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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가는 길 / 임곤택

 

 

숲에서 나온 길이 나를 앞질러
동백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뼈를 묻을 곳을 찾는 늙은 동물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쉼이 없었다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 그림자와 함께 산을 넘은 바람은 숲에 머물고
알 수 없는
사실 조금은 알 듯도 한 무엇을 보았던지
상기된 꽃잎들이 연이어 숲을 나오고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총총히 길을 건넜다
나무들이 울부짖듯 노래를 부르고
위태롭게 펄떡이던 잎들 위로
오랫동안 공중을 떠돌았을 시퍼런 영혼들이
막 새 몸을 얻어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명백해 보였다
동백숲으로 사라진 길은 돌아 보지 않았고
동백꽃만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죄 없이 다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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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삶의 전의를 상실한 채 깊은 절망, 천길 낭떠러지 앞에 핀 희망의 꽃

여기서 두어 걸음만 더 나갔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었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내가 믿던 몇몇 잠언과 자기암시의 형태로 붙잡아두었던 희망이 잔인하게 철회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도 없이 아프기 시작하던 차였다.

도선사 아직 잔설 덮힌 나무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전혀 다른 새 시작을 이제 준비해야 하나.. 이제서야 무언가 알 듯 한데.. 비로소 詩도, 삶도 내게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미 내 마음의 등과 배가 서로 바싹 맞붙어, 내 영혼은 흑갈색 미이라. 벌써 몇 해를 모래 바람 속에 헤맨 뒤였다. 세상은 그런거였다. 회색의 구름 속에 알 듯 모를 듯 거개가 운이거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미리 다 정해져 있는 듯 했다.

나는 철저하게 길 위에 있었다. 항상 어딘가로 향해 걷고 있었지만 그나마 길가의 노견 때론 질퍽하고, 때론 먼지 뒤집어 쓴 풀꽃들이 마음 편한 그런 길이었다.

간혹, 정말로 아주 간혹, 새로운 빛을 발견했단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감당할 수없는 기쁨과 어지럼증에 잠깐 정신을 잃곤 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땐 낯익은 예전의 그 빛에 다시 눈이 부셨다.

절망의 바로 앞, 만신창이의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선 천 길 낭떠러지, 구멍난 신발 앞에 피어 있는 작고 예쁜 꽃 한 송이.

희망은 그런건가 보다. 사람을 죽지 않을 만큼 늘씬 패주고는 이제 모든 전의를 상실할 때쯤, 바로 그때쯤 한번 씨익 웃어주는 건가 보다.

부족한 글을 예쁘게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앞으로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그리고 항상 넓게 살피고 깊게 고민하는 시를 쓰고 싶다.

부모님과 우리 가족, 그리고 후배 의혁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부터’라고 다짐하며, 다시 한번 뽑아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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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 깊이 있는 주제 형상화 돋보여

불교신문 신춘문예라는 특징 때문인지 응모된 시(시조) 작품의 대다수가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대다수가 불교적 세계관을 작품 속에 내재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재로 다루어진 것들이었고, 불교적 관념만 생경하게 노출되어 있을 뿐 한 편의 정제된 시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품이 만만치 않은 시적 역량을 보여 주어 심사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작품은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최숙자), ‘고물상 장씨’(금이정), ‘대흥사 가는 길’(임곤택) 등 세 편이었다.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삶의 애환을 가다듬은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구머리 찜의 묘사와 일상적 삶의 반성의 교직이 작위적인 데다가 다소의 감상기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고물상 장씨’는 배냇병신인 고물상 장씨의 삶과 폐품이 되어 고물상에 버려진 물건을 대비시킨 상상력과 단순한 비유법에서 느껴지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고물상 장씨의 배냇고물인 왼팔에 얽힌 사연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재생을 꿈꾸는 사물과 인간의 욕망이 긴밀한 조응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함께 ‘고물캉’과 같은 어휘가 시적 긴장감을 이완시켜 놓았고 “고물상을 동그랗게 에워싸던 불빛도 차츰 사그러진다”를 독립연으로 처리한 것도 애매했다.

