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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한 잎 / 최용수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만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 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꽤 열정적이었던 문학청년 시절이 내게도 한때나마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군 제대 후,특별한 이유도 없이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많은 이름들이 반짝 나를 스쳐가는 동안 살아서 외로웠던 날들이 많았다. 어떤 길은 반드시 갔어야만 했고 또 어떤 길은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오랜동안 있었지만,작년에 만난 몇몇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름대로 의미있고 소중한 작업들을 시작했다. 이 사회 혹은 세상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나는 서른이 되었서야 하게된 셈이었다.

 

아주 가끔씩 시를 적었다. 창작의 성과물로서가 아니라 그저 생각날 때 일기를 쓰듯이 말이다. 적어도 시 적는 동안에는 스스로에 대해,이웃들에 대해고민할 수 있었던 게 나에게 더없이 소중했다. 반강제적으로 친구에에 등 떠밀려 응모를했고 그리고 염치없이 당선이 되었지만,내게 시는 앞서 밝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사실이다. 삶의 많은 사소한 부대낌을 접어가면서까지 시를 적진 않을 것이다. 다만,더욱 몸을 부려 시 적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는 재미없는 다짐을 해볼 뿐이다.

 

공사현장에서 지하 공장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묵묵히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두 동생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등 돌리기에도 바쁜 시절에 변변치 못한 나에게 안부를 물어주던 몇몇 벗들이 있다는 게 살아오는 매순간 힘이 되었다. 그들에게 한 번쯤 질퍽한 술이라도 대접해야 겠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었는데,그러한 계기와 여건을 한꺼번에 마련해준 두 분 선생님께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감사드리고 싶다.

 

새 천년에는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심사평] "생활 속 소재... 밝고 따뜻하다"

 

시들이 틀에 맞춘 것처럼 너무 비슷하다. 산문시와 운문시 또는 한 시에서 산문과 운문을 적당히 배합하는 형식부터 그렇다. 신춘문예를 위한 특별한 텍스트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내용도 서로 비슷비슷하고 알쏭달쏭이다. 억지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만드는 것, 쓰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닐 터이다.

네 사람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승철의 작품 중에서는 '편지에게 쓴다'가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제목은 좀 이상하지만 불안하고 무언가 을씨년스러운 작자의 느낌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요즈음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와 너무 다른 점이 없다. 이현승의 시는 장황한대로 지루하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근황' 같은 시는 경쾌하고 발빠른 느낌을 준다. 시어의 선택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안정감이 없다.

김성곤의 시는 무언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추'가 가장 좋은데 좀 산만하다. '다물도' 같은 시가 왜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작자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용수의 시는 생활 속에서 가져온 소재이면서도 밝고 따뜻해서 좋다. '낙엽 한 잎'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고달픈 삶의 현실을 다루었으면서도 어둡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지없이 아름답다.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같은 비유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녀 이야기'도 쌈박한 시다.

이상 네 사람의 시 가운데서 최운의 '낙엽 한 잎'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다른 응모자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 당선작으로 뽑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자기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평가되었다.

 

- 심사위원 유종호.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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