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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잠수함 /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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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슴의 불로 삶의 날것 익혀갈것

 

전날 밤 길어진 머리를 파마했다. 머리카락은 하늘이 물려준 세계의 지붕이자 벗을 수 없는 외투다. 내 천장을 다르게 꾸미고 새 옷처럼 신선해진 오르막을 걸어오며, 나를 들여보내는 바람의 아귀가 전과 다른 것을 알았다. 작은 변화에도 지구는 모든 힘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자연이다. 꼿꼿한 겨울이 동그랗게 손 모으고 머리 위에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침 전화를 받았다. 한 목소리가 미간을 통과했다. 온 겨울이 몸에 들어와 휘몰아쳤다. 내 발은 어디로 달아나고 없었다. 그 순간의 숨 한 모금을 나는 다시 마실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흙을 먹어봐야 사는 맛을 안다지만 나는 흙을 먹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짧은 불로 밥을 지을 수는 없다. 은근하고 느긋한 불을 가두고 살 것이다. 불을 통해 날 것을 가두는 일이 시가 아닐까. 사람은 더 큰 집과 더 큰 차를 위해 살아가선 안 된다

 

나의 어머니 우리 가족! 오래 연락 못한 동지들, 병일! 은영! 딱 한 번 칭찬해주신, 오 캡틴 마이 캡틴 이경교 교수님! 1반 식구들! 늘 열정적인 신달자 교수님. 명지전문 캠퍼스! 무한한 눈길로 만나고 싶은 은정! 나의 메모! 내 문학의 역사이신 심사위원님들! 돌을 씹듯 감사하다.

 

 

 

 

[심사평] “역동적 시어들 호방한 기운 넘쳐

 

지난 해와 비교해 볼 때 전체적인 응모작의 수준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끄는 빼어난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일이다. 물론 새로운 신인의 등장이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사를 할 때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본심으로 넘어온 15명의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중에서 한 응모자의 작품이 중복 투고로 인해 결선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응모의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남다른 정진으로 꾸준한 향상의 길을 가기를 바라면서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시인 황동규· 최승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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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 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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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의 가 든든한 아침됐으면"

 

아직까지 자장면 빨리 먹기 내기에서 져본 일이 없다. 자장면 곱빼기를 먹고 나서도 보통을 한 그릇 더 먹는 식성이지만, 성격이 급한 나는 좀처럼 뜨거운 음식은 먹지 못한다. 이래저래 어지러웠던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아침밥을 새로 안치셨다. 그리고 국도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언제나 스쿨버스가 올 시간에 허둥댔고, 급한 마음에 한두 숟가락만 들고 일어서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침, 어머니는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에 찬물을 반쯤 담고 그 안에 내 국그릇을 띄워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바가지 안에서 동동 떠다니는 국그릇에 밥을 말아 아침을 버티곤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크게 어긋나지 않고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어머니의 이런 마음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나의 시 쓰는 일이 어머니의 빨간 바가지처럼 누군가를 헤아리고 살피는 일이 될 수 있으면 한다. 시란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진실을, 별 것일 수 없는 일상의 단면을 온것으로 담아내는 것이어서,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한 것들이나 사소해서 지나쳐버리는 것들을 온전하게 보듬어 간직하는 일이 결국 시의 노릇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잠 많은 이들에게 마침맞게 식은 콩나물국이나 청국장처럼 나의 시가 사람들에게 든든한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백핸드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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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역량·동화적 상상력 독특"

 

당연한 말이지만, 신인의 시는 참신해야 하고 내적인 절실함에서 비롯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튼튼한 시적 역량을 겸비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사자들이 의견을 교환한 것은 바로 이런 심사의 척도였다.

 

김병호의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시의 질료로서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이만큼 섬세한 신인도 드물 것이다. 마음의 천진성에서 비롯된 동화적 상상력도 독특했다.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자리 앉혔다는 징검돌이나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같은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응모한 봄날의 사진 한장에 나오는 어머니에게 연애 한번 걸고 싶은거지요/봄 햇살 속의 어머니를, 나는/그만 처녀로 놓아주고 싶은 것이지요같은 구절도 그렇다.

