길이 없는 곳에도

풀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간다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지는 생

아직도 살아서 영원히 살아서

혼자서 가야할 길

통곡하며 간다

기다려 줄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아득한 바다에 홀로 남아

눈물꽃이 된 사람

 

2

하늘도 울고 땅도 울어

잡초도 피지 않을 땅에

꽃 한송이 피운다

쳐 내고 또 쳐 내고

짓밟아 만신창이 되어도

일어나 꽃을 피운다

불가능과 가능의 사이에서

불꽃으로 피어나

스스로 꽃이 된 사람

그냥 눈물 나는 사람

아득한 바다는 끝없이 아득해서

아득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눈물겹다

통곡의 피눈물로 꽃이 된 사람

 

3

모르는 적들이 흩어져 있는

아득한 바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술 한잔 시름을 달래며

동쪽 하늘에 뜨는 샛별 바라보았다

마쳐야 할 일들이

마쳐지지 않아 힘겨웠고

끝없이 다가오는 일들이 두려웠다

바다는 말이 없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병들에 짓눌렸고

병든 땅과 하늘에 짓눌렸다

마지막 바다는 오로지

어머니의 품에서 만들어진다고

화약냄새 진동하는 새벽 바다에서

그리운 어머니 얼굴 떠오른다

 

 

 

 

 

 

[은상] 처마 밑 고드름 / 김정식

 

저 얼음꽃들

좀 봐

마음

꽝꽝 언 채

거꾸로 매달려 있어

 

처마 밑

곶감처럼

한 실에 꿰어져

줄줄이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네

 

기와 속

숨겨진 비밀

오금

검은 눈물

울 

떨구고

 

회초리 든 햇빛에

이실직고 반성문 쓰며

거짓된 몸

연결고리 문

식은 땀

처마 밑에서

투... ...

 

 

 

 

 

 

[은상] 학교에서 / 정기원

 

이층 끝 계단 첫 방은 교장실이다.

문을 열면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 들어와 있다.

책상과 의자는 창문을 등에 진다.

언제나 밖은 엎치락뒤치락한 방대한 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정면으로 마주하면 눈물이 난다.

35년을 걸어왔지만 창밖 풍경의 운동장은 공급 받으려는 특별한 자리다.

아이들로부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와 백일홍으로부터,

미끄럼틀과 시이소와 하늘사다리로부터.

 

아이들은 언제나 푸드덕 날개 짓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날아오르기 위해 제법 긴 시간을 뛰어다니며

넘어지면 일어서는 정교함을 배운다.

내가 가르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품을 때까지.

목표는 가까이에서 허락되는 자신의 방법으로 날아올라,

극복하고 증명하며 인식하는 역사를 만든다.

그것은 꼭꼭 씹어 삼키는 운동장의 언어다. 전교생 85명이

무한동력이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있는가하면 몸을 웅크린 은행나무 둘레로

백일홍이 후렴처럼 맴돈다. 거기, 높고 행복한 하늘이 있다.

한 계절이 지고 한 계절이 피어날 때마다 아이들은 웃고 웃는다.

울고 우는 아이들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감성에 상상력으로

발돋움한다. 창밖은 한 폭의 초심이다.

미래와 온기가 담장을 새어나가지 않게 끊임없이 여민다.

 

하늘 사다리는 자유를 닮았다.

철봉을 옮겨 잡을 때마다 마음속에 고여 있는 격렬한 실재를 만나기 위해

놓치지 않고 전진한다. 여전히 목표를 향하여 전하고자하는 아이들의

몸짓은 시작되었다.

시이소는 정직을 닮았다.

한사람의 무게가 진실을 입증하며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약속, 기우뚱거릴 때마다 혹은 떨려나오는 무게의 목소리. 미끄럼틀에서

스르르 미끄러진 아이들이 창밖 운동장에 가득하다. 멈추지 않기를.

 

 

 

 

 

 

[은상] 가장자리 / 박청환

 

중앙은 항상 고요했다

무거웠고 깊었다

가장자리는 항상 번잡했다

가벼웠고 얕았다

중앙은 항상 먼저 채워지고 먼저 녹았다

나머지가 가장자리 몫

큰 고기들은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크고자 하는 고기들도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이 때로는 첨벙 튀어올라 파문을 만드는 것은

가장자리의 플랑크톤을 약탈하려는 교묘한 술

중앙을 키운 것도 먹여 살리는 것도

가장자리다

중앙은 망각의 장소다

치어들은 커서 중앙으로 향했고

중앙에 도착해서는

가장자리를 잊었

그러고도 뻔뻔한 중앙은 때때로 가장자리를 찾아와

입 안 가득 먹이를 훔쳐 돌아갔다

그러나 가장자리는 

중앙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언제나 먼저 마르고 먼저 얼지만 

가장 늦게 녹고 가장 늦게 채워지지만

비 온 다음 날처럼 연못이 벙벙해지면

중앙으로 떠난 치어를 생각하며

철벙철벙 뒤척일 분이다

갈대를 부여잡고

그리움을 숨기려

스멀스멀 안개를 피울 뿐이다

 

연못의

가장자리는 

자리다

 

 

 

 

 

 

 

[동상] 북한강에서 / 이상재

 

물뱀이 고요를 물고 나아간다

햇볕과 바람이 말려진 그물마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의 그림자만

어부의 손끝을 따라 엮어져 있다

강어귀에 전설이 닿았던 나무들도

그 속을 비워내다 쓰러져 가면

강은 터전으로 일군 사람들 차지다

나무의 빈 곳을 두드려 만든 배는

강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으므로

익숙한 안개의 군무를 지나

물고기의 이동을 따라 갈 것이다

 

달빛은 칡꽃향기를 따라 번져갔다

말질을 하던 사람들이 그물을 거둔다

비린 생선들이 살을 허물어 익어갔고

굴뚝연기는 별을 향해 내뿜었다

강에 흩어져 있던 소문을 물어

수다스러운 새들이 돌아오는 동안

늙은 잉어들은 강을 뒤집으며

거친 숨으로 안개를 끌고 갈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강에 기억을 내리고

강이 터전을 거둬가기까지

강은 언제나 고요하다

 

 

 

 

 

 

[동상] 졸업사진 / 김종범

 

그대들 떠남을 준비하세요

이제 당신들은 은유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에

내동댕이 쳐질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그렇죠!

연못을 가로지른 징검다리와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조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자의식 따윈

중심선에서 살짝 비낀 전신 프로필 사진 속에 던져버려요

 

지나간 날들이 두려운가요, 그럼 이쪽을 보세요

지금 이 순간 영원히 그 시간을 잡아드리죠

혹 나중에라도 이 사진을 보면 당신의 웃는 모습 너머

사진 속에 가두어 놓은 두려움을 깨우지는 마세요

좀 더 발전적으로

그런 후회 따윈 다시 하지마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살짝 웃어요

여러분들의 모습이 인화되어 규격화 되는 때

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할 것이므로

함부로 앨범 따윈 들추지마세요

 

꾹 꾹 눌러놓았던 지난날의 두려움이 당신들을 어떻게 습격할지

안전을 보장 못 합니다

 

그냥 이 순간에 존재하세요 넥타이를 고쳐 메고, 자 찍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동상] 오두막집의 겨울밤 / 장민석

 

깊은 겨울밤

뒤란 대숲에서 사그락 거리며

댓잎 부딪치는 소리

짙은 어둠속에서

소름 돋는 소리로 달려온다

 

이따금 부엉이가 서럽게 울면

이름 모를 산새들 추위에 떨다가

애처롭게 우는 소리들이

무서움 다닥다닥 붙여서

찬바람 뚫고 오는 밤

 

식어가는 구들장에 몸을 웅크리고

무거운 솜이불 뒤집어 쓴 채

겨울밤 슬픈 가락을 엿듣는다

 

먼 곳으로부터 출발한

찬바람이 산등성이를 훑고

강을 따라 내달리다가

산골마을까지 들어와 가쁜 숨 내뱉으며

먼 곳의 겨울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사뿐 사뿐 대숲에 눈 내리는 소리에

산새들 잠드는 시간

어둠을 눈 속에 하얗게 묻어두는

겨울 대숲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안고

산골의 긴 긴 겨울밤을

홀로 무서움 떨쳐내고 있는 아이는

부엉이만큼이나 서러움 속에서도

햇볕 받는 꿈을 꾸며 잠이 들던

 

아주

오래 전 그 겨울 대숲 속의

오두막집이 그리운

오늘!

