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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 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올려대기 시작한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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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새로움 찾으려는 패기 돋보여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현정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과 박병준의 '봉천동 5번지에 남아 있는 불빛들'이었다.

 

'봉천동'은 그 무엇보다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 노련함은 동봉한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그러나 어디서 미리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신인다운 패기가 설 장소를 아끼고 있다.

 

이에 비해 '밀란 쿤데라'는 노련하지는 않지만 새로움을 찾으려는 정신이 있다. 동봉한 다른 작품들에서 새로움과 패기가 더 나타나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고 '밀란 쿤데라'를 택했다.

 

우리는 두 작품 중에 어느 것을 당선시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몇번씩 읽고 오래 생각한 끝에 팽팽히 수평을 지키고 있는 두 작품의 촌평에서 '밀란 쿤데라'쪽을 누르기로 했다.

 

조재형의 '수평선을 감아올리는 수차', 김종훈의 '냉장고', 조성순의 '느티나무'도 눈을 끄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그 시선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게 했다. 좀 더 남들과 다른 감각과 생각을 지속적으로 가지도록 노력하면 좋은 재목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황동규·감태준

 

 

 

공기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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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踰里에서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재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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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는 많이 늙으신, 계속 늙어가실 어머니에게 이 기쁨을 드려야겠습니다.

 

봉문(封門)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빚어 올린 항아리에 갖혀 지내며 시를 읽는 밤이 있었습니다. 예민해진 귀는 작은 소식에도 멍멍해졌습니다. 간혹 누군가가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그 이름 부르지 않았습니다. 상처라는 걸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곱게 키우던 새를 날려 보내며 세상의 조롱 속에서 한껏 자유롭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깨달음도 없이 나는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문도 창도 길도 없는 항아리 속에서 나오기 위해, 굳은 마음을 깨기 위해 나는 그 마음과 같이 넘어져 굴렀습니다. 계속 굴러가 시장에 이를 때까지…….

 

'큰 현명함은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작은 현명함도 못되겠지만, 상대를 용인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거래하며, 그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말들을 엮어 꽃을 만들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고 싶습니다.

 

이 당선의 기쁨이 그런 힘으로 치환되기를 바라며 부디 내 시가 깨달음의 경지로 떨어지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 삶 속에서 기우뚱거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종암동 시절의 식구들, 문창반 선후배님들, 고전기타부의 사람들, 인생의 모든 스승들과 뽑아주신 선생님들, 애정으로 가르쳐 주신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서운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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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너무들 비슷비슷하다. 유행처럼 생긴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각종 문학강좌 탓이 아닌가 싶다. 시란 어차피 남과 다른 시각 없이는 쓸 수 없는 것, 이런 시각은 손기술의 훈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감각적으로 세련된 시들이 적지 않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이번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다.

 

하지만 최승철('눈 덮힌 돌''목도장이 있는 골목' ), 이현승('근황''모과'), 장만호('수유리에서''겨울잠' )의 시는 크게 돋보인다. 최승철의 시에는 생활의 음영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목도장이 있는 골목'의 분위도 시를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을 한다. 표현을 공연히 모호하게 하여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버릇은 고쳐야 할 것 같다. 이현승의 시는 남과 비슷하지 않은 시로서 매우 개성적이다. '근황'이 가장 좋았는데 이만큼 유니크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데 수준에 미달하는 시가 여러편이다.

 

장만호의 시는 우선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그 나름의 리듬도 갖고 있다.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회한이며 안타까움, 그리움이며 깨달음 같은 시적 내용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남의 것이 아니고 진짜 자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든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수유리에서'가 가장 빛나는데,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같은 비유도 시에 생기를 더한다. 밝고 환한 분위기의 '원정'(園丁)은 생명감으로 충일해 있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청어'(靑魚)도 그가 시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자질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균질감 있는 시다.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준비를 충분히 끝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주저하지 않고 '수유리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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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신 툭하면 집 을 나갔을 것이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 어 놓고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데 깨금발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 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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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변 / 이길상


