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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관한 단상 / 김효순

 

 

1. 거미

 

날개는 없지만
공중에 떠 있다
보금자리는 아니지만
늘 집을 짓는다
입으로 눈으로
집을 짓는다

희고 투명한 기억들만을
허공 중에 매달아
기다림의 긴 터널을 뚫는다
길 없는 길을 잇고 또 이어 만든
하얗게 반짝이는 미로 속의 집

집은 두 팔을 벌리고
집은 아가리를 벌리고
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숨죽여 찾아 올 손님을 기다린다

공중에 뜬 채
힘없고 나약한 짐승만을
기다리는 집
집은 늘 위태롭다
집은 덧없는 덫,
덫이다 아니
무덤이다

2. 나방

 

날개는 있지만
늘 주저앉고야 만다
다 그놈의 불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녀석에게 뛰어
들었다가
한쪽 날개의 끝을 데었다

그날 이후
악몽만이 남았다
더 이상
제대로된 비행 따윈 할 수 없다.
기울어진 날개
지치고 아파서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다.

한때
사랑이 집이라고 믿었다
이제 누군가를 기다리지 못한다
나만의 동굴을 찾아
지친 날개를 퍼덕일 뿐

멀리 어슴프레 하얀 집이 보인다
이번엔 집이 확실하다
그 집에게 안긴다
그 집에게 속삭인다
너만이 내 영원한 안식이라고
너만이 내 맨 처음 자궁이라고

3. 달팽이

 

날개도 없고 다리도 없지만
있는 힘껏 바닥을 기어다닌다
내 슬픔은
너무 오래...
딱딱하게 굳어져 옹이가 되었다

이젠 그 슬픔들이
눈과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 되었다

그는
파도소리를 듣고
어느날 찾아왔다
그는
소용돌이가 두렵다며
어느날 떠났다

지문처럼
나이테처럼
언제나 걸어온 길들을
둥글게 말아
짊어지고 다닌다

내 집은
작은 섬

이젠 그 오랜
路毒과 그리움이
더듬이보다 단단하게
앞길을
짚.어.준.다.

 

 

 

 

아리아드네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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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안개가 무성하다. 저 희디흰 눈동자들, 어둠 속에서 발목 잡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뿌리치며 길을 걷는다.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 느낌. 뺨에 와 닿는 미끌미끌한 그 눈동자들이 숨이 막히다. 그렇게 그 시선들을 외면하며 걸어왔다. 마음은 늘 안개 속, 물 속을 허우적거렸다. 3년 전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밤새 지키던 그 해 성탄절이 생각난다. 유난히 하얗게 내리던 눈가루들이 내 눈앞에선 안개가 되어 온통 시야를 가리던 그 때. 아무도 내게 위로가 될 수 없음에 혼자 견디며 무슨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시구 하나 떠올린다.

충분히/흔들리며/고통에게로/가자//뿌리/없이/흔들리는/부평초잎이라도//물/고이면/꽃은/피거니//....캄캄한/밤이라도/하늘/아래선//마주잡을/손/하나/오고/있거니//

그 때 비로소 알았다. 한 줄 시가 실낱같은 불빛이 되어 앞길을 비추어줄 수도 있음을, 내게 시가 다가와 손잡아주는 밤이었다.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따뜻한 시... 상한 영혼들에게 기도보다 훈훈한 온기를 주는 시... 사람을 견디게 하는, 사람보다 단단한 시를 쓰고 싶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고 아득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에 이정표를 제시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아직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 그리고 시힘을 돋워주신 이지엽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김민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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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서적 흡인력 가능성 기대

예심을 거쳐 올라온 40명 중에서 김효순·이종숙·하재청·성향숙 등의 작품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종숙의 `저녁, 거리에서'는 안정된 호흡과 섬세한 필치로 시간이 흘러가는 풍경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시들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져서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기 어려웠다. `공단세탁소'를 비롯한 하재청의 시는 결이 고르고 생활의 실감을 지니고 있다. 개성적인 묘사를 이끌어내는 재기발랄함도 돋보이지만,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 위해서 재치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성향숙의 `나무의 근성' 등은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날렵하고 착상도 재미있지만 일정한 틀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 틀을 과감하게 깨뜨릴 때 좀더 생동감 있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효순의 `집에 관한 단상'은 일반적인 신춘문예형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거미, 나방, 달팽이의 입을 빌어 집에 관한 생각을 전개해가는 이 시는 대상에 대한 겹눈을 지님으로써 단선적인 사유를 넘어서고 있다. 지나치게 알레고리에 의존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다른 시들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발성법이나 정서적 흡인력이 그의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게 했다.