 

 

 

 

 

[동상] 차를 마시다 / 권덕은

 

중년의 어머니가

고스란히 상자에 담겨 내게로 왔다

 

때깔 고운 보자기를 풀자

쏟아져 나오는 찻잔들, 다구와 찻상

 

고단한 삶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친정집 진열장에서 빛을 내고 있던

어머니의 작은 조각들

 

야야, 인자 나는 다 필요없데이

차도 마실 만큼 마싰다 아이가?

찻잔도 손에 무거븐 나이가 된 기라

 

생의 허물을 또 한 번 벗고

저물어갈 채비를 하시듯

벗은 허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신 어머니

오목한 다기마다

고봉처럼 쌓여있는 어머니의 침묵들

또르르 찻물 따라내니

하나, 둘 깨어나 춤을 춘다

 

침묵은 혀뿌리에 걸리고,

입 속에 스미고 내 몸을 돌아

나직한 경이 되어 허공을 울리고 있다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보듬어 찻잔을 든다

미련 없이 벗어 낸 어머니의 허물을 받아 든

중년의 내가 할 일이라는 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동상] 목재 파쇄기에 대하여 / 김태수

 

온몸은 쇠로 뭉쳐져 있으면서

식성은 어울리지 않게 나무의 속살을 좋아한다.

벌레들 구멍이 숭숭 뚫린 소나무 둥치를 쪼개어

입에 넣어주면 들어가기 바쁘게

몸을 부르르 떨며 씹는 소리가 땅을 울린다.

손발은 없고 입만 가지고 있어도

탈나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주는 것이 고맙다.

쌓아놓은 나무들은 많은데

소화기능이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찐득찐득한 송진이 목구멍에 붙는 것을 주의하라고

일하는 사람들끼리 무언의 눈짓을 보내기도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욕심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씹고 갈고 빻는 모습이

사람이 하는 짓 보다 낫다.

소나무만 골라 먹는 것은 좋지 않아서

가끔 수액이 많은 활엽수도 주고

냄새나는 폐기목을 주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너도 나도 골고루 잘 먹어야 서로가 잘 산다는 것을

이 외진 공터에까지 어려운 세속의 사정이 전해지나 보다.

생장을 멈춘 나무들의 나이테가 안타까워서 그럴까.

병들어 죽은 나무들의 고통을 이해해서일까.

몸은 쇳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정 많은 사람처럼 나무들의 속살을 삼키지 않고

톱밥을 만들어 내어놓는 넉넉함에

축 처진 삶의 기운이 솟아난다.

 

 

 

 

 

 

[동상] 문화 상회 / 유상록

 

난리가 나던 그 해였던가, 피난민 열차가 설 적마다 억수같은 사람들을

부려놓고는 떠났다 한다.

 

사람들이 멧새처럼 터를 잡던 그 시절에, 처녀는 장마당 한 켠에서

채소를 따듬었다.

 

이슥해져 돌아오던 날마다 봄은 자꾸 어지럽기만 해서 걸음마다 달이

울렁이고

 

그런 밤에는 우거진 복숭꽃 마다 꼭 처녀귀신이 앉았다 했다.

 

저 너머 강변에는 몇번이고 큰 물이 져나갔다.

 

손이 야물던 색시의 점빵에서 아이들은 십리 사탕을 입에 물고 십리길의

재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

 

가난을 감춰 쥔 조막손들이 눈치를 볼 때마다, 소같은 눈을 꿈벅이던

신랑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해마다 진 벛꽃이 문에 날아와 말라붙으면 봄비가 몇 번이고 또

씻어내렸다.

 

덧칠을 잊어버린 창살 마디에 꽃물이 때가 졌다. 사람들은 벚꽃처럼 나고

자라 떠나갔고.

 

조약돌같던 점포들은 모두 이가 빠져버린 채, 공터에 남은 슈퍼 집

미닫이가 바람에 들썩인다.

 

노인네는 오늘도 떠나버린 이를 추억하며 누군가를 맞이하듯 문창을

닦는다.

 

이른 봄볕이 정갈한 유리창을 넘어와 과자 박스의 빛을 바래고 있다.

 

 

 

 

 

 

[동상] X레이 소견서 / 강경식

 

X레이 소견서 –박보검 방사선과

 

Name : 김명신 Age/Sex : 51 Date : 2017.봄

 

이 환자의 뼈 사진을 확인한 결과 특이점이 발견됐음

뼈 속이 비어 있고 가벼워진다는 건 조류의 전형인데

파충류도 아닌 포유류에서 조류로의 진화는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몇 안 되는 케이스임

특이변종이거나 애초 조류였음을 숨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환자의 남편에게 몇 마디 소견을 전할까 함.

이마트 계단에서 넘어졌다고는 하나 이 환자는 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음

원인으로는 갈비뼈 속에 품었던 자식들 뛰쳐 나간 지 오래고

척추 마디마디에 디스크판 대신 받쳐주던 남편이 퇴행된 지 오래여서

묶여 있던 벼릿줄과 매심줄이 드디어 환자를 놓아 준 것으로 사료됨.

날개죽지뼈로 펴지는 갈비뼈가 우화등선의 초기단계를 벗어나면

날아야 하는 본능을 걷잡지 못하므로 미리미리 아내의 뼈 속을

채워 넣기 바람

참고로, 이 환자 몸 세포 구조는 현찰과 고기를 좋아하게끔 진화

되었으니 뼛속에 채워 넣을 내용물은 그 두 가지와 접착제 같은 당신의

관심이면 됨.

 

-----이 상----

 

박보검방사선과의원. 오래된 선녀 구조 전문의: 박보검

DR. PARK’S CLINIC OF DIAGNOSTIC RADIOLOGY.

 

 

 

 

 

 

 

[동상] 참나무와 주름버섯 / 안윤미

 

시들음병에도 끄덕없이 50년을 살아온 참나무를 벌목꾼이 베어버렸다.

나무 밑둥만 덩그라니 남아 겨울을 참아내더니 결국에는 말라버렸다.

참나무 썩은 등걸에서 주름 버섯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버섯은 나무를 빨리 썩게 만든다.

썩은 나무들은 또다른 거름이 되어

청설모도 주워먹지 않은 도토리에 싹을 틔운다.

 

겨울의 무서운 추위에 나뭇가지들이 말라붙었다.

말라붙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꽉 부여잡고 있는

썩은 고치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빈껍데기인줄 알고 툭 쳤더니 그 속에서

한겹한겹 옷을 벗으며 나비가 탈출을 준비하고 있다.

 

시내도로를 지나던 검은 차 한 대가 고양이를 쳤다.

무서운 타이어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내장이 제 살갗을 빠져 나왔다.

고양이의 피가 눌어붙은 도로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그곳을 지나던 굶주린 까마귀가

썩어가는 내장을 제 뱃속에 쓸어담고선 펄쩍펄쩍 날아오른다.

 

모든 썩은 것들에는 생명이 있다.

누구도 심지 않은 썩은 나무등걸에 으레 주름버섯이 자라는 것처럼.

주름버섯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듯 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생명은 계절의 순환처럼 이어진다.

봄이 온다는 것을 몰라도 겨울이 지나면 으레 봄이 온다.

봄은 겨울 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썩은 것의 아픔은 봄이 겨울을 밀어낸 힘으로 사라진다.

