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내 사랑 물먹는 하마

 

nefing.com

 

 

 

[당선소감] "바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 있냐고"

 

지나가는 바람이 어린아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하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니. 여기 이곳에 민들레가 보여서요. 호기심 많은 바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 동무와 지금 소꿉놀이 재미있니. 글쎄요? 그런데요 동무의 몸이 너무 가벼워 둥둥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리고 있는데, 제 겨드랑이에 솜털이 막 솟아 올라오는지 자꾸 근지러워요. 이제는 지금 이 자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들, 그들이 뿌리내려 걸어간, 걸어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은밀히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희열이다. 알고 보면 사람도, 사람의 마음 그 열정도 한 알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갈밭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내려 마침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때문에 나는 많이 눈물겹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이 기쁘기도 하다.

 

국제신문 신춘문예의 자리에 어느날 문득 날려와 뿌리내린 민들레 마음 하나의 꿈이 오랜 시간 참은 뒤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마음껏 날아올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홀씨의 이름,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음이 정확한 말을 걸어 갈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당선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울먹였던 아내와 지금 막 옹알이를 시작한 딸에게 지금 한없이 행복한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헌납하시고도 눈물이셨던 어머니 그리고 내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형과 동생, 나 때문에 영혼이 아팠던 수많은 그 분들에게 지금 가리늦게 '많이 죄송스러웠다'는 말 전하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심사평] 자연에서의 삶 개성 있고 건강하게 풀어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외국에서, 고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다양한 작품이 투고됐으며 남성들의 투고가 많아져 신춘문예 여성화의 비율이 다소 주는 현상도 보였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시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시를''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 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나머지 분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