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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 문신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곁을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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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시를 왜 쓰는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충분히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조각들과 개인적인 넋두리를 그럴 듯하게 행만 바꿔 나열한 시들은 일차적으로 제외되었지만, 일정한 수준에 오른 시들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시를 습작하는 사람라면 모름지기 언어와 인식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을 시쓰기의 목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고만고만한 언어 기술자는 많아도 놀랄 만한 발견으로서의 시를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좋은 작품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찾기 위해 일곱 사람의 시가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강윤미, 김정경, 최민영의 시는 흠잡을 데 없는 말의 수련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매끈함이 중심을 관통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보다 언뜻 서툰 듯 하지만 김미경의 [만추]와 김인경의 [팔복동과 평화동 사이의 등나무]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독창적인 발성을 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윤경의 [대나무꽃]과 문신의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두 편 중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앞의 작품은 만만치 않은 패기에다 무리 없는 이미지의 전개가 돋보였으나 두어 군데 상투성에 물든 시구가 결정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문신의 작품은 능청스런 발상이 활달한 화법에 힘입어 시의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보여주는 시이다. 함께 응모한 시들도 믿음직스럽다. 감동이 드문 시대에 감동을 낳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허소라(시인· 전 군산대 교수)·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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