 

 

 

 

 

 

[동상] 아내의 장독대 / 김헌기

 

손 없는 날 아내가 장을 담근다

눈가에 잔주름이 그윽한 아내는

이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맵시나는 생활한복을 입고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메주를 건져 낸다

한 뭉치 지푸라기 솔로 팍팍 문질러 닦아내어

쨍쨍한 햇볕에 메주를 말려서

정성 가득히 장을 담그는 아내

하늘 한 자락 잘 발려

새끼손가락 휘저어 입맛을 쩝쩝 다시며

꼼꼼하게 연신 장맛을 보고

햇발이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장독 항아리를 문질러댄다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행여 미쳐 내가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답답한 가슴을 쿵쿵 쳐대며

햇볕에 보타져 장졸아 줄 듯

해마다 아픔으로 되돌아올 기억을 쟁여두고

아내의 마음도 저렇게 타닥타닥 보타지는 것일까

나는 온기 가득한 장독대 항아리를

무심코 들여 다 보다가

훅, 순간 뜨거운 숨결이 내 얼굴에 덮치고

문득 뭉글뭉글한 함박꽃이 환하게 피어

복이라곤 일복밖에 없다던 어머니가 비치고

늘 짭조름한 인생 술에 절여 막 살다가

강물처럼 떠내려간 아버지가 밀려오고

옹알이가 한창인 큰 손주 놈

햇살이 시들 때까지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놀다가고

쩌-억 쩌-억 갈라진 메주덩이 사이사이로

푸름 한 곰팡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고스란히 삶의 깊은 손맛을 내는 아내의 장독대

이따금 어디선가 톡, 톡, 톡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

장독대에선 보글보글 장 익는 소리가 나고

어느 덧 펑퍼짐한 동네 아줌마 차림이 물씬 묻어나는 아내는

여직 아물지 않는 상처 하나 묻어두고

벅차게 차아 오르는 장처럼 아내의 삶도 저리 익어가는 것일까

오늘따라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고여 있는 신열이

저 하늘에도 푸르게푸르게 번지는 것일까

 

 

 

 

 

 

[동상] 감자탕 집엔 손님이 많다 / 김일하

 

감자탕은 등골 빼먹는 재미가 쏠쏠해

젓가락으로 후벼가며 빨아먹는 것인데

먹고 나서 구멍 숭숭한 뼈를 보면

내가 빼먹은 등골에 바람이 들어

밤마다 바람 소리로 앓으시던 어머니

굽은 등이 생각난다

 

일가의 기둥이라는 든든한 배경 앞에

나의 잘못은 묵인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뼛속부터 가벼워진 어머니

어머니는 따뜻한 밥이었고

먹고 싶을 때 빼먹을 수 있는 등골이었기에

등이 시린 건 나이 탓이라 일축했다

 

몸꽃인양 번지던 주름

골 깊은 그 길 마디마디에

바람이 살고 있었다는 건

몸을 벗은 일생을 습골, 봉인하며 알았다

 

마주하고 앉아 저마다의 뼈를 발기는 사람들

좀처럼 숙인 머리를 들지 않는

중앙시장 끼고 돌아 허름한 감자탕 집

 

빈 뚝배기에

세상의 어머니가 중추적으로 쌓이고 있다

 

 

 

 

 

 

[동상] 콩나무 시루 / 황덕조

 

발이 시렸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구멍 난 바닥에 제각기 몸을 뉘이고

꿈꾸던 시간들이 마르지 않게

서로의 여윈 발목을 끝없이 적셔주었다.

 

쳇다리를 지나

물받이 자배기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자주 꿈의 언저리를 적셨고

젖을수록 강해지는 꿈들은

조금씩 겨울의 빗장을 풀며 자랐다.

 

아무도 함부로 뿌리 내리지 않았다.

어깨에 어깨를 기대면서도

서로의 아픔과 기억을 더듬어 거리를 두고

서로가 일어서야 할 공간을 위해 몸을 움츠렸다.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한 줄기로만 살아 오를 것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와

무거움 침묵 속에서

제각기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리던

작은 주먹 같은 별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둡고 무거웠던 하늘을 밀어올리고

검은 보자기 속에서 헤아리던 시간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겨울 아침을 녹이는 국 한 그릇,

어울려 위안이 되는 나물 한 접시가 되었다.

오래도록 꿈꾸던 자들의 열망을 모아

소박한 밥상을 다독이는 샛노란 희망이 되었다.

 

 

 

 

 

 

[동상] 너희들이 내 삶의 시인 것을 / 박현동 

 

가난한 시골의 詩人 선생님을

꿈꾸었지만

학급 환경정리를 위해

시 한 편을 달라는 실장의 말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시 한 편이 없어 못내 부끄러워

빈 교실 먼지 낀 책상 위에

그 부끄럼을 끄적인다.

괴로울 고 苦三 담임으로

입시지옥의 수문장처럼 버둥대면서

하루 종일 순종만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꿈이

악몽이 되는 요즈음의 나는

얼마나 또 어리석은 열심인지

그런데 아이들아

너희들이 졸리워 떨구는

그 안타까운 고갯짓이

하루에도 열두 번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는

그 눈물겨운 삶의 무게도

세상 속의 나로 서기 위해

세상 속의 나로 꽃 피기 위해

가슴에 거름을 품어

아프게 움트는 것이기에

꽃 피기 직전에 내지르는

절절한 향기 같은 것이기에

그런 너희들을 일구는 내 사랑이

그런 너희들이 내 삶의 詩인 것을

난 무엇을 바라

또 다른 부끄럼을 끄적이겠니.

 

 

 

 

 

[동상] 어떤 소리 / 김희관

 

동네 정육점에 들러

돼지 목살을 사들고 집으로 오는데

고기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꿀꿀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달아오른 불판 위에

붉고 두꺼운 목살들을 옹기종기 눕히자

고기들은 지글지글 소리 내며

뜨거움에 마구 몸을 비틀었다

 

익고 있는 고기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아내는 돼지처럼 먹는다고 핀잔을 준다

 

중심을 잃고 허둥지둥 살아온 흠 많은 남편임을

아내와 한편이 된 눈치 빠른 돼지도 알고

불판위로 너도 얼른 올라가야지 하며 소리칠 것 같아

 

고기 숙숙 잘 넘어가던 내 목젖은

죽은 돼지를 위해 경건하게 묵념하듯

그만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현실에 안주하며 짜부라진 내 귀와

어설프게 열려 있어 두려웠던 내 입을 자책하며

술기운에 아내에게 넋두리만 길어진

창 밖 별들에게도 부끄러워지는 밤이었다.

 

술에 취해 집으로 오던 어느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있던 정육점 앞을 막 지나는데

정육점에 걸려있던 돼지들이

여태껏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구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꿀꿀! 정신 차려! 꿀꿀꿀!

 

 

 

 

 

 

[입선] 노란 미소 / 윤상선

 

[입선] 얼음다리 / 차재연

 

[입선] 가라앉은 유채밭에서 / 이송이

 

[입선] 출장 가는 길 / 이건섭

 

 

 

 

[입선] 섬 아닌 섬 / 박창식

 

산길 험해 예전엔 자갈치서 기선으로 창아가던 곳

가슴 속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날

그대 안부가 절절한 날, 송도로 간다

 

사시사철 하얀 옷고름 풀어헤치고

푸른 젖가슴을 내놓는 그 바다

밤새 젖은 별로 깜박이던 묘박지 외항선들도 꿀잠에 빠져들고

밀물에는 끝없이 실려 온 상사가 켜켜이 쌓인 백사장에는

고운 모래가 눈물처럼 반짝거린다

 

고즈넉한 언덕바지 노송 한 그루, 해풍에 붙박인 채

굽은 등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풍파가 그은 시간의 날카로운 빗금이

나이테로 점점 둥글어지는데

언제나 올까, 등이 굽도록 기다리는임

 

파도가 쉴 새 없이 낮은 음표로 작은 모래 건반을 두드려도

납작 엎드린 밤은 불면을 뒤척거린다

 

언제나 올까

밤바다 가득 수놓은 금실 달빛을 거북섬 위에다 곱게 펴서 

그대 사뿐히 지르밟고 올 구름다리 하나 놓아볼가

 

