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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저녁 7시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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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는. 내 詩가 거짓인 줄 알았다 돌아보면 모두가 거짓말 같은 게 삶 아니던가 그래서 두려웠다 함부로 들뜨지도 또 함부로 슬프지도 않으려 했다 길을 걷는 동안,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는. 나를 믿지 않았다

당선소식을 들은 날 저녁, 퇴근길 차안에서 싸구려 향수냄새가 나는 주유소 휴지에 코를 풀며 나는, 울었다. 차 창 밖으로 詩를 닮은 잎들이 詩를 닮은 사람들이 또 詩를 닮은 휴지통이 겨울 밤 안에 있었다. 왜 내 詩가 되었을까, 라는 물음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아주 아주 긍정적이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神이 너를 한번 믿어보라며 던져준 금화 한 닢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내 삶이 금화 한 닢으로 통째로 바뀔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않고 고맙고 행복,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다음. 바람이 부는 쪽으로 詩를 쓰고 싶다.

내게 아버지 같았던 오 교수님, 사랑하는 남편과 J, 그리고 내 생애 가장 슬픈 이름인 엄마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다. 또 모자란 詩를 안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라고 꼭. 꼭. 전하고 싶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7명의 91편이었다.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것이었으므로 다들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난형난제에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실로 자웅을 결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도에서’‘옷 만드는 여자’ ‘누드’ ‘부활’ ‘사자가족’ ‘막차’‘아버지의 겨울’‘남산동 2가’‘도배를 하며’‘4월’ 등 10편이 남아 한판 겨루기를 계속하였다.

설왕설래 끝에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압축력이 약해 느슨해진 것, 너무 사변적이고 설명적인 것, 시적 변용에만 겉멋을 부린 것,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 감상적인 색칠하기에 급급한 것, 가식적 위장술로 교묘히 포장한 것, 시류에 편승한 산문적 억지를 고집한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얻어낸 결과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일전을 겨룬 작품은 ‘아버지의 겨울’ ‘남산동 2가’‘4월’등 3편이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다 기성 시인의 냄새가 너무 짙은 나머지 오히려 낡은 매너리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역으로 ‘남산동 2가’는 용기와 열기를 앞세운 젊은 혈기와 현실 재단적 안목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거칠고 미완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까지 참작하여 작품 ‘4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작 ‘4월’은 다소 소품적인 데가 있으나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행과 연 구분의 탄탄한 구성력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데다 공교롭게도 최종심에서 겨루다 탈락하게 된 두 작품의 장단점을 무리 없이 절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또한 크게 참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정의 본령과 시적 정공법을 지속적으로 살려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용택 김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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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실역 일번 출입구 / 최정란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톤 트럭 한 대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잘 발효된 침묵을 한 줌 얹자
설익은 말들이 숨을 죽이고 돌아눕는다
반죽 묻은 손으로 간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관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젖은 말들 불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완숙의 음절로 한껏 부풀어올라
두꺼워지는 어둠을 몇 걸음 뒤로 밀어낸다
종이봉지 안에서는
단골이라고 한 마디 더 얹어준 덤의 말
속에 든 말없음표까지 골고루 뜸이 들고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말을 받아든
나는 목에 걸린 고등어 가시 같은 누추한 설움에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무성한 차가운 말들이 파놓은
캄캄한 지하도 같은 숨은 함정들을 용서한다
오늘도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농아 부부
소리 없이 따뜻한 느낌표 같은 붕어빵을 굽는다



 

 

장미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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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의 쌀을 씻는다. 시의 반찬을 늘어놓고 간을 본다. 아직은 시고 떫고 싱겁고 짜고 맵다. 어느 날인가 감칠 맛 나는 시를 밥상에 올릴 것이다. 알맞게 뜸들여 꼭꼭 씹어먹고 싶은 맛난 시를 써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시의 식탁으로 초대해 까칠한 녹슨 수염이 비치는 반짝이는 수저를 손에 들려주고 삶의 허기를 메워 주고 싶다.


부엌에 굴러다니던 전복껍데기 하나를 들여다본다. 아름답다. 산란하는 빛에서 파도소리가 부서진다. 빛이 부족하고 파도가 거칠고 껍데기도 하나뿐인 전복의 삶의 조건은 부족한 것 투성이. 저 아름다운 무늬는 다름 아닌 고통이며 슬픔이었을 것이다. 슬픔이 없었다면 드러난 뼈 속에 고통의 무늬를 새기는 대신 허영을 살 찌웠을 것이다. 조금씩 들어오는 햇빛을 물의 프리즘을 통과시켜 갈무리하는 동안에 따라 들어온 물결도 같이 출렁이다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고통이라면 온전히 내 몫이겠지만 기쁨이라면 절반은 결핍과 부재의 몫이다. 내 미움을 받으면서도 나를 지켜준 결핍에게 악수를 청한다.


