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무기력에 대하여 / 성향숙


욕실 수채구멍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머리카락이 뭉쳐있다
많은 무리속에서 나약한 소외감으로
떨어져 버린,
뿌리잃은 생으로 한가닥씩
나뒹굴던 머리카락들
더 이상 꿈을 공급받지 못할
이미 버림받은 생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풀썩거리고
아주 작은 물 흐름에도
소용돌이로 휘말리며
여기 저기서 밟히고 뒤채이다가
그곳에 소외된 힘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한다
더러는 좁은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
전혀 다른 무리들과 섞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들에 잠시 붙어 있기도 하며
구석의 먼지라도 껴안고 뒹굴면서
안간힘을 써 보기도 하는,
그것들이 비로소 힘을 내기 시작하는가
구멍을 꼭 막고
거센 소용돌이를 정지시키는
힘이 발휘된다

 

 

 

 

 

엄마, 엄마들

 

nefing.com

 

 

 

[당선소감] “ 상처받은 영혼 보듬고파”

아침 식후,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이 허리가 불편하신 어머니가  '아유-'신음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하신다. 침침한 눈과 기가 많이 빠져나간 손아귀의 힘으로 음식찌꺼기가 덜 씻겨져 매번 설거지를 다시 해야 하지만 유일한 노동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같아 몇번 만류하다 이제는 그냥 내버려둔다. 어쩜 힘은 들지만 꼭 해야만 될 것같은 늙은 어머니의 설거지. 내가 시(詩)를 하는 것이 꼭 그 행위 같다면 억지일까.

도립도서관 문예강좌에서 처음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아니 처음 말 배우는 아이처럼 되지도 않는 언어를 시라는 이름으로 내보였을 때 부정의 말보다는 내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고 건조한 시의 씨앗에 축축한 습기를 적당히 부어주어 싹 틔워주신 스승님과 무럭무럭 자라게 해주신 또 한사람의 스승님, 그리고 내 졸시를 처음으로 인정해 뽑아주신 농민신문에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시를 쓰고 싶고 매일 설거지를 하듯이 아주 개운한, 만족에 가까운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염소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nefing.com

 

 

 

[심사평] “작은 것이 갖는 힘의 상징성 돋보여”

예심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어온 응모작품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유행적인 시풍을 답습하거나 요설증(饒舌症)이 흠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전종평의 <개미살이>, 신정민의 <석재소에서>, 최월강의 <늪에서 숲으로>, 연용호의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 이광수의 <석계里 봄>, 성향숙의 <무기력에 대하여> 등 여섯편이었다.

<개미살이> <석재소에서> <늪에서 숲으로> 등은 감수성이 보이지만 추상적인 분위기, 압축과 절제의 부족, 환경시의 한계점 등을 드러내고 있다. <문둥이골 창꽃 따러 갈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보여준 풍속도이지만, 감각과 사고력의 깊이가 부족하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 <석계里 봄>은 면밀한 관찰을 통해 본 농촌의 풍경이 산문적으로 늘어져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무기력에 대하여>는 아주 작은 것이 갖는 힘, 쓸모없는 것이 갖는 힘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상징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삶의 진실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점을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문덕수, 함동선 시인

728x90

 

 

 

고래 / 이승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

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

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

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

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

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

<장미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

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

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

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

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 옥수, 응봉

세 개의 海域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우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장은

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 에머슨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심사평]

 

올해에도 1500명이 넘는 분들이 응모해 주셨다.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기약되기 어려운 일에 자신을 쏟아붓는 그들의 재능과 노고에 오늘의 우리 시는 크게 신세지고 있다.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20여명의 후보들을 놓고 우리는 적지 않게 고심했다. 저마다의 재능과 수련을 수긍할 수 있었지만, 또 모두 그만큼씩의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상력, 예민한 미적 균형감각, 시에 임하는 구도적 열정의 가능성을 신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필연이며 제도로서의 신춘문예의 사명은 그러한 새 재능의 발굴에 있는 것이다.

