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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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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11.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No.4> 7.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4.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 그런 편이다> 5.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6.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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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선 / 정유나

 

 

피터 팬에게서 도망친 그림자는 오늘 밤도 우리의 골목에서 숨죽이고

껌뻑거리던 형광등조차 눈을 감아버린 방 안에서 일기를 쓰는 중이야

울고 싶은 일들이 차고 넘쳐서 구석으로 숨겨놓아도 자꾸만 쓰러지는 밤들

악몽을 꾸는 게 싫어서 잡은 속눈썹을 비비며 밤을 참아보려고 했지

이불 위로는 고백하지 못할 거짓말과 징크스들이 흐트러진 채,

심연 속에서 놀란 어깨를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가는 손가락들

다정하게 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진심 근처를 맴돌다 흩어지던 낱말들

낯선 이름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쓸 때면 손톱 밑에서 자라나던 부끄러움

얼버무리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던 게 서로의 마음에 빗금을 긋는 일이라면

헝클어진 집 안에서 아이처럼 쪼그려 울던 엄마를 기억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을 수 없어서 뒷걸음질 치던 어린 날의 초상

이상하지, 엄마는 분명 나보다 큰 사람이었는데, 작은 엄마의 그림자를

차곡차곡 접어 서랍 깊숙이 숨겨놓았어, 나는 성장통만 가득한 비대증을 앓던 아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나의 궤도 밖으로 이탈하거나

소중한 것을 담던 거울이 먼지에 쌓여 더 이상 빛나지 않을 때,

엄마의 청춘이 녹아 있는 나의 얽ㄹ 위로 사춘기의 끝자락이 드리웠지

그때서야 난 평생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걸 알았던 거야

침대 위로 새겨진 엄마의 외곽과 둥그렇게 떨어지던 옆모습

붉게 변한 콧잔등으로 잠든 엄마의 들을 톡톡 두드리다가

나를 품고 있던 세계가 으스러지는 것을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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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출구의 기도 / 안광수

 

 

오늘 하루도 힘껏 살자!

아침 6시 30분에 눈을 뜹니다

 

형, 어제 빅이슈 판매 어땠어요?

홈리스 월드컵 사진을 독자들이 좋아하셨지, 너는 어땠니?

 

오래전, 아침 6시 30분

빚 독촉 전화와

형은 언제 사람 될래 잘난 동생과

부모님의 잔소리가 지겨워

30만원을 훔쳐 가출했지요 룰루랄라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습니다

 

다 내 것 같았던 세상은 내 돈 30만 원을 갉아먹고

80만원에 나를 추포도 섬 일꾼을 팔아넘겼지요

지하도 노숙 생활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또 지친 하루들

죽어버릴까

그러다가

 

안녕하십니까, 사랑과 희망의 잡지 빅이슈입니다

 

지금은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서

동냥을 하는 어르신 한 분과

파지를 팔며 생활하는 다른 누숙인 사이에서

임대주택의 꿈을 외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반드시 갚고 싶은

30만 원의 열 배 백 배를 외치고 있습니다

 

빅이슈 동료들과 노숙인들과

가출한 사춘기들을 위해 판매금액을 세어 보면서

간절한 기도를 외치고 있습니다

 

전철이 또 한대 도착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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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시원 / 이재원

 

 

안전화 동여매고

막노동 현장으로 나선다

인력사무실에서

공치고 오는 길

바람에 휘날리는 검정 비닐 봉다리

어매,

행상 파하고 사과 담아 귀가하시던

어매, 

생강 보따리 이고 장에 가시던

광장 비둘기는 끼릭끼릭 장난치며

지난 밤 추위 이기려 마신 뒤 토한

밥알 먹고 있다

꾸꾸르 꾸꾸

비둘기 꽁무늬 따라가면

어매 자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방은 216호

슬리퍼 신고 쭈뼛쭈뼛 방으로 들어왔다

옆방 217호에서 웃음소리 난다

혼자 왜 웃을까

내일은 어디로 팔려갈까

혹시 또 데마찌*

 

희망고시원

네 개의 벽 틈새

희망은 어디 있을까

 

* 일감을 공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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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없는 방 / 서명진

 

 

