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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나비 판화 / 최영희

 

 

요양병원 치매 병동의 노인들은

일어나면 끌을 가지고 저마다 뭔가를 새긴다

삐꺽거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혀끝에서 사라진 말을 곰곰이 떠올린다

양각으로 드러나는 동그라미 얼굴

조각조각 파내면

초록 비린내를 풍기는 눈동자

병실 밖 세상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한 마리 날갯짓이 방향을 잃는다

끌로 깊이 그어낸 네모난 집

풍경을 잘못 도려내 사라진 어린 시절

난해한 지도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닫힌 출구에서 문고리만 덜컹거린다

어둠이 깃들어 기억할 순 없어도

바람의 문신을 채워 날개를 그린다

균형이 맞지 않아 한쪽으로만 기우는 기억

물감 자국만 남아있을 뿐

지워진 그림자는 볕으로도 찍을 수 없어

꽃이 피지 않는 그림은 미완성이다

날카로운 끌로 파내기를 반복해도

좌우가 뒤섞인 노인의 오늘은

판화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한다

 

 

올해 20회를 맞는 김포문학상의 대상에 소설부문 박하성(경북 김천)씨의 <떠도는 섬들>이 선정됐다.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회장 송병호)와 의)우리의료재단 김포우리병원(이사장 고성백)이 함께하는 제20회 김포문학상 전국공모에 전국의 신인 작가 및 문인들이 응모해, 예심과 본심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김포 문학상 및 신인상 부문별 선정 결과가 나왔다. 김포문학상은 올해로 20회째로 회가 거듭할수록 응모율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으로, 현재 총 상금은 1,500만원이다.

올해 김포문학상의 우수상에는 시 부문 최영희(서울 금천)씨의 <나비 판화 외4편>과 시조부문 이숙자(경기 파주)씨의 <바리스타 카페 외4편>이, 수필부문 수상작품은 고옥란(광주광역시 광산)씨의 <덤 외 1편>등 총 4명이 선정됐다.

한편, 김포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김포문학 신인상에는 장년부 수필부문 문승운(운양동)씨의 <우리의 딸들 외1편>과 장년부 시부문 김옥란(고촌읍)씨의 , 청년부 시부문 홍지은(풍무동)씨의 <3초 외 4편>등 총 3명이 선정됐다.

이번에 본심 소설과 수필 부문을 심사한 백시종 소설가는 심사평을 통해 "본심에서 올라온 수십 편의 글들이 모두 아쉽고 안타까웠다. 작품의 완성도와 범상치 않은 문체, 잘 짜여진 스토리 등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낸 존재의 의미와 자유로운 영혼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시 부문을 심사한 허형만 전 목포대교수는 "탄탄한 시적 사유와 따뜻한 시선으로 본심에 올라온 시들이 각기 실존적 삶의 의미와 깊은 사유를 드러내고 있었다"라고 전하며, 심사를 하면서 전반적으로 느낀 소감으로 "요즘 시를 왜 어렵게만 쓰려고 하는지, 독자와의 원활한 소통은 물론 작품을 통해 내면적 삶을 성찰하게 하고 따뜻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고 전했다.

한편, 김포문학상 시상식은 2021.12.4.(토) 오후 ‘2021 김포문인협회 송년의 밤’에 앞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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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소쇄원에서 쓰는 간찰(簡札) / 김나비

 

 

[우수상] 오동의 향기 / 강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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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당선소감] 아픈 이들 보듬는 따뜻한 시 쓰겠다

 

시클라멘 화분에 영희 씨 젖꼭지만한 붉은 망울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꽃을 터트리기 전 베란다에서 햇살을 즐긴다는 그녀, 피고 지면 또 다른 꽃대가 올라온다 했습니다.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을 때가 여름이라고 했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요” 라는 말에 물기 어린 글을 썼다 지우고 다시 또 쓰고….

