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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 /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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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

 

이 기쁨에 아득함이 있다. “‘볼트’는 어떻게 그곳까지 갈 수 있었을까.”

 

당선 소식 후 잠시 자리를 피해 줬던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날짜를 확인한다. 겨울이 느리게 가는구나. 일상은 왠지 사소한 일에도 조금 더 책임을 요구하는 것 같다. 무반주 첼로를 들으니 코끝에 저수지가 생기는 기분이다. 세계 안에서 파편인 나는 이제 새롭게 비행해야 한다. 상승과 하강의 난류(亂流)를 지나며 나는 시의 이름으로 호명될 것이다. 착빙하는 동체에 닿는 빛의 차가움은 문학의 신경인가. 고향을 떠난 모든 미사일에게 시를 읽어 주고 싶다.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전에 내게 자꾸 다른 일이 생긴다. 그럴 줄 알았어. 편지는 또 다른 이에게 가 버릴 거야. 그러면 나는 읽지 못한 편지의 말을 대신 써 나가도 좋겠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립습니다. 존경하는 극작가이신 아내 김성민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늘 저를 보호하고 삶과 문학을 위한 수공업적 자세를 길러 주셨습니다. 저는 문학과 예술의 동료로서 당신에게 속합니다. 외롭고 높게 인문 연극하는 극단 피오르에 감사드립니다. 서현과 진서에게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나의 변증법입니다. 예선을 거쳐 최종심까지 질식의 시간을 견뎌 준 ‘볼트’에게 감사합니다. 당선의 영광을 주신 서울신문에 감사드립니다. 아름답고 절실하고 성스러운 모국어에 감사합니다. 어쩌면 영원히,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는 오늘의 관습 앞에서 순결한 존재의 먼 얼굴을 회상한다.

 

 

[심사평] 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신해욱·오은·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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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벚 보살 / 이수진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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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 짓게 됐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돌이켜보면 ‘시인이 되거라’ 부모님 유언으로 인해, 경영학에서 문학의 길로 에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시를 시작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던 2016년, 그 심정을 모르는 남편과 아이들의 응원은 더 버겁기만 했다. 그때 지인이 박덕은 교수님을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늘 정체성에서의 물음표가 나를 괴롭혔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앞서곤 했다. 그때마다 교수님의 채찍이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방황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다잡아주려고 전국에 있는 사찰을 데리고 다녔다. 딸과 아들은 할 수 있다고 수시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 덕분에 마음 다잡고 새로운 시도를 꿈꿨다. 국어국문학과에서 기초부터 다지면서 학업과 동시에 시 창작에도 전념했다.

그러던 중 윤성택 시인이 비유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차근 차근 한 편 한 편 날선 자음 모음들이 둥글게 깎였고, 직관의 터를 고르고, 앙상한 언어에 살을 붙여갔다. 그러길 몇 년,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아들딸. 공부에 집중하라고 반찬마저 해서 보내준 언니들에게도 이 영광을 돌린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심과 신심에서 태어난 환희의 노래

불교신문 ‘2023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와 시조 작품들을 상세하게 읽었다. 시적 경향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작품들과 불자로서의 내면을 살피는 작품들이 많았다. 불교신문의 신춘문예가 불자 문인을 발굴하는 등용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 선정을 위해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탁발승’, ‘물의 집’, ‘청벚 보살’이었다. 시 ‘탁발승’은 “절 아래 마을”로 탁발을 떠나는 수행자의 여정을 순차적인 시간을 따라가며 노래했다. “염소의 부러진 뿔을 쓰다듬고/ 늙은 도요새의 남루를 여며주었네”라고 쓴 시행의 끝자락은 공양물을 받는 탁발의 일을 오히려 마을 대중에게 베푸는 일로 적음으로써 탁발의 궁극적 의미를 장엄하게 부각시켰다. 다만, 탁발을 나선 주체가 선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맹그로브 나무로 의인화함으로써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시 ‘물의 집’은 시상이 빛나는 대목이 많았다. “백무리 물고 웃는 함박꽃 환한 마당”이라고 쓴 시구에서는 흰색의 밝은 색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심우도 빛바랜 벽엔 홀로 깊어 부푸는 달”에서는 빛이 바랜, 시간이 쌓인 벽과 달이 내뿜는 그 신생의 빛이 대비를 이루는 동시에 쑥 들어가고 부드럽게 튀어나온 질감 또한 대조적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시적 화자가 있는 시공간이 현실의 시공간인지 상상의 시공간인지가 불분명했고, 절의 공간과 세속의 공간 또한 뒤섞여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고심 끝에 시 ‘청벚 보살’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시심이 매우 맑았고, 또 무엇보다 깊은 신심을 시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청벚나무를 시적 주체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곧 구도 수행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벚나무)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라고 써서 청벚나무가 개화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고, 깨달음을 향한 희원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거리감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라고 쓴 결구에서도 귀의와 경배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신심을 바탕으로 웅숭깊은 찬불의 시편들을 계속 보여주길 당부드린다.

