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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착 / 노수옥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설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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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모두와 기쁨 함께…"빗방울 같은 둥근 시인 되겠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건 내가 몰랐던, 모르고 있는 곳의 소식이라고 알려주는 듯 했습니다. 몇 마디 말 끝에 우산이 확 펴졌습니다. 제법 무게가 나갔습니다. 순간, 방바닥과 발바닥의 사이가 한 뼘쯤 들떴고 12볼트의 바람이 불어와 나는 잠시 홀씨가 된것 같았습니다. 왼쪽 가슴 아래가 저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아무런 질문없이 대답만 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지구 근처에서 우주의 먼 과거를 쏘아보는 제임스웹 망원경의 눈동자처럼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는 과거를 쓰는 자세를 잃지 않겠습니다.

 

신앙과 시의 길을 가르쳐주신 마경덕 선생님 존경합니다. 이승하 교수님, 중앙대 잉걸문우님들 고맙고 감사합니다. 같이 공부한 롯데 평촌 문화센터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하겠습니다. 믿어주는 가족이 있어 모든 것이 처음이며 결과입니다. 존재감만으로도 든든한 남편 지준각씨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인 윤정이 영진이 가정 축복하고 준빈 준우야 사랑해!

 

아직 비를 만나지 못한 구름이거나 말 못하는 사람의 손짓에 불과한 저를 선해주신 광남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끝을 동그랗게 모아들이는 빗방울 같은 둥근 시인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심사평] 사유의 발랄함·냉정한 시선…신인의 과감함 돋보여

 

십여 년 전부터 신인상에 응모하는 작품 속에서 응모자의 성별과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다. 이번 심사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인적 사항을 지우고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방식의 영향이 크겠지만, 신선한 감각과 개성적 사유가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투고된 작품들이 하나같이 세대의 구분을 지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 다시 한번 청춘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고투도 빛나 보였다. 응모작 중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다만 심사자의 입장에서는, 온몸으로 받아낸 자기 체험 없이 손끝으로 매만진 작품의 가벼움은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응모작 행간에 스며있는 사유의 농밀함과 시선의 깊이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이중 ‘마트료시카’ 외 4편,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 ‘버드 세이버’ 외 4편, ‘슬리퍼’ 외 4편, ‘연착’ 외 4편을 시간이 허락하는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읽었다.

 

‘마트료시카’ 외 4편은 사회적 메시지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성이 돋보였다. 이미지나 의미를 자기 시의 질서 안에 수렴하는 모습이 안정되어 있으나, 의미가 시의 맥락을 선도하려는 태도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은 자기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하지만 이미지로 구축된 시적 세계를 지탱해줄 시적 논리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서 아쉬움이 컸다. ‘버드 세이버’ 외 4편 역시 흥미로웠다. 시에서 다루는 제재가 현실과 밀착되어 있으되, 시인의 은유를 통해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시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못해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슬리퍼’ 외 4편은 나름 자신만의 개성적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어 눈길이 갔다. 하지만 매 시편에서 반복되듯 드러나는 서술어의 변주가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어조는 시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골라야 하는데, 시인의 간섭이 다소 지나치다 싶었다.

 

결국 당선작으로 ‘연착’ 외 4편을 선정했다. 응모작 5편 모두 오랜 수련의 흔적을 안은 채,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사유의 발랄함과 시적 대상을 뜨겁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발굴해내는 솜씨가 훨씬 값져 보였다. 당선작은 자전과 공존의 정확한 주기로 재단된 세계 속에서, 오히려 결렬이나 연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단면을 은유적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고,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해내는 과감함이 신인으로서 기대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다만 시를 조금 더 현실로 팽팽하게 끌어당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시인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당선자가 세상과 교감하고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자기 시를 쓰며 오래오래 버텨주길 응원한다.

 

- 심사위원 : 김병호(시인·협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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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 최주식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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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이 들며 무너진 마음, 그걸 잡아준게 詩

 

눈이 오네. 창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잠깐 나갔다 올까 속엣말을 하며 문을 여는데 그새 희미해진 눈발이 비 되어 내린다. 그래도 나선 길, 다시 우산을 챙겨 들고 동네 주변을 좀 걸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우산 위에 송골송골 맺힌 쓸쓸한 기분을 툭툭 털어내고 의자에 앉으니 전화벨이 울린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다. 거짓말 같다는 말, 정말이다.

