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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열풍 외 4편 / 이동우

 

 

질투가 조화造花를 만들었다는 이 도시의 풍문

 

장미꽃은 허브티 한 잔 다 마시기도 전에 시들었다

시간이라는 벌레가 결 사이사이 주름으로 숨어들고

소행성 B612,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도 시든다

 

꽃을 냉장고에 넣는다

냉기와 서리로 화장한 꽃은 신선 유지 기능이 만족스러운지

더는 질투하지 않는다, 안에선 시간도 언다

언 꽃에게 한창때 사진은 보여 줘도

거울은 안 된다

박제된 젊음, 그 탱탱함을 회상하는 ‘복고復古’ 사진전이 열렸고

주말 내내 붐볐다

 

딸아이 스케치북에서 시들지 않는 꽃을 발견했다

아내는 빨간 크레용으로 그려진 장미에서

샤넬 No.5 향도 맡고

꽃을 쫓는 나비의 숨소리도 듣는다

 

땅의 보폭에 맞춘 그리니치 표준시를 거부하고

시곗바늘을 꺾는 사람들 하지만

수분과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훈제의 과정은 막지 못한다

요즘 들어 얼굴보단 빈 풍경을 찍는 아내

걸을 때마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가 난다

 

도시를 뒤덮은 풍문이 자욱해진 밤

냉장고에서 꽃을 꺼내 말해 준다

꽃잎이 다 져도 넌 장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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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전개

- 버려진 20리터 종량제 봉투들

(웅크린 자세로, 구겨진 표정으로, 무릎 꺾인 순간으로)

 

길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면

닫혔던 골목이 열린다

밤의 주인들이 후각으로 서열을 매겨

옆구리를 단번에 찢는다

불법 투기된 냄새에

얼룩무늬 몇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앙칼진 울음에 허공이 깨진다

먹이 다툼에서 밀린 그림자가

트럭 밑으로 사라진다

 

이슥해진 밤이 어둠을 담으면

한껏 부푼 골목이 터질 차례

금 간 담벼락마다 웃풍이 거세지고

틈새로 쏟아진 소란의 흔적이

전신주를 타고 축대 끝

옥탑방까지 타전된다

골목에서 쫓겨난 이들이 뒤척인다

벼린 발톱에 긁힌 길바닥이

게워내는 낮 그림자

밤의 숨구멍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집 앞 외등이 동공을 가늘게 뜨고

길은 어둠 속 꼬리를 치켜세우는데

 

 

 

비유하자면 겨울밤

 

빗댄 색들 가운데 의인화한 것 위주로 한 움큼 집는다 원고지에 조심스레 풀어내자 숨과 섞여 진해진다 입을 그려 주고 표정을 선물한다 비로소 꿈틀거린다

 

촛불 하나 켜고 둘러앉는다 의외로 책이나 옷가지보다 가구들이 말이 많다 핀란드 자작나무 탁자는 고향 얘기만 몇 시간째다 눅시오(Nuuksio) 숲, 이곳저곳에서 눈밭 헤치고 모인 고아들

 

벽시계도 수다스러운데 둥근 것들은 했던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늘 대유에서 시작된다 괜한 격식을 차리거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사달이 난다

 

직유는 늘어지기 일쑤고 ……, 은유는 둘을 뻘쭘하게 잇곤 한다

 

창을 열자 촛불이 어둠 사이로 얼른 두 손을 밀어 넣는다 허공이 하얗게 벌어진다 첫눈이 닿소리처럼 내린다고 해야 할지, 이 계절의 첫 페이지다, 라고 우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내 몸에도 불이 들어온다 별은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막다른 바다

 

어머니가 골목 어디쯤에서 물질하면서부터

조각난 일상

나는 집 앞 깨진 외등 아래 주저앉는다

어둠을 끌어당겨 제 몸을 덮은 밤바다처럼

스스로를 지워 버린 잠녀

겨우내 소금기 짙은 밭은기침만 골방 안으로

덕장 밑으로 쑤셔 넣었다

바람이 마당에 부려 놓은 갯내

눈가에서 파도가 참방거릴 때면

잠녀는 골목을 길게 이어

갯가로 나가려 했다

물소중이 걸린 옷장 안으로 펼쳐진 허름한 바다

방바닥에 흘린 물을 보고 바당이라 외치며

철퍽철퍽 바닷물을 두드렸고 이어지는

삭풍에 삭아 가는 노랫소리

이엿사나 이어도사나 이여 이여 이어도사나

자신의 근원인 마을 앞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밤

눈보라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사투를 벌였고

갯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포말 속에서

새벽은 후렴처럼 일렁였다

간신히 잔잔해진 숨비소리

잠녀는 또다시

물허벅에 담긴 파도 소리를 쫓아

막다른 골목에서

구부정하게 짠맛을 캔다

 