- 심사위원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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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추억 /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내려진 그 극장 간판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나 달아야겠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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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의 멍석, 정다운 자리면 좋겠습니다

 

땡볕을 업고 이삭을 주울 때면 할머니는 되뇌셨습니다. 자갈밭이라도, 우리 땅에 농사 한번 짓겠다고. 꿈을 이루셨습니다. 철길 걷어낸 땅. 그야말로 자갈밭. 콩을 심어 콩이 떨어지면 자갈 속에 숨어 찾으려 자갈을 헤치면 더 밑으로 빠지고. 자갈을 거의 걷어내 땅이 제 모습을 보일 즈음...... 이후로 밭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밭에 뿌리지 못한 땀을 요행히 교단에 쏟게 되었습니다. 서른여섯 해. 창작과 감상보다 입시를 위한 수업. 점수를 얻으려고 쪼개고, 부풀리느라 스스로도 재미가 없는데 듣는 아이들은 오죽했을까요. 가끔 시를 써서 들려주었습니다. 밭에 못 뿌린 씨가 마음 밭 시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적에서 벗어나면 착한 아이가 됩니다. 쓴소리, 흰소리 없는 애독자들의 환호성. 약이 독이 되었죠. 지루함을 모면하려는 아이들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론서에 인용된 작품은 경이로웠죠. 짚으로 비단옷을 짤 수 없었습니다. 멍석이나 짜야 했습니다. 멍석말이나 안 당한다면, 발에 밟히든 쥐가 갉아먹든, 도란도란 둘러앉는 정다운 자리라면 좋겠습니다. 자갈 속에 빠진 콩알 하나 주우려고 자갈을 골라내었듯 걷어내고 빼려 합니다. 모양 없고 거친 멍석 한 장 펼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끝물인 사람에게 이런 큰 영광과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주시다니. ‘이런 걸 누가 본다고!’ 촌철살인을 아끼지 않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심사평] 기억 저편의 사물 포획 솜씨 돋보여

 

515명이 투고한 2140편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위원들은 자기표현으로서의 시가 인간학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도록 매우 다양한 삶에 처한 이들이 다채로운 시적 발화를 선보였다.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적 수행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하는 일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과업. 이 어쩔 수 없는 역할을 위하여 걸러낸 시편은 김미선의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외 3편, 박봉철의 ‘만개꽃’ 외 2편, 이도화의 ‘무심코’ 외 2편, 김수현의 ‘무한동화’ 외 2편, 이상록의 ‘추억의 극장’ 외 3편 등이었다. 참신한 감각과 포착, 재치 있는 사변, 환상의 표출, 내면의 환기 등을 그에 어울리는 시적 언어로 건져낸 시편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어디 내어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우선 동의하였다. 하지만 단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과 삶을 지각하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발화의 양상에 더 주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상록의 시편들을 남겼고 그 가운데 ‘극장의 추억’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극장의 추억’은 흑백영화처럼 낯선 추억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서정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어 다소 낡은 느낌조차 없지 않다. 그러함에도 구체적인 시어와 비유를 통하여 기억 저편의 사물을 감응하고 포획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획득한 점도 높이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구체에 육박하려는 태도의 성실함이 뚜렷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이를 계기로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구모룡 문학평론가, 성선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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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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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보고자 마음먹으면 티끌에도 우주가 보여