역사엔 톱밥난로가 홀로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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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전반적인 수준향상 우열가리기 힘들어 응모한 작품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시기일수록 문학은 그 결핍에 대한 보상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심사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수준의 향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사는 괴로우면서도 즐거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장창영, 김정미, 이승은, 이영옥, 이길상의 시편들이었다. 장창영의 작품은 시적 연륜이 만만치 않아 보였고 표현들 역시 안정되어 있었다. 특히 ‘황태덕장’ 같은 작품에서 “하늘 물어뜯으며 말라가는 수천의 목어떼” 같은 구절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 오히려 아쉬웠다. 이점은 김정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제부도’나 ‘밤의 장례식’ 등은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어서 도전의식이 부족해 보였다. 이승은의 작품들 중에서 ‘다림질을 하다가’는 생활 속에서 얻어진 소재를 뛰어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추상적인 표현들이 거슬렸고 거기다가 동봉한 작품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영옥과 이길상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이영옥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묵호항 여인숙’은 선자들이 놓치기 아까웠다. “내가 언제나 먼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묵호항이 아름다웠다는 부분이나, “형광들 불빛이 / 서로의 감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같은 구절은 훌륭한 시적 표현이 단순히 능숙한 비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시행이 너무 길게 늘어져 호흡에 문제가 있었다. 문장들을 적절히 끊을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길상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거론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편차가 적어 믿음직스러웠고 섬세한 표현들 속에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령 ‘연’에서 “한지 대신 벌판을 뼈대에 붙인들 어떠랴” 같은 표현이나, ‘철로변’에서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같은 구절은 수사의 익숙함을 뛰어넘는 따뜻한 시선이 드러나 있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새롭지 않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막상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선자들 사이에 이의는 없었다.

 

당선자를 포함하여 응모하신 분들의 계속적인 정진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김남곤, 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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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정임옥

 

 

나무 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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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담바라꽃 피워내듯

 

밤새 뒤척이고 난 새벽 불곡산을 올랐다. 돌아와 문을 여는데 발밑으로 이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옷에 묻히고 온 많은 이슬 중에서 단 한 방울만이 나를 떠난 아침, 젖은 옷 벗어 걸며 내 안에서 마르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 그들에게 미안했다.

 

얼마 전, 삼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꽃을 보았다. 금불상을 뚫고 나온 그 꽃은 마치 이슬방울 같았다. 시를 쓴다는 것이 가슴으로 우담바라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닐까. 일생동안 갈고 닦아 좋은 시 한 편 써야 할 숙명의 길로 나는 지금 한 발 들어서고 있다.

 

삶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오지 않음을 알고 느꼈던 비애마저 기쁘게 감싸 안도록 다독여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친정 부모님과 종가의 맏며느리 역할에 소홀함을 덮어주느라 더 바쁘셨던 시어머님, 글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현식과 담비 그리고 야생화로만 알았던 당신이 내겐 우담바라꽃이었음을.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

 

시의 호흡법조차 모르는 내게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신 정호승 선생님, 이제 '어떻게' 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로 고민하라고 하신 말씀 늘 기억하겠습니다. 황야에 조심스레 밀어올린 대궁에 튼실한 뿌리가 되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슬프게 떠난 이와 그리움으로 머무는 뭇 인연들에게도 인사해야겠다. 그들과 함께하고, 함께 할 세상이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파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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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직한 자기성찰 돋보여

 

조필수, 이채운, 정임옥 세 분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더라도 별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옥의 '뿌리'가 당선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력, 섬세한 즉물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이 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정 씨의 모든 응모작은 당선작에 못지않았으며, 특히 '명암방죽'은 보기에 따라서 더 매력있는 작품으로 뽑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채운의 '리듬체조''사과알 속의 수행자'도 당선작에 비해 손색없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편 조필수의 '내부 순환로'는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당선권에 든 분들은 아니지만 최승철의 몇몇 작품들도 힘이 있어 보였으며, 하정임의 '햇빛별빛잔치'도 동화적 목가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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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 서광일

 

 

비닐 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사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꼇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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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낮에 아버지와 논에 나갔다. 추수를 앞두고 노릇노릇 익어야 할 벼들이 때 아닌 태풍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 비바람에 쓰러진 벼를 보고 있자니 태풍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게 들녘에 나온 농부의 마음일텐데. 아버지는 한참을 비 속에 서 계시더니 물꼬만 보고 그냥 가신다.