어머니가 두고 간 망사리

나는 삿대도 없이

골목에 잠긴 물길 더듬으며

널린 조각들을 맞춰 간다

골목마다 바다가 넘실거린다

 

 

 

 

봄 외출

 

권투 선수가 매니큐어를 바른다

사각 링처럼 각진 손톱

땀내 위로 뿌려지는 꽃잎

글러브를 벗은 손가락은

발가벗은 것 같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꽃잎이 샌드백에 가 붙는다

가쁜 호흡들이 달라붙은 곳

심판이 휘슬을 분다

함성이 모인다

꿀꺽, 카운트다운을 삼키는 벽

맞아도 손톱은 꿋꿋하게 자랐다

밖으로만 자라는 퍼런 멍

숨기고 싶어 주먹을 말아 쥐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손톱

얻어 입은 옷처럼 껑충하다

햇빛이 죽죽 팔을 뻗는다

원투! 원투!

섀도복싱은 이제 그만

가볍게 쥔 주먹 안에서

사각 링이 구겨진다

쫙 펴자, 순식간에

만개하는 손가락들

소녀가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당선소감]

 

하루하루 충실했으나 시가 잘 써지지 않아 허전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밤새 시에 대해 이야기할 선후배가 없어 외로웠으나, 어쩌면 그래서 자유로웠다.

 

조금 늦은 내 글쓰기는 아직 유년의 골목 어디쯤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 나를 일으켜 다시 달릴 수 있게 한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뒷덜미를 잡는 창작에 관한 회의.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달리며 조금씩 깨닫는다. 우직한 반복이 저 스스로의 리듬으로 마침내 한계를 넘어서리라.

 

굽이쳐 뻗어가는 ‘시산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험준한 산세山勢에 주눅 들지 않겠다. 한 발 한 발 내딛겠다.

 

마지막으로 내 시의 근거와 얼개가 되어준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영원히 반짝여 달라고 …….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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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 김태인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

바닥이 없는 마음처럼 지붕 없는 둥지를 이고

부화할 날들을 뒤로 한 채

늙은 나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새는 빈 둥지를 허물고 도화지를 떠났다

 

* 애착안정성 진단을 위한 투사검사(B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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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1번과 3번 지문의 영역 사이에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문장들이 꿈틀댄다

이해는 지문이 만든 미로를 뚫고

출제 의도는 몇 년 째 퇴로를 헤맨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과정은 4번 지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그리고 죽음의 묘비명을 이해하기까지

 

3번 나뭇잎과 1번 잎사귀 중 옳지 않은 것은?

가장 나뭇잎 같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질문에 모든 잎사귀들은

말문의 잎맥을 막고 치를 떤다

가장 고양이 같지 않던 울음소리만 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순간은 질문과 사고의 이종교배이다

가장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몇째일까요?

문제 같지 않은 문제가

가장 꽃 같지 않은 꽃을 고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간다

 

똑똑 물방울 돋는 약수터 바위틈에

5번 물결이 수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가장 꽃잎 같은 분홍 벚 꽃잎 아래로 숨어든다

열한 번 한숨과 아홉 번 어긋난 관절은

지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지문이었을까요?

 

 

 

순간기억상실

 

강한 휘발성을 띤 순간의 장소에서 당신의 기억은 웜홀로 증발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블랙홀의 가공할 중력과도 같아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끌어당겨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배출한다 실로 눈빛 깜박할 순간이다 서울역 앞 내 앞을 빠르게 지나는 한 여인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 균형을 잃고 두 시선을 직선의 관성을 한 순간에 집 어 삼 켜 버 렸 다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커피 잔에 흙빛 기억을 왈칵 토해내며 핑그르 순식간에 비켜선 찰나 마주 오던 한 남자 나를 피해 급히 직진 괘도를 선회할 무렵 휴대전화 통화에 한쪽 기억을 먹혀버린 한 여성의 스텝과 엉켜 탱고의 피날레를 연출하고 만다 서로의 방향성 기억은 가방이 서로 부딪치며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놀람과 통증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연쇄반응으로 엉켜버린 공황은 순간기억상실증 옆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이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유리창에 부딪히고 순간 걸음을 멈춘 바람에 날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서울 상공에 쌓이며 지표면 1mm를 덮어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중금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간기억상실의 연쇄반응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서울역 대합실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틈새

 

얼굴 틈으로 날아오는 새,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와 오늘 사이로 말과 행동을 자주 흘린다.

 

화장실 깨진 벽거울에 비춰진 조각난 얼굴, 나뭇가지 쪼개놓은 낮달처럼 틈새 파고든 눈코입은 온전히 꿰매내지 못한다.