나머지 절반은 살아오는 동안 내게 기대를 걸어 주고 참고 지켜 보아 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내 삶의 힘인 지석 지혜, 그리고 늘 나를 설레고 긴장하게 만드는 당신이 있어서 참 행복하다. 아버지와 시어머니, 형제들에게 기쁨의 작은 몫을 드린다. 머무르고 흐르는 귀한 인연들에게도 인사를 전한다. 삶은 고통 속에서 아름답다는 말, 비오는 날도 맑은 날과 같은 무게로 소중하다는 말, 그대들이 없었다면 나는 감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술한 가능성을 읽어 주시고 말없는 격려로 흙 위로 싹을 올리는 법을 보여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목요창작반 문우들에게도 부끄러움을 건넨다.


신입생의 설렘을 선물로 주시며 격려의 회초리도 같이 주실 신경림 남송우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첫 발자국 떼었으니 서두르지 않고 착실하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곱게 똑딱, 곱게 똑딱’ 들린다며 어린 나를 옆에 앉히고 굳이 눈감고 들어 보라 하시던 어머니 산소에 이 글을 바칩니다.

 

 

 

 

사슴목발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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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려진 작품은 12명이 쓴 71편이었다. 이 시편들을 읽으면서, 예비시인들이 지향하는 시의 경향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발상의 새로움도 있었고, 세태를 흥미롭게 반영하는 삶의 시들도 많았다.

 

그러나 심사자들의 관심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시적 대상을 개성적인 시선으로 노래하는 역량이었다.


다양한 소재들이 시적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참신한 언어감각, 선명한 이미지 조형력과 개성적인 자기 호흡법을 지닌 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는 대부분의 시들이 신춘문예용 맞춤시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cafe 통기타’ ‘낙타할머니’ ‘굴비’ ‘두실역 일번 출입구’ 등이었다.

 

‘cafe 통기타’는 통기타의 줄이 지닌 음역을 다양한 이미지로 변주하고 있는 발상 자체가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짧고 긴 호흡의 교대가 빚어내는 개성적인 리듬은 살만했다. 그러나 시를 여는 첫행의 이미지가 다음 행을 적절히 유도하고 있지 못해 시작의 적절성이 문제가 되었다.


‘낙타할머니’는 한 노파의 일상의 모습을 낙타로 형상화하고 있는 발상은 좋았으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기법이 너무 교과서적인 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발상에 걸맞는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굴비’ 역시 충분히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역량을 보이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어머니가 엮던 굴비에 대한 추억을 섬세한 리듬과 원형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점은 이 시가 지닌 강점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지녀야할 구성의 집중력이 떨어져, 시가 지녀야 할 긴장감을 갖지 못한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두실역 일번 출입구’는 시의 구성력이나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농아부부가 굽는 붕어빵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빵을 굽는 행위를 말을 굽는 시적 의미로 끌어올리고 있는 시선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감을 통해 전해지는 시적 화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무리 없이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쉽게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계속적인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신경림(시인), 남송우(문학평론가·부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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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집 근처 / 전다형


구서1동 산 18번지
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수선집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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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연필을 깎는다. 뭉텅한 연필 입구 깊숙이 들이민다. 빙빙 돌린다.

투명한 통에 잘게 부서져 쌓이는 나무들의 아픔 어디에 뿌리를 남겨둔 나무였을까. 또 다른 제 살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무의 아픔 끝에, 몸체 안에 숨은 심이 보인다. 그 단단함이 역사(歷史)같다.

뼈와 살을 깎는 아픔으로 세상을 건너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그런 삶만이 깊고 곧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내 삶을 연필 깎기에 넣어 빙빙 돌린다. 톱날이 신이 난다. 욕망과 죄의 비늘을 쳐내고 물관부의 투명으로 눈뜨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밤을 세워 섬세한 연필심으로 시(詩)의 행을 이어나가고 싶은 것이다.

