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당선소감] 꿈속에서 본 사과나무의 행운
내가 태어난 곳은 아라가야의 옛 도시 경남 함안이다. 이곳은 눈이 가는 곳마다 무덤인, 무덤의 도시이다.
어릴 적 나는 무덤 위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한번 빠져들면 쉬이 깨어날 수 없는 무덤가에서의 잠. 장성하여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그것도 비 오던 날, 어머님이 그 무덤 사이에 무덤 하나를 들고 들어 가셨다. 그 도시의 풍경으로 치장된 것이었다. 거대한 무덤의 도시에 새 어머님과 살고 계신 아버님에게 늦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시를 쓰면서 꿈속에서 좋은 시를 본적이 있다. 어느 누구의 시와도 다른, 좋은 시라는 것을 단박에 알고 부지런히 외웠다. 그러나 꿈속의 시를 기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있다면 꿈을 포장하고 있는 이 무덤과도 같은 잠의 무게를 벗어 던져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맡에 노트를 놓고 펜을 손에 쥐고 잠을 잤다. 그리고 시를 봤을 때, 마치 캄캄한 무덤에 갇혀있다가 사력을 다해 봉분을 뚫고 밖으로 걸어나오듯 침대에 앉아 노트 한 귀퉁이에 옮겨 썼다. 그런데, 호흡기 질환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놓지 않으시던 오규원 선생님이 그 시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시였다면 다시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오규원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투고를 하기 전에 꿈을 꿨다. 오규원 선생님과 황지우 선생님이 길을 가면서 길가에 심겨진 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나에게 줬다. 그 사과를 받고 보니 사과가 아니라 속이 뻥 뚫린 등이었다. 붉은 빛이 찬연하게 흘러나오는 등을 두 선생님이 따주시면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당선 통보를 받고 심사하신 분 중에 황지우 선생님이 계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 본 사과나무에 아주 오랫동안 거름을 주었던 김혜순 선생님과 이광호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을 꾸도록 힘을 보태주신 교수님, 선배, 후배, 여러분들에게 더없이 고마움을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미흡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자신의 목소리 있는 작품 기대
본심에서 당선 가능한 작품으로 세 편의 시를 골라 놓고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두 심사자가 내민 작품들이 뜻밖에 서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작품 가운데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선뜻 내놓기에는 뭔가 머뭇거려지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민씨의 ‘생수를 사다’라는 시는 모든 응모자에게 공통된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을텐데 이미지의 과잉이나 어휘의 낭비로 인해 시가 딱 시로서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어제 먹은 파리 바게트에 들어 있는 이스트가 주는 이분의 일 박자 부푼 템포가 레코드점의 철 지난 마돈나와 맞물리면서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구절처럼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다. 요즘 시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에 작동하는 유질동상(類質同像)은 본디 ‘혼돈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명석한 것’이라는 시의 초기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신미나씨의 ‘호출’도 어느 정도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너무 많이 동원된 은유나 생경한 환유가 시적 소통의 회로를 막아버린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이 모든 게 기실은 할말도 딱히 없는데 억지로 시를 쓰고자 하는, 혹은 시 쓴다는 착각을 즐기고 있는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향후 한국시의 불길한 경고음으로 들려왔다.
안성호씨의 ‘가스통이 사는 동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가 동의한 것은 이 작품이 앞서 말한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비교의 차원에서 안성호씨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안성호씨가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시, 그래서 그것을 들으면 아, 안성호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시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동맥경화에 걸린 한국시를 벌떡 일어서게 할, 젊은 시의 쌩쌩한 육성을 듣고 싶다.
심사위원 김승희·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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