 

찔끔찔끔 녹물 흘리는 수도꼭지, 전립선이 막혔는지 꽉 깍 나오는 울음이 길다. 한번 구겼다 펼친 살림처럼 모든 각이 흩어지듯 놓아두고 지우고 가야 할 것들.

 

휴지에 싸서 버린 얼굴이 넘쳐난다. 형광등 속이 까맣다. 한쪽 기억을 뜯어낸 벽지 여백이 길다.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스미고 대들보가 벌어진다.

 

한 귀퉁이 부서져 내린 계단으로 깃털구름이 몰려든다. 거울 속으로 한 줄 훈풍이 불고, 햇볕 든 꿰맨 틈으로 죽지 않은 뇌신경을 뻗는다.

 

얼굴 중앙으로 사납게 몰려오는 실금, 조각조각 붙은 파편이 흩어지듯 수십 개의 얼굴이 다시 부화한다. 푸드득

 

주름지고 패인 틈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 떼,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헐렁하지도 호락하지도 않다.

 

 

 

겨울, 유전자

 

 

하늘에 닳아가는 새들의 잊힌 무릎이어서

나는 둥근 손거울 안에 오랜 문명처럼 희미하게 닳아간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고기의 뼈를 대면하는 일처럼

 

나는

거울 위에 눕는 또 하나의 혈연

 

주먹도끼를 들고 오랜 자폐를 깨고 나오는 날

무르팍을 흐르는 달빛의 기도는 단말마 비명으로 깨져 한꺼번에 와장창 쏟아질 것이라 한다

 

깨어진 조각마다 고스란히 녹화된 아버지 얼굴과 내 눈빛이 바라보는 아이들

서로의 거울을 바라보며 부레가 닮아가는 예감을 터득하는지도 모른다

 

곱슬머리를 기억하기 위해 쌍꺼풀 닮은 눈빛이 더듬어가는

유전자 지도 속에서, 물고기 뼈를 바라보는 염색체 한 쌍이 잊힌 새의 무릎임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보라와 폭풍과 강추위를 이끌고 거울로 뛰어든 후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손짓을 해도 대답이 없던 무성영화 같았던 거울 속에는 혈연으로 뭉쳐진 응고된 구름에서 잊힌 문명들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수상소감]

 

응모를 한 후 바로 베트남 출장길에 올랐다. 몇 번의 낙선이 있었던 이유로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다. 전화가 안 되어 카카오톡으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먼 타국에서 혼자 맛보는 짜릿한 순간이 앞으로의 시쓰기에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정과 모던 사이에서 방황을 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의 수준을 인정 받았다기 보다는 더 많이 노력하라는 노력상으로 생각하고 싶다.

 

몸에 깃털이 다 벗어진 느낌이다. 깃털이 다 빠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어떤 깃털이 나게 될지 두려움 속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깃털은 다시 돋아날 것이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색깔과 모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기회를 주신 계간 <시산맥>과 심사를 해주신 송용구 시인님, 안차애 시인님, 이기와 시인님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심사평]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작품을 기대하며

 

70여명의 700여의 응모작에서 예심 통과하고 본심에 오른 작품 중 김태인, 이선유의 작품들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외 9편은 풍부한 습작의 연륜을 짐작케 할 정도로 언어의 연금술에 있어서 숙련된 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생(生)의 체험에서 얻은 주관적 사유(思惟)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객관적 공감대의 넓이를 확대할 수 있는 훗날을 기약한다.

 

김태인의 「새 둥지를 그리세요」외 9편을 주목하였다. 그의 시는 낱말, 어절, 문장 간의 의미의 연결고리가 튼실해보였다. 문장과 어절과 낱말은 몸의 각 기관처럼 의미의 자양분을 주고받으며 상호의존(相互依存)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수준의 편차가 거의 없는 10편의 응모작 중 특히 <순간기억상실>과 <지문>과 <틈새>가 심사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분주한 역대합실에서 보행자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사건을 비롯하여 일상의 사건들 사이에 보이는 평범한 ‘틈새’들이 새로운 의미의 세포들로 채워지면서 ‘시’라는 유기체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이 혈액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사건, 하나의 사물과 또 다른 사물,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그 사람과 자연 간의 의미의 그물코들을 촘촘히 연결시키는 ‘연쇄반응’의 그물망을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솜씨가 시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송용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심사평]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를 바라며

 

행복하게도 따끈따끈한 햇(?)시편들에 한나절이나 잠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섯 분의 작품까진 추릴 수 있었으나 마지막 두 분의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 외 9편을 놓고는 다들 長考의 한숨이 깊었다.