연필이 깎인다. 뾰족한 심이 일어나 나를 찌른다. 아픔을 견딘 것만이 가장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시인의 명찰’을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내 시의 철자법부터 짚어주신 하현식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께도 감사드리며 함께 공부한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묵묵히 내 시의 길을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사과상자의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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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0명에 이르는 응모자의 시들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20명 시인들의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는 점에서 심사자들은 아주 ‘기뻤음’과 함께, 단 한 편을 골라야 하는 ‘고통에 빠져야 했음’을 밝히고 싶다. 그러나 거의 전부 산문시라는 ‘시적 유행’에 물들어 있는 점은 심사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언어를 쓰는 솜씨, 또는 그러한 감각적 표현의 형상화는 모두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으나 그 감각의 표현 뒤에 숨은 사유라든가, 리얼리즘의 진정성, 따라서 肉化되어 있는 시를 찾기가 어려웠음은 결정적 흠이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들은 다음 네 편이었다.

‘해류와 노동’, ‘주먹만한 구멍 한 개’, ‘퇴행성 관절이 왔다’, ‘수선집 근처’- ‘해류와 노동’은 상당히 아까운 작품이다. 그러나 신선한 그 소재와 시적 세계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념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리듬감이 없었다. 좀더 진정성으로, 리얼리즘의 무대를 세웠다면 리듬감이 살아나는 시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먹만한 구멍 한 개’는 사유가 있는 시적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그 사유의 깊이가 언어에 실리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언어와 사유가 따로 놀고 있었다고 할까.

‘퇴행성 관절이 왔다’도 진정성과 필연성, 구체성이 함께 하나의 시적 무대 위에서 형상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육중한 세계를 세우려고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선집 근처’는 우선 리듬감이 있고, 시적 무대 위에 형상화된 세계가 아주 肉化되어 감지되는, 아름다운 시였다. 그리고 감각적 언어에 실린 그 사유의 깊이도 심사자들을 아주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또 이 시인의 시 중에 ‘구서동 신 서동요’가 지닌 리얼리스틱한 현장감의 언어도, 이 시인의 시에 대한 심사자들의 마음의 자를 간절하게 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심사자들은 위의 네 편 중에서 ‘구서동 신 서동요’를 쓴 시인의 ‘수선집 근처’를 당선작으로 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예심 정일근· 이성희 / 본심 허만하·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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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믈리에* / 강혜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획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 소믈리에 :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당선소감] 큰딸의 발걸음 응원해주세요

 

큰딸 구두 680원, 콩나물 50원, 두부 30원……, 30년을 살아낸 늙은 한옥을 떠나오면서 어머니는 책장 서랍 속 몇 권의 가계부와 일기장, 빛바랜 편지 뭉치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 속에 일렁이던 뜻 모를 불꽃을 십 원 한 끝 틀림없는 셈법과 쓸쓸한 몇 줄의 일기로 다독였을 어머니.

사라져 버린 그 뭉치 속에는, 성긴 눈송이 같은 밥을 먹고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던 가계도를 주머니에 구기고 다니던 청년의 아버지가 삼동의 골목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말한 사랑의 고백도 함께 있었다.

귀한 말씀처럼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 보고 싶었던 그것들을 조용히 태우시던 어머니의 남모를 회한이 오래도록 마음을 에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꺼지지 않고 그날 이후로 뜨겁게 울고 있다. 때로는 그을음을 피워 올렸고 때로는 꺼질 듯 위태로웠지만 ‘시’의 얼굴로 나를 찾아와 넘실거린다.

겨울은 여전히 깊고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강물 위로 튼튼한 다리를 놓을 재간이 내게는 없다. 이렇게 더듬거리며, 왜 그렇게 멀고 야속하냐고 악을 쓰며 걸을 것이다. 길이 아득해지는 날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머니가 내 핏줄 속에 흘려보내주신 눈물 어린 화법으로 곱은 손마디를 녹여 세상에다 대고 오래도록 연애편지를 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서툴겠지만 행복할 큰딸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떨고 있는 어깨를 두드려 일으켜주신 심사위원님과 광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푸른 시의 방’ 강인한 선생님, ‘시인회의’와 강정숙 선생님, 정윤천 선생님, 고성만, 조성국, 김행란 선생님, 김재준 선배, ‘터앝문학동인회’와 매서운 나의 독자 은주에게 감사드린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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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소믈리에의 삶, 와인의 삶 포개는 솜씨 기발

 

본심에 열여덟 명의 시가 올라왔다. 10대에서 60대까지 각 연령층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지방도시에서 시골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자기의 방에서, 시에 골똘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뭉클했다. 본심에 오른 만큼 언뜻 보기에 다 근사했다. 그 중, 시상(詩想)은 기발하지만 아직 밑그림 단계인 시,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 말을 대폭 줄여야 할 중언부언 시들을 추려냈다.

이효정, 오정순, 권명호, 강혜원 이 네 명의 시편들이 남았다.