어린 시절 나는 어두운 우리집이 싫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은 항상 어두웠다

 작은 창마저 막혀 있어 한낮에도 햇빛조차 들지 않던 검은 방

그 작고 어두운 방에서 일곱 식구가 오글오글 모여 살았다

 

아버지는 원래 없었다

 

내 나이 열일곱 살에 시작한 첫 직장생활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서 빵 만들 준비를 하고 공장장인 동네 형이 나오면 같이 만들어서 아침 8시엔  빵을 매장에 진열해야만 했다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후에 빵과 케이크를 만들고 저녁이 되면 내일 만들 빵에 대한 준비를 했다

미리 반죽해서 빨간 통에 담가 놓으면 아침에 숙성이 되어 빵을 만들 수가 있다

그제야 나는 청소하고 쉴 수가 있었다

 

내 잠자리는 제과점 내 전등이 하나뿐인 어두운 방

여기도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자려고 누우면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몇 번씩 깨곤 했다

제과점엔 정말 쥐가 많았다

어른 팔뚝만한 쥐도 여러 마리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런 쥐들이 수시로 내 방을 드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불을 켜고 잤다

불을 끄고 자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그때야 쥐와 시끄러운 소리에 익숙해질 수가 있었다

 

천구백팔십오 년 구의동 독일제과점

 

아버지는 원래 없었다

농사지을 땅 한 평이 없어 엄마는 허드렛일 하러 다니시고 누나와 형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갔다

 

한 달 일하고 받은 월급 사 만원

은행에서 첫 통장을 만든 후 시장에서 엄마와 동생들의 선물을 샀다

그때만큼은 내가 굉장한 부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도 빵을 만든다

누이를 닮은 보름달 빵

형을 닮은 곰보 빵

엄마를 닮은 단팥 빵

빨간 반죽 통에서 숙성되는 내 가족의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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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호사비오리* / 김영욱

 

 

길가 오리(五里)마다 서 있는 오리나무는

고향집 오라비 같은 조선 오리나무

 

비 오는 날이면 짝 잃은 나막신 하나

삼천리를 마다 않고 떠내려 와

검둥오리처럼 웅덩이에 둥둥 떠다니는데,

 

시커먼 숲 그늘이 산봉오리 넘보면

물갈퀴를 감추고

오리 떼로 날아오르고

 

멍석그늘 위로 흐르는 구름

풀무불로 뒤집느라 얼굴 익어버린 홀아비는

댕기머리 늘어뜨린 어린 각시

못내 기다리는지,

 

노을 벌겋게 달아오르면

눈이 매워 함지박에 눈물범벅 비비고

가마에서 푹푹 삶아지는 토종 오리마저

진흙 속에 부리를 박고 뿌리를 내리려는데,

 

사방오리 아니요 물오리도 아니요

털 없는 천둥벌거숭이

조선토박이

 

오 리마다 이정표로 서 있는 오리나무는

우수리 강가에서 시베리아 벌판에서

날아들던 호사비오리

올려다보고

 

바람 부는 날마다

날갯짓을 시늉하던 삼십년,

신원미상 노숙자

미수(米壽)의 홀아비는

죽도록 고향말투 버리질 않고

 

* 오리과의 겨울 철새로 우리나라에서 사라진지 62년 만인 1988년에 강원도 남대천에서 한 쌍이 시체로 발견된 걸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최근 철원과 춘천 등지에서 이따금 작은 무리가 발견되고 있다.

 

 

 

 

제1회 한탄강 문학상 대상에 김영욱 시인 차지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연천군은 지난 6일 연천읍 고문리에 위치한 종자와시인박물관 복합커뮤니티관에서 김광철 군수를 비롯해 신광순 관장, 이돈희 시인 등 운영위원 및 수상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한

ww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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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초라는 사건 / 정월향

 

 