 

한편의 시를 서정적으로 끌고 가는 리듬 구사 능력과 분위기의 통일성에서 시적 역량이 느껴졌고, 대상과 공명(共鳴)하는 부드럽고 여린 감수성이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두 심사자 사이에는 당선작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향상의 길위에 시가 늘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남승민의 양초’, 김선아의 인사동, 황사 며칠’, 안여진의 새장에서가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감태준, 최승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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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돔을 찾아서 / 윤성학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 영등 감생이; 영등철(영등 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음력2월초)에 잡히는 감성돔

** 채비;낚싯대 끝에서 낚시 바늘까지,낚싯줄과 찌와 납덩어리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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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누군가를 깨우는 떨림됐으면

 

멀었다 나는.

 

나를 키운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 내가 크긴 큰 건가. 그리고 K와 술을 마시며 낚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잉어낚시 이야기는 즐겁고 애틋했다. 잉어는 지금 없다. 낚싯대를 들고 있던 그날의 바람과 물결의 흐름과 깊이와 찌의 흔들림과 손끝에 전해오던 덩어리감만이 남을 뿐이다.

 

K와 나는 조금씩 취해갔다. 내가 잡은 건 무엇일까. 광혜원 저수지에서 건진 향어도 지금 없다. 그럼 내가 잡은 건 뭐였지.

 

퇴근길 지하철에서 졸다가 옆에 앉은 사람의 핸드폰 진동에 놀라 깬 적이 있다. 나와는 관계 없는 사람들이 나를 깨웠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신호들이, 그 커뮤니케이션의 언어가 누군가를 깨울 수 있을까. 내 마음 속의 떨림이 다른 사람의 허벅지에서 진동할 수 있을까. 그런 게 문학인가.

 

아직 멀었다 나는.

 

이렇게 궁금한 게 많다니. 사람들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에 깨지 않는다. 창호지 조그만 틈으로 팔락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작은 떨림.

 

매년 복권을 사는 기분으로 응모했었다. 발표가 나기까지의 설렘으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새로 쓴 몇 편의 시가 남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들이는 시간이 줄어든다. 도대체 어디다가 공을 들이고 살고 있나.

 

아직 멀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가족들, 나를 가르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나와 맥주 마시기를 즐기는 내 친구들, 농심 사람들, ‘나의 팔할 구공친구들. 그들의 아랫목이 골고루 따뜻한지 어떤지 이부자리 밑으로 손을 한 번씩 넣어보고 싶다.

 

 

 

 

당랑권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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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팽팽한 긴장감... 쉼표에도 무게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김선아의 석모도 가는 길’, 박일구의 외출’, 이상우의 지리 수업’, 그리고 윤성학의 감성돔을 찾아서가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석모도 가는 길은 아름답다. ‘세상의 마지막 노을에 물들어/ 태어나는 투명한 말이나 파도 위에 앉은 수천의 금빛 동자승들과 같은 빼어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토로가 흠이었다.

 

외출은 길게 논의되었다. 이 산문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응모작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들-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는 행 갈이, 산문시 특유의 장점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 확산된 산문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을 밝힌다. ‘지리 수업엔 재기가 번뜩인다. 그러나 시를 성급하게 하나의 의미로 단순하게 귀결짓는 잠언조의 진술들이 더러 눈에 거슬렸다.

 

문학적 역량도 중요하지만 신인이라면 새로운 면모가 있어야 한다.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신인은 그렇다. 새로운 표현에의 열정으로 늘 젊어야 한다.

 

그 모든 면에서 충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선작으로 결정한 감성돔을 찾아서는 참신하다.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긴장을 늦추는 법없이 전개된다. 리듬의 자연스러움과 진술의 격조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쉼표 하나를 찍는 데도 이 신인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쉼표 하나에도 자신의 이름과 인생을 걸어야 할 것이다.

 

당선작에 이견이 전혀 없었던 심사였다. 그만큼 눈에 띄는 시를 만난 것이 기쁘다.

 

심사위원 황동규 서울대 교수, 시인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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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당선소감] 짐승 배설물이 내뿜던 난로의 온기가 준 선물

 

당선통보를 받고 예전 벌판의 집에서 느꼈던 온기가 생각났습니다.

 

딱딱하게 마른 짐승의 배설물이 내 뿜던 난로의 그 온기.

 

맨 처음 짐승의 뱃속에서 쏟아졌을 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을 그런 배설이라면 지금 나의 이 지난한 배설도 그와 같은 ()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은 걸음입니다. 뒤처진 걸음입니다. 그래도 간혹, 뒤를 살피는 업이 천직이 될 수도 있다는 용기를 내어 봅니다. 척후병의 막중함으로 詩作(시작)에 임하겠습니다. 안도의 한 숨이 얼마나 방심하는 순간인지를 다시 한 번 되뇌이면서 잠시만 기뻐하겠습니다.