 

하지만 ‘신인상’이라는 처음의 의도로 돌아가 짚어보니 한 분의 당선자가 풋풋하거나 촘촘한 시의 행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완성된 시편도 중요했지만 현상의 올과 감각의 결을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로 얼마만큼 직조해내는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김태인의 시편들은 공기방울 같은 가벼운 감각과 진부하지 않게 행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행보가 강점으로 보이나 시편들 사이의 편차와 모호한 표현은 극복해야할 과제로 보인다. 이선유의 시편 ‘무늬’와 ‘깃털’을 한참을 쥐고 놓지 못했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공교로운 언어의 결은 참으로 매혹적이었으나 자주 보이는 상투적 문구와 익숙한 묘사 등이 못내 걸렸다. 이미 詩魔에 든 분이니 한결 깊어진 풍모로 시단에서 반갑게 만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화투 패를 뒤집듯 지금 여기의 시편을 까서 보이고 또 다시 몇 모금의 시인으로 남는 가혹하고 이상한 동네(?)에 자발적으로, 설레어가면서 들어오신 것을 연민하고 또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안차애(시인. 본지 편집위원) 

 

[심사평]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을 기대하며

 

누구에게나 무의식 방에 “내면아이”가 살고 있다. 사십 살, 오십 살이 지나도 “내면아이”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려져서 세상이 갑자기 낯설고, 먹먹하고, 불안하고, 불쑥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몸뚱이만 커졌을 뿐이지 억압받고, 거부당했던 영유아기의 영혼은 무의식 안에 외소하게 남아 징징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길을 걷는 다는 건 그 어두운, 심층에 가두어 두었던 내면아이를 조심스럽게 들추어내어 달래는 과정,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할애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라는 시구에서도 극명히 들어나듯이 “나 안의 나” 은밀한 이중 자아의 현실적 괴리가 파헤쳐지고 있다. 그의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건 내면 심리를 현상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기법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편 마다 숨은 심리와 표층 현의식, 또는 드러난 현상과 숨은 원형의 상관관계를 짜내는데 농익은 안목과 섬세한 세공술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앞으로도 그의 시작은 기울지 않고 더 탄탄하게 대양을 항해하리라 믿는다.

 

나머지 후보작들 중에서도 번뜩이는 시적 기교와, 독특한 발상과 전개가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있었으나 그것이 지속력이 없이 부분에서 그치거나 어느 대목에서는 장황하여 시적 리듬을 죽이는 경향이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 밖으로 밀리기도 하였다. 후보자들 모두 시를 아바타처럼 바라보고 자기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걸 보니 그들 중 우리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는다.

- 심사위원 이기와(시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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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외 4편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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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인사

 

자세를 교정하다 새의 온도를 짐작했습니다 짐작만 했어요 뜨거운 온도로 쏟아지며 태어나던 날부터 세상을 짐작하는 것이 습관이어서

 

어깨에는 깃털처럼 자라는 겨울이 있습니다 깃털을 뽑으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눈은 발아래 쌓입니다 눈을 밟으면

 

새가 펑 펑 울었습니다 새는 그렇게 웁니다 짐작으로

한 발을 반쯤 들어 올린

 

새가 절반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새를 만났고 새가 날개를 펴는 순간은 자주 목격했지만 공중에서 날개를 펴는 동작이 발레의 짐작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리를 반쯤 들어 올려도 새처럼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날지는 못 했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못돼먹었으니까

 

동베파도브레 - 정령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신고

글리사드 - 찢은 새를 밟고

발을 버린 무용수처럼 날아올라 - 그랑제떼

 

숨이 멎었습니다 짐작만으로

 

신발 한 짝에 어깨 한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다른 발을 들어 올려 빛을 끌어당긴다면 불가능한 자세를 새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아침마다 당신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겠습니다

 

 

 

사과를 먹는 사과씨들

 

어떤 의미에서 사과는 2층에서 언니들이 던진 종이다

 

사과를 씻으면 단어는 뭉개진다

이 언니가 저 언니와 섞이고 문장이 젖는다

 

종이는 썩지 못한 것들의 시

아니, 씨

언니들의 방에서 뒹굴던 사과씨 귤씨 비타민C는

 

내가 버린 종이였다

젖은 종이를 펼치면

 

사랑한다는 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건너가 있다

계단이 계단으로 접히다 썩은,

 

집들이 언니들의 씨와 나의 시 사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더 어두워진 다음에 언니들을 깎아낸다

 

사과씨에 닿기 위해

시를 쓰면

사과는 씨에서 멀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집에 가까워졌다

 

집을 뭉치면 금형공장 프레스로 누르면 더 단단한 씨가 되겠지만

사과씨 귤씨 바다라는 Sea는 다른 장르의 종이

혜은 씨 수미 씨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사과를 씻으면 농약보다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체리가 굴러다니는 지구

 

 