한 사람의 시인을 세상에 낸다는 것은 현재 상태의 우열뿐 아니라 그 가능성까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를 당선자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나희덕,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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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 / 정동현

 

 

짙은 물빛 가까운 저녁엔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이들의 냄새가 그리워진다 겨드랑이 쉰내가 조개처럼 따닥따닥 매달려 유난히 북적이는 퇴근 시간- 나는 오랜 추억의 크기만큼 좁은 섬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마을 버스 속으로 꾸역꾸역 몰려들 듯 물결에 쓸려 고래 뱃속으로 가라앉는다 고깃집 붉은 빛과 싸이키 조명 탐조등이 능숙하게 훑고 지나가는 곳마다 파도가 일렁이고 산호초 춤추는 아로마 나이트크럽 아니 아로마 노스탤지아 나이트크럽 그게 그곳의 본래 이름일게다

 

우리 동네 마을버스 1-2번 로얄빌딩 바이더웨이 광덕슈퍼 목이동 파출소 지나 강서 보건소에서 노선은 끝난다 늘 그렇듯 구토와 주정과 욕설로 끝나는 나이트크럽 무인도보다도 외따로 떨어진 종점 버스- 춤추던 산호초들은 어디 있을까 파도소리도 없이 적막한데 빈 손잡이처럼 흔들리는 밤의 끝 한 누이가 내게 다가와 고단한 별들의 눈썹이 새겨진 전단지 하나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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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가 돈이 되지도 않고 명예가 되지도 않은 시절을 살아가면서 왜 이 지상 위에 시 쓰는 영혼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가에 대해서 선자들은 심사기간 내내 이야기했다. 새로운 시간들에 대한 열망, , 상처의 회복, 날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선자들의 손에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최미정, 나정숙, 정동현의 시편들이었다.

 

최미정의 `화성식료품'은 이미지의 전개가 탄탄하고 삶의 냄새도 곳곳에 스며 있었으나 식료품 가게 너머의 어떤 언덕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미흡하다는 생각으로 최종선에서 제외되었다.

 

나정숙의 `기억 저 편'과 정동현의 `무인도'를 두고 선자들은 격론을 펼쳐야만 했다. 두 작품이 분명한 장점과 결함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억 저 편'이 보기 드물게 정확한 풍경 묘사를 하고 있는 반면 그 시점이 과거지향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고, `무인도'의 경우 범상한 삶의 풍경들을 자신만의 감정의 체에 걸러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으나 그 감정들이 지닌 열망과 꿈이다분히 감상적일 수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인도'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이 시가 지닌 철저한 현재성, 자신의 삶을 따뜻한 언어의 꿈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을 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함께 보낸 11편의 다음 시들이 일정한 치기를 내보이고 있음에도 거기 펼쳐진 언어들의 꿈이 충분한 장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선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안정보다는 변화를 열망하는 시대적 패러다임이 선자들의 선택 행위에 내재해 있었음에도 부인할 길이 없다.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과 열정으로 삶의 막막한 풍경들에 강렬하게 부딪쳐 나가는 멋진 시인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곽재구(시인·순천대 교수) 고재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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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약국앞 무허가 종묘사 / 김해민


삼거리 `희망약국'앞 난전이 벌어진다. 보따리에선 배추씨 무씨 아욱씨 아주까리씨 삼씨, 잎담배에 당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쏟아진다.


장돌뱅이끼리 마수걸이 인사 잊지 않는다. 신식 종묘사에 밀려 이제는 손님구경이 수월치 않다.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 누런 옥니를 보이며 하회탈처럼 웃는 한 노인이 무씨 반 줌과 한 묶음의 잎담배를 사갔을 뿐이다.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사리고 있다.