 

새벽운동시간까지 깨어있는 나를 보며 잠 채근을 해주던 무뚝뚝한 남편과 가족의 둘레에 앉은 승준, 은경, 동현, 수연, 동준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딸만 낳아 평생을 죄인처럼 사셨던 어머님의 기쁨도 남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 시의 언저리부터 살펴주신 박해람 선생님, 목적지를 욕심내지 말고 잠시 쉴 수 있는 쉼을 욕심내라던 그 말씀 내내 새기겠습니다. 또 함께 구름밭을 경작하는 경운서당 문우들, 그대들이 내뿜는 내공 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서로를 보듬고 격려해주는 다울동인, 용인문학회 식구들, 첫걸음을 떼게 해 주신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이라는 축제의 자리에 앉혀주신 정희성, 강영환, 허정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시작의 각오를 올립니다. 국제신문의 선택에도 또한 누가 되지 않는 행동을 다짐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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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정희성 강영환 허정(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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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 박진규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 문탠로드(Moontan Road)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에서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수 있도록 조성된 2.2㎞의 산책로.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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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선물"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어느날, 해운대 문탠로드에 갔습니다.


사스레피나무가 아주 많은 산책길이었는데 그 나뭇가지마다 마른 솔잎들이 거꾸로, 일렬로, 촘촘히, 걸려 있었습니다.


사스레피나무란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 풍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희한한 취미를 가진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요.
뽑아주신 시는 정말 시를 아는 사스레피나무가 준 것이었습니다.


지난 2년여 동안 그랬습니다. 유난히 나무들이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두 발이 지상에 심긴 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었던 저에게 나무들은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더 이상 신발이 필요없는 요양원 병실에서 괴로운 투병을 하고 있는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 버짐 핀 과묵한 플라타너스처럼 무언의 세계에 갇힌 당신이고서야 얼마나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젖은 장작 같았던 저에게 시의 불꽃을 피워준 이가 당신이기에 이 당선의 기쁨을 뜨거운 채로 드립니다. 그리고 널. 나의 첫 독자였던 경아, 나의 거의 전부를 알고 있는 아내이기에 앞뒤없는 신랄한 언어로 나의 중심을 흔들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살갑지도, 냉철하지도 않은 제자를 언제나 바위처럼 기다려주시던 강남주 교수님, 문학동인 잡어의 동지들과도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날 것의 졸시에 환한 꽃다발을 심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국제신문사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삶의 깊이 응시하는 내면의 시선 미더워"

 

전체적으로 수준이 고르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부산경남 지역보다 오히려 타 지역에서 응모한 시가 훨씬 많았다. 신춘문예만큼은 더 이상 중앙과 지역을 구분해서 차별화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심에서 거론된 시는 모두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다만 언어적 기교나 시적 수사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느낌이 들어 신인으로서의 시적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좀 서투른 감이 있더라도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박눈', '탁구치는 자전거', '나무의 온도', '뭉게구름을 확장하다',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패턴화된 시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미지가 육화된 개성 있는 시를 찾는 데 주력했다.


낡고 진부한 서정에 갇힌 시보다는 풍경과 일상을 응시하는 내적 깊이가 시정신의 심화를 불러오는 작품을 주목하였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었고, 삶의 깊이를 내면으로 응시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미더웠다.


다만 응모 작품들 간에 시적 경향의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은 신인으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어 당선작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최종심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예비 시인들에게는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앞으로 시와 더불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본심위원 정호승(시인) 최영철(시인) 하상일(문학평론가·동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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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당선소감] 어둠서만 숨쉬던 내 시에도 햇빛이

 

내 방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침은 내 방을 찾아오지 않고 멀리서 보고 있습니다. 그 어둠이 무서워 전등 스위치를 찾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스위치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끝이 없는 일은 나를 더욱 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외톨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후가 저물어가는 시간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만 숨을 쉬었던 시에게도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쁩니다. 당선 소식을 자랑하고 싶어 여기 저기 전화를 겁니다. 햇빛도 덩달아 신이 나서 내 방안 구석구석 돌아다닙니다.