 

오늘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집 앞을 쓸어야 하지만, 저는 여전히 눈은 좋은 소식이라 생각해요. 투고하던 날에는 할머니가 꿈에 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좋은 징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징조들에 배신당한 적이 너무 많아, 그냥 내리는 눈을 구경하며 일이나 하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선이 된다면 멋진 말들을 늘어놓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저와 거리가 먼 것 같아 그냥 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태연해지면 좋을 텐데, 저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조바심을 내고 전전긍긍하며 보냈습니다. 간절히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풀숲을 들여다보고, 밤이 될 때까지 공원의 오리들을 지켜보고, 낯선 도시의 낯선 역에 내려서 헤매도 보고.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너무 간절한 꿈이었는데, 꼭 내가 되고 싶었지만, 또 꼭 나일 이유는 없어서. 그저 쓰고 또 썼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도 꿈이라 생각하며, 꿈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사이에 또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시를 쓰고, 시를 아는 척도 해보고. 이해하는 척도 해보고.

 

그러니까 시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보고자 마음먹으면 작은 티끌 하나에서도 우주가 보이고, 보고자 마음먹지 않으면 드넓은 우주에서 작은 티끌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게 시는 한 번도 쉽게 다가온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 다가오는 무언가, 제가 보는 무언가가 시라고 믿으며 계속 쓰겠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쓰면 그게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앞으로 어떤 시들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백자를 굽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쓰겠습니다. 제게 다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나희덕 선생님, 박형준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조만간 눈처럼 좋은 소식과 함께 연락하겠습니다. 다만, 소식을 전할 수 없는. 할머니, 아버지. 당신들이 내게 준 이름이 여기에 있어요.

 

 

 

[심사평]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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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 안시표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마을의 "다락쉼터" 옛 지명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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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무한 사랑 어머니 삶 새기며 시인 길 걸을 것"

 

초등학교 1학년 가을, 제주 시내에서 고내봉 오름 아래 낮게 펼쳐진 농어촌 마을로 전학 왔습니다. 매일 눈 뜨면 파도 소리에 마을은 분주히 움직이고 골목엔 어린 꼬마와 대문도 없는 집을 지켜내던 개들이 전부였던 시절. 그 사이를 빠져나온 나는 가끔 굽이진 해안 길을 걷다가 오래된 초등학교로 걸어가는 꿈을 꿉니다. 만지면 잡힐 듯한 선생님의 음성,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까르르 웃는 친구 얼굴, 하나하나가 그리운 연말입니다.

 

이 연말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걸 축하드립니다" 문자와 전화를 받고 떨리듯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나의 직업은 항만 공사의 건설사업관리 기술인입니다. 지금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제주 섬을 빠져나왔지만, 여기에서도 바다는 나를 껴안고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 막연하고 꿈틀거리는 기억들이 어느 날, 내 안을 헤집어 놓습니다. 멋도 모르면서 SNS에 낙서하며 무미건조했던 삶이 2년 전 뭍으로 나오면서 "이제는 낙서가 아닌 시를 써봐라" 용기를 주신 조성국 선배님 덕분에 진솔한 삶의 성찰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왜?, 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무한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 마음이 다 같은 시가 아닐까요? 어긋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신 삶, 그거 하나면 시인으로서 가는 길은 아름답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화상으로 '시와 문화' 시 창작 배움에서 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이고 명징한 이미지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정적인 관념의 틀에서 벗어난 시의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박몽구 선생님, 함축적 언어의 깊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선미 선생님, 그리고 시 창작 배움 여러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미숙한 시를 뽑아주신 무등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께도 시인으로서 용기를 갖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끝으로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감수성을 키워준 나의 고향 '고내리'와 사랑하는 가족들, 애월 초등학교 친구들 덕에 감히 시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쁩니다.

 

 

 

 

[심사평] "상상력의 참신성 초점…당선작 시의 미덕 돋보여"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정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의식으로부터 제법 사이 띄기가 된 것인지, 몇 해 동안 보이던 어둡고 우울한 감상성이 어느 정도 걷혀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아 반가웠다. 좋은 시는 능란한 기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과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통찰하는 자기 성실성에 의해 산출된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시가 언어를 몸체로 하는 한, 언어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자기 감상에 먼저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시, 그러면서도 상상력의 참신성과 가능성을 갖춘 좋은 시에 주목하였음을 밝혀둔다.