씨앗의 환(還)을 꿈꾸며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약국 안 시계가 한시를 가리킨다. 담배 한 개비로 허기를 막으며 서 있다. 자전거의 삼천리표 글자도 흔들린다. 시계가 세 시를 가리킨다. 그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 꿈을 매만지며 고개를 떨군다. 균형 잃은 약사의 걸음이 봉투 앞에 멈춘다. 그는 여전히 씨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약사가 건네준, 알싸한 박카스 노란 액속에 애간장 타는 그의 뒷모습이 섞여 넘어간다. 시계가 여섯 시를 가리킨다.

환(還)의 길을 찾아주지 못한 씨들을 다시 품고 삼천리표 자전거에 앉는다. 그가 종묘처럼 떨궈놓은 새끼들은 떨이한 간고등어 대가리를 뼈까지 야무지게 발라먹을 것이다. 방죽 지나 흥얼대는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자전거머리도 흥얼흥얼 박달재를 넘는다. 검은 대지에 뿌려진 씨처럼 푸른 별들이 하늘에 흩어져 있다.

 

 

 

 

외로울 때는 귀가 더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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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겨우 시의 한쪽 맛봐"

사과가 다섯알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김현 선생님의 `반 고비 나그네 길에'에 수록된 `사과 다섯알'이란 수필에서 읽은 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 남는 말입니다. 가장 맛있는 것부터 먹으면 더 맛있는 것을 놔두고 항상 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 불만이 있지만 대신 다음 것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아무렇게나 뒤섞어놓고 집어먹는 방법에는 아무런 부담도 기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어야 가장 잘 먹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살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제가 지금 입안 가득 단물이 고이는 사과를 베어 물긴 했지만 남겨놓은 사과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건 이미 조금 맛본 사과와 남겨둔 사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앞으로 써야 할 시와 제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것입니다. 이를 감당함에 있어서 할 수만 있다면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키고 처음 시를 만났을 때의 떨림과 긴장을 지니고, 어느 것보다 귀함에도 사람들에게 하찮고 작게 여겨지는 것들을 질료로 삼고싶다는 바람과 동시에 다짐을 해봅니다.


이미 받은 복을 세어보게 하는 감사한 얼굴들이 너무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셔서 제 삶을 도우시는 그분과 분명히 뜬구름 잡는 일로 여겨졌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문학을 하겠다며 서른이 되도록 걱정만 끼쳐드린 딸을 믿음의 눈으로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흐트러지려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도록 용기를 주신 분들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심사평]

신인을 기다린다는 것은 패기넘치는 사유와 활달한 상상력의 소유자를 기다린다는 뜻일 것이다. 치열한 언어 수련의 내공이 엿보이면서 기존의 시적문법에 오염되어 있지않은 시를 고르기 위해 응모된 시들을 꼼꼼히 읽었다.


일곱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상훈의 `그물'은 시에 투여하는 열정에 비해 감동의 폭이 좁다는 게 흠이었다. 평이한 시적구조, 이미지의 불투명성 등을 차차 고쳐나갔으면 한다.


길동호의 `등나무'는 세심한 관찰에 의한 발견의 눈이 시선을 끌었으나 `이제 무겁게만 느껴지는구나' `나는 그것이 두렵다'와 같은 직설적 표현이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나경의 `환한 방'은 언어를 매만지는 살뜰한 솜씨가 돋보이는 시다. 하지만 `길' `허공' `꽃' `나비'로 변주되는 이미지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복처럼 서러운 흰빛'과 같은 표현도 신인으로서의 참신성을 의심하게 만든 대목이다.


김해민의 `희망약국 앞 무허가 종묘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는 규격화된 틀에 맞춰 쓴 시라는 오해와 세밀하고 따뜻한 묘사로 성공한 시라는 장점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하지만 `말린 무화과 같은 입을 오물거리는 한 노파'나 `일광욕을 즐기는 양 씨앗들은 이리저리 몸을 트는데 성미 급한 씨앗이 행여 싹이라도 틔울까 볕이 몸을 도사리고 있다'와 같은 구절들은 아주 뛰어난 표현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대상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문학의 밭을 힘차게 갈아엎는 좋은 쟁기꾼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허형만,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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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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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철거민 들여다보면서 표현 떠올려

 

시를 다시 쓰면서 딱 3년만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가 바로 3년째가 되는 해네요.”