‘대흥사 가는 길’은 첫눈에도 잘 다듬어진 작품임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별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짜여진 구성과 평이한 어휘와 조사(措辭)를 통해 생사의 반복적 순환과 그 경이로움에 관한 깊이 있는 주제를 형상화한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이 작품이 주는 ‘잘 정제된 작품’이란 일차적 인상은 신춘문예 응모용이란 혐의를 주는 게 사실이지만, 작품을 이만큼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기량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과 함께 투고한 작품이 보여주는 고른 수준을 시 당선작으로 뽑는다.

앞으로 신인으로서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갖추면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으며, 더욱 정진할 것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장영우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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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렴

 

 

1
깊이 흐를수록 뜨거워진다는 건 돌아올 메아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그건 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이거나
팽창하는 하늘의 속삭임일지도 몰라요 갈대가 맨발로
웅숭그린 강가에서 당신을 떠나 보내고 물수제비를 뜨며
단발간격으로 수면 흔들어 놓는 납작 돌멩이의 몸부림이
낯설지 않은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저 돌멩이의 마지막
흔적이 바닥을 울리는 순간 찡한 뜨거움으로 녹아
흐르겠지요

2
맨 처음 당신을 찾아 나섰던 그 자리 거기 나는 꼼짝없이
발묶여 있는데요 깊게 흐를수록 멀어지는 당신을, 아득한
바닥에서 푸른 피 흘리며 나는 다슬기처럼 시큼해지는데요
뜨겁다니요 시리디시린 혈관 껴안아 주는 건 피붙이같이
뿌리 얽힌 갈대 뿐이었어요

3
어쩌면 물구덩인 듯 보여요 깊어지라 한 마디를 水深(수심)만큼
던지고 뗏목 따라 떠난 당신을 돌아올 거라 손꼽는 망부석
하나가.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먼 나루 하나 남겨
놓고 떠났는데요 혹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수증기나 구름
혹은 비가 되어 당신이 깊게 박아놓은 혈관의 뿌리를
뜨겁게 헹궈주리라 믿는데요

 

 

 

 

[당선소감] 

 

오랜동안 캄캄한 바다에 홀로 떠 있었습니다. 망망한 바다의 어둠 속에서 가랑잎같은 나룻배 하나에 몸 실은 채, 표류할 섬 하나 보이지 않고 방향 가늠할 표적 하나 없이 나아갈 항로를 잃고 있었습니다. 파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뒤로 밀려나 언제나 그 자리인, 무감각 상태에서 헤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주위와 싸우기 전 자신과의 싸움에 먼저 지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소스라치듯 깨어나 보면 밤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이 질책 담은 눈망울을 하고 죄다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아, 아찔하게 정신을 가다듬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일상에 지친 감정을 깨워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하는 감각들이 없었더라면 나의 싸움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막, 한 줄기 구원같은 등대빛이 서방정토에서 비춰 왔습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파도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증거를 확인한날,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詩(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도 좋은 시라 격려해 준 知人(지인)들과 시의 正道(정도)를 걷도록 준엄하게 채찍질해 주신 서지월 선생님, 부족한 작품을 選(선)해 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불교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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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기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선학 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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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에 서다 / 이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어 오면
나도 못내 저물어 땅거미가 되는 것인데
저물다가 문득
自盡하려 곤두박히는 나뭇잎 보았다
재빠른 하강곡선
그속에 잎맥같은 무수한 길이 보였다
뿌리에서 잎맥까지 이어진
길따라 나섰다
감은눈 속으로도 휘영청 열린
길은 이제 들숨에서 시작되고
날숨으로 끝나가고 있다
뿌리가 준비한 거한 목숨들
길 가운데 빼곡했다
텅텅 비워야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
그 길 어느 도중에야 섬광처럼 왔다
내 비어가는 속 뜰 어디엔가도
형형안 만다라 한폭 쟁여져 있으려나
다시 빈들에 서 본다
冬 安居에 들고 있는 초겨울
저 들판
바람 쓸리는대로 지는 잎새처럼 떨어져
섭생의 가드레일 같은
난해한 눈빛으로 열반경을 읽고 가는
새 떼 한무리
가뭇없는 허공에 銀紙처럼 구겨박혀
일몰이 된다

 

 

 

 

꽃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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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먼 길 나서며

첫 눈 조신조신 내리더니 축복이었나 봅니다. 그 날 오후의 난데없는 당선 통지는 내게 분명한 이정표였습니다.