오늘, 꽃이 피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첫눈이 내리는 퇴근길이었지요. 한겨울에 이토록 화사한 꽃을 피우다니…. 올해를 넘기지 않아 다행입니다. 눈발이 바로 땅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부유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들도 심장이 뛰는구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운전을 멈춰야 했습니다. 눈의 방향을 따라 걸었습니다. 큰길의 환한 불빛을 의지한 골목은 차갑고 희미했지요. 내 시작의 지향점과 닮아 있습니다. 삶의 무게를 시의 무게로 받아들일 때까지 겸허한 자세로 정진하겠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아프고 힘든 이들을 보듬어 주는 따뜻한 시를 쓰겠습니다. 그런 글들이 모여 내 자신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기쁨에 가장 빨리 전염된 나의 영희 씨, 연수와 지연이 사랑해. 그동안 응원해 줘서 고마워.

시의 첫 걸음을 올곧게 일깨워 준 강희안 교수님, 인문학 강의로 시적 사유를 확장 시켜 준 소설가 연용흠 교수님, 좌절과 절망으로 방황할 때마다 시의 연을 단단하게 붙잡아 준 이돈형 시인님, 시의 길에서 만난 수레바퀴문학회와 시깡패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제게 따뜻한 손 내밀어 주신 강대선 심사위원님과 전남매일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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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고통받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

 

책상 위에 쌓인 응모작을 읽었다. 정성을 다해 보내온 시들이라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코로나19 시대에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고독과 우울한 내면을 다룬 시가 많았고 가족 서사와 함께 일상을 소재로 한 시들도 적지 않았다. 사유의 깊이를 언어로 형상화한 시에 먼저 눈이 갔다.

그중에 ‘뒷모습’, ‘여우야 여우야’, ‘미역국’ 등이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뒷모습’은 시장의 노파를 새우로 비유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어시장에서 노파의 삶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좋았으나 너무 쉽게 풀린 부분이 있고 함께 제출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움을 주었다.

‘여우야 여우야’는 코로나19로 격리된 상황을 동요로 표현한 발상이 신선했다. 하지만 몇몇 시어들이 전체적인 시적 긴장감을 반감시켜 작품을 선정하는 데 망설이게 했다.

‘미역국’은 아기를 잃은 ‘아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함께하는 지점에 마음이 갔다. 코로나19 시대에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울림이 컸다. 나머지 작품의 수준이 고른 점도 신뢰를 주었다. 축하드린다. 깊은 울림을 주는 참신한 서정성을 기대한다. 당선되지 못한 분들도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강대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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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가마리 포구 / 박병란

 

[가작] 모슬포에선 못 쓸 것은 없다 / 김성배

 

 

 

[심사평]

 

5회 서귀포 문학작품 공모 시부문에 응모한 작품 편수는 359편이었다. 응모 편수만 놓고 보더라도 서귀포 문학작품 전국공모가 전국의 수많은 문인들로부터 관심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부문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블라인드 처리된 응모작들을 돌려 읽은 뒤, 각자 간추린 작품을 다시 논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사평에 먼저 알려드려야 할 사항은 무엇보다 서귀포 문학상의 심사 방향이다. 이것은 문학상 공고란에 명시된 공모 주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명시된 공모 주제는 서귀포시의 삶, 역사, 자연, 문화, 사람, 전설, 신화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내용들은 소재로 분류될만한 성격의 것들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공지된 주제 내용이 심사의 방향일 수밖에 없음을 전제해야 한다. 이로써 서귀포 문학상의 취지가 선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응모 작품들은 대부분 서귀포 관련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소재를 취하고 형상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것들에 육화되지 못한 채 나열과 이미지 설명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소재로써 체화된 단어들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거나, 잘 알려진 서귀포의 이미지 포장에 활용된 아쉬움이 컸다.

 

반면, 일상의 육화가 이루어진 작품들은 그 내용이 서귀포로 이어지는 연계고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굳이 서귀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납득되는 삶과 사람이 작품에 드러났다. 실제 작품 속에서 타지역의 지명이 혼용되는 사례도 있었다. 무난한 작품성의 성취를 보여주지만 심사 방향과는 다소 거리 있는 작품들도 아쉽지만 최종심에서 제외되었다.