이국정취 물신한 밤이 찾아와 꺼져가던 추억들에 불을 밝히면

섬 아닌 섬에서 손짓하는 그대

 

횟집 수족관에 갓 들어온 어리둥절한 고등어 한마리가

이 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놓치고 있다

 

 

 

 

 

 

[입선] 어떤 일출 / 최범석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이 알을 낳는다

어둠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양수가

검은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수평선 너머에 환한 얼굴 살짝 비친다

깊은 속울음으로 산란의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

아이처럼 어깃장 놓던 방게도 움직임 멈추고

수증릉 수비하는 갈매기도 날갯짓 멈춘다

해변에 늘어서서 이 순간 기록하는 카메라도

숨죽인 셔터소리만 조심스럽게 쏟아낸다

드디어 전설의 용울음소리 그 파문이 밀려오고

금방이라도 단물 쏟아질 듯한 수밀도 하나

조금도 흩트림 없는 둥근 얼굴로 둥실 떠오른다

고통의 틈을 메우던 양수덩어리 흐물흐물

고빗사위에 쐐기처럼 두 손으로 떠받치다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보고 탯줄 잘라낸다

산란이 끝나고 깊은 바다에서 솟아나는

허탈한 신음소리 출렁출렁 밀려오는데

막심 므라비치는 횟집마당에서 엑소더스를 연주하고

감은사지에서 사라진 종이 소리없이 울린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갈매기 때 일제히 날아올라

붉은 하늘에 까맣게 너울대며 축하비행을 한다

동해바다에서 용이 되어 천년을 산 문무대왕이 

이제는 눈부신 하늘의 전설이 된다

 

 

 

 

 

 

[입선] 거꾸로 매달린 사람 / 김홍기

 

[입선] 말 / 김난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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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소금꽃 / 김민규

[은상] 고드름 / 채규근

[은상] 옥자 / 선희석

[은상] 광대 / 김동현


[은상] 몽돌 / 서해웅


해안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여수 몽돌 바닷가

발가락 사이로 물이 스미듯

돌과 돌 사이사이로 파도가 들어치고 있다

바위섬과 뭍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바다 위 넘실대는 윤슬

햇볕에 달구어진 돌 위에 앉아 

몽글몽글한 살결을 어루만져 본다

파도도 보드라운지 자꾸만 밀려와

꽉 움켜쥐고는 이내 다시 부서지고 만다

얼마나 견뎌야만 이토록 매끈해질 수 있을까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깎이고

거친 바람에 저네들끼리 부대끼며

모난 얼굴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견뎌야

안으로 안으로 더 단단해질 수 있을까

까만 돌 위 점점이 박힌 하얀 무늬들

아픈 시간의 반짝이는 기록들

징검다리처럼 한발 한발 따라가다 보면

거기, 커다란 손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가 있다





[동상] 풍장 -매미 탈피각 / 이호종 



[동상] 아버지의 배 / 박수찬


선창에 목줄을 메고 온종일 삐걱이는

아버지의 작은 목선은 경전이고 서당이다

이물에도, 고물에도

독해 할 수 없는 글들이 가득하다

오늘도 솜금기 가득 머금어 독 오른 해풍이

어깨동무를 겹겹이 하고 몰려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아버지의 팔순 주름을

갑판에 서각을 하고 돌아간다

새롭게 새겨진 글자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눈은 회한의 글을 쓴다

너도 이제 다 늙어 가네

한 세상 산다고 고생 찬 많았데이


한국전쟁 때

포탄에 다리를 잃은 아버지

곰삭아 살이 떨어져 나간 건현에

송판을 덧대고 못질을 하신다

바람이 말벌소리를 내며

갑판에 벗어 놓은 의족 안을 기웃거려도

신경은 온통 뱃삼에 있다

9607028-6408852

연안지방 허가판을 주소처럼 달고

바다가 되어 가신다




[동상] 타카시마로 가는 길 / 박기준

[동상] 폐경 / 김형만

[동상] 산정묘지 / 정기원



[동상] 겨울 갯벌의 저녁 / 김두길


지퍼가 열린 해안선

질척한 갯벌의 내장이 쏟아진다


언제인가, 말이 통하지 않는 침묵으로부터

귀를 테러당한 적이 있는 거기,

몇 봉지 탈수가 덜 된 파도의 물집이 남아 있고

온몸에 울음의 면적이 퍼져 있는 갯바람의

희미한 궤도가 떠돌고 있을 뿐


쓰러지는 방법을 배운 겨울 갯벌은 이제

다시는 지상에서 직립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걸어온 길을 뱉어내고 있는 평면

