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 이언지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 마농꽃 :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당선소감] 시 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태안 바닷가에서 방제 봉사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을 생각하고 있을 때 빗방울처럼 당선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다정히 만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깊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내 행복은 고통 속에 있다는 걸 알기까지 참 많은 가을을 낭비했다.
자명한 인식이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지점에 내 시가 있어야 함을 어렴풋이 안다. 묵묵히 바다의 얼굴을 닦고 있을 아이의 분주한 손길처럼 시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세상의 때를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하얀 흡착포에 묻어나던 시의 분비물을 빗방울이 와서 태워버린다. 늘 바깥보다 안이 추웠다. 그럴수록 시의 손발은 더욱 뜨거웠다. 눈만 높아 시집 못 간 노처녀같은 시에 면사포를 씌워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린다.
시를 익힐 무렵부터 기꺼이 시의 동료로 대해 주셨던 유병근 선생님, 늘 푸른 나무처럼 곁을 지켜주시는 부모님, 시인이 되기 전부터 시인으로 불러주었던 믿음직스러운 내 아들 혁, 흐린 날 함께 달을 찾아 다니던 당신, 당선 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시던 시의 동료들, 모두 모두 따뜻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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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탁월한 언어 솜씨와 거침없는 상상력의 힘
400여 명의 시 1800편을 읽으면서, 여전히 한국시의 지층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인도 많지만 아직도 시인 지망생도 많음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시의 수준은 상당히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김진의 '달, 멈추다', 김미혜의 '몽유', 김정의 '숨 쉬는 고서점', 이언지의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등은 최종 논의 대상 작품으로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달, 멈추다'는 설화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발상 자체는 살만 했지만, 그 현재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한계가 보였다.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이란 점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몽유'는 예민한 감각을 통한 이미지화나 새벽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시선은 좋으나, 시어 선택에서 아직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를 창출하는 힘이 모자랐다.
시인은 일상어를 자기 언어로 새롭게 전환시켜가는 힘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고서점'은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그 상상력을 밑받침해줄 수 있는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는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언어유희에 가까울 정도로 능수능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낼 듯하면서 감추며, 감출 듯하면서 드러내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시적 전개와 거침없이 펼쳐가는 상상력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준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전원은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문정희·남송우·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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