 

응모작 중 심사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시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 작품만을 당선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미향의 '속도의 풍장'은 버려진 자동차를 통해 인간 삶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데,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박행신의 '지워질 줄 알았다'는 어머니와 목기에 얽힌 서사적 모티프를 산문시형으로 구성하면서도 끝까지 서정적 긴장을 놓치지 않은 뚝심이 돋보였다. 최서정의 '풍경사(寺)'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정경들을 풍경의 사찰로 응시하는 독특한 상상력과 성찰의 언어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의 자리에는 안시표의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는 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소(沼)와 소(牛)의 동음이의어로 교직하고 있는 상상력의 확장성, 장소 체험으로 환기하는 그리움의 서정성, 소환된 기억을 늪에 사는 생물들로 구체화시키는 예민한 감각, 한 편의 시를 마치 언어로 그린 수채화처럼 보여주는 이미지의 선명성 등이 그것이다. 표현이 난삽해지거나 의미에의 집착을 범할 수 있는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으로서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또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김동근 문학평론가·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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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에 든 사람 / 박장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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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를 등질 수밖에 없던 때…시를 통해 숨 쉴 수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났다. 아버지는 엄마를 버리는 대신 육지를 등졌다. 제주로 향하는 밤. 엄마는 처음 프러포즈를 받았다. 정 살 길이 없으면 돌아오는 배에서 뛰어내리자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그렇게 손가락을 걸었다. 섬 사람들은 간첩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곳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고 감자를 고구마라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안태를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나를 등질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다. 이내 시가 보였다. 시를 읽으면 숨이 잘 쉬어졌다. 시만 읽었다. 쓰고 싶은 마음은 자동문처럼 열렸다.

 

이 마음을 잘 받아주신 김기연 선생님. 방향을 잡아 주신 이영주 선생님. 따뜻하고 단단하게 매어주신 하재연 선생님. 텐션을 올려 주신 손미 선생님. 선생님들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함께 시를 공부했던 모든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작당」 「작정」 「무작정」 「작약동맹」 「닥치는대로」 여러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희영, 연정, 오래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그리운 갑수 씨, 춘자 여사, 병해, 병욱 사랑합니다. 나의 산타! 준! 윤! 당신들은 나의 전부입니다.

 

고 서정호 님께 늦은 소식 전합니다. 포기하지 말란 말씀 꼭 쥐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심사평] 시적 상황을 다층적 구성…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 포착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평이한 감각에 머물거나 시적 긴장을 견인하는 힘이 부족한 작품들이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축한 절제의 미학과 시어의 갱신을 이루어낸 작품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재독과 윤독을 거쳐 5편으로 압축한 뒤 다시 3분의 작품을 두고 최종적으로 깊은 논의를 거쳤다.

 

박이음의 시는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툭툭 끊기는 질문과 대화들 속에는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담겨 있었다. 내밀한 고백과 연계된 낯선 이미지가 감정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적 대상의 관계와 상황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아 시적 주체의 사유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주제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능력도 좋고, 시의 도입부를 도발적인 진술이나 감각적인 묘사로 제시하여 흡인력 또한 있었으나, 환상적인 상황 설정이 혼돈스러운 시적 전개와 맞물려 의미를 잡기 어려웠고 흐릿한 환상으로 처리된 종결부에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면이 아쉬웠다.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편차가 있다는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선민의 시는 새로운 발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중심에서 이탈되거나 인식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낯선 사유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정해진 중심과 질서가 포섭하지 않는/ 못하는 주변의 것들, 중간과 평균으로 재단된 것들 너머를 지향하는 이미지들이 교직되면서 주제로 응집되어 시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상력의 폭이 예상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고, 관념적인 진술이 사유의 깊이를 동반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동어반복에 그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투고된 작품들이 엇비슷한 시적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목소리도 일정해 단조로운 인상을 받았다. 시적 대상과 현실의 고통이 맞닿는 자리를 섬세하게 잇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박장(본명 박미영)의 시는 언어의 내포와 외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 역전된 현실에 대한 감각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있었다. 시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형식적 실험과 세계 내의 상징적 폭력에 따른 고통이 핍진하게 담겨 있었다. 일상적 상황과 사건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시적 상상이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행한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해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박스에 든 사람'은 자본주의의 상품 체계에 종속된 삶, 비굴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존재가 지워지는 현실이 아버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삶의 힘겨움과 겹쳐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간명한 상황 전개가 주는 시적 긴장, 안과 밖을 역전시키는 상상력, 언어의 굴곡과 뒤틀림을 통해 찢어지고 뜯어지고 구겨진 삶의 맨살이 드러난다. 주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지워진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이 신인의 단단한 내공이 앞날의 시작(詩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문태준, 손진은, 신철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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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원 /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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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의 힘으로 제법 살아가더니… 이젠 詩를 놓을 수 없게 됐다