잊었는가 했는데 잊은 게 아니고 떠났는가 했는데 떠난 게 아니었는지, 때론 파고 높았고, 때론 깜깜한 그믐의 시절 속에 부대껴 흐르며 살다가 문득문득 사무치는 그리움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시(詩)였습니다.

늘상 설렘으로 지켜봤던 새해 아침 그 환한 지면에 제 졸시(拙詩)를 올려주시다니, 놓칠 뻔한 꿈 붙잡아 가두게 해 주시다니, 불교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합장(合掌) 올립니다. 이 격려에 힘입어 첫 걸음 내딛었으니 천리길 마다 않고 가겠습니다.

이 기쁨 회향합니다. 유년부터 아직토록 내 시의 도반인 저 햇빛, 거기 잘 버무려진 삼라만상과 종단엔 그 시의 지향점인 우주적 자아에까지. 그리고, 내 서정의 자양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생전의 불효를 뉘우침과 더불어.

또한, 늘 곁을 든든히 채워주었던 가족과 법우들,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벗에게 온전히 회향합니다. 저 중중무진 법계에까지.

 

 

 

내 영혼 21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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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넓은 세계로 나가기를”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는 많은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통과하여 본심에서 오른 작품들은 강재현 〈청평사 가는 길〉외 8편, 백하길 〈공사장에서〉외 8편, 김승호 〈山家에서〉외 5편, 정하해 〈살아서 관을 짜다〉외 4편, 이정원 〈빈 들에 서다〉외 5편, 홍 범 〈보이를 마시며〉외 4편, 이완 〈나비〉외 5편 장석원 〈낙하하는 것들의 이름을 안들〉외 4편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은자, 장석원, 이정원, 김승호 네분의 작품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은자의 간결성, 이정원의 서술성, 장석원의 참신성, 김승호의 형식적 절제 등이 각각의 장점으로 돋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시적 사유와 투고된 작품의 균질성 등으로 인해 이정원의 〈빈 들에 서다〉와 〈등신불〉 등을 금년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나 ‘풍경에서 뛰어나온 마음들’을 붉은 배롱꽃에 전화시킨 상상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최동호 교수

 

 

 

 

[가작] 山家에서 / 김승호

나무 숲 바람소리 가만히 숨죽이면
못 물은 왜 이렇게 꼬리가 길은지,
돌담에 기대어 있는 산중의 의문 하나를
모악의 산맥같은 돌로 눌러 죽이고
석등 밑에 부려놓은 허리 휜 길 하나
가슴 속 붉게 흐드러진 화염도 밟고 와서
손 호호 불어가며 고봉 쌀밥 공양하고
그림자 가득한 창호문을 닫아걸면
화엄은 깊은 바닷속 늘 깊이 잠겨 있음을
비 끝에 쓸리는 적멸의 이 길을
시내에 모이는 솔 소리에 비내리면
미륵은 우리 곁에서 수행자로 걷고 있다.

 

 

[입선소감] 그리움을 글로 채우며…

산 속 깊은 산가(山家)에서 가지가 앙상한 나무에 등 기대고 있으면 가만히 밀려오는 산중의 외로움, 외로움과 그리움은 늘 함께 했다.

산 위에서나 산밑에서나 내 가슴은 늘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였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나를 속박했었고 뒤돌아보면 항상 회한만 남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앓이하며 원고지를 채우던 스무 살 때가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된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원고지도 버리고 세상 속으로 훌쩍 뛰어 들었지만 언제나 가슴 저 밑은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또 다시 스무 해쯤을 훌쩍 넘기고서도 그리움은 변하지 않았고, 늦게 서야 다시 시작한 글쓰기의 보상 심리는 상이라도 받는 것이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아내가 곁에서 격려해 주었던 것이 큰 위로가 되어서 좋은 상을 받는 것 같다. 더욱이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된 것은 내게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선(選)에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라는 것으로 알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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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 / 오다정

 

 

달력 뒷장을 읽는다

무심한 세월이 쓰고 간

투명한 글씨 위 아버지

長江 한 줄기 그리셨다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

가보지 못한 세월 너머로

進進, 언덕으로 포구로

그 어디 너머로 進進

화면 가득 띄우고도 모자라

반 토막만 남겨진 배

 