 

신덕환 이영주 김병기 김규 최한 신동언 양해기 이승수씨의 시를 우선 물망에 올려 검토했다. 신덕환씨와 이영주씨의 시는 그 안정감과 시선의 깊이에 패기와 긴장감이 보태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병기씨의 독특한 문장과 팽팽한 결말들은 매력적이었으나 비문(非文)의 빈발이 지적되었다. 김규, 최한씨는 그 수준급의 시적 조형능력과 감각의 자유로움이 좀 더 깊고 신실한 내적 근거를 가질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신동언씨의 후반부 시편들은 이의가 없을 만큼 높은 완성도의 것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자기 답습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결국 양해기, 이승수씨로 후보를 압축한 후에도 결론은 쉽지 않았다. 양해기씨의 시를 깊고 어른스럽다고 한다면 이승수씨는 발랄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양해기씨가 견실하고 잘 정돈된 대신 어딘가 닫혀 있는 느낌이라면 이승수씨는 진취적인 만큼 일말의 산만함과 치기를 부담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우리는 진통 끝에 이승수씨의 젊은 열정을 앞자리에 놓기로 합의했다. 거기에는 양해기씨의 시들이 고르기는 했지만 이 한편이라고 집어 말할 만한 작품이 마땅찮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 심사위원 김혜순, 김사인 시인

 

728x90

 

 

의자 / 김성용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는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발 달린 짐승이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알코올이 잠시 내 몸의 주인이었을 때, 전화가 왔다. 내가 세운 계획보다 앞서가는 현실을 알려주는 낯선 전화였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나는, 나를 앞서가는 현실 앞에서 먹먹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새천년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 서른 세 번이 술기운과 함께 지난 밤 내내 내게는 앞서 울리는 듯도 했다. 유독 '부끄럽다'는 종소리만이 기억에 남는다.

 

나보다 더 기뻐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 막내의 철없는 모습에 마음 졸이시며 살아오신 부모님과 가족들, 궁핍한 주머니 사정에도 꿋꿋이(?) 술자리를 지켜준 친구들, 형들, 그리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함께 밤을 지새던 '까치노을'문학동아리 후배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내게는 기쁨일 뿐이다.

 

무엇보다 시의 길로 입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손진은 선생님, 배우는 학생들보다 더 큰 열정을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학과 장윤익, 여세주, 김주현, 구광본 선생님과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전한다.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에게도.

 

짝사랑에 고민하던 한 사내가 그동안 참았던 용기를 모두 풀어 고백하고 당당하게 퇴짜맞은 기분으로 이제 대문을 연다. 대문이 더듬거리며 열릴 것인가, 수다스럽게 열릴 것인가, 고민하지 않겠다. 제 자리에서 소외된 것들과의 한울림을 위하여 종신불퇴(終身不退)하겠다.

 

20세기의 작은 먼지가 21세기의 민들레를 꿈꾸며

 

 

 

[심사평]

 

응모된 시를 읽으면서 상향평준화 현상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2천여 편에 이르는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거친 작품들은 대부분 수준작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나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 어려움이 따랐다.

 

김미영의 '보영약국은 따뜻한 말을 조제한다'는 일상사의 이면을 신선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으나 '소설적'인 묘사에 그쳐 깊은 울림이 아쉬웠다. 이계희의 '볕이 잘 드는 마을'은 잔잔하고 단단하게 세상살이의 고랑을 파고 일궈내는 감수성이 돋보이지만 삶을 장악하고 뭉뚱그려내는 힘이 부족하다. 이별리의 '철길 사이'는 언어와 감정의 절제, 한층 높은 도약이 요구돼 좋은 시의 문턱에 머문 느낌이며, 유가형의 '기억의 상자에 빠집니다'는 발상이 참신하고 언어 감각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은 신민철의 '앵무새와의 대화'와 김성용의 '의자'였다. '앵무새와의'는 독특한 시각으로 삶을 액자 속에 담아내는 기교가 능숙하고 언어의 행진이 현란하다. 하지만 말을 너무 이리저리 돌리는 바람에 삶에 대한 인식의 바닥이 얕아지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재미있는 언어유희와 세련된 감수성이 장점이자 약점을 만들고 있는 경우지만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엿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보다는 삶에 더 기대고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를 기대한다.