둥근 것은 왜 기울어질까 태양과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슬픔 없이 기울어진다 지구와 체리는 부딪친다 크랙이 생겼다 방울토마토는 싱거워서 크랙 사이로 체리즙을 흘려 넣는다 그런 식으로 지구에 연애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연애는 워싱턴 체리 같아 이국적인 말로 세련된 욕을 구사하지만 연애의 안쪽은 백 년 내내 우기였지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태양은 지구보다 작아지고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지구는 체리보다 작아졌다 빗물은 어디에 고여야 하나 비는 싱거워져서 지구를 적시지 못하고 백 년 동안 과육 속에서만 내린다 태양은 방울토마토처럼 창백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억 년 후에 하얗게 될 방울토마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억 년 동안 친절했던 체리에 대해 사랑은 체리나무 같지 친절을 조금 기울이면 가지 끝은 붉게 맛이 들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구를 토마토와 함께 두면 지구에 먼저 금이 갔다

 

 

기체를 끌어안는 방식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덮밥을 즐겨 먹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가끔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얹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멍게덮밥이고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알맹이는 씹을 때마다 당신을 주황색으로 떠올리게 해요 멍게 오렌지 꽈리는 버리세요 주황색만 생각하세요 첫 키스는 꽈리 같았죠 꽈리를 불면 질량이 0이었던 한 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팽창하는 인플레이션 10⁻³⁶이나 10⁻³⁴초 만에 멍게는 멍게로부터 멀어지죠 멍게를 훔쳤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론물리학과 식품영양학은 버리세요 그러면 식탁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대기현상이 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대기가 폭풍의 기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 대적점이라는 목성의 주황색 반점 사실 멍게는 거기서 나왔죠 노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죠 그러니 주황색은 잊어요 덮밥만 생각해요 폭풍의 대기를 뚫고 착륙하듯 나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꿰뚫기도 해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재료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죠 죽은 별에서 새 별이 탄생하듯 재료의 완전한 죽음으로 밥은 완성되니까요 덮밥은 죽음 위에 죽음을 얹는 한 끼니까요 첫 키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당신과 당신 사이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다 보면 입은 기체로 들끓고요 사실 꽈리는 거기서 나왔죠

 

 

[당선소감]

 

복대박, 림포마 투병 중인 반려견입니다.

 

「윤곽」의 그 손처럼 내 손은 한 번도 종양을 어쩌지 못하고 간절하게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세 번째 날 오후를 지나는 중이었고 내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오후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던 중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연모하면서도 두려웠고 좋아하면서도 피해 다녔던 제게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간절함이 신께 닿았나 봅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곽재구 선생님, 염창권 선생님 그리고 ‘상상인’ 관계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와의 결별을 밥 먹듯이 하던 저를 안타까워하시던 여성민 시인님 감사합니다. 정말 잘 써야 된다고 하신 허혜정 교수님과 고락을 함께해 온 시향문학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보내주신 키다리 아저씨 배철훈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들 감사하고 대박아! 그만 일어나렴.

 

이제는 시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겠습니다. 애인처럼.

 

 

 

[심사평] 

 

메타버스metaverse 시대의 특징적인 상상력이 글쓰기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계와 가상계의 경계 지점에서 머뭇거리는 예비 시인들의 목소리가 지치지 않고 끝없이 들려온다. 이처럼 중심을 포착하기 어려운 시대에 ‘시 쓰기/읽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현실계에 구멍을 뚫지 않고는 가상계 혹은 상징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구멍은 통로이며, 구멍 뚫기는 시인의 몫이다. 더불어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소통의 단위가 되기 위해서는 화살촉과 같은 무게중심을 가지고 대상을 향해 꽂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무기명으로 본심에 전송된 원고는 16명의 투고작이었다. 먼저 이를 출력하여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읽었고, 다음에는 오프라인으로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대상작은 8명, 4명, 2명의 순서로 좁혀져 갔다. 전체적인 면에서 시적 표현의 양상이나 제재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시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서정적 자아의 부재, 주제 의식의 빈곤, 시어의 함축성보다는 진술적 설명에 치우친 점 등이 우선 지적되었다. 최종에서 논의된 작품은 「크레인의 목적」 외 7편, 「손, 라이프 나이프」 외 8편, 「문」 외 4편, 「윤곽」 외 4편이었다.