 

정창준씨(36)는 울산 대현고 국어교사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시를 썼지만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취직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와 멀어졌다. 내년이면 교사 경력 10년째인 정씨가 그 꿈을 다시 꺼내들 게 된 것은 3년 전 대학 시절 썼던 시들이 좋던데라는 말을 대학원 교수로부터 전해 들으면서다. 대학시절 썼던 시들은 컴퓨터 메모리가 삭제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우연치 않게 남아있던 유일한 프린트본을 후배로부터 돌려받으면서 정씨는 다시 시를 쓰게 됐다. 그리고 3년째, 마침내 오래된 꿈이 이뤄졌다.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정씨는 <난쏘공>의 화법을 인용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용산참사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너무 끔찍한 일인데도, 사람들에게 쉽게 회자되기만 할 뿐, 절실한 이야기들은 외려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쏘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고 학생들에게도 꼭 가르치는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1970년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음 아파서 그것을 모티프로 시를 쓰게 됐습니다.”

 

정씨는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체화된 언어로 피부에 와닿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심사위원들에게 받았다. 정씨는 울산은 급격한 팽창 과정을 거치면서 용산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가진 도시라며 재개발이 예정된 학교 옆 철거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표현들이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선작 이외의 다른 시에서도 사회문제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정씨의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정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 대형마트, 베스트셀러나 실용서로 채워지는 서점의 풍경을 시로 써내려갔다. 그는 사람에서 비롯되고 사람다움을 지키는 게 문학의 가장 큰 소임인 것 같다사회적 약자들이나 사라져가는 것들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신춘문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며 아직 시 세계나 세계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충실하게 재현해내고 싶다고 새내기 시인의 포부를 밝혔다.

 

 

 

 

아름다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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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실종된 현실 인식의 발견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4),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4), 김영진(‘도끼발4), 류성훈(‘밤의 도플러4),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4)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심사위원 이시영 시인(왼쪽)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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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의 방식 / 이만섭

 

 

직선은 천성이 분명하다 바르고 기껍고

직선일수록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는 곧 정직한 내력을 지녔다 하겠는데

현악기의 줄처럼 그 힘을 팽창시켜 울리는 소리도

직선을 이루는 한 형식이다

나태하거나 느슨한 법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배회하지 않으며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정직이다

밤하늘에 달이 차오를 때

지평선이 반듯하게 선을 긋고 열리는 일이나

별빛이 어둠 속을 뻗쳐와

여과 없이 눈빛과 마주치는 것도

직선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령, 빨랫줄에 바지랑대를 세우는 일은

직선의 힘을 얻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대는 직사광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있다

그로 인하여 빨래는

마음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을

것이다

바지랑대는 빨랫줄로 말미암고

빨랫줄은 바지랑대 때문에 더욱 올곧아지는

그 기꺼운 방식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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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독립군처럼 글 썼죠

 

독립군처럼 글을 써왔습니다.”

 

시 부문 당선자 이만섭씨(55)는 제대로 된 문학 수업 한 번 받은 적 없다. 정읍농고 졸업이 최종 학력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전북 고창의 벽촌 산골 학교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고 문학에의 꿈을 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문학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다. 이씨의 문학 독학은 그렇게 시작됐다.

 

건설·주택 관련 일을 하고 리모델링 사무실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고, 김윤식·김현 등의 평론집과 문학사상’ ‘현대문학등 문학잡지를 빼놓지 않고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고 싶어 소설 공부와 소설 쓰기에 매진했다. 이문구와 김주영의 소설 등 1970년대 작가들의 소설을 섭렵했다. 그러다가 5년 전부터 시를 썼다. 장에 천공이 생기면서 치료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서다.

 

수술받고 요양하면서 시간이 많이 생기니까 시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더군요. 병석에 있었던 시간들이 오히려 시 쓰기의 끈을 붙잡아 준 것 같아요.”

 

좋았기 때문에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글쓰기다. 김승희 시인의 목숨 걸고 쓰라는 말을 되새기며 글을 썼다.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에서 문학 카페를 운영하며 글을 썼고, 5년간 1600여편의 시를 써왔다. 지방 문예지 등을 통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마다하다가, 지난해부터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두 번째, 올해 당선됐다.