 

'앵무새와의'에 비해 '의자'는 완성도와 세련미가 떨어진다. 거칠고 튀며 난폭하다. 전체적인 숨고르기와 후반부의 마무리도 허술하다. 파괴적이고 현대적인 것까지 유형화되는 이 시대에 이런 유형의 시가 일종의 '상투성'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의자'를 통해 우리의 삶이 사로잡힌 수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파괴적이지만 역동적인 이미지로 삶의 '굳은 살'을 떨궈내는 힘을 지니고 있어 호감을 갖게 한다. 끊임없이 관습과 고정관념, 상식에 도전하는 패기와 힘을 견지하기 바라며 당선작으로 민다.

 

728x90

 

 

집 속엔 길이 없다 / 김규진

 

 

1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일찍이 출근하는 시인은 없었다.

숨 쉬는 것은 오직 나와

베란다의 난초 몇 그루뿐.

내가 뒹구는 집을 꿈꿀 때

이 식물들은 떠나는 길을 꿈꿀까?

 

집은 하루 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끊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 낸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가격의 단지가 서 있을 뿐이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난초잎 두어 개가 흔들렸으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길들은 이내 돌아가 버린다.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지친 나그네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2

기원전 588

싯다르타는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에서 죽었다.

기원전 4

예수도 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길 위에서 죽었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

칡넝쿨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비포장길을 달리다

낮술을 마신다.

목마름을 목마름으로 다스리기 위해

 

어데까지 가제예?

난데없는 주모의 물음.

마치 혜능에게 점심을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던 주모처럼.

낮술 때문에 길은 비틀거리고

 

3

갑작스런 흐드득 흐드득 비

해발 1,300미터 구룡령 넘어가는 길.

비안개는 뿌리고 차는 진창에 빠지고

---차를 버릴까?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액셀을 북북 밝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4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욱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에 길이 없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 번도 걷지 않은 가슴 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문화일보 주최 2000년 신춘문예 시상식이 24일 오후 4시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서 김진현 문화일보 사장은 축사를 통해 “2000년의 새벽을 여는 새로운 작가들에게 큰 기대를 한다. 큰 아픔의 역사가 큰 작가를 만든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고통을 겪은 한국의 경험이 뛰어난 작가를 탄생시킬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김병익(문학평론가·문학과지성사 대표), 김원일(소설가), 황동규(시인·서울대 영문과 교수), 김화영(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이문열(소설가), 감태준(시인·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홍준(영화감독)씨 등의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소설가 이윤기·최성각, 시인 이문재, 문학평론가 김경호· 한기(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씨 등 내외빈 80여명이 참석했다.

 

수상자는 시부문 김규진(41),단편소설부문 전유선(45), 시나리오부문 최준영(34),문학평론부문 이홍섭(35)씨 등이다.

 

728x90

 

 

 

찻잔 앞에서 / 이선희

 

1

이제 그만 엎질러버리고 싶어요 휘저어버리고 싶어요 좀처럼 행굴 수도 없는 목마름, 얼룩처럼 앞치마에 찍혀 있어요 뜨거운 목숨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꿈도 아닌데 꿈속에서 내가 잠시 기울었다 일어서는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무시로 송곳처럼 쿡쿡 찌르는 아픔알 것 같아요 비어 있는 가슴을 더욱더 긁어대던 더부살이 같은 물살을 알 것 같아요 견고한 언어의 씨앗 다투어 잎 아무는 기척 알 것 같아요 목마른 얼룩 앞치마에 파고드는 저녁나절의 쓸쓸함도 알 것 같아요 내 삶의 그림자였던 보랏빛 실핏줄에 닿던 칼금 지금도 징그럽게 꿈틀거려요 그리움이란 변증법 데리고 꿈틀거려요 나를 떠난 그대는 이미 멀리 있는데 그 무관심도 관심인 듯 짓궂게도 출렁거리는 나 바람이에요

 