 

먼저 「크레인의 목적」은 일상의 애환을 환몽 속에 아프게 겹쳐 보인다. 크레인에 날아온 새는 자아의 상관물로 ‘몸 바꾸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곧 감상의 벽에 막힌 것이 아쉬움이다.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도 논평이나 감상을 넘어서는 의미의 파장이 있어야겠다. 「손, 라이프 나이프」는 영상 언어 및 극적 서사의 방식으로 언어의 다층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실험적 형식을 아우르는 중심이 풀려 있다. 그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추구의 진정성보다는 논평적 위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문」(「락다운」)과 「윤곽」(「사과를 먹는 사과씨들」)이었다. 「문」에서는 “눈송이마다 저녁이 붙어 있다.”와 같은 표현이나, “마당은 자꾸 넓어져서 너는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폭삭 늙을 때까지 시를 쓰고, 지나가는 새소리를 모으기도 했다.”와 같은 절묘한 서정성의 실현이 시의 정감을 풍부하게 한다. 동시에 내면의 영역 표시를 ‘문’으로 상징한 것은 평이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이 없었’던 것에 닿아 있다.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의미를 형상화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윤곽」은 앞의 시와 같이 ‘나/너(당신)’의 관계성 속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결속의 상징은 “손”이자, 손이라는 윤곽을 가진 “열쇠”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당신”의 관계성을 깨고 타인의 “손”이 개입되는바,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와 같이, 너(당신)조차도 타자화되면서 꽉 쥔 열쇠의 윤곽은 점차 “헐거워”진다.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해졌다”라고 했을 때, 선택 불능의 홈만 깊게 파인다. 전체적으로 너(당신)는 마음으로 지어진 가상의 너이자 허구적 현실이다.

 

두 작품 모두 장단점이 있고, 비중이 엇비슷하다. 「문」에서는 ‘나/너’의 단순한 도식이, 「윤곽」에서는 일부 어눌한 표현이 걸린다. 논의 끝에 「윤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의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안정적인 전개와 동봉한 작품에서 보이는 상징성의 구축 등에서 믿음이 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분발을 부탁드리며 다음 해를 기약하기로 한다.

 

- 심사위원 : 곽재구 · 염창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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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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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외 7편.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외 4편.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응, 그런 편이다> 외 5편.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외 6편.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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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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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년 11월.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제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응,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투’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외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외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응,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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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컵 외 4편 / 최은여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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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수상소감]

 

시를 쓰는 몇 해 동안 제가 사는 작은 도시 서북쪽 우리 동네 하천가에는 벚꽃과 접시꽃이 여러 번 피고 지고 수양버들이 새로 심어졌습니다.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하천 둑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를 묻고 새가 불러주는 답을 받아 적었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가끔 시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은 후, 필사하고 습작하던 A4 종이 뭉치를 정리했습니다.

 

나룻배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저에게 크고 깊은 등단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입니다. 그런 저는 하얀 종이배를 꼬깃꼬깃 접고 띄워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깊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종이배가 찢어지면 다음 날 더 두꺼운 종이배를 접어서 올라탔습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면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늘 혼자였고 또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시인과 대화하던 중 ‘작가’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솔직함을 시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작가’라는 단어 풀이는 노가 없는 뱃사공의 거친 손에 노를 잡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강 건너 아름다운 숲에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 다녀왔습니다. 서늘하고 고요한 시를 쓰겠습니다. 성실하고 미련한 글 노동자로 살겠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누군가가 서어나무 같은 시를 만나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허물어 시인으로 빚어주신 ‘수요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안도현 선생님, 김륭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께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시를 더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여기겠습니다.

 

 

 

[심사평]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

 

본심 작품

 

이은정 「생리전증후군」 외

최은여 「머그컵」 외

라환희 「화양연화」 외

이은우 「라라의 창」 외

김나형 「비둘기, 투신」 외

김수형 「야호에 찍는 마침표」 외

 

삼백사십여 명이 응모,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열기가 뜨거워지는 최치원 신인문학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섯 분의 응모작들은 그 가능성 못지않게 편차 또한 뚜렷했다. 모든 시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언제 어디서든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심사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시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생의 새로운 범주 혹은 미지의 세계)으로 만들어지거나 수혈되는 영혼의 양식에 가깝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두 분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이은우(「라라의 창」외) 씨의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음미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흥미로웠고,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설렜다.

 

이은우 씨의「라라의 창」외 4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밀고나가는 패기와 언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만큼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서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부 상투적인 진술들과 맞물려 사고의 깊이와 메시지가 다소 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라라의 창」의 경우 문장을 부리는 능력만큼이나 탁월한 이미지를 전경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마지막 연(“겨울이 노랗게/창을 두드릴 거야”)의 임팩트가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번 심사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제로 오랜 토론을 거쳐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새롭고 다른 시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된 서정을 새로운 시의 표면 위로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만의 세계를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와 이미지로 보여준다.「머그컵」이란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상투적이지 않게 혼융되면서 육체와 정신에 제각기 기댄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저항을 독창적으로 펼쳐 보인다.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서사가 단순히 읽히기보다 보이게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동참하게 하는 극화의 형식이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앵두를 줍는다//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로 시작,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튀어 오르고/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는 결말에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습작시간과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이다.