생각하면, 끝은 시작의 후유증에 발과할 뿐

반드시 세상의 어딘가에

끝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평면은

왜 우리의 생애처럼 항상 끝을 향애 가고 싶을까


천정이 없는 북반구 위로

대규모의 날이 저무는 시간

죽음처럼 식어버린 방파제 위에 서서 나는

어쩌면 시작보다 더 필사적인 끝을 위하여


살다가 결국 나였음이 밝혀질 그대

어느 반대편의 저녁 속에서

내 등에 기대어 슬슬이 저물고 있을

그대의 빈 몸 속으로


셀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새떼를 날려보낸다







[동상] 저녁의 산책 / 신현숙



[동상] 자반고등어 / 박정훈


갈길 잃은 흩어짐으로 아직 남은 늦더위가

오후 두시 골목시장 좌판을 훑고 간다


비린내 가득한 좌판 위로 자반고등어가

지친 늑골의 육신을 내려놓고 외마디 외침으로

공양의 길을 가고 있다


검은 빛 감도는 허파 사이로 

오대양 심해 온갖 세월을 유영하던 움직임들이 

이젠 숨죽여 발가벗은 몸으로

미소같은

그윽한 편안함이 묻어 있다


소금에 염장되어

자신의 마지막 한 점 살점까지도

몸 보시 하는 인자한 황금빛 웃음에는


한여름 그 길고 험한 물길질 대신,

이젠 모든 생리작용을 마치고

세월의 빗장을 열어둔 채

죽음의 정원을 짓는

늙은 누에의 거룩한 영혼의 입놀림같이

자식들의 굶은 배를 위해

물배 채우시는 늙은 어매의 얼굴이 있다






[동상] 전당포 / 이희복


갚아야 할 죄 값

빚 때문에 영혼의 반을 팔았다

오른팔을 올리면 교회 탑 뾰족한 지붕이 서고

왼쪽 눈을 뜨면 사창가 울음을 핥아내는 입술이 열렸다

나는 젊음을 담보로 삶을 팔며 술로 살았다

하나 둘 늘어나는 빈병의 공간 속에

정신적 치유를 위한 고뇌를 담으나

깊어가는 상실은 막을 길 없고

살기 위해 살찌우는 빚 덤이

짙은 화장으로 잠이 든 아내,

들락거리는 푼돈은 아내의 취기에 가난만 입힐 뿐

오늘 쪽 어깨의 통증엔 아무런 보탬이 없다

뜰 때마다 쌓이는 눈꼽에 가려지던

나날이 무디어지고 낮아지는

십자가의 높이와는 아랑 곳 없이

육신을 쪼고 있는 전당포의 팻말은 지금도

부엉이 눈처럼 껌뻑거린다








[동상] 로드킬 / 심진경




[동상] 항구의 아침 / 이규준


아침마다 항구에는 비늘이 날을 세운다


오가는 파도에 몸을 싣지 못하고

그물에 갇혀 쪽잠을 잔 물고기들

밤새 접혀있던 비늘이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켠다


사십년 전, 칡같이 질긴 보릿고개에 

모진 입 하나 덜고자

자갈밭 두 마지기 덤으로 안겨 주면서

부초처럼 떠 밀려온 시집살이

그저께 물때 보고 돛을 올린 김 영감

떠난 날이 제삿날인가, 돌아올 날 기약 없어

곱게 모은 두 손, 밤새 사발에 넘치는 기도

그 염원 결코 헛되지 않아

만선의 깃발 올린 낯익은 돛단배 하나

아낙의 아침 숨결이 길다


수평선을 허무는 아침 해가

항구의 어둠을 둘둘 말아가자

하나 둘 무게를 버리는 배들

비었던 좌판은 뜨거운 호흡으로 열이 오른다

마지막 비린내마저

싹슬이 해가는 경매사의 갑싼 흥정

아침 항구의 좌판이 식어가고 있다








[동상] 편의점 24시 / 김화숙


그녀는 마네킹처럼 유리창에 진열된다

마지막 버스가 떠나자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빛나는 순간,

열한시에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던 남자가

열두시에 급히 와서 생리대를 챙겨 갔다

그의 다급한 발소리너머

고양이가 밤하늘을 홀리고 있다

창 쪽에 두 개 남은 사발면

붉은 눈의 노인은 올 때마다 같은 면을 선택한다

허겁지겁 건더기만 쑤셔 넣고 소주는 따로 붓는다

그는 마트에서 세끼를 산다


겨울 속에 인스턴트 그림이 부유한다

계산기 앞에 서 있는 그녀도 인스턴트 식품이다

하루와 하루가 물려 있는 시간은

마법에 걸려 영원으로 간다


하루가 어떻게 끝나는지 몰았던 날들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몰랐던 날들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유리창을 서성이고

시간을 세고 있는 그녀는

눈동자가 뿌옇게 닳고 있다


생활이 품목으로 떠 있는 공간에서

그녀의 시간이 박제되고 있다


정거장에 깨어 날 때까지 한 세기가 왔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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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어느 저녁 반찬 / 이효조

[은상] 창 / 김태인

[은상] 꿈구는 남녀무늬 항아리 / 김일하

[은상] 어미의 돌절구 / 김기범

[동상] 대화 / 김진대

[동상] 석쇠 / 고순용 

[동상] 일상 / 문기훈

[동상] 양파 / 윤명호

[동상] 온기를 쫓아 뒷걸음치는 지우개의 순애보 / 서영호

[동상] Her / 이동백


[동상] 뽕짝의 바다 / 김미숙


수문이 열렸다

먼 바닷물이 거품을 물고 닫힌 가슴으로 온다

막혔던 숨을 내쉬며 혈색이 도는

허언구의 바다

바닷물은 돌아갈 길을 잃었고

수평선 너머를 기억하는 물고기도 사라졌다

몇 년째 갯벌에 묶여 뼈가 삭아가는 폐선

육지가 된 섬은 멀리로 비틀거리고

타관 사람들 발소리만 흥얼거리는 그곳

보름달이 떠도 마지막 씨를 뿌린다

하얀 머릿수건처럼 물이랑을 떤다니는 어선에서

종일 뽀짝의 가락

막걸리와 땀 냄새에 취한 물결이

흥얼흥얼 배를 밀고 가는데

수문이 열릴 때마다

밭은 기침을 하는 바다 위로 낮은 한숨은

유행가처럼 흘러가고






[동상] 편지-늙은 느티나무 / 이병두

[동상] 어머니와 트로트를 / 심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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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푸른 감자 / 윤영규


햇감자를 덮어 둔 신문지에는

뜨거운 날들의 기록들이 구겨져 있다

까막눈이 부끄럽다던 어머니에게

신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덮는 것이다

읽지 못하는 세상의 소란을 들추고

푸른 색이 도는 감자를 고른다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햇빛을 타박하면서 알아차린 것은

감자에게 번진 몽고반점

감자는 아무도 몰래

빛줄기가 만든 요람에 누워

옹알이를 했나보다

촉이 낮은 알전구 불빛에도

감자는 옴팡눈을 뜨고 있다

어머니가 읽지 못하는 활자들이

으깨지면서 파열음을 내는지

감자의 옹알이가 자꾸 들린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호외다






[은상] 봄호수 / 구서영


봄호수가 햇살을 만나면

크리스탈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겨울 묵은 이불홑청 털어 말리듯

차르르 차르차르 속을 뒤집으면


내 깊은 꿈에서 푸른 잠자던 잉어가

뽀그르르 하품하며 깨어나고


꿈결인 듯 그대 머리결인 듯

능수버들 보슴보슴 솜털 보듬는 소리


묵은 벚나무 가려움에 투둑-툭

꽃망울 터트리는 소리


예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봄은 물가로 먼저 와서

환희의 교향악을 울리나니


부지런한 아들은 함빡

개나리꽃 웃음 흘리며 몰려 나와


폴리프로필렌 등산바지 무르팍 언저리

걸을 때마다 삐익삐익 스치는 소리


이 봄 한 무리의 종달새 된다







[은상] 할미꽃에게 길을 묻다 / 이규환


과수원에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에 부고장이 걸렸다

집에 들인 객에게는 야박하게 굴지 말라시며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내어 주시던

속 깊은 마음씨를

가시 숲 헤집고 참새 떼가 물어 나른다

대청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길게 누운 그림자는

할머니의 유품을 챙겨 펄럭이는 만장을 끌고

상주가 되어 산으로 간다

평생을 베풀며 살아 온

풀려나온 정 넘치는 이야기가 아지랑이 등에 올라타고

따사로운 햇살의 추모 속에

상수리나무 옆에 걸터 앉은 바람이 곡을 한다. 후두둑 후두둑

꽃상여 스친 자리

부풀은 홀씨가 떠돌다 정착하는

지천으로 널린 야생 풀꽃의 자서전처럼

다채로운 참살이로 힘겨워 할만도 하지만

세상살이 경험 많은 꽃들은 피었다 지고

마지막 가는 길에

문늑 고개 들어 할미꽃에 길을 묻는다

"이 길이 그 길이요?"







[은상] 빈집 / 정혜찬


소리를 잃은 워낭은 텃밭에 묻히고

주인을 잃은 자전거는 녹이 슬어 잠든 탓에

삐걱거리는 녹슨 양철 지붕만이

아기를 대신해 울음을 울건만

메아리 쳐 오는 것은

텅 빈 툇마루에 올려진

몇 장의 통지서


목마름을 잃은 수도꼭지는 침묵에 잠기우고

손님을 잃은 대문은 마당에 누운 탓에

마른 잎 몇 개 남은 감나무만이

쓸쓸한 엽서를 붙이건만

바람 불어 가는 곳은

텅 빈 그리움에 익어간

새까만 장독대







[동상] 가을 오후 2시 / 김여선


가을 하늘

푸른 병 속의

소주들이 넘실거린다

갈 곳 없는 바람만

빈 테니스장

철조망 사이로 들락거리고

모두들 단풍구경에 바쁘다

가끔 쳐다본 하늘엔

아직도 어제 마신

파란 소주의 숙취로

머리가 푸르도록 어지럽다

바람도 걸리지 않는 철조망에

어깨를 기댄 애기똥풀

씨앗도 맺지 못한

노란 똥꽃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사랑도 가끔은

철 늦은 애기똥풀

노란 똥꽃처럼

열매를 맺지 않아도 좋으리







[동상] 나이 서른 / 김봉대 


나이 서른은

남자는 가장이

여자는 엄마가 될 나이다


나이 서른은

청춘도 아니고

기성세대도 아니다

스스로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나이 서른은

후배도 되고

선배도 되는

처신이 애매한 때이다


나이 서른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삶도 팍팍했을 것이다


나이 서른은

어느 날 

갑자기

뛰어 넘고 싶은 개울이다


나이 서른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못하는

삼불 시대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린다


나이 서른은

치열하게 살아야 할 시간이지만

어느 듯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시간이다


나이 서른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때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갈 길을 잊은 돌아가지 못하는 철새가 된

나 자신을 본다







[동상] 아이스크림이 녹는 시간 / 이용주




[동상] 꽃 핀 것이 좋은갑다 / 김형만

[동상] 갈대 / 심상대

[동상] 문고리 / 곽향련

[동상] 블루(부제: 파도와 소녀) / 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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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과자 주세요 / 이신율리

 

 

아는 과자는 어제 다 사라졌어

달콤한 맛을 알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이야

사과는 계모가 다 먹어치웠지 내겐 사과 대신 다크초콜릿만 주고

 

유혹하지마, 모르는 것은 달콤하지

 

계모를 동그랗게 묶어 마카롱을 만들었어

빨주노초파남보 다음은 분홍이 되는 이상한 나라에서

서로 모르는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거짓말 두 개 넣고

 

맛없는 크림이 자랄 때까지 과자는 햇살의 공식을 모른다고 했지

 

, 터지는 멘토스와 다이어트 콜라 폭발하는 계모가 좋아

 

폴란드초코와플 테니스공껌 턱 빠지는 풋젤리 모르는 과자 주세요

 

쓴 맛도 알고 싶어?