 

논의를 거쳐 압축된 두 작품은 가마리 포구’, ‘모슬포에선 못 쓸 것은 없다였다. 두 작품 모두 서귀포라는 소재의 형상화를 무리 없이 잘 거쳤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전자의 경우, 그것이 서귀포라는 상징성을 잘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후자의 경우에는 작위적인 연결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누가 봐도 맨도롱 호게따위의 수사는 억지로 채집한 소재라는 게 자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논의된 장단점을 고려하여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을 각각 가작으로 선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이뤘다.

 

가작 당선자들께 축하를 보낸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당선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성취도를 보여준 여러 응모자분들께도 심심한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나기철,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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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스모루, 새들의 집 / 김신숙

 

 

새는 날아가지

날아가다 언젠가는 구름이 되지

스모루라는 새는, 스모루라는 구름은

바다부터 가파르니 날갯짓이 비탈지다

아버지가 소작하던 귤밭있던 자리는

지금은 붉은 열매가

아파트 불빛으로 익어가고

오랜 세월 망보던 자리에 둥지를 튼

아버지, 아버지라는 새

연대 아래로 트럭 흐르는 소리

일 끝난 아버지 손 씻는 소리

가파른 땅은 등 굽어 걸어야 겨우

발자국 소리 별빛으로 비틀거리며

날 수 있을까

술 취한 사내가 휘청거린

망팟으로 내려가는 길

빈 주머니는 가파른 구름으로 환생하고

스모루라는 이름으로 숨이 마르고

아버지는 먼저 하늘로 날아갔다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며

새들의 말을 듣는 연습이 필요하고,

뿔소라의 말을 건져올리며

젖어서 날 선 마들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엔

새도 보이지 않는다

그 텅 빈 날개,

숨 마르는 경계

스모루가 날아오른다

 

 

 

 

 

[가작] 마라도의 꿈 / 김선호


 

 

 

 

[심사평] 서귀포의 매력을 시적 감동으로 채워줄 작품을 기다리며

 

올해로 제4회째를 맞는 ‘서귀포 문학작품상’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 수는 모두 504편이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첫 회부터 어떤 정보도 개입되지 않은 블라인드 심사로 진행되었으며,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린다.

 

이번 응모 작품의 경향을 살펴봤을 때 삶의 이야기를 시에 녹여내려 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삶의 고단함과 서귀포의 전설, 서귀포의 상징성을 나타내려고 애쓴 작품들이 눈에 띄어서 작품을 읽는 맛이 났다. 잊고 있던 서귀포라는 이름을 꺼내어 불러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삶의 경험이나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쓴다는 것은 관념성이나 추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 경우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직접 경험일 경우에도 ‘시’가 갖는 함축과 비유, 상징으로 이야기를 녹여내지 못하면 날것으로 남아 일기나 산문처럼 흐르기 쉽다. 아쉽게도 그런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서귀포’라는 지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스러운 수사법을 동원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결국 ‘시’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서귀포적이면서 시적인 응집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스모루, 새들의 집’과 ‘마라도의 꿈’ 그리고 ‘무태장어*의 편지’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고심하였다. ‘스모루, 새들의 집’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지명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스모루’라는 제주의 지명을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참신함과 그것을 통해 ‘아버지와 새’라는 이미지를 끌어낸 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서귀포문학작품상’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주제나 표현에 있어 다소 미숙하고 가벼워 보였다.

 

‘마라도의 꿈’은 마라도의 이미지를 내면화하여 표현하는 데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문장들이 자기감정에 몰입한 나머지 주제에서는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마라도의 꿈’이 보이지 않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당선작으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무태장어*의 편지’는 서귀포라는 지명의 특색을 잘 살린 작품이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담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비슷한 의미의 문장들로 긴장을 놓쳐버리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쩔 수 없이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시적 표현에 있어서 끌리는 작품도 더러 있었지만 형식만 있거나 이미지만 있거나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서귀포문학작품상>에 부합하는 이렇다 할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고심에 고심을 했지만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가작에 그치게 되어 매우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서귀포의 매력을 담은 감동적인 작품들이 줄줄 나오길 기대하며 여기서 마친다.

