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 정임옥
나무 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당선소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담바라꽃 피워내듯…
밤새 뒤척이고 난 새벽 불곡산을 올랐다. 돌아와 문을 여는데 발밑으로 이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옷에 묻히고 온 많은 이슬 중에서 단 한 방울만이 나를 떠난 아침, 젖은 옷 벗어 걸며 내 안에서 마르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한 그들에게 미안했다.
얼마 전, 삼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꽃을 보았다. 금불상을 뚫고 나온 그 꽃은 마치 이슬방울 같았다. 시를 쓴다는 것이 가슴으로 우담바라꽃을 피워내는 일이 아닐까. 일생동안 갈고 닦아 좋은 시 한 편 써야 할 숙명의 길로 나는 지금 한 발 들어서고 있다.
삶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오지 않음을 알고 느꼈던 비애마저 기쁘게 감싸 안도록 다독여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친정 부모님과 종가의 맏며느리 역할에 소홀함을 덮어주느라 더 바쁘셨던 시어머님, 글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현식과 담비 그리고 야생화로만 알았던 당신이 내겐 우담바라꽃이었음을. 그들이 있어 행복하다.
시의 호흡법조차 모르는 내게 산소호흡기를 끼워주신 정호승 선생님, 이제 '어떻게' 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로 고민하라고 하신 말씀 늘 기억하겠습니다. 황야에 조심스레 밀어올린 대궁에 튼실한 뿌리가 되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린다.
슬프게 떠난 이와 그리움으로 머무는 뭇 인연들에게도 인사해야겠다. 그들과 함께하고, 함께 할 세상이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심사평] 정직한 자기성찰 돋보여
조필수, 이채운, 정임옥 세 분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더라도 별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옥의 '뿌리'가 당선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력, 섬세한 즉물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이 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정 씨의 모든 응모작은 당선작에 못지않았으며, 특히 '명암방죽'은 보기에 따라서 더 매력있는 작품으로 뽑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채운의 '리듬체조'와 '사과알 속의 수행자'도 당선작에 비해 손색없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편 조필수의 '내부 순환로'는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당선권에 든 분들은 아니지만 최승철의 몇몇 작품들도 힘이 있어 보였으며, 하정임의 '햇빛별빛잔치'도 동화적 목가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김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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