 

승섭이는 초록색의 시를 쓰는 것 같다고. 너의 시를 읽으면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고. 너의 시를 읽고 오래도록 울었다고. 잔잔하고 고요한 산들바람을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 말들이 가장 먼저 맴돕니다. 시의 힘은 때때로 말의 힘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보드라운 흙 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는 씨앗의 힘과 같습니다. 너무 섬세하면 예민해지는 구석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한 번 힘을 내면 높이 자라고 깊이 뿌리 내립니다. 그래서 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이 제법 좋습니다. 겁도 많고, 자주 불안해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시를 통해 일종의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기에 시는 제게 놓을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어린나무의 그늘 아래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를 읽고 쓰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셨던 박경아 선생님, 시를 공부하는 첫 번째 길에 계셨던 배은별 선생님, 늘 따뜻한 마음으로 시를 이끌어 주셨던 이지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의 개성을 발견해 주시고 믿음을 주셨던 김경후 교수님, 앞으로도 계속 시를 써나가 보라고 말씀해 주신 남진우 교수님, 많이 칭찬해 주시고 얼마 전까지도 꼭 시인이 되라고 말씀해 주셨던 이영주 교수님, 섬세하게 시들을 봐주시고 저보다도 당선을 기뻐해 주셨던 천수호 교수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굴림, 느루, 절정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C파트, A파트, B파트를 함께했던 시 전공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를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아가라고 불러주는 두 분께도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체험의 일단’을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 뛰어나

 

올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감상문과 같은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소재를 취하고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변용과 깊은 사유의 맛이 결여된 감상은 넋두리와 소품에 그칠 뿐이다. 구성이 승했던 때에 작위가 문제였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진술은 절제와 엄밀함을 통해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적 문장의 힘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경구를 떠올리며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음을 덧붙여 본다.

 

‘히에로글리프’는 미술관에서의 감상을 시공을 넘나드는 사유로 확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후반부 이후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에서 길어온 잔잔한 사유가 매력적이지만 마지막 대목에 있는 다소 이질적인 논평자적 마무리가 사족이 되고 말았다.

 

‘묘목원’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고려함과 동시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한 작품을 내밀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과장과 작위가 없이 단정한 문장을 통해 체험의 일단을 문제적인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에서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게 하는 시적 구성도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 심사위원 :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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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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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정년 퇴임 후 새로운 도전, 큰 상에 감사”

 

내 어렸을 적 외가에서, 이른 봄이면 툇마루에서 햇볕을 안고 뒹굴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홍시 하나를 밥사발에 담고 숟가락을 꼽아 주시던 외할머니가 계셨다. 혀끝에 녹는 달콤함은 무어라 말할 수업이 황홀했고, 감나무 꼭대기에서는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을 까치가 깍깍거리며 쪼아 먹고 있어 숟가락을 흔들며 깔깔대고 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곳에는 나비가 우화하듯 크고 멋진 현대식 건물이 버티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동강난 필름처럼 드문드문 어린 날의 추억이 스쳐 지나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빼앗긴 듯 허전하고 슬프다.

 

아마 지금도 그곳 어디엔가는 할머니 향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달큰한 냄새가 그립다.