2

비트 아래 엎드린 아이들은 황사바람을 털고 있어요 어딘가에 있을 풀밭을 기웃대며 지나간 시절을 꿈꾸어요 먼 풀밭 너머 장다리꽃 사이로 아직 알을 까지 못한 벌레들은 썩은 밀랍을 게워낸대요 벌레들이 잠든 밀랍의 무덤을 지나 무개차가 지나가지요 풀잎 같은 허리 꺾으며 툭툭 마디 끊어지는 소리 들려요 쇠비름처럼 붉은 길의 줄기를 타고 장다리 꽃이 오고 있어요 종알대는 꽃일이 흔들거여요 무수한 발자국이 파놓은 길바닥을 지나 바람은 가고 장다리꽃 속으로 아이 두엇 종알거리는 소리 들려요 아직도 오지 않는 풀밭을 기웃대는 나를 종알거려요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심사평] 일상 속 감정 형상화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다섯 사람의 시를 읽고 먼저 느낀 점은 무언가 서로들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개성있는 시, 남과 다른 생각의 시가 드물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부자연스럽고 말장난이 심한 시들이 많았다. '자궁'이라는 말은 왜 또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자연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역겨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동언 장혜림 이선희 세 사람의 시는 읽을만 했다. 신동언의 시 중에서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감각이 느껴지는 '점자책을 읽으며'가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하지만 선명하지 못한 대목이 있는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장혜림의 ''이나 '동해일기'는 지향도 분명하고 힘도 있었으나 완결성이라는 점에 있어 좀 부족했다.

 

이선희의 시들은 10여 편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시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루는 내용들이 엄청나게 야심적이고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아무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다. 특히 '찻잔 앞에서'는 우리가 흔히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은 상실감이나 그리움, 애절함 등을 따스한 시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시였다. 균질감도 살만했다. '바람에게'는 소품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서, 시란 특별한 소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이선희를 당선자로 뽑기로 합의했는데, '찻잔 앞에서'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 일상생활 속의 회한과 아픔, 기쁨이 큰 감동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심사위원 허만하 신경림

 

 

 

 

내 안의 물고기 그림

 

nefing.com

 

 

728x90

 

 

낙엽 한 잎 / 최용수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만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 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꽤 열정적이었던 문학청년 시절이 내게도 한때나마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군 제대 후,특별한 이유도 없이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이름들이 반짝 나를 스쳐가는 동안 살아서 외로웠던 날들이 많았다. 어떤 길은 반드시 갔어야만 했고 또 어떤 길은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오랜동안 있었지만,작년에 만난 몇몇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름대로 의미있고 소중한 작업들을 시작했다. 이 사회 혹은 세상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나는 서른이 되었서야 하게된 셈이었다.

 

아주 가끔씩 시를 적었다. 창작의 성과물로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날 때 일기를 쓰듯이 말이다. 적어도 시 적는 동안에는 스스로에 대해,이웃들에 대해고민할 수 있었던 게 나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반강제적으로 친구에에 등 떠밀려 응모를했고 그리고 염치없이 당선이 되었지만,내게 시는 앞서 밝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사실이다. 삶의 많은 사소한 부대낌을 접어가면서까지 시를 적진 않을 것이다. 다만,더욱 몸을 부려 시 적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는 재미없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공사현장에서 지하 공장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묵묵히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두 동생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등 돌리기에도 바쁜 시절에 변변치 못한 나에게 안부를 물어주던 몇몇 벗들이 있다는 게 살아오는 매순간 힘이 되었다. 그들에게 한 번쯤 질퍽한 술이라도 대접해야 겠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었는데,그러한 계기와 여건을 한꺼번에 마련해준 두 분 선생님께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감사드리고 싶다.

 

새 천년에는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심사평] "생활 속 소재... 밝고 따뜻하다"

 

시들이 틀에 맞춘 것처럼 너무 비슷하다. 산문시와 운문시 또는 한 시에서 산문과 운문을 적당히 배합하는 형식부터 그렇다. 신춘문예를 위한 특별한 텍스트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내용도 서로 비슷비슷하고 알쏭달쏭이다. 억지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만드는 것, 쓰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닐 터이다.

네 사람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승철의 작품 중에서는 '편지에게 쓴다'가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제목은 좀 이상하지만 불안하고 무언가 을씨년스러운 작자의 느낌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요즈음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와 너무 다른 점이 없다. 이현승의 시는 장황한대로 지루하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근황' 같은 시는 경쾌하고 발빠른 느낌을 준다. 시어의 선택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안정감이 없다.