 

아침 햇빛이 베란다 가득 들어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햇빛이 따라옵니다. 환하게 비치는 내 몸을 봅니다. 내 몸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서있습니다. 어둠에서만 숨을 쉰 내 언어들도 이 햇빛에서 고른 숨을 쉬게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합니다. 오랜 기도를 끝내고 나는 일어납니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국제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늦은 시 공부에도 늘 칭찬만 해주신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며 묵묵히 나를 믿어주고 밤 늦도록 컴퓨터 앞에만 있는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곤 했던 남편과 우리 아이들, 민지 양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의 씨앗을 찾으러 같이 다녔던 조덕자, 이궁로, 유금오 시인에게도 마음 가득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진영미 씨에게도 그동안 많이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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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긴 시를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 돋보여

 

경향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보내온 많은 시들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시의 형식과 더욱 다양한 주제들 앞에서 심사위원은 고심하면서 오랫동안 시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신원희), '꽃게와 발레리나'(박세랑), '장롱을 열어놓고'(박종인),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도미솔) 등 4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또한 오랜 토론이 있었습니다.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좋은 시였는데 함께 보낸 다른 작품과 편차가 심해, '꽃게와 발레리나'는 발랄하고 감성적이어서 좋은 시였는데 그래서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로 넘겼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장롱을 열어두고'와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두고 두 분 다 표제작은 물론 함께 보내온 탄탄한 구성의 시들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롱을 열어두고'는 맑은 서정과 부드러움이 빛나는 시였고,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심사위원은 '장롱을 열어두고'가 가지고 있는 반복적 구성이 결점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당선작과 같이 보낸 시들의 어떤 작품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어 그런 신뢰가 당선자의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선자 도미솔 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다음에도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본심 심사위원 :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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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 이언지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 마농꽃 :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당선소감] 시 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태안 바닷가에서 방제 봉사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을 생각하고 있을 때 빗방울처럼 당선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다정히 만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깊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내 행복은 고통 속에 있다는 걸 알기까지 참 많은 가을을 낭비했다.

자명한 인식이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지점에 내 시가 있어야 함을 어렴풋이 안다. 묵묵히 바다의 얼굴을 닦고 있을 아이의 분주한 손길처럼 시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세상의 때를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하얀 흡착포에 묻어나던 시의 분비물을 빗방울이 와서 태워버린다. 늘 바깥보다 안이 추웠다. 그럴수록 시의 손발은 더욱 뜨거웠다. 눈만 높아 시집 못 간 노처녀같은 시에 면사포를 씌워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린다.

시를 익힐 무렵부터 기꺼이 시의 동료로 대해 주셨던 유병근 선생님, 늘 푸른 나무처럼 곁을 지켜주시는 부모님, 시인이 되기 전부터 시인으로 불러주었던 믿음직스러운 내 아들 혁, 흐린 날 함께 달을 찾아 다니던 당신, 당선 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시던 시의 동료들, 모두 모두 따뜻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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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탁월한 언어 솜씨와 거침없는 상상력의 힘

400여 명의 시 1800편을 읽으면서, 여전히 한국시의 지층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인도 많지만 아직도 시인 지망생도 많음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시의 수준은 상당히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김진의 '달, 멈추다', 김미혜의 '몽유', 김정의 '숨 쉬는 고서점', 이언지의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등은 최종 논의 대상 작품으로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달, 멈추다'는 설화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발상 자체는 살만 했지만, 그 현재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한계가 보였다.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이란 점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몽유'는 예민한 감각을 통한 이미지화나 새벽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시선은 좋으나, 시어 선택에서 아직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를 창출하는 힘이 모자랐다.

시인은 일상어를 자기 언어로 새롭게 전환시켜가는 힘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고서점'은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그 상상력을 밑받침해줄 수 있는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는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언어유희에 가까울 정도로 능수능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낼 듯하면서 감추며, 감출 듯하면서 드러내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시적 전개와 거침없이 펼쳐가는 상상력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준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전원은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문정희·남송우·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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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

탈 털어낼 때쯤이면 명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내 사랑 물먹는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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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바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 있냐고"

 

지나가는 바람이 어린아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하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니. 여기 이곳에 민들레가 보여서요. 호기심 많은 바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 동무와 지금 소꿉놀이 재미있니. 글쎄요? 그런데요 동무의 몸이 너무 가벼워 둥둥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리고 있는데, 제 겨드랑이에 솜털이 막 솟아 올라오는지 자꾸 근지러워요. 이제는 지금 이 자리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더 묻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들, 그들이 뿌리내려 걸어간, 걸어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은밀히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은 내게 있어 희열이다. 알고 보면 사람도, 사람의 마음 그 열정도 한 알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갈밭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내려 마침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때문에 나는 많이 눈물겹기도 하면서 또한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이 기쁘기도 하다.