돛대도 물결도 반 토막이

된 자리, 아버지 또 그리신다

정직한 삼각형

· · ·

넘어보자 했으나 넘지 못했던

능선 뾰족뾰족 이어진다

 

빨갛고 검은 日歷의 뒷면

연습 없어 미리 살지 못한 세월로

열 두 척 반, 배 떠간다

아버지, 그려내신 한 장 그림

소실의 문자 빼곡히 박힌

발음되지 않는 국어책 같다

 

 

 

 

 

[당선소감] 글자들에 세상을 구겨넣던 나...오늘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노래를 듣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손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따라도 불러 봅니다. 그러다가 잠잠히 그저 듣기만 합니다. 세상에 노래는 얼마나 많던가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그의 순정을 다해 노래해 왔던걸까요. 그들의 노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의 노래는 왜 이렇게도 못생겼을까요? 그런데도 거기 누군가는 제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좀 귀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못생긴 노래에 담은 지극한 순정함과 곡진함을 당신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외로움에 지쳐 저의 노래들이 시들기 전에 말입니다

 

다르게 말 할 줄 몰라서, 다른 말을 배우지 못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자들에 죽어라고 나의 세상들을 구겨 넣고 앉았었던 저를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못생긴 노래를 힘을 다해 부르고 앉은 저를, 저의 지난 날들을 당신은 기억하실까요? 저의 기억이 혹여 당신의 기억인 걸까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빚을 쓰는 것이라고만 믿어 왔던 제가 떠나 온 자리는 너무 먼 곳이어서 이젠 처음 빚을 냈던 자리로 갈 수 없어요. 당신이 저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제가 절 무너뜨렸던 걸까요?

 

보세요, 정신의 가장 차가운 바닥에 나를 쓰러뜨렸던 당신, 몇 번이고 꺾이면서도 무릎을 털며 일어서려 할 때마다 다시금 나를 주저앉히곤 했던 당신, 삼엄한 당신, 다정한 당신, 그리고 우스운 당신, 오늘은 저를 좀 오래 들여다봐 주세요.

 

가족이 힘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 아버지 어머니, 형부 양웅식 큰언니 김종민, 영원한 마음속의 은사, 민해 선생님, 신대철 선생님, 지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었던 미선언니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연옥, 용옥, 향선. 모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밝은 눈으로 늙은 미래를 축복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열심을 다해 노래부르리라 다짐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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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은유·상징 적절히 조율된 수작앞으로 좋은 시인 되리라 확신

 

오다정씨의 '중세국어연습 혹은 그림'은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시다.

 

이 분의 시에는 우선 어려운 말이 없다. 시에 어려운 말을 쓰면 정말 어려워진다. 그런데 본심에 올라온 시가 대개 그러한 시였다. 시는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삶을 노래하자는 것이므로 문장이 헛갈리거나 하면 그냥 놓아버리게 된다. 누가 끙끙거려가면서까지 시를 읽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을 건 다 있다. 행과 행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사유의 도약은 읽는 사람을 화들짝 깨어나게 한다. 시와 산문의 구별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당선작은 은유와 상징, 환상, 그리고 우리네 생활이 적절히 조율된 수작이라 할 만하다. 가령 '마킹펜이 지난 자리/ 푸른 물결 굽이굽이// 배를 띄우랴'에서 연과 연 사이의 바다를 보라! 게다가 '반 토막만 남겨진 배'는 우리를 금세 이 세상 저편으로 싣고 가지 않는가. 더불어 '굽이굽이' , '進進', '뾰족뾰족' 등등 적절히 배치한 리듬은 시의 맛을 크게 살려준다. 이만한 '언어''사유'라면 당선작으로 충분했다. 최근 회자되는 장광설의 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상쾌한 작품이다.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최인숙씨의 '무지개' 와 허영둘씨의 '고요를 잘 살펴보면' 등이었다. 모두 잘 짜여진 작품들로 읽혔으나 굳이 단점을 들라면 너무 기성품 같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서툴지만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이 더 새롭고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아쉽게 내려놓게 됐다. 이 분들 역시 훗날 좋은 시인으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 심사위원 : 안도현,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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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고물상 / 박옥순