김성곤의 시는 무언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추'가 가장 좋은데 좀 산만하다. '다물도' 같은 시가 왜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작자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용수의 시는 생활 속에서 가져온 소재이면서도 밝고 따뜻해서 좋다. '낙엽 한 잎'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고달픈 삶의 현실을 다루었으면서도 어둡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지없이 아름답다.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같은 비유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녀 이야기'도 쌈박한 시다.

이상 네 사람의 시 가운데서 최운의 '낙엽 한 잎'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다른 응모자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 당선작으로 뽑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자기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평가되었다.

 

- 심사위원 유종호.신경림

 

728x90

 

 

달 속의 길 / 정시우


달이 거리에 얼어 있다
제 속으로 깊어지는 달을 걸으며
금남로를 유영하는 눈(目)
쩡, 하고 금가는 소리에 하늘을 본다
낮달이다
반은 어디론가 숨고 반은 낮에도 눈빛이 형형하다

거리를 기웃거리며 보이지 않는 달의 반을 찾는다. 사람들은 퇴적암처럼 층층이 시간을 딛 고 있는 멀티비전 속 공룡과 자동차, 사라진 시대와 사라질 시대가 손 잡는 것을 본다. 눈이 자꾸 지상으로 가라앉고, 균열진 콘크리트 틈새에서 오롯이 자라나서 말라가던 꽃대는 허물 을 벗는다. 나는 본다. 걸을수록 낯선 거리, 부유하는 열망들 사이,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얼굴로 눈사람처럼 뭉쳐져서 겨울을 건너고 있는 맹인의 적선 바구니에 어린 손가락이 넣는 동전 하나를. 한낮에 교감하는 해와 달의 빛에 반짝 환해지는 눈사람. 어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달의 반쪽을 감싸고 있다.

가끔씩 아이들이 근접하는 하늘
달의 길이 사람의 길에 닿을 때
지구가 잠깐 자전을 멈춘다.

 



 

이유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728x90

 

 

후리지아를 든 남자  / 김형미


크고 황폐한 내부 속에 길을 감춘 건물들
사이에 사내 하나 서 있다
작은 미동도 없이 후리지아 한 다발을 가슴에 품은 채
귀가 어긋난 보도블럭처럼 퉁겨져 나온 사내를
건물들이 흘깃거리며 내려다 본다
사람들이 사내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사내는 서서히 신호등이 되어간다
그 자리에 그대로 보도블럭 사이 발을 묻고
후리지아꽃을 피워낸 나무가 된다
이제 사람들은 크고 황폐한 내부가 되어버린

사내를 의식하지 않는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사내는,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내를 중심으로 지구가 생기고
역사가 맥을 잇고
나와 길과 건물들이 태어나서
건물들이 길을 가두듯 사내를 가두었는지도
사내가 갈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내의 몸 속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 켜진 사내의 몸 속을
21세기는 두 팔 휘두르며 건너갈 수 있을까
노란 차선처럼 다문 입술에서
일순간 먼지 먹은 바람이 새어나왔을 뿐
말 없는 사내 머리 위로
새가 날아갔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 속에서 꽃대 올라온 후리지아가 쇠었다
사내는 문득 듣는다
늙은 봄이 가쟁이를 벌리고 벼룩 잡는 소리

 

 

 

 

불청객

 

nefing.com

 

 

728x90

 

 

우물 / 최영신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심사평] 새천년 여는 도전 정신 돋보여

 

새천년에는 새 시를? 언어는 그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마치 생명과도 같다. 그 새로와지는 변화의 중심에 시인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민족의 언어는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 우물(최영신)이 결정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않을는지 모르나 적어도 이 작품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다. 이 도전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가볍게 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답적이지 않다. 그다음으로 이 시는 문제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시 정신을 동반하고 있다. 끝으로 상찬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적절한 관찰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 전체를 투사하는, 용해된 정열이랄까 하는 것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매력들은 가령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는 표현과 같은 데에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제 얼굴을 드러낸다. 추억도 복고도 아닌 자기성찰로서 우물의 이미지가 이만큼 빚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격언의 풍자」 「흙을 바라보며등 다른 작품들도 우수하다. 독특할 개성의 시인으로서 자기 세계를 일구어 나가기바란다.