그동안 시가 안써진다고 얼마나 나 자신을 함부로 했던가. 시간은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침몰시켰다.

그나마 몇 알 여물지도 않은 내 작품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서울에서의 어설픈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여름내 여물기 위해 얼마나 더위와, 또 내 자신과 싸웠던지 작품을 보내고 며칠을 앓았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혓바늘이며, 몸살의 잠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때서야 알았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자동차 배기통에 대고 호흡하는 듯 답답한 시간이었다.

올 추석 고향에 내려가면 이것 저것 물어오는 친지들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까. 차라리 이 지독한 도시에 남아 며칠 꾹 참으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도 태생이 촌놈이라 그런지 물소리가 좋고 풀내음이 좋아 결국 내려와 침묵으로 며칠을 보냈다.

짓궂은 친구들. 늘 그 자리에서 날 반겨주기도 하고 대목이라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녀석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철이 들었는지 서로 어깨도 도닥거린다.

관계란 참 대단하다. 내 언어의 텃밭이 되어준 부모님 동생들, 오래 곰삭아 텃밭에 거름이 되어준 고향 친구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텃밭을 함께 일구는 동기들, 그리고 '원광문학회' 식구들 모두 고맙다.

아니 미안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텃밭에서 거둔 부족한 열매 몇 알을 맛 보아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내 오랜 문혈(文血) 현승이와 광대 희준, 내 안에서 질서가 되어준 이준에게 깊은 포옹을 건넨다.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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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복숭아'(서광일)는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적 진술로 시작된다. 사내가 자전거를 세우고 길바닥에 흩어진 복숭아들을 줍는 1연부터가 그러한데 특히 비닐봉지에서 흩어져 나온 복숭아들을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에 비유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평범의 시행들은 2연의 시적 비약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온축으로 보인다. 2연에 의하면 사내는 한쪽 다리가 짧으며 그래서 자전거 페달을 비스듬히 밟을 수밖에 없으며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식구들을 위해 '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를 고를 줄 아는, 작지만 눈밝은 기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시인의 시선은 사내가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하는 데까지 머물면서 이 가난한 날의 삽화를 돌연 활력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런 시대에도 시를 쓰고 읽는 이유일 것이다. 즉 '복숭아'는 시의 기본 규칙을 잘 준수하면서 어떤 가난에 특별하고 의미있는 삶의 충만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비록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어느 스산함 속에서도 자전거 바퀴는 기쁨으로 땡땡할 수 있는 것이다.


