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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필화(革筆畵)를 보며 /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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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땅의 모든 시인께 영원히 못갚을 말 빚"

 

꽃다운 기운이 감도는 방기(芳氣)마을에 세 들어 지낸 지 꼭 백일이 되었습니다. 석양이 겨울 잔디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오후 4시. 홀인원처럼 날아든 당선 소식에, 아무도 없는 8만평 잔디밭 한 가운데로 나가 눈물이 멈출 때까지 울었습니다. 호천통곡(呼天痛哭) 떨치고 일어나며, 깊고 오랜 애증의 뿌리인 사랑하는 가족과, 내 생에 마르지 않는 말의 곳간이 되어주시는 찬란한 어머니, 지치고 힘든 순간마다 자식보다 꼭 세 배는 더 아파하신 당신을 뜨겁게 불러봅니다.

시를 통해서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처럼, 통점(痛點)을 감추며 침묵하는 모두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던 날들이었습니다. 더 깊고 낮게 가슴으로 불러보며, '그 곁에, 단 한 번이라도 스며들 수 있다면…'하는 간절함으로 미련하리만큼 글쓰기를 해 온 문청(文靑)에게 '등단'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안겨주신 존경하는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잡아주신 손의 온기 내내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첫 마음 잃지 않고 거듭나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그 길에 함께 할 국제신문사의 빛나는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국어선생님에서 이제는 10년 지기(知己)가 되어 가슴으로 응원해 주시는 박진희 선생님, 우리들 모여 목요시를 열자던 문창 도반들, 부경대 문우들, 함께 했던 날들이 고맙다는 안부가 모자랍니다. 숱한 스침 속에서, 따스하게 말 건네는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아 만남의 찰나를 허락해 주셨던 부산의, 이 땅의 모든 시인께는 온 밤을 지새우는 눈길로도 말의 빚 다 갚지 못할 테지요. 이 소중한 자리를 빌려, 가슴 속 심해의 마르지 않는 물길로 흐르고 계신 모교 국문과 교수님들께 '사람이 힘이 되는' 시의 진의를 탐미하며 부단한 길을 가보겠다는 겁 없는 다짐과 함께 존경을 전합니다.

 

 

 

 

활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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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섬세한 관찰력 돋보여

 

본심에 오른 24 편을 읽으면서 세계와 사물을 언어로 대치시키며 자기만의 작품으로 다듬어 가는 솜씨에 감탄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혁필화를 보며' '철마 가는 길' '樹醫師(수의사)의 지구본' '고래의 새벽' 중에서 나름대로의 개성과 언어 구사능력 그리고 새로운 신인으로서의 참신함과 살아있는 패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혁필화를 보며''고래의 새벽'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일정한 수준에 이른 '혁필화를 보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가운데 '노래'는 매끄러운 비유와 함께 시적 성취감도 있었지만 신춘문예가 갖는 건강한 정서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어 제외되었다. '철마가는 길'은 다소 안일한 접근으로 무게를 떨어뜨렸고 '樹醫師의 지구본'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시어 사용이 다소 거칠고 시가 가져야하는 깊은 맛이 결여되어 감동을 반감시켰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래의 새벽'은 적절한 비유와 참신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사물을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긴장미 있는 이미지 창출이 아쉬웠다.

 

당선작 '혁필화를 보며'는 일상에서 건져올린 예사롭고 평범한 시적공간을 착실히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였고, 언어를 매만지는 손길에서 성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오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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