 

심사위원 오승철 유홍준 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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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박재삼문학상 수상자에 복효근 시인 - 뉴스사천

[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제9회 박재삼문학상 수상자로 복효근 시인이 선정됐다. 박재삼문학상운영위원회(위원장 정삼조)는 2022년 박재삼문학상 본심 심사결과, 복효근 시인의 (현대시학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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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박재삼문학상 이병률 시인 수상 - 뉴스사천

[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제8회 박재삼문학상 시상식이 10일 오후 3시 박재삼문학관 다목적실에서 열렸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해 별도의 부대행사 없이 문학상 시상식과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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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외 6/ 변윤제

 

 

가만히 멈춰라.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동호회.

 

가만히 멈추는 건 무엇인가요 멈추는 것과 가만히 멈춤은 무슨 차이일까요.

먼지떨이를 쓸어내리며 생각했습니다.

수백 갈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했습니다. 먼지떨이로 사람을 때리면 회초리가 되고요. 먼지떨이로 반찬을 집으면 젓가락이 되는데.

가만히 멈추면 가만히가 무엇이 되지요?

 

요를 펴면서도 생각했어요.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쥐는 사람아. 김밥 놀이를 시키며 내 숨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아. 어머나.

오이의 기분은 희박하구나? 그래서 안쪽이 창백하구나.

 

그대여.

내게 가만히를 명령한 그대야말로 가만히의 명수.

타르트를 파는 저 세탁소를 보아요.

가루가 떨어져요. 옷걸이엔 밀가루 포대가 잔뜩 걸려 있답니다. 세제 대신 흰 가루 쏟아지고.

 

왜 우리는 항상 가는 곳만 가야 하나요?

이 세탁소에 온 손님은 아무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새하얀 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만이 매일 저 세탁소에 옷을 맡겨요. 검고 푸른 옷마저 희게 만드는 저 세탁소를.

완벽한 하얀색을.

가만히는 그렇게 꾸준한 일. 늘 하는 것을 늘상 반복하는 일. 그런데 제게도 가만히라니요?

 

가만히를 일생 기르면서 가만히를 가만히 가르치는 당신.

제자리에 멈춰 돌아가는 세탁기 군단.

 

진정한 의미의 세탁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었고.

당신이 찾아온 옷가지는 타르트가 되었고. 포도 향이 나고. 어떨 땐 빳빳한 쿠키의 감촉이 제 목젖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

그 말이 제 유년을 하얗게 탈색하는데.

발버둥.

토악질. 새하얀 구토물의 겨울. 가만히 동호회가 발버둥으로 완성되고야 마는데.

 

가만히에게 편지를 씁니다.

가만히야.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가만히 부르는 순간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떨어져나가고.

제 털을 가만히 기르고 있던 먼지떨이가 부서져버리고.

벽에 가만히 스며들고 있던 내 등이 내 척추에서 떨어져나가서.

사방이 저로 가득한.

동호회라기보다는 가만히 의회에 가까워집니다. 가만히로 구성된 제국일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비명에 대해.

가만히 나라의 폭군으로서 명령합니다.

 

꺼져.

가만히 꺼져.

세상 모두가 일제히 발버둥친다면, 진정한 가만히가 완성되는 것?

 

시속 칠백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가만히 국민들.

도저히.

도저히.

결정적으로 나는 가만히 있게 되는 겁니다.

 

코끼리가 없는 코끼리 유치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코끼리가 들어오는 순간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무엇을 동경했는지.

육중한 네 다리와.

유치원을 기둥째 뿌리 뽑는 압도적인 코.

우리 귀여움이 바라왔던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힘.

 

그대여.

가만히 멈추라고요?

가만히야.

나는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습니다.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릅니다.

, 가만히.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가만히 동호회.

 

 

 

 

최류자들

 

 

인도에서 온 아디타

 

냉장고에 넣은 여권은 기한이 줄어들지 않는다 믿는다. 아디타의 여권은 늘 차가운 곳에 케밥을 파는 그는 자신을 터키 사람이라 소개한다. 며칠째 팔리지 않는 양고기에 기름을 덧바르면서. 화전하는 걸 보면서.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건 편지. 수증기가 올라오자 종이 접히는 소리. 당신 불법으로 온 거 맞잖아. 유통기한 지난 거라고. 배탈이 났다는 남자가 아디타의 뺨을 갈겼다. 두어 번 더 후려갈겼다. 노래를 부르며 양고기에 기름을 바르는 아디타. 기름기름. 고기고기.