 

서면 영광도서에 서 있던 이십 대 초반 무렵의 내가 보였다. 서점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시집들의 무게에 눌려 아, 저기 내 자리는 없겠구나 돌아서던 뒷모습. 그리고 시를 쓰지 못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나이 드는 게 편해’라는 위약을 매일 유산균처럼 먹었다. 날들과 계절이 오고 갔다. 마음이 견디기 힘들 때 시를 읽으니 조금 나아졌다. 나도 모르게 무너지는 마음일 때 그것을 잡아주고 버티게 해주는 힘.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똬리를 틀었다.

 

우연히 눈에 띈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공고.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아내는 왜? 라고 묻지 않았다. 그래, 하고 싶었던 거 해. 눈물이 살짝 기쁜 마음은 잠시,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내가 시에서 얻은 위로만큼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상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는 것이리라.

 

김이듬 손택수 김참 심사위원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것. 꼭 갚아야 할 부채로 알겠다. 시에 대한 안목과 자세에 대해 가르침 주신 정홍수 류근 황인찬 이지아 선생님께 감사 인사 올린다. 아내 재인, 우리 아이들 성렬, 민서 고맙고 사랑한다.

 

 

 

[심사평] 3편 각축, ‘파도는…’ 공감의 폭 높은 점수

 

응모된 시의 경향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시, 실험적인 시, 새로운 감각의 시로 분류할 수 있었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젊은 세대의 독특한 언어 감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심사위원들은 십여 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쪽방촌 오르트 씨’, ‘미행’,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세 편의 시를 놓고 마지막 논의에 들어갔다.

 

세 편의 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세 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음미해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세 작품이 각각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어서 심사위원들 간의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선작을 내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쪽방촌 오르트 씨’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기법적 완성도도 높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도 뛰어났다. ‘미행’은 담백하면서도 깊이와 품격을 지닌 좋은 시였다. 재치 있는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풋사랑을 그려낸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였는데 특히 뒷부분의 반전이 좋았다.

 

좋은 시에 필요한 요소는 많다. 언어의 깊이와 생각의 높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감의 폭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올라온 세 편의 시는 모두 이런 요소를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 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의 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감의 폭이 가장 넓은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은 언어 감각이나 호흡 면에서는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이 점은 시를 계속 써나가면서 점점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선보일 좋은 작품을 기다려 본다.

 

- 심사위원 : 김이듬, 김참,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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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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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길을 잃고 무작정 걷던 내 발자국을 확인한 순간

 

도쿄에 도착한 첫날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서툰 언어로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을 실천할 손짓, 발짓은 또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다행히 출발 전, 사진으로 보았던 건물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걷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첫눈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을 잃은 걱정보다 첫눈에 설레었던 마음이 더 오래 남은 것 같습니다. 시 쓰는 일을 잠시 접어두면서 선택한 도쿄행이었습니다. 나쁜 버릇 중에 하나는 그게 무엇이든 생각이 깊어지면 무작정 선부터 긋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서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어요. 작은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족이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다시 글을 쓰게 된 결심은 생각나지 않아요. 그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온 거 같아요. 시를 쓰는 건 잃어버린 길처럼 모르겠으면서도, 그러나 기어이 찾아가야 하는 곳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당선 소식을 들은 이 순간이 그날의 첫눈 같다면 다행히도 헤맨 내 발자국을 내가 확인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감사한 얼굴들이 많이 생각나는데, 이렇게 이름을 불러도 되는 건지 고민되었어요. 조금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이렇게나마 표현해봅니다. 먼저 아빠, 엄마 저에게 먼 곳을 가르쳐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박시연, 나의 아토씨와 함께 기쁨을 나눌게요.

 

남진우 교수님, 박상수 교수님, 천수호 교수님, 편혜영 교수님 저를 지도해주신 모든 명지대학교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곁을 함께해주는 우리 지원이랑 지은이 항상 고마워. 미쿠야 고마워. 그리고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김행숙, 황인숙, 이경수,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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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 차수현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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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를 경쾌하게 표현

 

경제난과 아직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 시인이 창작의 열정을 멈추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왔다. 시를 쓰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 역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시인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시인이 많은 사회는 정치인이나 투기꾼이 많은 사회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214명의 시인 지망생이 총 1589편의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 23명의 시 134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오랜 시간 검토하여 이영숙의 ‘태풍주의보’, 서승환의 ‘3D 큐브 레이아웃’, 차수현의 ‘산책’,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 이 4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영숙의 ‘태풍주의보’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표현이 매끄러우나 시적인 시상의 새로움과 시적 표현의 참신성이 부족해서 제외되었다.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는 주제 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사유의 깊이를 전개해 내지 못해 최종심에 오르지 못했다.