이효정의 ‘손잡이의 시간’은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은하수를 횡단하는 한 무리의 맘모스를 만나면’이나 ‘그리고 오래된 인류의 분실물을/하나 둘 태우고 싶어’ 같은 맥락에 있어서 뜬금없고 표현에 있어서 상투적인 구절이 걸렸다. ‘고서(古書)’는 완성도가 높았다. 판타지가 겉돌지 않고 현실에 고즈넉이 배어들어 있다. 판타지가 주조인 시는 체험이 받쳐줄 때 설득력이 생긴다.

오정순의 시편들은 풍경으로 정서를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매끄럽게 잘 읽힌다. 그런데 좀 늘어진다. 말을 압축하면 탄력이 붙을 것이다. 권명호의 ‘남일상회’는 시골서민의 풍취가 잔잔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서정시다. 당선작과 끝까지 겨눠보다가 아쉽지만 놓았다.

강혜원의 ‘어떤 소믈리에’는 소재도 독특하고 표현도 기발하다. 화자인 소믈리에의 삶과 와인의 삶을 포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올린다.

심사위원 이성부,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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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골 / 이슬

 

나무의 뿌리들이 태엽을 감고 있는 시간

누군가 상자뚜껑을 열듯 소리를 쏟아내는 나무들의 춤

소리가 멎을 때까지 흔들리는 일에 한창이다

울긋불긋 어지러운 현기증을 다 털어낸 자리

나뭇가지를 뛰어 다니며 놀던 수액들은 모두 바람이 된다

앞뒤를 보여주며

숨기는 것 없다는 듯 보여주는 엽록의 투명한 연주가 길다

잎의 사이사이마다 음계가 반짝 거린다

 

새들이 앉았다 간 나무 밑 마다

불안한 노래가 가득 떨어져 있다

뿌리가 감고 있는 것은 깊은 어둠이다

칸칸의 어둠에 앉았다 날아가는 새들

가끔 잎을 털어내는 환한 시간이면 날아오르는 새들이 있다

 

가장 밝았던 한 때

꽃잎의 치어들을 다 허공에 날려 보내고

나무는 지금 푸르게 비어 있다

꽃의 그늘이 진 자리에 초록의 소리가 가득 하다

 

바람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 속

나이테를 돌아 풀어지는 태엽

평생 춤출 곡이 빙빙 돌아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푸른 치마를 입고 거꾸로 서서 흔들리는 듯

바람이 상자를 닫는 시간

음계들이 떨어진 나무 밑에는 그늘도 다 졌다

나선형의 나이테 그 길이만큼 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오르골: 자동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조그만 상자 속에서 쇠막대기의 바늘이 회전하며 음계판(音階板)에 닿아 음악이 연주된다. 

 

 

 

[당선소감] 당선의 무게 큰 성장통 될 것

 

각각의 사람과 사물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에게는 그 고유한 시간의 부피가 부족합니다.

 

또한 모든 관계에 사이가 있듯, 저는 저와의 시차를 확인하려 스스로 사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저 다운 것들과 멀리했던 그 사이를 오늘은 끌어당겨 다정하게 팔짱을 기고 싶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응모 결과가 또 다른 시차를 제게 던져 주는군요. 시차 부적응시에 두통과 초조함을 유발하듯 당선이라는 무게는 저에게 부담과 불안함을 유발했습니다. 이것이 성장통의 한 종류라면 꽤 괜찮기도 하고 꽤 잔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미팅을 주선하듯 시와 만나게 해 주시고 아직 어린 자질을 칭찬해주신, 그러나 여전히 무서운 박해람 선생님! 이제는 제 두려움도 다독거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늘 말씀하신 명분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 특히 엄마! 엄마와 함께 시를 공부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멀리 백일장에 갈 때 운전기사를 자처해주신 아빠! 자만하지 말라시던 그 말씀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동생들, 함께 공부하는 경운서당 학동님들.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용인문학 회원님들.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제가 읽었던 모든 시들과 부족한 시를 선택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 한 광주일보사의 선택에 누가 되지 않는 시를 쓰겠습니다. 잊지 못 할 새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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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비범하고 감각적인 사유 … 신예 출현 기대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시적인 대상을 나름의 감각과 사유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으나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단정하고 힘 있는 문장이 드물었고, 대개는 장황했다. 한 편의 시는 생략을 통해 되비추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그것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임요희씨가 투고한 ‘포장’외 3편의 작품 가운데 ‘포장’을 주목해서 읽었다. “흰 천으로 싼다”는 이 ‘포장’의 의미는 꽤 중의적으로 읽혔다. 존재의 흔적을 없애는 행위, 혹은 철거라는 의미에 상당할 이 상징은 신선했다. 다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이 작품에 비해 미흡했다.