 

국제신문 신춘문예의 자리에 어느날 문득 날려와 뿌리내린 민들레 마음 하나의 꿈이 오랜 시간 참은 뒤 아하 그렇구나 무릎을 탁 치면서 마음껏 날아올라 어디론가 떠나가는 홀씨의 이름,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발음이 정확한 말을 걸어 갈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당선소식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울먹였던 아내와 지금 막 옹알이를 시작한 딸에게 지금 한없이 행복한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헌납하시고도 눈물이셨던 어머니 그리고 내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형과 동생, 나 때문에 영혼이 아팠던 수많은 그 분들에게 지금 가리늦게 '많이 죄송스러웠다'는 말 전하면서 고개를 숙입니다.

 

 

 

 

[심사평] 자연에서의 삶 개성 있고 건강하게 풀어

 

시대가 어려울수록 시는 빛나는 법이다.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시를 읽으면 행복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외국에서, 고등학생과 노인들까지 다양한 작품이 투고됐으며 남성들의 투고가 많아져 신춘문예 여성화의 비율이 다소 주는 현상도 보였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신인의 패기와 개성,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보다는 잘 만들어진, 신춘문예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는 시들이 많았다.

 

최종심에 '아버지, 꽃시를 심어요'(석지영·대구), '기차 떠나는 새벽'(이미정·울산), '스트랜딩 증후군'(김초영· 전남 순천), '무늬의 힘'(이현수·전북 진안), '권태'(김성순·울산) '타임캡술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정경화· 경남 함양)6편이 남았다.

 

'아버지 꽃시를''기차 떠나는 새벽'은 시적 성숙을 보여주었으나 시인의 힘이 부족해, '스트랜딩 증후군'은 신인의 힘을 가졌으나 시의 성숙이 부족해, '무늬의 힘'은 완벽한 시였으나 자신의 틀에 안주하고 있어 '권태''타임캡슐에'가 마지막 경합을 가졌다.

 

두 편의 시 모두 신인의 자격을 갖춘 시였다. '권태'는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는 상상력이 빛났으며 '타임캡슐에'는 싱싱한 상상력이 가득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을 통해 '권태'가 시적 완성도가 더 높은 작품이나, 다소 산만하지만 좀 더 가능성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자연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풀어간 당선시는 시인이 오랜 시간 꾸준하게 독학으로 개성적인 습작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또한 남성적인 힘과 당당한 시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어,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좀더 깊어지는 용맹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나머지 분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최하림 정일근 최영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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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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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달게 받아야 할 고통이자 희열

추사의 '사난결(寫蘭訣)'에는 "인품이 고고특절 하여야 화품도 높아지는 것인데 세인이 공연히 형상만
같이하기에 애를 쓰거나 혹은 화법으로만 꾸려가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또 비록 9천 9백 99분까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나 9천 9백 99분까지 갔다고 난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 9천 9백 99분까지 간 나머지 1분이 가장 중요한 난관이니 이 난관을 돌파하고서야 비로소 난을 그린다 할 것이다"라는 크고 깊은 문장이 나온다.

화(畵)의 길과 시(詩)의 길은 일맥이며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추사가 "나머지 1분의 경지는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하자면 인력으로 되는 경지가 아니요, 그렇다고 인력 이외의 것도 아니라"고 한 그 1분의 경지는 내겐 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미래를 위해 이제 비로소 9천 9백 99분까지의 험한 행로가 눈앞에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시는 달게 받아 모실 고통이자 희열이고, 또 푸른 미래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과 희열을 늘 몸소 보여주시는 고재종 선생님과 남도의 미풍으로 다가오는 광
주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천금같은 내 귀인께도 어여쁜 절 올리고 싶다. 아울러 가능성 하나만을 믿고 내 시가 세상 첫 숨을 타도록 도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와 함께 부지런히 쓰겠다는 다짐을 올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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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토속의 기운 신선하게 느껴져
 

선자(選者)에게 넘겨진 시편들은 예심을 거쳐 온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의 시적 성취가 고루 엿보였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에서는 모두들 비켜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이하정의 '합천 가는 길', 이인주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이은규의 '조각보를 짓다' 등 세 편이었다.