 

서승환의 작품과 차수현의 작품 두 편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래 고심했다. 두 편 모두 표현의 참신성과 주제의 밀도가 장점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서승환의 ‘3D 큐브 레이아웃’은 어항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한 측면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우리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등 오랜 창작의 숙련 기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진 문장들이 흠이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차수현의 ‘산책’을 선택하는 데 합의했다. 차수현의 작품에서는 뛰어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산책하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쾌한 언어가 반대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말해주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잘 살아 있어 시의 주제 의식을 강화해 주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전환이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운문의 효과를 아주 잘 살려내고 있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친 듯한 작품의 완성도와 신인으로서 보여주는 참신한 패기가 모두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런 좋은 작품을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어 기쁘고 뿌듯하다.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 심사위원 : 황정산 평론가, 신미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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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양이 /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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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복잡·치열한 일상 불현듯 멈출때… 시와 함께 걸어갈 것

 

복잡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시간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불빛으로 가득 찬 제주의 도심을 지나 숲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세상의 이면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들판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의 들판에는 세찬 바람을 따라 풀들이 눕는 소리와, 낮게 울려 퍼지는 말들의 수군거림, 아득히 들려오는 습한 천둥소리만 가득합니다. 방패처럼 나를 감싸던 시야와 소리가 멀어지고 하루 종일 흘러넘치던 것들이 온전히 사라지는 그 시간, 거대하고 희미한 은하수의 흔적 사이로 먼 곳의 별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입니다.

 

밤눈에 덮인 겨울 산사의 오솔길에는 작은 돌부처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소복하게 눈 쌓인 동그란 어깨와 무릎 사이로, 빨간 산딸기 열매가 덩굴손을 꽉 쥐고 슬쩍 올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끝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삼나무 냄새와 낡은 전각을 감싸고 있는 지붕, 숲을 머금은 채 묵직하게 머무는 이끼의 흔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세상은 길의 끝자락을 쥐고 고요히 멈춰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시간을 따라 총총히 흩어진 것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을 외롭고 고요한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문을 열고 기꺼이 그 길로 이끌어 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 함께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며 지지하고 응원해 준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심사평]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 심사위원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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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 김현주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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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시 지치지 않고 온몸으로 쓰는 사람 될것

 

쓰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을 떠올리며 걸어왔습니다. 어둡고 희미한 그 길에서, 시는 폐허가 된 나를 낯선 세상으로 거리낌 없이 데려가 주고 때론 밑바닥의 경계까지 몰아붙이며 강렬한 어퍼컷를 날리곤 했습니다. 달콤쌉사름하고 중독적인 그 녹다운의 순간 뒤로, 숨겨진 심연 너머의 진짜 세상이 아른거립니다. 수없이 넘어지더라도 지치지 않고 일어나 걷겠습니다. 모든 순간의 시작과 끝을 똑바로 마주하며 온몸으로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경상일보와 심사위원님, 처음 시의 문을 열어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함께 걷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차가운 세파 속에서 늘 돌아가 머무를 곳이 되어주는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심사평]시소의 물리적 속성,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응모작이 투고됐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15명이 투고한 15편이었다. 이들 시편은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경험과 고도로 조직된 언어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찾아왔고, 결국 시상의 참신함과 작품의 완결성,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지속 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해 김현주씨의 ‘시소’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소’는 시소가 가지는 물리적 속성인 ‘올라감’과 ‘내려옴’이라는 순환성을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이다. 멀리 떠나지 못하고 높은 데를 향하는 시간과 낮고 얕은 곳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깊이가 높이로 전화되는 순간에 ‘당신’을 발견해가는 사랑의 서사가 아름답게 전해져온다. 시소를 둘러싼 역동적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면서 자신을 규율해온 시간과 불화하고 화해하는 교차점을 그려냈다고 판단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시소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남겼을 잔상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비교적 긴 호흡 속에 구성하는 만만찮은 비유적 능력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이라고 예감해본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시상과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에 더 빛나는 결과를 얻기를 기대해본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 심사위워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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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 권영유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파이

 

오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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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움튼 문학의 꿈, 더 크게 펼칠 것

 