 

집 앞 슈퍼마켓에 포도를 사러 나갔다가 당선 소식을 들은 그는 순간 먹먹해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묵묵히 남편을 지켜봤던 아내와 두 아들은 뜨거운 축하를 보냈다. 자식이 돈 안 되는 문학을 하는 것을 한사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팔순 어머니도 지인이 당선 축하의 의미로 보내온 꽃바구니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당선작 직선의 방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이씨의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물이나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이끌어낸 정제된 언어로 시를 쓰고 싶다는 이씨의 말처럼 직선에 대한 이씨의 사유가 정갈한 언어로 담겨 있다. 서정주, 박재삼, 고정희, 김명인, 나희덕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씨는 사유를 담는 좋은 시, 참된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평] “닳도록 갈고 닦은 안정감” “다른 세계로의 비상 기대

 

본심에 스물세 분의 시가 올라왔다. 풍작이다. 전체적으로 두드러진 경향은 시들이 산문적이라는 것이다. 산문으로 풀더라도 시로서 자기부양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서술에 그치고, 서술하다 보니 설명이 되고, 설명하다 보니 추락했다.

 

처음 걸러 열두 분의 시가 올랐고 거기서 정창준(‘누이의 방), 이현미(‘자장가), 강다솜(‘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 이만섭(‘바람의 형용사) 이렇게 네 분이 남았다. 모두 내려놓기 아쉬운 분들이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작은 한 편만 실리는데 한 편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만한 표면장력이 제일 센 분이 이만섭이었다. 다른 세 분의 시들은 응모한 여러 편 속에서는 유니크한데, 한 편을 세우기에는 좀 약했다.

 

정창준의 시들은 도드라진 구절도 많지만 자기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빈센트 반 고흐같은 시는 고흐를 꿰뚫는 정창준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고흐에게 기댄다. 강다솜은 시를 일순에 성립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의 시구들은 주위의 단어들을 끌어당겨 수렴하는 자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하자마자 바로 이어 무리한 메타포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예컨대 그림자 위로 내리는 눈에서 발자국 속에 갇힌 공룡의 그림자가 중생대에서부터 이 저녁을 덮고 있다는 무슨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말씀인지. 그리고 고요의 발자국 소리가 생긴다같은 구절은 발랄한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붕 떠 있다. 시라는 게 부력이지만, 그 아래 하중을 못 받으면 사라져버린다. 우리 기성시인도 명심할 일인데 단어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 메타포 하나하나, 시인이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현미의 자장가는 발랄하고 새롭다. 그 조를 밀고 나가기를 기대한다.

 

당선작 직선의 방식의 시인 이만섭에게서는 붓이 닳아지도록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가 느껴진다.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그의 포에지랄지 시상이 한 지점에서 맴돌고 있다. 말하자면 거듭 부연하고 있다. 만만찮게 여겨지는 그의 역량이 그에 대해 스스로를 어떻게 설득하고 깨뜨려 다른 세계를 열어줄지 궁금하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황지우·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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맆 피쉬 / 양수덕

 

 

땡볕 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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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내게도 뿌리가 생긴 것 같다

 

시 부문 당선자 양수덕씨(55·본명 양선희)는 기자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첫 번째는 적지 않은 나이로 늦깎이 등단을 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그의 시가 젊고 감각적이라는 것이다. 양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를 재확인시켜주었다.

 

뿌리가 없던 사람에게 뿌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시에서 많은 실패를 겪었고, 희망도 안 보여 스스로가 바람 같다고 느꼈어요. 제가 당선된 것은 시를 잘 써서라기보다 저 같이 뿌리없이 사는 사람들,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뿌리가 없다고 했지만, 양씨에게 시는 자신의 존재 그 자체였다. 성신여자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도 시에 대한 꿈을 한시도 접지 않았다. 40대 초반 자비로 시집을 내기도 한 그가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8년 전. 혼자 쓰는 시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에 시 공부 모임에 나갔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 시사랑회 화요팀에서 공부하고 있다.

 

시에 대한 애정 하나로 외길을 걸어왔지만, 신춘문예 등에서 낙선을 거듭하며 아픔도 많이 겪었다. “한 선생님이 시를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 시가 보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큰 용기가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았는데 이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입니다.”