 

 

1

충대우 6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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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정감이나 관념을 구체적인 표현없이 실감나게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체적인 표현에 얽매이면 묘사할 수 없는 부분까지 묘사하게 되어 시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체험이 부족한 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비명까지 묘사하려들지 말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묘사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러 투고자 중에서 박옥순의 '개신고물상' 외 7편은 단순하긴 하지만 삶이 묻어나 있고 표현에 무리가 없다. 호흡도 자연스럽다. 당선작 한 편만 두고 본다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느껴지고 낮은 곳을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눈도 없는 시보다 미숙하지만 눈을 떠가는, 생명 있는 시를 밀어본다

 

- 심사위원 신경림, 신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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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날 / 김행란


집 한 채가 1톤 트럭에 너끈히 실린 오후
하나 둘 도시의 집들이 나와 거리를 간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집에는 집이 없다

낯선 자의 비좁은 집에 편승하여
세 식구 잠시 인생을 포개어 앉는다
밀어낼 수 없는 따스한 불편
살아온 사십여 년을 싸놓은 짐보다
무거운 아내의 한숨이
보자기를 풀어놓은 듯 물결친다

못질을 한다
세 식구 밝은 웃음을 걸어두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꺼낸 희망도
단단하게 더욱 단단하게 걸어 놓는다
오래된 살림살이 낡은 남루를 벗듯
아내는 오래오래 닦는다

부엌문에 딸아이가 제 그림을 붙인다
아내와 내가 어설프게 도화지에 서 있는
아내와 내가 가난하게 서 있는
방 한 칸과 두어 평 부엌을 이어 놓는다

딸아이의 여섯 살 웃음이 진달래꽃으로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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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파업  / 오영숙

 

 

집이 난파되자 나는 가슴에 얼음 하나 깨고 있었다
햇볕에 풀어져버린 기와집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활자가 부서진 우편함에는 주인 잃은 일련번호들이 빗물에 잠겨 얼룩을 물어 뜯고 있었다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세간들이 퇴행성 관절염에 걸려 전신을 삐꺽거리며 엎어진다
여기 저기서 숨어있던 먼지들이 뛰쳐나와
아버지의 독한 체위에서 잠수한다
허기진 방안을 매운 온기가 가족사진에 곰팡이를 피워내고
내 어린 시절을 떠내려 보냈다
청마루 밑에 흩어진 헌 신발들이 맥박이 뛰고
빈 뜨락에는 녹이 슨 농기구들이 동강 나서 비명을 지른다
한 구석에는 잠을 털고 일어선 우물가에는 절구통이 무게를 잰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버리고 있었다

 

 


춘궁기  / 오영숙

 

초가집 서까래는 전신을 삐걱대며 소리를 낸다
촘촘히 박힌 돌담, 한 모퉁이가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흙더미 속에서 일어난 붉은 장미 한그루가
햇살을 당기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안간힘으로
서서 얼굴을 가리고 봄 날을 만났다 풀섶을 헤친
틈 사이에서 못다핀 꽃 한송이가 빗장을 푼다
넓은 마당에는 낡은 의자가 부러져 움츠리고 앉자
슬픈 상처를 달래고 있었다 욕망의 살갖을 태운
얄팍한 브라우스가 창가에 서성이며 잃어벼렸던 암내를
찾고 있었다 암덩어리 끄집어 낸 돌담은 무게 무거워서
길 하나 열어놓고 불그레 취해있는 장미와 물레방아를 돌린다
속살드러낸 이데올로기 길 밖으로 질주한다

 

 

 

 

[당선소감]

 

《부모님 영전에 영광바쳐》밤마다 골짜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여울은 다시 세찬 바람이 되어내 어린 날의 가슴에 그리움의 언덕 하나씩을 쌓아올렸다. 그렇게 내 시의 꿈은 열병처럼 달아올랐다. 때로는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에 문인화를 저미면서 시를 향한 담금질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당선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 작은 어깨 위에 큰바위덩이 올려졌다.