 

전화가 온다. 낮선 번호다.

 

상냥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시가 당선 되었다고...

 

소녀시절엔 누구나처럼 문학소녀였고, 시집을 읽으며 괜히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메모지에 글을 낙서처럼 끄적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후 내 삶의 궤적에는 열심히 사는 직장인이었을 뿐이었다.

 

정년퇴임 후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자 펜을 잡았다.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큰 상을 준다니 그냥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늦깎이 걸음 뒤처질까봐 주시는 채찍이라 생각한다.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양일보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또, 당선을 함께 기뻐해 줄 모든 분들께 서릿발 속에서도 감도는 훈풍을 모아 보내드립니다.

 

모두가 행복하시길...

 

 

 

[심사평]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응모작은 전보다 많은 작품(588)으로 늘어났지만 미숙하고 난무한 작품들이 많았다.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이 예년보다 떨어지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 김길중의 ‘컵라면’에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의 몸매와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짙은 어둠과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 정황을 엿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낡은 일기장에 작은 파편 같은 가을이 데려온 바람, 햇볕 냄새가, 툇마루 뒹굴던 추억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그리움으로. 찬바람 속의 허기와 장독대 항아리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아 먹던 시절의 외가의 추억들을 일떠세워. 사랑의 자취들을 속에서 읽어낸다.

 

가뭇없이 떠나가는 한 조각 속에서 무심의 공덕이라며, 해조음의 하늘만 본다. 여기서 해조음은 불타의 관음음으로 세월 속에서, 하냥은 함께의 방언으로. 무심의 삶속에 살아나고 있다.

 

윤연옥의 ‘외갓집’에서 근원적 삶의 신실한 성찰력이 돋보인다. 윤연옥의 ‘외갓집’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정연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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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째 /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거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 나간 지도

구 일째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 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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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낌없는 조언으로 이끌어준 스승·문우들에 감사”

 

흔들렸습니다. 하늘에서 땅속 뿌리까지. 흔들리면 오는가 봅니다. 사랑도 따뜻함도 눈짓도 첫눈도 그리고 휴대전화?. 소백산 아래 영주 고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무섬의 외나무다리가 흔들렸습니다. 뜨거웠습니다. 잠깐의 순간이 나를 녹여 땅속으로 흘러 뿌리를 찾아 엄마를 불렀습니다. 가장 추운 날 가장 뜨거운 맛을 보며 어느 시인의 시처럼 우물의 뚜껑이 닫히듯 눈을 감았습니다.

 

시조만 고집했던 저는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쓰게 됐습니다. 김기택 교수님의 강의에 매료돼 시를 접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 시를 만지고 먹고 보고 듣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넓은 사막의 모래바람과 맞서는 길 위에서 앞으로 가지도 뒤돌아서지도 못할 때 제 손을 잡아 이끌어주신 이돈형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께 시를 흠뻑 패주던 시 깡패 문우들 고맙습니다. 제 시가 문우들에게 두들겨 맞아 조금은 말랑말랑해지나 봅니다. 지난여름이 이 겨울보다 더 뜨거운 건 내일이 있기 때문이겠죠? 늘 많은 조언으로 저를 이끌어준 김분홍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준 제 식구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영주지부 회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끝으로 제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신 나희덕·장석남 심사위원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고 공부하며 쓰겠습니다.

 

 

 

[심사평] 감정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새로운 시공 ‘매혹적’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 심사위원 : 장석남 시인,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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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의 긍정 / 오후랑

 

 

나의 낮은 열두 시간 더하기 열두 시간 꺼지지 않는 낮은 좀 우울 했어요 내 표정을 보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므로 그건 예외이고요

 

그래요 꽃 말고도 내게 향해줄 것을 찾다가 지난밤을 밤이 아닌 것처럼 꼴딱 샌 거죠 불어터진 라면발 같이 풀어진 졸음과 갓 삶은 계란처럼 뜨거운 열정이 마구 섞여 골라낼 이유 없는 은밀한 밤의 계단을 지나면

 