 

당선작 맆 피쉬는 양씨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목격한 젊은 걸인을 보고 가슴이 아파 시를 쓰게 됐다. “살다 보니 제가 모르는 사람도 스승이고,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스승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양씨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가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걸릴까봐나중에 조용히 당선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오래 지켜봐줬던 부모님, 형제, 친구, 주변사람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뿐 아니라 인연 있었던 선생님들, 시사랑에서 함께 공부한 분들께 감사의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양씨에겐 시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동안 혼자 즐기려고 시를 썼지만, 이제 사람들이 위안받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새, 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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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개성있는 언어 활달하게 구사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다섯 분의 작품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수연씨의 숙련공이었다. 시를 쓰고 있는 자기 세대의 어법을 개성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행과 행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고, ‘숙련공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감각적인 표현에 구체적인 사유를 담지 못한 허약한 표현이 많았다. 시에서 강한 정신력과 숙련된 언어는 함께 이루어진다. ‘도원역아주 조금만 남은 것들을 쓴 김우찬씨는 언어를 정제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갈고 닦은 언어는 새롭다기보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언어나 세계를 향한 모험이 보이지 않는다. 시에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웅선씨의 창밖으로 오분은 창을 내다보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개성적인 어조로 붙잡아내는 그 착상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해 환상으로 잇대어진 연결 부분은 실감이 부족했다. 감탄어미와 치명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시의 끝을 맺고 있는 것도 안일한 수법이다.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이 세계로 실어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의 당선을 계기로 세계 속으로 자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도 함께 얻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최정례,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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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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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보들레르 무덤에서 否定의 산책자를 얘기하다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회색빛 거리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석 위엔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불멸은 저주 받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시집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책이자 강물 위에 던져버린 첫번째 책이라고 말하자 보들레르는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산 일보다 버린 일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산책 혹은 배회를 일삼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未知와 否定의 정신을 지닌 아름다운 산책자들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제 정말 작별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인 어떤 말을 했고 나 또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인 어떤 말을 했고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음은 존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내게 도착한 시인이! 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앞에서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언은 늘 그렇듯 부질없는 짓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현재의 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공간 속을 산책하는 일은 오랜 버릇대로 지속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사물들을 나만의 낯선 눈으로 포착할 것이다.

어머니,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저의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 타자기를 물려 받은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화가이자 내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야, 언제나 사려 깊고도 날카롭게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손 잡고 함께 걸어가자. 내 동생 웅아 진아,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언어의 장엄함과 황폐함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어린 시절의 국어 선생님인 진대곤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대 그대들에게 사랑을 사랑을.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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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뛰고 달리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쾌감

모두 열두 분의 시가 본심에 올랐다. 그 가운데 김란 씨의 ‘자벌레’ 외 4편과 이제니 씨의 ‘검버섯’ 외 5편이 마지막으로 논의됐다.

김란 씨는 시를 안정감 있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하다. 쓸 데 없는 수사가 없다. 그런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약하다. 그래서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저 무난히 스쳐간다.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 비뇨기만 남았다던”(‘골똘한 화장’에서)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활달함이랄지 생기랄지가 모자라 보인다. 관념어의 잦은 사용과 리듬감 없이 늘어진 문장은 생동감의 걸림돌이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에서)

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황인숙,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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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레옥잠 /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나를 탐하여 물 위에 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일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 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었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 낯을 보겠네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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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어릴 적 길을 가다 빛나는 돌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돌들 사이, 햇빛에 반사되어 이상한 광채를 뿜는 돌이었다. 친구와 나는 그 어떤 표시도 하지 않은 채 보물을 숨기듯 그 돌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잊지 말고 돌을 찾으러 가자고.

 

다음날 친구와 돌을 묻은 곳으로 찾아갔으나 그 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도 대개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거나, 집어 드는 순간 빛이 시들어 버렸다. 나중에는 그 돌의 생김새가 어떠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고, 내려 놓았다가 다시 집어든 돌은 처음것과 이미지와 무게를 닮은 것들일 뿐 모두 가짜 같았다.

 

시가 그랬다. 돌이 빛나는 한순간의 섬광, 그 칼날같이 번뜩이는 이끌림을 포착했던 시들은 힘이 셌고 정직했다. 매만지거나 흉내내기 이전,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 나에겐 진짜 시였다. 지난 시간 함부로 가져와 빛을 잃은 내 비유들을 제자리로 돌려주고 싶다.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이미 옛일이 되었음을 안다.