이하정의 시에서는 한 세대 전의 자옥했던 체험이 조밀하게 읽혀진다. 그러나 낡은 화폭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화자가 선택한 회상의 어조가 고루한 문맥 위에 얹혀있는 탓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인주의 응모작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문체는 평가받을 만하였다. 시화의 선택이나 상상
력의 밀도 또한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시의 힘을 한데 모으려는 집중력에서는 신뢰가 떨어진다. 집중력은 작품을 관통해가려는 시적 긴장감의 바탕이자 일관성의 핵심인 것이다.

 이은규의 시편에서도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조각보를 짓다' 역시
수다스러운 언사에 필적할 만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현빈지문(玄牝之門)'처럼 공연한 현학이 이 시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에 기댄 이 구절은 '만물을 낳게 하는 근원의 길'을 가리키지만, 그런 어사가 아니더라도 모성(母性)의 주술적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살려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겹겹의 말에 감싸인 '마고(麻姑) 할미'와 같이 토속에의 생식적 기운이 이 시의 신화적 토대가 되어 작품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건사해내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함께 공감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거듭 정진하길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오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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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필화(革筆畵)를 보며 / 이민아

 


맞춤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 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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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땅의 모든 시인께 영원히 못갚을 말 빚"

 

꽃다운 기운이 감도는 방기(芳氣)마을에 세 들어 지낸 지 꼭 백일이 되었습니다. 석양이 겨울 잔디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오후 4시. 홀인원처럼 날아든 당선 소식에, 아무도 없는 8만평 잔디밭 한 가운데로 나가 눈물이 멈출 때까지 울었습니다. 호천통곡(呼天痛哭) 떨치고 일어나며, 깊고 오랜 애증의 뿌리인 사랑하는 가족과, 내 생에 마르지 않는 말의 곳간이 되어주시는 찬란한 어머니, 지치고 힘든 순간마다 자식보다 꼭 세 배는 더 아파하신 당신을 뜨겁게 불러봅니다.

시를 통해서 세상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처럼, 통점(痛點)을 감추며 침묵하는 모두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던 날들이었습니다. 더 깊고 낮게 가슴으로 불러보며, '그 곁에, 단 한 번이라도 스며들 수 있다면…'하는 간절함으로 미련하리만큼 글쓰기를 해 온 문청(文靑)에게 '등단'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안겨주신 존경하는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잡아주신 손의 온기 내내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첫 마음 잃지 않고 거듭나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그 길에 함께 할 국제신문사의 빛나는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국어선생님에서 이제는 10년 지기(知己)가 되어 가슴으로 응원해 주시는 박진희 선생님, 우리들 모여 목요시를 열자던 문창 도반들, 부경대 문우들, 함께 했던 날들이 고맙다는 안부가 모자랍니다. 숱한 스침 속에서, 따스하게 말 건네는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아 만남의 찰나를 허락해 주셨던 부산의, 이 땅의 모든 시인께는 온 밤을 지새우는 눈길로도 말의 빚 다 갚지 못할 테지요. 이 소중한 자리를 빌려, 가슴 속 심해의 마르지 않는 물길로 흐르고 계신 모교 국문과 교수님들께 '사람이 힘이 되는' 시의 진의를 탐미하며 부단한 길을 가보겠다는 겁 없는 다짐과 함께 존경을 전합니다.

 

 

 

 

활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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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섬세한 관찰력 돋보여

 

본심에 오른 24 편을 읽으면서 세계와 사물을 언어로 대치시키며 자기만의 작품으로 다듬어 가는 솜씨에 감탄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혁필화를 보며' '철마 가는 길' '樹醫師(수의사)의 지구본' '고래의 새벽' 중에서 나름대로의 개성과 언어 구사능력 그리고 새로운 신인으로서의 참신함과 살아있는 패기를 읽을 수 있었다.

 

'혁필화를 보며''고래의 새벽'을 두고 논의를 거듭하다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일정한 수준에 이른 '혁필화를 보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가운데 '노래'는 매끄러운 비유와 함께 시적 성취감도 있었지만 신춘문예가 갖는 건강한 정서에서 다소 거리감이 있어 제외되었다. '철마가는 길'은 다소 안일한 접근으로 무게를 떨어뜨렸고 '樹醫師의 지구본'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시어 사용이 다소 거칠고 시가 가져야하는 깊은 맛이 결여되어 감동을 반감시켰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래의 새벽'은 적절한 비유와 참신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지만 사물을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긴장미 있는 이미지 창출이 아쉬웠다.

 

당선작 '혁필화를 보며'는 일상에서 건져올린 예사롭고 평범한 시적공간을 착실히 내면화하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였고, 언어를 매만지는 손길에서 성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오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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