 

이문정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시적인 대상을 내심(內心)으로 끌고 들어가는 인력(引力)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시한 서정의 내용이 대체로 평이했다.

 

박은영씨의 ‘검버섯’외 2편은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함께 경합을 벌인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박씨의 작품은 가만가만 나아가는 시행의 보폭이 신뢰를 갖게 했다. 솔직했고, 과장이 적었다. 작품의 내용이 가계(家系)에 국한된 것들이어서 다른 작품들을 더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슬씨의 ‘모닥불이 달을 굽는다’외 3편은 첫눈에 들었다. 이슬씨의 작품은 부드럽지만 독특한 상상력을 선보여 위력적이었다. 시적인 대상을 둥글게 감싸는 빛 같은 게 느껴졌다. 대상을 그 외곽에서 한 번 더 감싸는 이 비범하고도 감각적인 사유는 대상에 대한 무궁한 사랑과 뛰어난 통시(洞視)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시 쓰는 이로서의 미덕을 천생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신예의 출현을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라는 당부를 드린다.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이문재,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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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당선소감]

오늘 순천만 갈대밭을 다녀왔습니다. 석양 속에서 푸른 날들이었으나 마른 화살들로 가득한 벌을 걸으며 나는 이 벌판처럼 아름다운 과녁이었는가, 푸르게 날아와 주었던 캄캄하게 식어가는 내 화상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연인처럼 시에게 세상을 변혁하라, 길을 보여달라 악을 쓰다 차갑게 배신했지만 긴 시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나야 나, 이 사람아, 어깨를 쳐준 시에게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다락에 넣어둔 먼지 쌓인 꿈을 닦아주며 다시 써 볼 것을 권해준 기연이 씨. 나의 아내여, 당신이 베풀어준 이 많은 것을 나는 다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해찬아 슬아야, 나의 신앙들아. 나는 너희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주위에서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렵고 무서웠단다. 나의 시는 미래의 너희들에게 남기는 편지일 것이니, 내 심장의 소리와 색깔을 적을 것이다. 비루할지라도 아름답게 보아주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절벽에서 한 점 가능성을 귀히 여겨 손을 내밀어주신 정윤천 선생님, 시의 엄정함을 가르쳐 주신 강인한 선생님, 매 시편마다 쓴소릴 아끼지 않으셨던 큰누님 강정숙 선생님, 다시 시를 쓰는 길의 절반을 대신 걸어준 고성만, 조성국 형. 놀이터가 되어준 시인회의, 시마을과 시마을 동인, 영원한 마음의 고향 터앝문학동인회 그리고 광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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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에 기운이 없다. 살가운 서정의 만지작거림도 없고, 이 더러운 세상을 후려치는 거대담론의 포효도 없고, 형식의 실험을 위한 대담한 모험심도 없다. 시가 죽어 가는가? 기력은 시들시들하고, 목소리는 다 고만고만하다. 가족·밥·가난·고향과 같은 비슷비슷한 소재가 넘치고, 대부분 평서형 종결어미로 만족하고 거기에 그냥 머무른다.


사소한 이야기를 그저 사소하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 그렇다. 심사를 하는 내내 당선작을 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더 유심히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정한 수준에 근접했다고 판단해서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정길호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고래’는 온돌방의 고래와 바다의 고래를 말놀이 기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못해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허했다.


이성임의 ‘클립 속의 여자’는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해 단단한 언어 구성능력을 보여주지만 멋이 지나치고 소품에 그치고 있다.


오승근의 ‘소리를 줍다’는 시적 묘사에 공을 들인 시인데, 말투가 시를 앞서나간다. 시어와 일상어의 차이, 혹은 그 둘 사이의 절제를 좀 더 공부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함께 끝까지 겨룬 이혜경의 ‘가벼운 집’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고 시가 생기는 지점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적 대상을 너무 안이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그 핵심을 집어내는 데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재준의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시인으로 성공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이문재,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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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수선공 / 최일걸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를 놓는 길과 걸음이 구두를 망가뜨린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
쉼 없이 구두 뒷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
막바지로 구두를 몰아세우는 걸음걸음,
그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길도 걸음도 아니었다

구두방 선반 위에서
번득이며 광휘를 뿜어내는 구두가
시치미를 떼고 돌아앉는다
그는 어긋난 길들을 구두에서 삭제하고는
도톰한 밑창으로 새로운 길을 포장한 다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한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그는 시선을 곧게 펴서 손님의 종종걸음을 떠받친다
그의 뼈마디가 시큰거리다가 어긋난다