오로라로 부릅니다. 양파 속에 앉아 있는 당신과 당신 속에 앉아 있는 양파의 조합. 껍질 사이로 터지는 흰빛의 회오리, 이글루라 부릅니다. 천년 전에 내린 비가 기다리고 있는 집. 오래된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집. 얼음과 얼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거대하고 동그란 악수. 반갑습니다! 평화로운 저녁을 만들었습니다. 얼음이 얼음일 때의 공포와 얼음이 얼음을 버릴 때의 쓸쓸함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누이트라는 말은 선뜩한 날고기. 길고 느린 석양의 조합. 결론을 알면서도 오늘의 손가락을 구부리는 이유.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를 놓지 못하던 엄마와 손바닥을 빨갛게 태우던 아빠의 시간. 양파의 흰 피는 화끈거리고 양파 속에서 찬바람 부는데 손 안의 오로라가 자꾸 미끄러집니다. 흰빛의 현란함이 위대, 라거나 장엄으로 불릴 때 한 방울의 내가 흘러내리던 사건, 걸쭉하게 웅크린 이글루 위로 위대와 장엄이 쏟아집니다. 

 

 

 

 

'진주가을문예' 당선작 발표... 27년 운영, 올해로 종료

시 정월향, 소설 기명진 당선... 1995년부터 운영, 남성문화재단 해산 따라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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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나무는 번진다 / 이진환

 

 

빈 가지엔 허공뿐일까

농밀한 채색을 하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산천이
붉은 기운에 머문 잠시

찬 기운이 거두어가는 땀 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잎새를 준비하는 나뭇가지를 보고서야 혹독한 겸손을 본다

눈발 서럽게 덮어오는 빈 몸에도
우듬지의 묵묵함이 노을과 함께 내려앉는 새들의 둥지가 되고
밑동의 후덕함이 어스름과 함께 기어드는 것들의 거처가 된다

나서지 못하는 걸음을 두고
시름 깊은 날엔 강을 대신 흘려보내고
좋은 날은 구경삼아 구름을 대신으로 산하를 굽어보며
무심하여 헐벗을까 빈자리마다 다독이는
여린 뿌리들이 키 높이에도 어깨를 하고 내딛는 소란이 치열하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바람몰이가 성장의 통점이 되어
빈 가지를 말아쥔 뿌리의 힘이
한 점씩 옮아오는 냉기를 떼어내며 결핍에 겨운 나이테를 돌아 나올 때
침 마른 호흡은 수액에 감춘 새싹의 맥박이다

방정식의 삶이 아닌,
생명의 근원인 바닥의 함수로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의 협연으로 조화를 이루는 산천을 갖는다

나무는 번진다

나무를 감싸고 계곡을 건너는 바람에 볕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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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함소입지 / 정두영

 

 

젖 불기 기다리던 포대기 속 울음이

기다 걷다 발서슴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젖은 달 마르도록 손금 다 닳리도록

다랑논 어느새도

장돌림 어지간도

어쩌다 사기막도

어차피 갖바치도

다시금 애옥살림 누게막에 돌아오지 않았다

거시기고 아무개라 사초마저 뭇풀인데

죽기야 하겠나

주기밖에 더 하겠나

한목숨 시위에 걸고 왜바람 가로질러

다시 보는

다시 봄에

김치 치즈 스마일

웃음보 터트리는 걸음나비 포인트로

돌아온

봄의 씨앗 무명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수상] 뼈들이 전하는 말 / 박복영

 

 

허허벌판 꽃 무덤아래

알 수 없는 뼈들이 엉켜 있다

돌멩이를 파헤쳐 열수록

지층이 물고 있는 뼈 조각들

이름 없는 목숨들이 층층으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는 동물 뼈라 했고

어떤 이는 나뭇가지라고도 했다

손가락뼈들은 주먹을 쥔 듯 말려 있었고

머리뼈는 앞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붓으로 꺾인 무릎 뼈에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

어느 연대의 시간을 관통했을

쇠구슬은 녹슬어 삵아 붉었다

빗소리와 눈보라를 삼키며 연명했을 뼈들

침묵으로 견뎌온

슬픔의 역사를 물고 있다

열면 열수록 뼈들의 전언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개미떼가 의병 같았다

한 방향으로 돌진했을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너진 뼈 조각이 물고 있는 함성이

단번에 흘러나오듯

드러나는 무릎 뼈에 박혔을 총성

부를 이름조차 사라진 자리에

그날들이 발굴되는 동안

저쪽의 꽃 무덤이 흔들리며 또 붉어지고

겹겹이 묻힌 그 날의 항전은

뼈 조각으로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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