 

안부의 나라

 

손님이 정말 많은 시장이었대요. 아무도 없어요. 어떤 날엔 제 가게에만 비가 내려요. 일인용 먹구름, 일인용 우울, 일인용 불법 체류, 일인용 범법자.

단 한 명도 앉힐 수 없는 비좁은 가게. 흰 앞치마를 입고 행주를 위로했어요. 돼지고기 전단지를 위로했고. 뚝뚝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위로했고. 위로를 위로했습니다.

제가 부친 돈은 잘 갔나요. 전화를 걸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제 소식을 걱정하기엔 그곳이 너무 행복해져서. 찬란이 영영 안부가 되어서.

 

일자리 소개소의 창가

 

우표로 쓰기에 적합한 증명사진들. 시장 골목마다 내가 데려다놓은 체류자들. 휴지에 항공권을 그리고 선물해주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한 사람은 앉아서 잠들었다. 힐을 벗겨주었고. 패딩을 벗겨주었고. 또각또각 그 사람의 구두가 그자를 버리고 가는 걸 보았다. 비행기는 대체로 어항 속을 날고 있다.

 

대필

 

아디타는 돈을 많이 벌어요. (받아 적는 척한다.) 어제와 그제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어요. 눈 내리는 식혜 속을 함께 거닐고 싶어요. (??) 오늘은 물론 항상 기분이 좋아요. 잘 안 보이던 눈도 제대로 보이고요 (그는 머뭇거린다.) 정말이에요. 제 걱정은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에요.

 

소개소 창가엔 언제나 뿌연 안개. 제대로 쳐다보면 빼곡히 흰 우표가 붙은 창문. 걱정과 염려가 실질적으로 이곳의 눈을 가린다.

괜찮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속에 어두운 복도가 보이고. 괜찮습니다. 다시 들려오는 소리 속에 복도에 구멍이 뚫리고. 그 복도를 오려내는 건 빛나는 가위. 편지를 부치지 않는다.

 

유통기한

 

어느 날 세계지도가 그려진 거울이 배달되어왔다. 지우개로 가장 먼 나라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한 체류자가 그 거울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 말리지 않았다. 그들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 그들을 더욱 이용한다.

 

 

 

 

기분의 중력과 부력

 

 

혀를 질끈 깨물면 햇살의 방향이 달라지고

좋아

좋구나, 라고 발음하는 일만으로 기분에 부력이 돈다

정신병원에 갇혔던 스무 살 병상이 꼬리 치며 사라지는 뒷모습

 

그때, 꼬리는 의지랑 무관하게 헤엄쳤다

몸통이 꼬리에 매달려

수많은 물속을 여행 다녔지, 포식자를 피해 온 가족이 도망간 외할머니의 수조, 쉬는 시간이면 몰려와 날 때리는 물고기들, 어항을 빙빙 도는 정신병에 걸렸던 스무 살 폐쇄병동, 나를 둘러싼 부모의 동공, 그 물살과, 지느러미 사이로, 힘차게 헤엄쳐 다녔지

꼬리 짓이 더욱 세게, 왜 나에게? 몸통의 의문과 꼬리의 운동은 먼 곳, 온몸이 경쾌한 리듬을 그리다가

 

어느 날 바라던 바처럼 땅으로 걸어올라와

두 팔, 두 다리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밤마다 창밖서 끈적이는 즙이 흘러들고

 

천장에 아가미가 달렸어, 어느새 주억거리는 소리 속

수없이 많은 비늘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때의 몸을 걸어나갔고, 결국 꼬리에게, 왜 그랬어, 그런 여행을 왜 떠나게 했어, 파문이 되돌아오는 결 속

평범하게 잠이 들었지만

 