고달프지만 즐거운 이 길을 나는 소중하게 가꾸어 가리라 다짐한다. 잔잔한 파도가 거센 파도 앞에서도 역시 파도가 되는 것처럼 시는 나의 일상이며 생활이 될 것이다.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는 모래알로 남을 것이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언어미학의 맛을 깨우쳐 주신 하현식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먼나라에 계신 부모님 영전에 모든 영광 바칩니다. 그리고 항상 자상한 남편과 내 착한 아들 승준이와 격려해 준 문우들과 더불어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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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선을 거쳐 선자들의 손에 넘어온 작품은 열 분의 것이었다. 시단의 흐름을 일정하게 따르고 있으되, 다 같이 시적 개성이 무엇이며 새로움이 무엇이며 현실이무엇인가를 알고 썼다고 할 수 있다.

왜 시가 새로워야 하고 개성적이어야 하는지를 재론할 필요는 없다. 새롭지 않으면 새로운 신인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선자들은 위와 같은 시각에서 열 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검토하였다. 그런 과정을 두 시간쯤 거쳐 우리의 손에는 이영옥씨의 작품과 석미화씨의 작품, 오영숙씨의 작품들이 남았다.

이영옥씨의 작품들은 여섯편 모두 고통스런 삶이 가지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있다는 점이 남달랐으며, 석미화씨의 작품은 당선작으로 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강구에서」의 「전어들이 가을을 몰고 다닌다」거나 「비상등을 켠 안개는 소문처럼」이라는 구절은 시의 맛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미지들을 투명하게그리고 끈질기게 밀어나가며, 매우 절제된 언어를 쓰고 있는 오영숙씨의 작품들이나타나자 밀려났다. 오영숙씨의 작품에서는 허점도 과욕도 찾기 힘들다. 균형을 취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응모작품 모두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있다.

선자들은 「아버지의 파업」 「춘궁기」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쉽게 합의하였다. 쉼없이 정진하여 좋은 시인이 되기를 선자들은 바란다.

 

심사위원 김규태,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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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 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 / 이가희

 

 

강경상회 이씨는
짠 손바닥에다 새우를 키운다
멸치떼도 몰고 다닌다
헝클어진 비린내를 싣고 와
육거리 젓갈시장 골목 가득 풀어놓는다
날마다 그는 해협을 끌어다
소금에 절여 간간하게 숙성시킨다
그가 퍼 주는 액젓은
오래 발효시킨 수평선이다
그는 저울에다
젓갈의 무게를 재는 법이 없어
누구나 만나면
후덕하게 바다를 퍼 준다

저무는 수평선처럼 강경상회가 셔터를 내리면
골목에다 몸 풀었던 바다 갯내음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싱거웠던 내 몸,
어느새 짭짤하게 절인
젓갈이 된다  

 

 

 

 

나를 발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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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우선 응모자와 작품 편수가 많다는 데에 놀랐다. 전체적으로 보아 약간은 유행성에 흐른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서 기뻤다. 지방신문에 응모된 작품이지만 중앙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5편, 전민호 씨의 '귀가'는 간결미 넘치는 시의 화법이 선어(禪語)를 연상케 하였는데 호흡이 너무 짧다는 지적이 있었다. 김현주 씨의 '바람꽃'은 시의 터치가 가볍고 경쾌하면서 이미지의 적출(摘出)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매력적이었으나 지나치게 소품에 흐른 점이 또한 지적되었다. 이병희 씨의 '단풍' 역시 단아한 서정시로서의 품격을 고루 갖추고 있었으나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있다는 의견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장항 씨의 '말복'과 이가희 씨의 '젓갈 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였다. 장항 씨의 작품은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친자연적 소재와 도저(到底)한 문장이 힘이 강력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이에 비하여 이가희 씨의 작품은 간드러진 시어의 감각성이 노련한 솜씨를 더하고 있었고 삶의 실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충분히 곰삭아 있을뿐더러 오늘의 서정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의 영예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정진하여 좋은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 바라며 간발의 차이로 선에서 밀렸지만 종심에 오른 분들의 시업(詩業)에 부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종해,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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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 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 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 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몽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 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 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 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 끝에 채 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걸음씩 비켜 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 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 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 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 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 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 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앟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않고 있으므로.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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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 심사위원에게 전달된 25명의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모든 시들이 일정한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단 한 사람의 한 편을 고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틀린 문장이 더러 눈에 거슬렸고 장식에 치우쳐 시 한 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든 시들이 있었다. 깔끔한 소품도 더러 눈에 띄었으나, 그 소품에 들어찬 사유의 깊이 혹은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기교에 치우치거나 아니면 너무 표피적인 상황 묘사, 상투적 세계인식이 거슬렸다.