쓴맛이 아는 과자를 안다고 먹고 칡촉

아는 과자가 모르는 과자를 모른다고 먹어치워 악마의 잼 누텔라

 

계모의 주머니가 깊어지고 있어

아는 과자만큼 손목이 따뜻해져 거울아 거울아

 

주머니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츄파춥스 일곱가지 맛을 빨면서 모르는 과자를 찾아가지

 

 

 

 

[심사평]

 

오장환문학상 신인상에는 총 107명의 응모자들이 모였다. 수준이나 완성도 면에 크게 떨어지는 시들은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이 감상적이고 설명적이며 관념적이었다. 시의 언어가 산문의 언어와 다른 점은 의미의 명료함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함이다. 세계가 확정해놓은 의미로부터 언어를 해방시키기 위한 시의 전략이다. 때문에 시의 언어는 감상과 설명과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세계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 자신의 시가 어떤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일이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김미소, 김점복, 김창훈, 최진명, 이신율리 등 총 다섯 명의 시들이었다.

 

페이드 아웃4편을 보내온 김미소의 시들은 일상적 대상과 사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목소리로 인해 일상은 일상 너머 존재하는 비극성을 서서히 드러낸다. 특히 여름에게는 폭발적인 목소리의 흐름이 여름이라는 계절에 새로운 상상력을 끌어들이며 성장과 소멸, 삶과 죽음이 난반사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시의 목소리가 지닌 리듬과 그 리듬이 불러일으키는 파토스는 우리를 참혹하지만 매혹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다른 시편들은 아직 너무 거칠고 손쉽게 관념어와 추상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더 충분한 상상과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비대칭의 아침4편을 보내온 김점복의 시의 장점은 대상을 낯설게 우리 앞에 새롭게 존재하도록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발화 방식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철저하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아예 대상의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방식. 둘 다 그에게는 효과적인 시적 전략으로 보였다. 다만, 대상과의 거리가 어정쩡할 때, 대상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거나 대상에 대한 피상적 해석을 가하는 시들이 다소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시가 상식적 세계를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떤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계동 104번지4편을 보내온 김창훈의 시에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묘사다. 치밀한 묘사가 끌어들이는 이미지는 대상과 정황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해 시가 마주한 세계를 낯설게 다시 경험하도록 한다. 특히 그의 시 환생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감각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할머니라는 어쩌면 번연할 수도 있는 소재를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서 보신 분 연락 안 해도 무방해요라는 역설을 끄집어낸다. 그 역설을 통해 환생은 복잡한 다층적 의미를 띄고 우리 앞에 다시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취는 많지 않다. 다소 식상한 발상에 너무 기대 있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협소한 현실로 수렴되어 상식적 결론에 이르는 시들도 있었다. 이미지를 좀 더 밀고 나가는 힘 그래서 모르는 세계로 시를 진입시켜 보는 용기가 더 보태진다면 조만간 그를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A44편을 보내온 최진명 시의 존재론적 시선은 매력적이다. 그는 일상의 감각들 확장시키고, 그 감각에 의해 파생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그렇게 외부에서 길어 올려진 감각들이 내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와 버무려지며 내면과 세계가 조우하게 된다. 내면도 세계도 그 과정에서 변화를 겪는다. 다른 내면과 세계가 그의 시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흥분하지 않는 점은 그의 시의 또 다른 매력이다. 환촉은 그가 어떻게 감각과 이미지를 운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미지란 결국 하나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통합적인 감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도 이 시를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시들은 관념적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여서 무척 아쉬웠다. 관념은 결국 세계를 축소하고 자폐적이고 왜소한 내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최진명의 시를 손에서 내려놓는 데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신율리의 시를 선택했다. 통통 튀는 감각으로 무장한 자유로운 상상력은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리듬을 통해 그 상상력에 생기를 불어넣는 점은 그의 시가 지닌 큰 장점이었다. 이런 점은 다른 응모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었다. 그럼에도 거칠지 않고 과하지 않으며 매끄럽게 시를 진행하는 솜씨는 그가 만만치 않은 내공의 시간을 거쳐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는 과자는 어제 다 사라졌어라고 시작하는 그의 시 모르는 과자 주세요는 흔한 백설공주 계모 모티프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다양한 과자의 감각과 발랄한 리듬과 어우러지며 상식적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며 우리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로 데려간다. 결국 모르는 과자모르는 세계의 상관물이며, 그 세계로 진입하려는 자의 불안을 아이러니하게도 발랄한 리듬과 감각적인 이미지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시에서 상식세계의 윤리를 대상에게 들이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역설적 접근이 가능해지며 이러한 접근을 통해 새로운 윤리가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보여주는 모르는 세계의 모습이다. 다만, 그의 시에서 일상적 정황에 너무 도드라질 때 감각과 리듬만 남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점은 그의 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아쉽게 당선에서 밀려난 분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곧 좋은 소식으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모르는 세계로 그의 시가 통통 튀며 뛰어나가길, 그래서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상상력의 언어로 우리 세계를 다시 창조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우리 시의 영토가 조금쯤 넓어지겠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김근(심사평), 안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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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굴되고 있다 / 방윤후


화석처럼 유적처럼


몇 억 년 후의 눈빛이 샅샅이 훑고 있다

캐릭터들이 화면에서 사실처럼 그려지듯

내 몸은 시뮬레이션 중


얼굴 주름처럼 점점 사라지고 자라목이 펴지면서

화소로 온전히 박동하고 있다

음악, 집, 자동차, 음식이 매장된

21세기 지층에서 표본으로 떠내는

누군가의 붓질,

멈칫멈칫 계통의 척추가 드러나고 있다


지구 대멸종 전후 살았던 일생이

조사되고 세밀히 분석되는 중이다


상아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긴 속눈썹의 태아들,

조류 곤충들의 돌출은 없었다


처음 수천 년의 변화가 백 년, 백 년이 십 년,

십 년이 불과 몇 달, 그 가속에서

추정되는 대량의 인류


편리는 문명을 채취하여 절멸로 이글리기도 한다

머리카락 혈흔 침만으로 분류되어

1,2초 후면 다운로드 된다

일망타진되는 진화는 얼마나 덧없는가


인공지능이 현생 생물을 대표할 때

완벽하게 복원되는 사람들이

무릎 꿇린 채 인터넷 공간에서

팝업창으로 분류되고 있다


발굴작업은 지쳐 간다

남은 생 끝까지 캐기에는 가치가 없는 걸까


생존이 도로 묻혀 지고 있다

나는 반쯤 드러났다 다시 덮인,

퇴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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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행 / 오선주

 