 

 


[당선소감]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 노래하고 싶어

예기치 않은 당선 통보였기에 지각변동만큼 충격이 컸다.
그 충격파는 나의 전 생애를 고스란히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돌이켜 보면 눈물이 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부모님께 귀한 지면을 빌려 따스한 사랑을 전한다.
나의 어머니는 지방 화단에서 활동 중이시다.
어머니는 교육자의 길과 어미라는 말뚝에 묶여 있었기에 마음껏 꿈을 펼치지 못하셨다.
하지만 지금도 어머니는 붓을 놓지 않고 매일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시며 자신의 세계를 확충하고 계신다.
어머니의 재능과 열정이 온전히 나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나의 아버지의 끈기와 집념이 내 생에 근간이며 나의 추진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문장은 어떠한 한계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당선의 영광은 나의 몫이 아니고 부모님의 몫이다.
몇 달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 외할머니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농토에 생산된 쌀로 오늘도 시를 짓고 있다.
밥 한 공기의 따스함으로 늘 내 곁에 계시는 할아버지의 두런거림에 귀 기울여본다.
시는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세상에 그늘진 곳을 밝히는 시를 쓰고 싶다.
언제나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그 아픔을 노래하고 싶다.
세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시어로 형상화하여 하나의 세계로 견고하게 일으켜 세울 것이다.
부족한 시를 넉넉하게 품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시를 쓰겠다는 다짐을 전한다.
나의 반쪽인 아내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지금 나는 아들 진후의 첫걸음을 향해 열려 있다.
일 년 동안 아기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명의 강인함을 배웠다.
아들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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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꼼꼼한 관찰·묘사 시적 가능성 충분


올해는 응모작이 줄어서인지 본심에 올라온 16명의 작품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수준이 다소 떨어진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 중에서 정영희, 김효준, 최일걸 등의 작품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영희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되고 날렵한 반면, 의미구조가 취약하거나 모호한 게 흠이었다.


구체적 언어와 추상적 언어를 교직하는 것이 일종의 낯설게하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정영희의 시에서는 그 연결이 순탄치 않거나 진술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패닉의 바다’, ‘소나무역’처럼 유니크하고 일정한 스케일을 지닌 시를 결국 내려놓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적인 새로움이란 표현의 참신함뿐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확장되는 의미의 깊이에서 온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그에 비해 김효준의 시는 다소 거칠지만 시상을 밀고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박쥐의 서곡’, ‘구름공장’, ‘닭’ 등 가족의 고단한 삶을 동화적 비유나 우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김효준의 시들은 간명하고 발랄한 대신 시적인 복합성이나 여백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소재의 폭을 넓히고 상상력을 좀더 다채롭게 변주할 수 있다면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당선작으로 뽑은 최일걸의 시들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꼼꼼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대상을 인상적으로 각인해낸다.


묘사 중심의 시들이 지닌 답답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답답함을 극대화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구두 수선공’에서도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읽어내는 그의 시선은 작은 움직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이라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그 외에도 정육점, 후미진 골목 등 변두리적 삶의 풍경들을 주로 보여주는 그의 시들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칼날을 지니고 있다.


당선을 계기로 그 칼날이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삶의 어두운 환부를 베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희덕
▲연세대학원 국문학 박사 ▲1989년 ‘중앙문예’에 ‘뿌리에게’로 등단 ▲1998년 제17회 김수영문학상, 2001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5년 제1회 일연문학상, 2007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뿌리에게’, ‘반통의 물’, ‘사라진 손바닥’ 등 작품집 다수.

/이문재
▲경희대 국문학과 졸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등단 ▲1995년 김달진문학상, 1999년 제4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2002년 제17회 소월시문학상, 2005년 지훈문학상, 2007년 제7회 노작문학상 수상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제국호텔’ 등 작품집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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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저울눈 / 정재영


푸줏간 주인이 고기 한 칼 썩썩 썰어
척, 저울에 올리자 바늘이 바르르 떤다
그의 손대중이 저울눈 하나를 겨냥해
잠시 그 경계를 넘나들다가 딱 그 눈금에서 멎는다
얼마나 칼질을 해댔으면……
칼 쥔 손에 저울눈 하나가 직감처럼 꽂힐 때까지
마음의 저울추가 수도 없이 진자운동을 거듭했으리라
모자라서 보태고, 넘쳐서 덜어내는
모자람과 넘침이 오락가락 셀 수도 없었으리라
내 몸에 던져지는 생의 부하를 짚어내면서
내 안에서도 저 저울처럼 바늘 하나가 수도 없이 흔들렸다
모자람과 넘침 사이에서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다
살코기 한 덩이에 요동치는 저울처럼 내 몸도
등짐이라도 끙, 지고 일어설 때면 바르르 떨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저 푸줏간의 저울처럼 참 많이도 흔들리며 살아온다
저울은 이제 평정을 되찾았다
생의 무게를 내려놓고서야
꺾인 허리 반듯이 펴지던 어머니처럼.