 

「미러링」, 「예민한 장난」, 「내 이름은 Run」등의 작품 또한 자연스러운 언술과 맞물린 서사의 개성적인 조형능력이 돋보인다. 사소한 일상을 담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같은 작품에서도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확인되듯 그의 시적인식은 얼핏 평범한 언술이지만 주술적이다. 극도로 개인적이면서도 우울(?)할 정도로 합창적인 현실과의 조우를 시적에너지로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더불어 이은우 씨에겐 어쭙잖은 격려 대신 조만간 시의 길을 함께 걷게 될 것이란 심사위원들의 예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글) 유홍준 / 예심위원 김경린 성금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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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 / 최지안

 

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겨울 처마 밑에 쩔쩔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

 

 

[당선소감] 여기, 발화점

 

발꿈치 들어 살살 걸어봅니다. 지상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걷는 사람이 시인이라지요. 휴대폰으로 건너온 당선이라는 말이 그 저녁을 휘저었습니다. 이름표 받아든 일학년처럼 이래도 되는 것인지, 내가 가져도 되는지 만져도 보고 기울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꿈과 잠 사이가 멀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얄팍한 발목으로 넘겨다 본 까마득한 저쪽. 물렁한 턱이란 없었지요. 한 생을 시만 먹으며 무명으로 소비해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은 파일 안에서 허옇게 낡아갔습니다.

 

끝동을 만지작거린 9월. 몇 편의 깃을 골라 저쪽 문턱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신 김윤배, 이경철, 안도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 알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특히 열렬한 지지자인 두 딸과 축하 케이크를 먹고 싶습니다. 마경덕, 박지웅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수원 AK 시창작반과 시담 동지들의 응원 고맙습니다. 수필 스승이신 손광성 선생님 휘하 아가위회원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제 시의 발화점이 되겠지요. 이제부터 뜨거워지겠습니다.

 

40년을 디디고 살다가 얼마 전 떠나온 용인에게 안부 전합니다. 용인을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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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 제4회 남구만신인문학상 본심에 임했다. 용인의 구도심 어느 카페에서였다. 최종심에는 모두 열 사람의 응모작이 올라왔다. 다들 시적 수련의 흔적이 단단해 보였다. 우리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어떤 우연에 의해 시인이 탄생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훈련이 좋은 시인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습과 훈련의 흔적이 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을 만나고 싶었다.

 

새로운 신인일수록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말처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태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 신인에게는 과거의 것을 본받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응모작들은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에서 망설이고 기울고 빠져나오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민의 자국이 역력했다. 그 고민은 사사로운 것과 공적인 것,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들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만 여러 사람의 작품에서 ‘애인’ ‘문장’ ‘언니’ ‘허공’ ‘언어’와 같은 시어들이 동시에 발견되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상이 시류에 편승하는 말의 패션이 아니기를 바란다.

 

꽤 오랜 토의 끝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압축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외 6편은 현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시를 진행시키려는 의식이 강해 보였다. 자의식에 대한 편애와 고백의 시들이 넘쳐나는 때에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적잖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다 발랄하면서도 능숙하게 시를 전개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표현의 수사에 기대 멋스러움을 만들려고 하는 기술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롱꽃」 같은 시에서 “월세가 밀린 꽃이 아픈 허리로 비를 밟고 야근을 간다”는 표현처럼 삶의 신산함에 다정한 정감을 부여하면서 선연한 서정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시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고통에 바늘 끝을 갖다 대고 그 고통을 달콤하게 만드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올해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최지안씨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이 선정됐다.

 

용인문학회(회장 이원오)가 주최하고 용인시와 용인신문사,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이 후원하는 ‘남구만 신인문학상’은 조선시대 문신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시 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지난 2018년 제정됐다.

 

본심 심사위원단은 “최지안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약천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등 시조 900여 수를 지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벼슬을 그만둔 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집 ‘약천집’ 등을 남겼다. 묘역과 별묘 등이 모현읍 초부리에 있다. 

 

당선자에게는 상금 500만 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11월 27일 용인문화예술원 마루홀에서 진행되는 ‘2021 남구만문학제’에서 진행된다.

 

한편, 이번 예심은 용인문학 편집위원회가, 본심 위원엔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평론가)씨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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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 이창원

 

 

섬에는 집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과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도저도 아닌 떠나서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러저런 무리를 만들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몰려다니기를 좋아해서

애초에 얻으려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은 무리들이 있었고

누가 뭘 얻었거나 잃었거나 아무 관심 없이 구경만 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나를 포함하여 몇몇은 모든 걸 잃어버린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모든 걸 잃고도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훌쩍 딴 데로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섬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다

잘 돌아왔구나, 라며 내 말을 받아줄 것 같은 아버지는 어구를 정리하느라 외면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살면 거기에 익숙해져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갯바닥처럼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갯바닥 색깔처럼 납작 엎드린 물고기까지 걷어올리는 솜씨였다