경주에 오면 모든 것이 둥글어져라

토함산의 메아리처럼 둥글게 둥글게

떠오르는 태양을 안고

미소를 머금은 우리 님의 얼굴에도

연꽃송이 필락말락 떠오르는

고요한 아침이 묻혔어라

한 발 두 발 걸어와 한 몸뚱이로 둥글어져라

새싹 키우고 벌레 키우고

어머니가 된 고분처럼 둥글게 둥글게

굽은 능선 따라 모난 것도 둥글어져라

천 년 전 월지에 띄운 신라의 보름달도

경주에 오면

아라비아 호인(胡人)도 석굴암의 부처님도

굴렁쇠를 굴리던 아이처럼 아이가 되라

주령구를 돌리든 염주를 돌리든

쳇바퀴 도는 다람쥐의 삶,

회전문에 낀 옷자락도 닳고 닳아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둥글어져라

그믐에서 보름까지 한 천 년쯤 더

윤회하는 달이 되어 둥글게 둥글게

항아리처럼 푸짐하게 만다라 되어

경주에 오면 고운 말만 아는 혀처럼

에밀레 에밀레, 슬픈 소리 아니라

천지를 진동하는 꽃향기로 피어나

신라인의 노래를 둥글게 둥글게,

오랜만에 그대, 경주에 오면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도 하게

천 년 전 임인 양 조금은 서먹하게

웃는, 그저 웃는

이름 모를 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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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숨 / 박혜정


숨은 것도 다 들킨 봄이다 삼월의 봄꽃들을 말려 지갑에 90도로 접어 놨다 꽃은 그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피는 거다 가끔 난 당신에 대해 마음만 앞선 것은 아닌지 할 때가 있고 또 가금은 내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나인가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뭘 모를 때가 많다


몇 해 전부터 당신은 나의 세계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보면 나는 없고 당신만 있다


맑은 하늘이 나무에 걸린 가을 나뭇잎의 날씨를 만들자는 당신의 작음 숨소리가 지금도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날아가지 못했다 꽃피우지 못한 말들이다 또 부메랑처럼 내게 다가온다 밀려와 나를 생각의 굴레에 빠드린다


무얼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없고 나 없는 당신의 세계를 말하고자 한다


당신의 세계는 어지러운 생각이다 더러운 생각이다 당신을 생각하면 머리가 깨진다 깨진 머리카락들이 징글징글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숨소리다 꽃이 숨을 내뱉는 공기다 꽃이 피워 올린 생각이다

제발 가, 다시 오지 말고 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생각이다

생각을 기차역에 두고 온 날이면

구두가 먼저 나를 벗는다

구두 굽에 달라붙은 당신, 내가 생각을 버리고 왔는데 생각은 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야, 하고


어디선가 내 밤을 보고 있는 당신의 숨소리가 들린다








생의 얼굴


사진기가 없던 시대에는 얼굴이 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늦은 여름의 길거리에 화가 많이 난 새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빨간 물감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빨갛게 물든 새를 바라보는 오후의 다섯 ㅣ시도 하나하나 물들어 갔다


버스 정류장에 앉은 바람은 여름 온도로 더 높아진다

붉은 외투를 입다가 버리는 식은 바람들은

새의 흐릿한 눈동자처럼 휙

바람의 조각난 눈동자처럼 휙휙

핏빛 옷을 벗는 새들의 얼굴은 점점 늘어난다


다섯 명의 새들은 또 다섯 명의 새를 데리고 온다

새의 부리는 또 다른 눈이라고 의지한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기울기는 더 낮아진다


새들이 전해 준 소식들은 전부 다 그러했을 것이다

모두 같같은 안부하며 새의 부리가 쪼아대고

가엾은 새들은 부리를 땅에 묻고 죽어 간다

땅에 새와 얼굴과 현미경을 묻는다


무덤을 찍는 렌즈는 투명하게 알고 있다

현상된 사진에는 새의 영혼이 있을 것이다

더운 길거리에 화가 나 죽어 간 얼굴들도

바람이 된 빨간 물감들은 그대로 있다









모래시계를 삶았다


모래시계를 커피포트에 삶았더니 저녁 9시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시곗줄로 엮어 긴 바늘 뒤에 숨겨 두었습니다 감춘 시계의 손톱이 짧은 바늘과 나란히 걸어갑니다 잠깐 멈춘 사이 5월의 어둠은 커피포트 속에 끓고 있었나 보죠 당신은 문구점으로 라이터를 사러 간다고 했습니다


내 손바닥의 그림자는 시계를 좌우로 뒤집어 굽고

시계에 묶어 둔 체크무늬 리본 보플이 아름답게 떨어집니다

당신에게 숙제를 시킨 것도 아닌데 필통은 보이질 않습니다

라이터와 당신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천천히 식어가는 모래시계가 내 갈색 눈동자를 쿡쿡 찌르고 있습니다

시계가 내지르는 소음이 극성맞게 나에게 달라붙는 밤입니다

창문에 박힌 별의 발자국이 똑딱거립니다


당신은 어딧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이 공식의 수수께기를 나에게 남겨 두었을까요? 풀리지 않는 문제와 차가운 시곗바늘의 뾰족한 모래들이 부엌에서 픽픽 쓰려져 갑니다

당신이 자주 눕던 소파의 자세처럼요








목련나무 신분증


앞마당에 목련 나무가 새벽부터 울먹거린다

딸각거리는 기척들이 몸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물들이 흡수가 되어버린 몸, 나는 두 개의 몸이다

목련 나무가 좋아하는 부스러진 돌멩이들이 있다

달빛의 두 볼이 스친 별들의 어깨들도 고요하다


부지런하게 펄럭거리던 개매의 손짓들을 살펴본다

내 안에 이런 것들을 가만히 되새겨보는 새벽,

나는 아내에게 내려온 조금은 이른 봄을 생각한다

앞구르길기를 하며 그녀 앞에 움직이지 않는 봄,

뒤구르기를 하며 다섯 해에 떠나간 아이의 계절을


나의 신분증에는 아내의 봄이 들어 있다

봄이 두 개, 몸도 두 개라고 불렀다.

마치 아이와 중첩이 된 임산부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를 천천히 갖자고 말했었다


입버릇처럼 아내는 우리가 아이를 갖는 게 아니야,

아이가 우리에게 오는 거라며, 목련 꽃잎이 잘게

떨어진 골목에서 울음들을 거침없이 토해내기도 했다

꽃잎까지 떨어드린 아내의 울음은 온 집안에 있는

가구들과 내 마음까지도 축축하게 물들여 놓았다


아내는 밤의 밑바닥에 배냇저고리를 내려두고서야

하루의 간격에 잃어버린 잠을 찾을 수 있었다

창틀도 조용한 저녁에는 작년에 심은 목련 나무의

작음 잎사귀를 손등처럼 쓸어내렸다, 아내와

아이의 작은 귀처럼 핀 목련 나무의 꽃망울

곁에 서서 내 검은 눈썹들을 말끔히 흘려보냈다







무덤이라는 침대


아버지의 두 다리가 침대 가로선을 넘어간다

양복바지를 살 때도 실의 넓이는 두툼했다

물방울들이 지겨운 빛을 꺼둔 바밤이 되면

양복을 이입은은 아버지는 내 방으로 기어 온다


-아들아, 밥은 먹고 다니니

용돈을 얼나마 부족할까


삐뚤엊어진 글자들이 환생을 하는 아침이 오면

토요일의 햇빛들은 침대 다리들을 깨물고 있고

아버지의 두 다리는 내 책상 위에 가지런하다


나는 독일어를 검정 볼펜 뚜껑에 끼워 두고

아버지의 긴 다리를 접어 무덤에 놓는다


달력에 붙어 있는 숫자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이번 달 통장에 잔고가 남은 동전 소리가 딸랑거린다

아버지의 두툼한 양 발바닥의 울퉁불퉁하게 새겨진

흰 눈송이 냄새는 늘 부드럽게 내 콧등을 만졌다


-아버지, 여긴 방에요 쉿!

오늘 먹어야 할 알약을 놓고 갈게요

제발, 소주는 하루에 한 잔만요


오늘도 아버지는 치매를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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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 움찔할 때 외 4편 / 안성군  

이른 아침 무에 들었던 

거무스름한 살얼음 


점퍼를 덮고 잠든 사람 

그 사람 밖으로 삐죽  빠져나온 

푸릇한 발을 한참 바라본 적이 있다. 


햇살 들 때까지만 바라봐야지 

햇살에 무가 움찔할 때까지만 

바라보아야지 하며 

지켜본 적이 있다. 