 

 

 

 

꽃 등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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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갈증과 결핍감이 내 습작의 동력

 

시는 나에게 갈증 같은 것이었다.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것이었다. 이 갈증과 결핍감이 내 습작의 동력이었다. 건천의 돌밭 같은 언어의 지층에 깊숙이 가라앉은 시의 물줄기를 찾아 바닥을 헤매온 지 어언 20년. 어쩌면 내 삶 자체가 늘 조갈에 시달리며 콸콸치솟는 수맥을 찾아가는 도정일 테지만, 오늘은 건천의 돌바닥에 단비가 뿌려지듯 해갈의 소식. 기쁘다. 나는 금세 축축이 젖었다.


맨손으로 건천의 돌밭을 파헤치듯 시는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이 언뜻 머리를 스친다. 언어 이전에 현실에 밀착하고, 삶에 밀착할 때 시는 한 줄기 청량한 수맥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스승은 또 내 목마름을, 나를 넘어 타자를 향해 투사하는 연민을 시의 방법론으로 가르치셨다. 그것은 세상 모든 물상들로부터 영성을 이끌어내는 물활론에 닿아있었다. 내 시는 불볕에 달궈진 건천의 돌밭에서 단비를 갈망하는 눈빛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대상을 향한 자아의 투사로 요약되는 이 시 창작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습작기로 들어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살고 삶을 살 것이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엎드려 감사의 말씀 올린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빗나간 내 시의 안목을 바뤄 주시느라 노심초사 애쓰시고 심려가 많으신 박제천 선생님께 큰절 올린다. 시에 대한 열정을 키워오면서 서로 격려와 조언을 마지않았던 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 문우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이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일상에 독특한 시선탄탄한 구성력 돋보여

 

모두 열네 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평균 다섯 편 안팎을 응모했으니 예순 편쯤 되는 작품을 읽은 셈이다.


이 가운데 정재영(‘몸의 저울눈’ 외), 이병철(‘수평선’ 외), 변호이(‘길’ 외) 세 명을 최종심에 올리는 데는 어렵지 않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도 본심에 올랐던 만큼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소양도 충분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은 단점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무엇을 써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쓸 거리가 보이지 않는 시, 즉 왜 썼는지를 모르겠는 시) 둘째, 위와는 반대로 소재나 주제는 괜찮은데 시적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기성시인의 작품이라면 문예지 등에 발표해도 무난하겠지만, 신예의 등단 작품으로는 아쉽다. (패기나 참신함이 없다. 혹은 밋밋한 소품이다.)


변호이의 시 ‘길’은 여러 미덕을 갖췄다. 독창적이고 내성적이고 시를 밀고 나가는 사고의 힘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덴마크 장기(臟器) 어디쯤/숨어계셨습니다 감쪽같이/스물 세 해를 속았습니다” 같은 구절이 보풀처럼 걸렸다.
정재영과 이병철을 놓고 으뜸과 버금을 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제가끔 탄탄한 세계를 보여줬다.
이병철의 ‘수평선’은 감각적 표현이 돋보이는 섬세하고 깔끔한 시다. 요즘 우리 시단에 이런 시의 수혈이 필요하다는 데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작품을 떨구는 데는 적잖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근간 다른 매체를 통해서라도 그의 시들을 만나게 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정재영이 데뷔하는 무대에 에스코터가 된 것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한다. 당선작 ‘몸의 저울눈’은 작은 일상적 사건에서 삶의 무게와 균형과 흔들림을 짚어내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응모한 시 전부 힘 있는 게 아주 긍정적이다. 거듭 축하하며 문운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도종환,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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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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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깊은 시선·다양한 형식 시적 가능성 보여줘

 

모든 심사는 새로움과 완성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미묘한 저울질과도 같다.