 '복숭아'를 중앙신인문학상 영예의 당선작으로 밀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 '성에'는 짧고 빛났으나 '소음동 삽화'같은 시들은 너무 시적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안이한 감동만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예술가에게 있어 그 앞의 선행 규범이란 때로 과감히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도 이해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이들 작품의 수준차는 그리 크지 않다. 다만 당선작인 '복숭아'에 들어 있는 어떤 시의 눈, 작품 전체에 돌연 생기를 불어 넣는 그 무엇이 이들 작품에는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예술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물에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숨결을 부여하는 행위 아닌가..더욱 분발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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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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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언제부터인가 집에 대한 생각이 쾅쾅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몇 달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집이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새벽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들여놨다가 좁아서 나가버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 뚝뚝 떨어져 돌아서 버리고, 누구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허술한 집을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아주면서, 새는 지붕을 덮어주면서 저의 집을 지탱해준 사람들. 그들 때문에 마음속 집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집 한 채 세우고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쓰는 일은 저에게 집을 짓는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아직 서툴기만 한 저의 집짓기는 언제 끝이 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머리칼 허연 노인이 되어도 끝끝내 그 아름다운 집을 이루겠다는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기대도 앞으로 튼튼한 기둥으로 저를 받쳐줄 것입니다.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많은 지도와 관심을 베풀어주신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강정희ㆍ신익호ㆍ김균태 선생님 외 여러 선생님들, 문예창작학과의 김완하 선생님,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 했던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더욱 힘찬 걸음으로 걷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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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편이나 이번 시 부문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여러 편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상호의 '그 노인이 지은 집', 김남극의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 정선용의 '달팽이', 박판식의 '장지', 최요기의 '2월의 강'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은 역동성과 천진성이 돋보였으나 '가련한 생들 아니랴'와 같은 미숙한 표현이 지적되었다. ''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생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달팽이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의 생태학적 여정을 충실히 그린 작품이었으며 , '장지'는 할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와 통닭을 먹는 나와 가족들의 회한과 상처를 깊게 그리고 있었으며, '2월의 강'은 침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노인이 지은 집'에는 못미치는 작품이었다.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 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커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자는 부디 노력을 통해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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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 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시간이 그렇게 흘러 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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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15명의 응모자중 남소영, 이기인, 안휘지의 작품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남소영의 작품들은 신춘문예 스타일이라는 상투성에서 멀다는 점, 말의 침묵-암시의 울림, 생략과 여백의 효과 같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 상식을 거스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인다는 점 등에 비추어 그중 눈에 띄는 시적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겨울인사’ 같은 작품은 버리기 아까웠다.


이기인은 존재하는 것들의 외로움과 추움을 아주 잘 느끼고 있다. 그래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에서도 보듯이 그의 작품들은 따뜻하다. 계절도 인심도 춥고 싸늘할 때는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리고 일으켜세우는 일도 시가 하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일 것이다. 부드러운 어조도 시에 힘을 더하며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다는 점도 마음놓이는 일이다.

 

심사평 : 신경림, 정현종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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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 강리


새벽마다 유리창이 잠을 깨웠다
얼음산 몇구비 방안에 들어섰고
발시린 보리밭은 퍼렇게 일어섰다
갈가마귀 두 마리 날개를 둥글게 말아
허공에 검은 울음을 쏟는다
싸늘한 구들장 철마산이 뒤척였다
저문 금숭화 빛으로 손등이 갈라지고
머리칼에 내려온 사락별이 빗질을 한다
창가에서 손톱으로 세상을 지웠다
하얀 산맥들이 우수수 무너지고
죽은 새울음소리 소의 혼령이 되어 지나간다
서릿구름이 산허리를 치댈 때
눈가루를 뒤집어 쓴 기차가
사내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온마을 동솥은 아낙네 한숨을 끓이고
아랫마을 산모의 허기는 서까래를 들먹거렸다
겨울모퉁이에서 삭지않는 눈바람은 숨이 가빴다
아침 햇살이 으깨어진 길을 일으키며 다시 돌아왔다

 

 

 

#풀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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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서성이다 / 이궁로

 

 

기차가 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다
대합실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의자
일몰의 그림자 길어지면 차갑게 흔들리는
철로 주변의 측백나무 사이로 쓸쓸히 흘러가는 저녁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 지루한 표정
딱딱한 마분지 차표를 건네는 매표원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출발과 도착의 낡은 시각표
의미 없는 부호처럼 굴러 다니는 비닐 봉지
너무 일찍 나온 것이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보였지만
기차는 서지 않고 역을 지나쳐 간다
역을 지나쳐 가는 저 열차처럼
삶도 그냥 지나쳐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
대합실 밖에서 흔드는 이별의 손짓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과
재회를 꿈꾸며 사는 것도
열차가 다시 제 철로를 밟고 돌아오는 것처럼
생의 어느 지점에서 떠났던 사람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때에
한 번은 돌아올 것을 믿는 때문이고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침묵이
세상의 침묵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본다
수은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역 광장에
이별의 그림자처럼 서성이는 작은 별이 뜨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각이다, 기차가 오기에는

 

 

 

어둠은 밤의 너머에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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