동사(凍死), 제 계절에 죽지 못한 

철없는 주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는 구덩이에 묻혀 

노란 싹을 뚫는 봄을 기다리고 

생채기 많던 손을 골라내고 

흙 묻은 신발을 골라내던 

아무리 끌어 덮어도 

모자란 겨울밤이 있다. 


마치 웅크린 몸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나와 있던 

무의 파란 웃통을 본 적이 있다. 




집이 운다


한파주의보에도 

잠잠한 집 

바짝 웅크린 잠 같은 집 위로 

흰 눈이 내렸다. 


 그 사이 짬을 내어 풀린 한파 

웅크렸던 집이 

훌쩍훌쩍 

똑똑 운다. 

지붕 밑 주림을 

지붕 끝이 안다는 듯이 

적요하게 집이 운다. 


우는 집은 고아 같다 

어쩌다 화목한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망연하게 서서 울던 집 

을씨년스러운 집은 모두 단란(團欒)의 유품 같다. 

집 마당에서 떨고 있는 개 

개를 만져주는 푸르뎅뎅한 손 

두 귀가 한껏 넘어 간다. 


무럭무럭 조난신호 같은 연통 

그 난로 속으로 

한 토막 넣어 주고 싶은 

소주 반 병 

울던 집도 뚝 그치고 

유일한 소일엔 바람이 빠져 있다. 


하루의 끝자락은 

꾸덕꾸덕 힘이 세다. 






총체적인 총체 


엄마는 자주 

총체(總體)로 나를 때리곤 했다. 


엄마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화근인 나를 화풀이처럼 털어내곤 했다. 

나는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 


엄마의 주특기는 

총체로 온 집 안 구석구석을 털어내는 일. 

나는 집안의 어디쯤에 

웅크리고 있는 구석일까 


엄마와 나는 서로의 근심 

 근심이 구석이라고 생각했다. 


총체는 구석만 만나면 

먼지만 만나면 

춤추는 듯 즐겁게 

분란을 일으켰다. 


먼지들의 대장도 못 되는 나는 

어느 꼬리를 닮은 털이범은 더욱 못 된다. 


엄마의 취미는 창문을 열고 

분란을 밖으로 털어내는 일 

분란이 다 빠져나간 내 방은 또 

을씨년스럽다. 







털신


그 집을 지나치다 

털이 수북한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본다. 

언젠가 노인 한 분이 

저 털이 수북한 신발을 신고 

자꾸 나를 돌아보던 생각이 났다. 


불시에 사람과 맞닥뜨린 짐승이 

어둑한 저녁 쪽으로  사라지던 그 풍경 

사람과 짐승의 경계도 아직은 

살 만하다는 듯이 

저녁이면 불이 켜지고 

아침이면 밭은 기침 소리가 들리곤 했다. 


네 발과 두 발을 두고 

고민하는 듯 

한 사람의 생애가 기울어지고 

때로는 하늘이 넘치곤 했다. 


천천히 발부터 

짐승으로 변해가는 그 집의 노인 

어떤 걸음을 택할지 

고민하듯 천천히 걷고 있는 

털이 수북한  발이 자꾸 생각나는 것이다 








노는 땅 


우리 동네에는 노는 땅이 많다. 

생전의 할머니가 가끔 다녀오시던 

노구를 짜내어 흥겹게 춤추던 

관광버스 풍경처럼 노는 땅 많다. 

그런 노는 땅을 찾아내서 

같이 놀던 할머니 


노는 땅들은 바쁘다. 

종자를 가리지 않고 몰려든 풀들 

온갖 곤충들부터 고양이까지 

누군가 버리고 간 가전제품 

환삼덩굴 줄기를 타고 신나게 논다 


논다. 라는 말엔 

감출 수 없는 흥겨움과 한적함이 동시에 있다. 

그런 노는 땅과 놀던 할머니 

지금은, 밑으로부터 여섯 칸 

우로 네 번째에서 무료하시다. 


비가 내리는 날 

질퍽질퍽 땅들은 잘도 논다 

찡그리거나 구겨지다 슬금슬금 펴지는 것들 

호미, 낫, 지팡이, 수레 

각종 농기구를 가지고 논다. 


노는 땅들은 오늘도 

우거지고 가지런해진다. 









[당선소감] 


  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시까지 끌고 가거나 끌고 와야 될 관계들과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이 있어 그 얄팍한 방식을 고집한 끝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쪽 방향으로만 쏟아지는 밤, 새벽 틈새 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잠깐의 단잠에 들겠습니다. 어릴적부터 꿈꾸었던 것이 이렇게 부풀어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해 주신 심사 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부모님, 감사합니다. 다시 새로운 계획 앞에 선 성희에게도 힘내라는 말 전합니다. 넌 할 수 있다고 매일매일 응원해 준 준섭아, 고맙다. 그리고 같이 등단하자고 다독여 주고 어설픈 글들 많이 봐줬던 형석이 형, 형의 친절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시의 기초에 대해, 인간의 품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 임동확 교수님께 존경의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직 진행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하고 써야 할게 너무 많은 저에게 시는 슬쩍 구석 한 편에 감춰두고 싶은 소중한 보물 상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 시를 가르치는 위치에 설 수 있다면, 이 진행중인 감정들을 나직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심사평] 


 올해 《실천문학》신인상에는 총 198명이 응모했으며, 예심을 거친 6명의 작품이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이번 신인상 심사를 통해 얻은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많은 응모자들이 이미 언어의 조탁자로서 뛰어난 시적 기술을 발휘했지만 과도한 외국어 및 외래어 사용, 지나친 관념어 남용, 관념적 사변 취향은 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고, 심사위원들을 다소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하루 씨의 작품들은 개성 있는 상상력과 담대한 시의 전개가 인상적인데,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구구절절한 문장들을 통해 오히려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핵심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조시현 씨는 미학적인 서사를 시에서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이지만, 응모한 작품들 모두가 산문적일 뿐 아니라 비슷한 구조와 어조를 반복하고 있어 지루해질 우려가 있다. 장안아 씨의 시는 일상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담고 있으며 리듬감 있게 읽히는 맛이 있다. 그러나 글쓴이의 신성한 착상을 시의 몸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좀 더 끈질긴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장주영 씨는 어떤 거대한 세계 앞에서도 훼손 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냈다. 그러나 역시 시 속에 너무 많은 '할 말'들을 욱여 넣음으로써 시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석범진 씨는 다체로운 주제와 소재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끌어올려 심사 위원들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전해 주었다. 다만 시의 주제의식을 더욱 집요하게 끝까지 펼쳐낸다면 더 큰 가능성을 가진 문청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안성군 씨의 시는 화려하지도 발랄하지도 않다. 하지만 편편의 시가 서정성을 갖고 자기만의 시선과 호흡을 견지하고 있다는 데서 남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는 근래에 우리 시단이 얼마나 소통 가능한 시에 목말라 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에 와 닿는 시는 어떤 것인가, 생활이 있고, 육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각성과 성찰을 가져다 주는 시를 기다린 심사 위원들에게 이 젊은 당선자의 시는 한겨울에 "삐죽 빠져나운 푸릇한 발"(무가 움찔할 때)처럼 선명하게 우리를 각성하게 했다.  

 또한 '조난 신호'같은 연통이 있고, '훌쩍훌쩍' 울기도 하는 집이지만 "하루의 끝자락은/꾸덕꾸덕 힘이 세다"(집이 울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 시인이 가진 결기,'꾸덕꾸덕'버티며 세상과 맞서는 복서와 같은 자세를 심사 위원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안성군 씨가 그려낸 시 속 주인공은 대개 반백수거나 노동자거나 노인이다. 안성군 씨는 그들을 응시하고 발견함으로써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끈끈한 동류의식을 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람이요, 어떤 위협앞에서도 자신의 서정과 역사를 수호하고자 하는 '문지기'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안성군 당선자의 새로 출발을 축하하며, 한국 문학의 미래를 잇는 시인으로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신인상에 응모해 주신 많은 분들에겓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 심사위원 : 김은경, 이승하, 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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