어릴 적 노란 꽃만 보면 설렜던 적 있다. 그 느낌을 일기장에 적어가던 어느 날, 국어책에 나오는 시들을 필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때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끄적이며 막연한 문학의 꿈을 내 안에 심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심기만하고 잘 가꾸지를 못해서인지 아득한 세월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여름날, 김포의 아라뱃길을 걷다가 노란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더니 내 안으로 확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가 심었던 꿈을 다시 키우겠다고 김포문예대학을 덜컥 들어갔다. 처음은 뭔가가 될 것만 같아 신선했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왜 이리 잡초 같은 생각이 엉키는지, 포기하려다가도 겨우내 꽁꽁 언 땅에 움트는 싹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되살아나곤 했다. 가끔 이것도 시냐고 핀잔을 주는 남편도 사실은 꿈이 시인이었다며 힘이 돼주었다. 우리 엄마는 언제쯤 등단할까 농담하듯 약 올리던 아들 딸도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다정한 후원자였다. 많은 추억을 공유한 영선 언니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시꽃 향기로 다가온 문예대학 강사 시인들과, 세세하고 섬세하게 지도해주신 윤성택 시인께 감사드린다. 더 큰 꿈 틔워보라고 원대한 꿈을 달아준 심사위원님, 경남신문사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더 나은 희망의 꽃을 펼쳐야겠다.

 

 

 

 

[심사평] 참된 삶의 의미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 돋보여

 

한국 문학의 샛별이 될 신진 시인의 산실인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응모작품 편수가 지난해보다 늘었다. 시인 지망생이 늘었다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미학이 지닌 성찰적 인식을 수용해 삶의 가치를 북돋우려는 의식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 저변에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 열정을 담은 많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고무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전체 응모작에서 여덟 편의 작품을 가려낸 후 논의를 거쳐 ‘막판의 자세’, ‘창문 외전’, ‘퍼즐’, ‘레드문’ 등 네 편의 작품으로 축약해 숙고했다. ‘막판의 자세’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과 서사의 진행이 진지하면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표현이 평이했고, 의식 깊숙한 곳에 은폐된 문제를 사회성과 결부시켜 의미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창문 외전’은 비유를 통한 언어의 직조가 신선했고 시적 전개가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후반부에서 긴장감이 풀려 있었고 마무리가 미진했다. 좀 더 치밀하게 사유를 갈무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퍼즐’은 사고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주제의식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부한 표현들이 한계로 지적됐다.

 

‘레드문’은 일상적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시가 밀도를 더하면서 마침내 삶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의를 끄집어내는 상상력은 이 시를 견인하는 힘이다. 아쉬운 점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다소 거칠더라도 당대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첨예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논의와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레드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개기월식을 보면서 이를 숙련된 솜씨로 형상화해내는 자연스러운 시적 시선, 그리고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을 보여준 응모자의 시적 잠재력에 신뢰를 걸어보기로 했다. 더욱 정진해서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고대한다.

 

- 심사위원 성선경·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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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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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를 사랑했다.

시의 언저리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은 채.

베란다 빈 화분에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싹이 나고 줄기를 세우고 잎이 자랐다.

남천이었다.

폭염에도 혹한에도 끄떡없었다.

키를 높이며 푸른 그늘을 드리웠다.

남천이 오고, 씨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날마다 썼다.

시 쓰는 아침이 얼마나 황홀한지

아침을 기다리며 잠자리에 누웠다.

매일 그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사흘간 내린 눈이 하얗게 덮어버린 두타산 골짜기

작은 오두막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다.

와닿지 않은 현실에

조금 멍했고, 몹시 기뻤고, 전화를 끊고 나선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을까.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두려운 일이다.

 

부족한 제 시를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큰 격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과 사람과 삶이 다르지 않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파킨슨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집을 나서, 바닷가로 산속으로 모래 들판으로 유목민처럼 떠도는 나를 언제나 자유롭게 보내주고 맞아주는 남편에게, 늘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발랄한 두 딸 예인과 예지, 무심한 듯 다정한 아들 진우에게 감사합니다. 계속 시를 쓰도록 이끌어주신 이성미 선생님 고맙습니다. 은빛 머리카락 소년에게도 감사합니다.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의 편수도 역대급이었고.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오랜 수련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윤계순의 「계량」, 서희의 「침전의 방식」, 원미소의 「원룸」, 김송리의 「카블」,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 등이었다. 「계량」은 폐지 트럭의 무게를 재는 계량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삶의 고단함과 “헐값의 부피”를 그려낸 작품으로, 리얼한 현장성과 빈틈없는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침전의 방식」은 감자 전분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평생 고름 쏟던 마음을 치마폭에 담아/ 어레미로 감자 전분 내리던 어머니”와 가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제목처럼 잘 ‘침전’된 비유가 빛을 발했다. 「원룸」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있는 원룸”에서의 일상을 묘사하면서 관계와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카블」은 제목 그대로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블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전장 같은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숨가쁜 리듬과 강렬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최종에 오른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잘 짜인 작품이 주는 익숙함 때문에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였다. 이러한 활달함 속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나”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등의 구절을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장점들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어 최종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설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 심사위원 : 이문재·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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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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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정년 퇴임 후 새로운 도전, 큰 상에 감사”

