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겨울 내소사 /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없는 때

눈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꺾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들어 눈뭉치를 털어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앉은 장광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낯섦과 환대

 

nefing.com

 

 

[당선소감] “세상의 말들 가운데 고요한 길을 내”

 

강의를 위해서 찾아간 학교의 학과사무실 게시판에서 〈불교신문〉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았다. 당선 전화를 받고 게시물을 보던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학생과 투고작을 놓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묘한 일이다. 한동안 그만 두었던 시작(詩作)인데, 12월 초순의 내 마음은 시심으로 수런거렸다. 동대문 근처를 어슬렁거렸지만 쉽지 않았다.

 

20대에는 말을 하고 싶어서 시를 쓰려고 했다.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시를 쓰지 않은 세월 동안 마음은 욕망으로 어수선하고 복잡해졌으며,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말을 더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피로했다. 자본의 욕망으로 들끓는 세상과 수없이 많은 언어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 매우 자주 겨울잠 같은 유폐로 찾아 들고 싶었다.

 

고단했던 시절, 노자와 장자를 읽었던 것도 그러한 욕망의 한 자락이었던 것 같다. 늘 어디론가 가고 싶었지만 떠난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인도와 관련된 책자들을 뒤적이며 지도를 그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현실이 아니라 무거운 나의 욕망 때문이었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세상의 말들 가운데 고요의 길을 내고 싶고, 동일한 보폭으로 현실을 살고 싶다. 나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사찰의 고요에 익숙하다. 고요에 깃들 수 있는 시간들이 시로 인해 많아졌으면 싶다.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다 인연’이라는 말법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일이다. 해석의 과정 속에 더해지는 욕망들, 그것을 덜어내는 일의 자연(自然), 내 말들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나의 언어들이 당신의 마음을 담아내기를 원하시는 내 어머니와 오래도록 마음을 돌아보게 만드시는 아버지로 인해, 처음 시를 쓰고 싶었다. 그분들께 오래가는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오래 전 시 쓰는 일에 용기를 주었던 김명인 선생님께, 그리고 나의 말들에 길을 열어준 심사위원 선생님과 불교신문사에 감사드린다. 모두 고맙다. 십여 년 전 도봉산에서 내 시를 찬찬히 읽어주신 당신에게, 겨울 사찰의 햇빛 같은 평온과 평화가 내리기를 소망한다.

 

 

 

백석 문학전집 1

 

nefing.com

 

 

[심사평] “서정시의 ‘결’ 불교적 사유로 잘 표현”

 

249명, 모두 1500여 편에 가까운 시편들을 읽고나니, 먼저 우리 시단의 양적 풍요로움이 전해져왔다. 이렇게 많은 응모자들로 신춘문예가 성황을 이룬다면 아직도 우리 문학은 큰 희망이 있다고 느껴졌다. 신문의 특성 탓인지 불교 관련 소재가 눈에 많이 띄었으며, 대체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불교적 가르침이란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시 작품으로 승화 내지 변용시키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지닌 신인을 탄생시키는 것 또한 신춘문예의 역할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열대야’ , ‘사월초파일’, ‘소리 항아리’, ‘불꽃무늬 항아리’, ‘연못’, ‘백담사 살살이꽃’, ‘추이불이선란도’, ‘겨울 내소사’ 등 여덟 명의 작품들이 그 나름의 수준을 보여 주어 마지막 검토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더 축소시켜 최종적으로 ‘추사불이선란도’와 ‘겨울 내소사’ 두 편을 놓고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정할지 고심하였다. 이 두 작품은 각각 그 장단점이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추사불이선란도’는 선미가 승하고 시적 통찰이 빛나고 있었으나, 시적 구성과 언어적 세련미는 ‘겨울 내소사’에 조금 뒤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아 있다.

 

‘겨울 내소사’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결을 잘 살리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에서 포착되는 섬세한 화자의 눈길은 시행의 분절로 드러내면서 고요 속에서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을 통해 장엄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읽어내는 동시에 신생의 열망을 표현하는 능력은 그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시작 수련을 거쳤음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추사불이선란도’는 마지막 결구에서 “내게 있어 추사의 붓끝은 너무 아득하고 깊어 보였다”라고 하는 설명적 진술로 마무리되어 결과적으로 시적 긴장을 약화시킨 것이 결정적 아쉬움이었다.

 

전반적으로 금년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시조 부문은 응모자의 수와 질적인 면에서 이제 본격적인 도약기를 마련한 것 같다. 그 자체가 하나의 경사이자 축복이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아낌없는 격려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최종 당선자에게는 진심에서 우러난 축하의 박수를 전해드린다.

 

심사위원 최동호 고려대 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