그 통에 아버지 손에는 어구에 베였다 아문 상처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나

매년 되풀이되는 폭우에도 침묵처럼 잘 허물어지지 않는 벽돌담이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이따금 벽돌담 위에 손을 짚고 서서 저녁노을을 이끌고 돌아오는 배들을 구경하곤 했는데

햇볕에 오래 그을린 얼굴은 좀처럼 그 표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낯익은 것이 낯선 것이 되고 그걸 또 얼마만큼 견뎌야 낯익은 게 되는 것인지

더군다나 섬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칠부터 벗겨지며 원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일까, 두엇이 부두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건넨 뒤라서

나는 배를 몰고 미끄러지듯 섬 안으로 들어간다, 귀어(歸漁) 생활은 어떠냐는 물음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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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가 제14회 목포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927일 발표했다.

 

시는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우진, 박화성, 차범석, 김현 등을 배출한 문향 목포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목포와 관련한 다양한 문학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단편소설, (시조), 희곡, 수필, 평론, 아동문학 등 6개 부문을 공모했다.

 

14회 목포문학상에는 전국의 문학인들이 참여해 총 701명의 작품이 접수됐고 시는 전국의 지명도 있는 작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해 공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당선작을 확정했다.

 

본상에는 단편소설 부문 큐브가 있는 풍경; 0.083’(최수하, 서울시) (시조) 부문 탕자’(이창원, 충남 당진시) 희곡 부문 미얄’(허진원, 서울시) 평론 형식의 변주, 과정으로서의 감성-최은영론’(신용성, 홍천군)이 선정됐다.

 

지역작가 발굴 양성을 위해 전남 거주 작가에게 수여하는 남도작가상에는 단편소설 부문 길목의 무늬’(김성훈, 해남군) (시조) 부문 목포에는 이런 소리가’(박행신 광양시) 수필 부문 그녀는 나의 주인공’(주재현, 무안군) 아동문학부문 그림 가족’(이연숙, 영광군)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022일 목포문학관에서 개최되는데 본상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1000만원이, 남도작가상은 단편소설·(시조) 부문 수상자에게 각각 500만원과 수필·동화 수상자에게 각각 300만원 등 총 5,600만원의 시상금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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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팔꽃 / 김희정

 

 

스물보다 몇 해 더 산

어린 시동생은

나를 잉태해 불어난 엄마의 배를 보며

조카를 얼른 만나고 싶다고

형수님 배 만져봐도 되냐고

담벼락의 붉은 나팔꽃처럼

수줍게 얼굴 붉히며 물었다지

 

아마 그즈음에도 이렇게

가금 바람 불고 비 내리고

해가 쨍쨍했겠지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 살

엄마 뱃속에서 몸집을 키워나갈 동안,

육사에 막 입학한 삼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거지

시집살이에도 도시락 싸주며 공부시켰던,

착하기만 했다던 시동생을 떠나보내며

엄마는 뱃속에 나를 이유로

양껏 울 수도 없었다지

 

형수님 많이 울지 말라고 그때 떠난 건지,

매번 궁금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매년 현충일 국립묘지를 찾을 때면

내 일 년 치 생활과 갖은 상념 젖은 편지

가족 몰래 묫자리 위에 올려놓고

삼촌이 다 읽겠지, 뒤돌아보며

매번 구원받았다는 걸

아무도 모르겠지

 

그가 떠난 계절에 피는 나팔꽃 꽃말은

기쁜 소식, 결속, 덧없는 사랑

꽃말 따라 살다 간 것 같은 삼촌

매해 이 계절에는 그의 나이 세어보며

흑백 사진 속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새겨넣네

창틀에 심어 놓은 나팔꽃 화분에는

어느새 새싹이 피었다지

 

 

 

 

 

[금상] 외포리 요양원 / 송순애

 

 

바닷가 모로 누운 폐선 한 척

뒤척일수록 마른기침 흘러나온다

창가의 휠체어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노인이 자꾸만 한쪽으로 저문다

갈매기가 바람 다발을 뱃전으로 물어 나를 때

성한 데 없는 이음새가 삐걱거린다

더는 조일 수 없는 나사처럼

노인의 관절은 오래전부터 녹슬어 있다

누군가 찾아와 주었으면

어스름 속으로 길이 보일 텐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파도를 따라 졸음이 밀려온다

가는 귀먹은 텔레비전에서는

입만 벙긋하는 가수가 콧줄에 걸려나온다

식도 어디쯤 가보았던 것인지

바람 소리가 목선을 휘감고 쿨럭인다

한때 해상을 횡단하던 선박이었던가

물살이 커튼처럼 접혀오는 저녁,

이곳의 문은 여전히 밖으로 잠겨 있다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할 것이다

갯벌처럼 드러난 병상에서

폐선 하나 쓸쓸히 밀물을 끌어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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