 

내 어렸을 적 외가에서, 이른 봄이면 툇마루에서 햇볕을 안고 뒹굴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홍시 하나를 밥사발에 담고 숟가락을 꼽아 주시던 외할머니가 계셨다. 혀끝에 녹는 달콤함은 무어라 말할 수업이 황홀했고, 감나무 꼭대기에서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을 까치가 깍깍거리며 쪼아 먹고 있어 숟가락을 흔들며 깔깔대고 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곳에는 나비가 우화하듯 크고 멋진 현대식 건물이 버티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동강난 필름처럼 드문드문 어린 날의 추억이 스쳐 지나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빼앗긴 듯 허전하고 슬프다.

 

아마 지금도 그곳 어디엔가는 할머니 향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달큰한 냄새가 그립다.

 

전화가 온다. 낮선 번호다.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시가 당선 되었다고...

 

소녀시절엔 누구나처럼 문학소녀였고, 시집을 읽으며 괜히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메모지에 글을 낙서처럼 끄적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내 삶의 궤적에는 열심히 사는 직장인이었을 뿐이었다.

 

정년퇴임 후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자 펜을 잡았다.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큰 상을 준다니 그냥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늦깎이 걸음 뒤처질까봐 주시는 채찍이라 생각한다.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양일보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또, 당선을 함께 기뻐해 줄 모든 분들께 서릿발 속에서도 감도는 훈풍을 모아 보내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하시길...

 

 

 

[심사평]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보다 많은 작품(588)으로 늘어났지만 미숙하고 난무한 작품들이 많았다.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이 예년보다 떨어지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 김길중의 ‘컵라면’에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의 몸매와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짙은 어둠과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 정황을 엿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낡은 일기장에 작은 파편 같은 가을이 데려온 바람, 햇볕 냄새가, 툇마루 뒹굴던 추억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그리움으로. 찬바람 속의 허기와 장독대 항아리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아 먹던 시절의 외가의 추억들을 일떠세워. 사랑의 자취들을 속에서 읽어낸다.

 

가뭇없이 떠나가는 한 조각 속에서 무심의 공덕이라며, 해조음의 하늘만 본다. 여기서 해조음은 불타의 관음음으로 세월 속에서, 하냥은 함께의 방언으로. 무심의 삶속에 살아나고 있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이 돋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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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처럼 앉아 / 김석영

 

호박빛의 실내에서

나와 너는 가만히 앉아 휘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온도의 빛과 빛의 온도를

발음해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한낮의 호박과 호박빛의 환한 속내를

어둡게 들여다볼 것인지 궁금해진다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세 배쯤 커 보인다

색깔을 밀어내면서

향은 풀어지고 뒤섞인다

옅어진 물빛에 호박이 스며 있다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우리의 색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너는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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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영(41) 시인이 올해 ‘김수영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출판사 민음사는 제41회 김수영문학상에 김석영 시인의 ‘정물처럼 앉아’ 외 50편을 선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모든 시편이 고른 완성도를 유지하며 자아내는 긴장감이 눈에 띄었다”며 “시인의 치밀함과 인내심이 느껴졌다. 한 편의 시마다 스스로 던진 화두를 스스로 해결해 내는 매력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심사를 맡은 허연 시인은 심사평에서 “잘 조율된 한 악장의 음악 같다”고 했고,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어떤 단절과 함께 상황 속으로 이끄는 문장은 독자들을 시적 실재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고 평했다.

 

김 시인은 수상소감을 통해 “삶은 되감기 할 수 없지만 시는 여러 번 되감기 할 수 있는 허구이며 편집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유일한 즐거움”이라며 고다르가 말한 ‘두 번째 첫 번째’라는 표현을 인용, “앞으로도 계속 ‘n 번째 첫 번째 시집’을 내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밤의 영향권’이 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수상 시집은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 12월초 발행하는 문학잡지 ‘릿터’에서 수상작의 대표 시 4편을 우선 공개하며, 시인의 수상 소감과 심사위원의 심사평 전문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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