 

전체적으로 '이층에서 본 거리' 외 는 침착한 관찬력과 욕심부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묘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들이 가진 즉물적 상상력도 좋지만, 그 즉물성이 시대적 삶에 대한 암시까지 겸하고 있었다. 너무 기교만 부리고 장식에 매달린 작품보다 오히려 이렇게 가라앉은 묘사를 하는 작품이 돋보였다.

 

- 심사위원, 김혜순, 이남호 시인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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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 / 조유인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 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씩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 듯.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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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이를 한두 살씩 먹을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한두 가지씩 사라진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란 것도 겉으로는 거창하게 들리지만, 가능성의 한 갈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내가 취했던 것은 모조리 다 열등의 갈래길들이었다.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내게 다가온 엄청난 가능성의 시작을 조금은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싶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시인을 두고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는 '가슴으로 하는 말'이 될 터인데,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여태껏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혀끝에서만 맴돌아 나온 가성은 아닌가 싶어 덜컹 부끄러워진다.

 

시는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 그래도 내가 가냘픈 신음이라도 내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심호흡부터 해야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만들 때까지 피나는 노력과 발성 연습도 해야 할 것이다.

 

내 작품 최초의 고급독자인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릴 수 있어서 신난다. 지난봄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한집에서 살게 된 형과 착한 동생과도 어깨동무하고 싶다. 영문과 및 국문과 교수님들, 동국문학회, 누구라고 얘기하면 빼먹을 이름이 있을까봐 차마 말 못하는 친구, 선후배님들과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졸작과 그 수많은 '의도적 오류'들에게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꼭 보답해 드릴 것을 다짐해본다.

 

 

 

[심사평] 빛의 소리의 영롱환 합금 아름다워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은 클랙션 하나로 운전자의 짜증을 표현하거나, 두꺼운 코트 위로 등을 긁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고 답답한 노릇이다. 언어의 꽃인 시는 바로 그 힘겹고 답답한 느낌이 트이면서 은폐된 삶이 내장 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달리 비유하자면 그것은 우연히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윗 도리와 아랫도리 사이로 트이는 흰 살결 같은 것이다. 해마다 신춘의 좋은 시들은 숨겨진 삶의 맨살을 응시하게 한다.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김희영)땅은 제 속에 눈물을 가두고 살아간다’(임경림)는 비록 참신한 조망이나 색다른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성력을 갖춘 시들이다. 그러나 대개의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그러하듯이, 기성의 시풍과 범용한 수사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을 갖는다.

 

기형도의 말투를 연상케 하는 기이하고 황당한 어법으로 삶의 황폐와 좌절을 넋나 간 듯이 중얼거리는 한용국의 시들, 특히 실종내성등은 젊은 시의 새로운 물줄기를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다만 군데군데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구절들이 글쓴이의 언어 통제력을 의심케 하고 장인으로서의 신뢰를 가로막는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유인의 금관은 고대 석관의 밀폐된 뚜껑을 여는 듯한 돌출한 상상력을 빛과 소리의 영롱한 합금을 빚고 있다. 물론 간혹 추상화된 말들이 관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가느다란 국수 다발처럼 힘을 잃는 듯한 느낌이나, 마지막 네 번째 연이 시적 의미의 종결에 별다른 기여를 못하고 사족처럼 내걸린 듯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는 빛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읽어내고, 깨어짐으로부터 만들어짐의 비밀을 탐색하는 특이한 눈길은 유망한 시인으로서의 전도를 예감케 한다. 아울러 나직하고 느릿하면서도 끈기와 뚝심을 갖춘 꼬깃꼬깃한 말솜씨는 사소한 곤경에 쉽게 꺾이질 않을 근성 같은 것을 짐작케 한다.

 

당대의 신뢰할 만한 글쟁이로 살아남아 매일신춘문예의 이름을 빛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권기호(시인.경북대 교수)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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