 

당선작을 양보한 작품들로서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조정), 물방울 하나에도(한용숙) 등이 있었음을 부기한다.

 

- 심사위원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우물

 

nefing.com

 

728x90

 

 

거미 /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술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더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별을 털며 집으로 가는 퇴근길은 아름다웠다.

지친 몸에서 빠져나온 사내는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연필부터 깎곤 했다. 연필심처럼 생각이 올라오면 그것을 공책에 옮겼다. 사내의 왼손엔 어김없이 담배가 들려 있었는데 온 몸을 태울 듯 빠르게 타 들어갔다.

아침에 사내의 방문을 슬쩍 열어 보면 사내의 목이 앉은뱅이 책상 위에 툭, 털어져 있을 때가 있었다. 등을 흔들어 밤새 무엇을 썼느냐고 묻기도 전에 사내는 담뱃재처럼 흩어지곤 했다.

원고를 보내 놓고 나는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신 지독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모든 감각이 진공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허공을 걷는 아찔한 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혓바늘이 입천장을 찔러 대는 통에 나는 양식을 아낄 수도 있었다.

그런 증세는 1주일이 넘게 계속되었다. 몸살이 끝날 즈음 나는 일요일을 빌려 금강 하구의 갈대 숲에 접혀 있다가 돌아왔다.

혼자 콩나물국을 맵게 끓여 먹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얼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화기를 내리자마자 몹쓸 아버지가 울컥거려서 잠시 젖게 내버려두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눈물이 되곤 하는 어머니 김정자 여사, 지난해 성탄절 전야에 흙으로 돌아가신 존경하는 아버지, 묵묵히 지켜 봐준 사랑하는 핏줄들, 한시름 놓으셨죠?

큰형으로 느낄 때가 더 많았던 이상복.정영길.이혜성 교수님을 비롯한 문창과 교수님들, 어머니 같은 박라연 교수님, 그리고 내 생활의 지침서이신 정종환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호만형, 성민형, 문원을 비롯한 문우들과 시창작반 식구들, 절망할 때마다 다독거려 주던 동기생들, 출발점을 허락해 준 중앙일보와 출발신호를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못 든 길에서 지도를 만들어 나가게 하신 강연호 은사님! 앞으로도 저를 가파른 벼랑 끝에 세워 두실 거죠? 선생님, 거기로 나오세요. 오늘은 제가 소주 한잔 살랍니다.

 

 

 

 

웃는 연습

 

nefing.com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로는 예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정서적 탄력이나 신인다운 패기 또는 개성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심사의 자리란 때로는 곤혹스럽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했던 작품들은 김다솔.강성민.박승철.류남.박성우씨의 시편이었다.

김다솔씨의 응모 시에서 엿보이는 것은 섬세한 시어가 감당하는 풍경의 투명성이다. 관찰과 묘사에 기대고 있는 이 응모자의 시선은 드러나지 않는 삶의 굴곡과 파문들을 읽어내지만 정작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않아서 아쉬움을 주었다.

강성민씨는 환상과 이미지를 교직하는 매력적인 시상을 펼쳐 보이지만 그것들을 한 줄로 꿰보이는 맥락의 힘이 제대로 살펴지지 않는다. 응모 작품들이 유지하는 수준에는 편차가 두드러진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겠다.

박승철씨의 작품은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거기에 걸맞은 시어의 선택도 선이 굵다. 그럼에도 행간과 행간 사이에 긴장과 탄력이 지탱되지 않는 까닭은 범상하고 익숙한 수사에 비약이 심한 시상을 걸쳐놓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류남씨의 시편들은 분방한 상상력을 감당하는 그 나름의 형식미가 재미있게 읽혔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확인하기에는 응모 편수가 너무 적었다. 군데군데 부적절하게 동원된 시어들도 막상 선자들을 망설이게 했다.

박성우씨의 '거미' 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습작의 연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응모작에서도 시적 상상에 스며드는 체험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하여 거의 제 솜씨로만 한 채 시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응모자의 오랜 단련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다만 사물 앞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려는 노력만이 앞으로 제 몫의 장인으로 자신을 세우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김명인 황지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