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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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길을 잃고 무작정 걷던 내 발자국을 확인한 순간
도쿄에 도착한 첫날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서툰 언어로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을 실천할 손짓, 발짓은 또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다행히 출발 전, 사진으로 보았던 건물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걷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첫눈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을 잃은 걱정보다 첫눈에 설레었던 마음이 더 오래 남은 것 같습니다. 시 쓰는 일을 잠시 접어두면서 선택한 도쿄행이었습니다. 나쁜 버릇 중에 하나는 그게 무엇이든 생각이 깊어지면 무작정 선부터 긋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서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어요. 작은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족이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다시 글을 쓰게 된 결심은 생각나지 않아요. 그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온 거 같아요. 시를 쓰는 건 잃어버린 길처럼 모르겠으면서도, 그러나 기어이 찾아가야 하는 곳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당선 소식을 들은 이 순간이 그날의 첫눈 같다면 다행히도 헤맨 내 발자국을 내가 확인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감사한 얼굴들이 많이 생각나는데, 이렇게 이름을 불러도 되는 건지 고민되었어요. 조금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이렇게나마 표현해봅니다. 먼저 아빠, 엄마 저에게 먼 곳을 가르쳐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박시연, 나의 아토씨와 함께 기쁨을 나눌게요.
남진우 교수님, 박상수 교수님, 천수호 교수님, 편혜영 교수님 저를 지도해주신 모든 명지대학교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곁을 함께해주는 우리 지원이랑 지은이 항상 고마워. 미쿠야 고마워. 그리고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를 숙입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 심사위원 김행숙, 황인숙, 이경수,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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