 

이제와 다 지난날의 삽화를 떠올리는 것은 강릉의 대관령 길로, 서울로 떠돌았던 내 생이 결국은 어딘가에 묻혀 있을 그 돌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서 나는 두렵고 외된 길 위에 떨며 서 있다. 지도도 없는 보물찾기가 싫어 손금을 들여다보는 날들이 많았으나, 거짓에게 매번 지면서도 종내는 진실하기를. 하여 아프고 가난한 삶의 이마를 짚어주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곡진하다.

 

마침내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님들, 숭의여대 강형철 선생님, 박세현 선생님, 김사인 선생님과 고루 기쁨을 나누고 싶다. 특히 이홍섭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아울러 강릉대 평생교육원 문우들과 오랜 벗 수영, 태영, 수현, 인숙, 부모님과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이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은 그저 소박하나 달리 그 마음 너머까지 전할 길이 없어 미안할 따름이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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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한편의 시의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 만큼 눈부신 일이다. 수많은 독자의 기대를 받으며 신춘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시는 분명 축복받은 시임에 틀림없다. 금년도에도 그런 시가 태어났다.

 

당선작으로 뽑힌 신미나의 부레옥잠은 부유성 수초인 부레옥잠이라는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서정성의 깊은 완성을 획득한 시이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시대와 삶을 투시하는 사상성이나 새로운 언어의 탐색은 없다 하더라도 사물에 대한 정감과 생명에 대한 여성적 상상력으로 넘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과 함께 끝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았던 작품으로는 유병록의 흰 와이셔츠오리떼’, 김서영의 자벌레’, 박미산의 파티마는 천왕봉에서 나를’, 박성준의 에스컬레이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김초영의 스트렌딩 증후군’, 박도준의 젖은 구두등이었다.

 

볼링장의 레인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을 절묘한 비유로 풀어낸 흰 와이셔츠오리떼’, 엎드린 당신의 발을 끈질기게 물고 있는 삶의 늪을 묘사한 젖은 구두’, 작은 생명에 대한 놀라운 순간을 환희로 포착해낸 자벌레등은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는 가편이었다.

 

시는 언어 예술의 정점이다. 필연성 없는 산문성의 경향, 언어의 무절제한 낭비, 소통 불가의 시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치열한 시정신과 절제된 언어로서 서정시 본래의 감동을 획득하는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시인 김종해,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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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아래에 파묻은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껍질이 떨어져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테를 차례로 안아낸다 얇은 나무판자에 땅-땅 못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아이가 뛰어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열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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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캄캄한 동굴 속의 한 줄기 빛

 

아주 오랜 시간 어두운 동굴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이 동굴에 출구가 있기는 한 건지 넘어지고 깨어지며 암흑의 긴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동굴 안 아무 곳에서나 쓰린 몸을 누이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꿈결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한줄기 눈부신 빛을 감지했다. 그 빛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왔다. 들어온 입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인 동굴 밖에서 난 지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 좀 있으면 누군가 어이 이봐 촌뜨기하며 어깨를 툭- 하고 칠 것만 같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배터리를 갈아주신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후덥지근하고 습기 많은 곳에서 시원한 생맥주로 갈증을 달래준 이영식, 강상윤 시인, 동굴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길 나보다 더 초조해 하며 기다려준 형제들과 친지들, 깨진 무르팍에 소 곱창으로 연고를 발라주고 차가운 소주로 약솜을 대준 영훈고 9회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한다.

 

그러나 특히 무엇보다도 캄캄한 시의 동굴 안으로 한줌 빛을 던져 주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동굴 밖에 나와 몸을 살펴보니 온몸이 멍 자국이고 말라붙은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된 상태다

 

내 온 몸에 감겨 있는 핏자국을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한 장의 그림 형태로 그려져 있다

 

앞으로 내 시가 걸어가야 할 지도쯤으로 보인다

그 지도 지워지지 않도록

그 상처 아물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겠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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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고단한 삶을 건져낸 신선한 힘

 