요란한 풀밭이 나와요 나는 투명 수채화처럼 색칠됐고요 겨드랑이가 부서질 듯이 날아봤어요 거친 붓칠 같은 숨결들이 빙빙 돌며 나의 길을 더 어지러이 파닥이게 하는 그런 일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가령 별이라든가 주머니라든가 물론 작명소에 들러야죠 아핫 아버지 아시면

 

날갯죽지 확 꺾어 버리고 호적 파버린다 하실 텐데

 

괜찮아요 이미 얼굴을 다 잊어버린 이름들과 꽃 같은 조명 밑에 납작 엎드려 본 것이나 나선으로 머리를 흔들어대며 다 드러난 나를 외워댔던 일이나 또 너무 멀어 다시 올 리 없는 환각의 벽에 아주 시원하게 박치기를 해봐서

 

무서운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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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내가 쓴 시, 다른 사람이 읽어도 시가 맞는지 궁금”

 

폭설주의보가 내렸고 저는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노트북 화면이 하얗고 고개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이 하얗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도 하얘서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환함이 도처에 깔려있네요.

 

어둠을 무서워합니다. 어둠이 무서워 불을 환히 켜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건물 밖 나트륨 등 아래에 앉아 잠시 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회사 뒤에 숲이 있었는데 숲에 사는 것들이 밤마다 불빛 아래 모이곤 하였습니다. 혼자가 아니구나. 혼자가 아님에 위로 받는 것으로 어둠을 지우고 싶어서 잠을 잘 때도 불을 켜고 잤습니다. 참 이기적이지요. 나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아닌 것들을 소모시켰던 겁니다.

 

시를 읽고 싶어서 내가 읽는 시를 제대로 읽는지 알고 싶어서 자꾸만 시를 읽었습니다. 시를 읽다보니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쓰긴 했는데 내가 쓴 시를 남들이 읽어도 시가 맞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선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시가 완성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시가 될법한 지점에 있는 것을 뽑아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도망가는 시를 붙잡지 못할 때가 많은데, 더 써보라고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능성을 봐주셔서 기쁩니다.

 

묵묵히 지지해준 경석, 바하 그리고 성미자, 김안심 여사님 사랑합니다. 격려해주고 열심히 읽어준 니건, 은실, 지선 그리고 오총사 사랑해. 고맙습니다.

 

 

 

 

[심사평] “참신한 발상 안정적으로 끌어가는 솜씨 일품”

 

본심에 올라온 일곱 분의 작품에서 먼저 네 분의 작품을 가려 뽑았다. 김태춘의 시는 빛나는 문장이 있었다. “자고나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거야/바보 같은 바나나가 범인이라니” 같은 구절은 낯설고 참신하다. 오후랑의 시는 참신한 발상을 끌어가는 솜씨가 일품이었으며 언어유희나 은유와 상징 사용에도 능했다.

 

이은정은 어떤 것이 시가 되는지는 알고 있다. 특히 ‘낙하’에서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한꺼번에 실려 온 걸음 같아/난간에 부딪히는 발소리”로 표현한 대목이 좋았다. 김혜윰의 시는 특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손을 놓친 듯/나의 목소리는 끝까지 잠기고 있습니다” 같은 구절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 중 두 사람으로 선택지를 줄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은정은 어떤 발견과 인식이 자기만의 개성에 이르지 못했다. 반전이나 재해석 없는 나열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김혜윰의 시는 이미지나 진술들이 파편화 되었다는 점이 약점이었고, 시상을 끝까지 전개해 가는 힘이 약했다.

 

김태춘은 시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고, 시적 감수성이 좋았다. 다만 “대상 없는 저주가 술병에 쌓이고 우리는 불판 위에서 자폭 한다” 같은 문장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웠고, “먼지 자욱한 광고가 끌고 가는 늘어진 시간” 같은 경우에도 관념을 사물화 한 점은 좋았으나, ‘광고가 끌고’에서 ‘끌고’에 의문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문장의 옥석을 가려 더 밀도 높은 시를 써낸다면,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후랑의 ‘나방의 긍정’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어떤 작품을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이 골랐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특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같은 엉뚱해 보이는 진술이 시적 일관성 속에서 살아있다는 게 돋보였다.

 

- 심사위원 : 이대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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