 

풋풋한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작품에는 무언가 한끝 모자라는 공백이 보이고, 잘 짜여진 구조와 안정된 화법을 만나면 각()이 너무 다듬어져 익숙한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양자가 적절한 지점에서 만나는 작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투고작 중에서 실험의식과 젊은 감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원진철의 시였다. 쉼표나 마침표만으로 제목을 삼는 것도 재미있는 발상이라 할 수 있고, 활달한 구어체 문장은 다소 거칠고 산문적인 대로 씹는 맛이 있다. 그러나 시상이나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고 집중시키는 힘이 약해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미정의 시는 차분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고 절제된 서정성을 보여준다.‘마중물같은 작품에서 그런 특징은 일정한 성취에 도달하지만, 전반적으로 상투화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문으로 된 기술방식이 특유의 속도감을 낳기보다 의미를 분산 또는 분절시키는 것도 그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신유정의 폐품장의사였다. 그의 시에서는 사유의 힘이 느껴지고 안정된 호흡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호감이 갔다. 시어를 이 정도로 유연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오랜 숙련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자꾸 읽을수록 왠지 허전해지고 그 낯익음이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선작으로 뽑은 정동철의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도 사실 아주 낯선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읽다 보면 골목의 작고 어두운 공간에서 도장을 파며 살아가는 사람의 등을 통해 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게 부조(浮彫)되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대상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신중한 손끝이 낳은 이미지일 것이다. 한 가지 스타일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형식의 모색을 보여준다는 점도 그의 시적 가능성에 신뢰를 갖게 한다.

 

다만, 뛰어난 시는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노력 못지않게 비약과 파괴를 통해 탄생한다는 것을 부기(附記)해두고 싶다.

 

심사위원 안도현,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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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순* / 강윤미

 

 

길섶 가시덤불 속에서
용케도 멜순을 찾아내시는 어머니

재잘거리는 내 눈이 서운할까
마주치시는 것도 잊지 않고
말에 간간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도
그녀의 등허리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향해 있다

두 눈 부릅뜨고 그녀의 눈길을 따라가 보지만,
내 눈에는 엉킨 실타래같은
가시덩굴 뿐

선밀 나물은 나를 피해 요리조리 숨어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얼른 달려와 다소곳이 앉는다
그 부름으로 환해지는 산보길
멜순도 허겁지겁 봄을 불러와 꽃을 피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선밀 나물과 어머니의 멜순
길바닥에서 엉켜 뒹구는 그 말들을 모아
어머니는 버무리신다
데쳐도 향기는 손끝에 남고,

어머니 몸엔 멜순향 나는 파스가 숨어 있다

* 멜순: 선밀나물의 제주도 방언

 

 

 

 

 

자장면 먹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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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오늘 저녁,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대학원서를 냈던 열아홉의 겨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지평선 위를 달리던 기차를 생각했습니다. 처음 보았던 기차가 얼마나 신기했던지요.


올해로 제주도를 떠나온 지 육 년이 되어 갑니다. 그 동안 다섯 번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또다시 겨울이 왔습니다. 항상 첫눈을 기다리던 마음이었는데, 막상 당선소식을 듣고 보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먼길을 갈 수 있게 용기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힘겨울 때마다 말없이 손을 잡아주시는 이상복 교수님, 믿고 지켜봐 주시는 정영길 교수님, 정동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전동진 선생님, 박성우 선생님, 유재화 선생님, 원광대 문창과 동아리 '시공간'과 대학원 식구들, 나의 친구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물푸레나무 정배오빠, 동생 윤정.수복, 오늘도 집어등을 켜고 딸을 응원해주시고 계실 부모님께 이 기쁨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부족한 시를 항상 따뜻하게 읽어주시는 강연호 교수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심사평]덜 길들여진 감수성 높이 사

 

새롭고 도전적인 목소리를 만나고 싶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갈수록 어려워져가는 것 같다. 투고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소재나 발상이 비슷비슷하고 시단의 유행을 모방하기에 급급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도 강윤미, 주영국, 문정희 등의 시는 일정한 궤도에 올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희는 말을 다루는 솜씨가 능란하고 일상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변주해 내고 있지만, 상상력과 어법이 지나치게 낯익은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주영국은 사회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시에 포섭해 들이며 건강하고 뚝심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스케일에 비해 내용이 명료하지 못한 것은 시어가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는 증표일 것이다.


강윤미의 시는 주영국의 시에 비해 감정의 선(線)이 너무 여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선자들은 강윤미의 덜 길들여진 감수성과 발견의 시선을 높이 사서 '멜순'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즐겁게 합의했다. 어머니의 삶과 사랑을 '멜순'이라는 낯선 말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이 작품 역시 그런 특장을 잘 보여준다. 당선자의 이 새로운 출발이 커다란 공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심사위원 강은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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