시인으로서 언어를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천 자체이어야 마땅하다. 시의 외형을 지닌 모호한 설명과 감상들, 일부 투고작들의 필연성을 수긍하기 어려운 산문화 경향에 대해 우려를 갖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시적 사용이 지니는 근원적 의의와 위엄에 대한 자각의 결핍을 반영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심을 통과한 9명의 후보들 중 매듭론’ ‘고치의 시간’ ‘에버랜드 화원에서’ ‘깃을 날리며4명을 우리는 대체로 시적 사유가 다소 도식적이거나 언어 운용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제외하였다. 남은 5명의 후보 중 이현수는 뿌리의 방같은 섬세한 안정감이 인상적이었으나 좀더 새로울 필요가 있었다. 정구영은 인드라의 그물등 일부 작품의 재기가 신선했으나 그것이 과연 재기를 넘어 진정한 시적 모험이라 할 만한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재훈은 생기 있고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특히 공중전화 부스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부분적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미나와 양해기 두 후보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신미나의 시편들은 감각과 수련이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가작들이며, 삶을 누추함에서 건져내는 독특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입김’ ‘흙잠을 제외하면 가벼운 감각에 주로 의지하고 있으며, 크게 새롭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양해기의 시편들에 대해서 역시 고단한 생활 현장에서 건져올린 살아있는 글감과 시적 몽상이 잘 통합된 작품들이며, 근년의 젊은 시 일각이

 

드러내는 해체와 일탈 지향에 비해 신선하고 힘이 있다는 긍정적 평가에 대해, 제출된 매편의 시적 발상과 전개가 대동소이하고, 제재의 선택이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일 뿐 1970, 80년대 민중시 운동이 이룬 성과에 비할 때 시적 사유가 새롭다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었다. 재독과 삼독, 격론과 휴회가 긴 시간 이어진 끝에, 결국 신인작가상이 이 한편을 독자 앞에 내놓는 제도라는 점과 신인다운 패기에 가산점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으며, 이어 양해기의 서울 목공소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마음의 안과 밖이, 밈과 당김이 잘 균형 잡힌 수작이다. 울분을 벼려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사랑의 포즈가 아니라-짐을 당선자는 지고 있는 듯하다. 건투를 빈다. 신미나를 비롯한 아홉 분 또한 우리는 잊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심사위원 김종해, 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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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미용실 /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라숱이 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겨울가뭄 극복할 큰 힘 생겨

 

거주민만큼 계단이 많은 동네, 흑석동에서 겨울을 두 번 맞는다. 시간은 어떤 맨홀에 빠져 허우적거렸을까. 되돌아보면 어둔 구멍에 빠져서 며칠 묵었다고 여기게 된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잠에서 깨던 날이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인지 녹슨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런 소리들은 적막을 밀어내는 음계 같은 거였다. 혹은 내 가슴속에서 총총히 계단을 만드는 시 같은 것. 나는 반지하방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퇴고를 하는 꿈도 꾸면서.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친구는 시였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어느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시가 내 곁에 그냥 있는 게 아니라고 알았을 때부터 나는 절망을 알게 되었다. 줄곧 비가 내리던 날이 많았다. 겨울이 오면서 눈이 내리길 간절히 기다렸다. 내게 있어 희망이란 어디서나 공평하게 내리는 눈발 같은 거였기에.

 

눈 쌓인 거리를 이유 없이 걷고 싶었다. 꼭 그래야만 지금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으므로. 드디어 청천벽력처럼 전해진 당선소식은 눈발이 되어 쏟아졌다.

 

그 순간 나는 사유의 계단을 찬찬히 오르 내리게 해준 흑석동이 참 고마웠다.

 

나의 긴 겨울가뭄에 눈발을 내려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분들이 꽤 많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묵묵히 믿어주신 이승하 선생님, 나에게 내릴 눈발을 간절히 기다린 지우 경주. 친구들. 내 시의 고향 그루터기, 시동, 생각만 해도 치열해지는 원광문학회, 멋진 14기 동기들, ·후배님들, 포에티카 선배님들. 식충이를 한없이 믿어준 사랑하는 부모님과 뚝섬 고모, 미순, 석완, 언제나 봄날 같은 누나 미선, 내 귀여운 동생 석민.

 

이제는 길이 가려진 눈길을 더 힘차게 가야겠습니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과 비유 돋보여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늙은 측백나무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신경림·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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