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후리지아를 든 남자 / 김형미
크고 황폐한 내부 속에 길을 감춘 건물들
사이에 사내 하나 서 있다
작은 미동도 없이 후리지아 한 다발을 가슴에 품은 채
귀가 어긋난 보도블럭처럼 퉁겨져 나온 사내를
건물들이 흘깃거리며 내려다 본다
사람들이 사내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사내는 서서히 신호등이 되어간다
그 자리에 그대로 보도블럭 사이 발을 묻고
후리지아꽃을 피워낸 나무가 된다
이제 사람들은 크고 황폐한 내부가 되어버린
사내를 의식하지 않는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사내는,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내를 중심으로 지구가 생기고
역사가 맥을 잇고
나와 길과 건물들이 태어나서
건물들이 길을 가두듯 사내를 가두었는지도
사내가 갈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길이 사내의 몸 속을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 켜진 사내의 몸 속을
21세기는 두 팔 휘두르며 건너갈 수 있을까
노란 차선처럼 다문 입술에서
일순간 먼지 먹은 바람이 새어나왔을 뿐
말 없는 사내 머리 위로
새가 날아갔다 세월이 흘러갔다
눈 속에서 꽃대 올라온 후리지아가 쇠었다
사내는 문득 듣는다
늙은 봄이 가쟁이를 벌리고 벼룩 잡는 소리
'신춘문예 > 전북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경종호 (0) | 2011.02.13 |
---|---|
200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문신 (0) | 2011.02.13 |
200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장창영 (0) | 2011.02.13 |
200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송승근 (0) | 2011.02.13 |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 이길상 (0) | 2011.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