그러나 그날엔

커튼을 순식간에 젖힌 아침인데도

볕이 주춤거리며, 일렁거리며, 망설이는 파도처럼 밀려들었지

동틀녘 육지에 올라온 생선이

제 안의 초점을 조금씩 되찾는 모습을 보았듯이

 

이제 헤아릴 수 있어

물고기였던 사람의 기분엔 언제나 중력과 부력

 

침대에 누워 또 한번 혀를 깨무는 거야

그러면 침대 속 남아 있던 물결이 출렁거리고

좋은 게 뭔데? 까먹고 살면 안 돼? 그런 중얼거림도 꼬리 칠 수 있지

 

죽어가던 비늘이 태양을 향해 솟구치고, 보여

우릴 둘러싼 것 중 가장 강한 중력을 가진 저 별

태양 곁엔 늘 쏟아지는 비늘

눈부신 물결 속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등을 마주대고 잔 밤과, 그런데도 무사히 졸업하던 날의 기억, 강박당한 나를 둘러싼, 다정한 폐쇄병동 환자들, 어느새 꼬리가 그곳을 헤엄치고

잊고 있던 기분의 중력이 나를 계속 끌어당기면

 

아니야, 역시 오늘은 기분이 좋아

발음하며

날 뒤덮은 비늘을 하늘로 솟구치게 해

그들은 하늘에 침잠하고, 짙푸른 아침 물살의 색을 빚어내지

창공, 내 기억으로 출렁이는 수면

다시 혀를 질끈 깨물면

 

 

 

 

민트초코가 유행이라서

 

 

치약을 넣고 라면을 끓입니다

유행이라면 뭐든 해보고 싶으니까요

제겐 적당한 동질감이 필요할 뿐

치약에게도 따뜻함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국물까지 마셔도 죽진 않을 거예요

한때 흰 국물 라면이 유행일 때도 있었잖아요

이 면을 마지막으로 저도 퇴장할게요

꿈이 생기고 말았잖아요

민트초코의 결정타를 날리겠다는 야심까지가,

 

라면을 들고 지하철에 탈 거예요

가스버너에 불을 지피고 역무원이 출동할 때까지

흰 연기 피어오르는 눈앞에서

도시 괴담처럼 살아남는 거죠

화가 날 때마다 저는 이를 닦던 사람

칫솔과 치약에게 성을 내던 사람

민트초코가 유행이라니

치약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온 게 고마울 따름

이제 위장은 잘 닦인 치아처럼 번쩍일 테고

참신하다는 말은 모욕적일 뿐

치약 라면이라 해서 칫솔을 들 필요는 없죠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젓가락을 들고 치약 거품 속으로

하얀 구멍 구멍의 더 구멍 아래로

자꾸 그렇게 곁눈질하지 말아요

세상에 대한 안목이 생겨버릴 것 같잖아요?

한 가락도 나눠주지 않을 거예요

 

 

 

 

귀신고래의 마을

 

 

애초 증조모가 내게 맡긴 일은 고래의 귀지가 될 만한 파도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녀와 같이 고래 귓속을 걸으면 천장의 선홍빛이 귀지에 내려앉고.

부스러기마다 불이 들어와 밤에도 사방이 어둡지 않았다.

 

고래 귓속에 무엇이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장소가 발견되곤 하였다.

씨앗이 닿아 초원이 된 고막.

귓바퀴 소용돌이를 하릴없이 걷자 트랙이 되었고.

그녀와 함께 그곳을 종일 걸으면 사지에 소용돌이 문양이 돋기도 했다.

 

나는 불이 들어온 귀지를 들고 고래의 외이도를 탐험했다. 파도 무늬 그려진 귀지.

처음엔 푸른빛이나, 점차 황금빛이 감도는.

혈색이 닿으면 핏줄아 돋는 그것에게.

내가 부스러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면 두 볼에 붉은 기운이 선명해졌다.

 

광대 안쪽이 마그마가 흐르는 것처럼 뜨겁다가, 이내 온몸이 싸늘해졌다.

증조모는 그럴 때 내 목덜미를 낚아채 고래 귀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그 밖은 노을의 너머와 맞닿은 곳, 나는 지평선 아득한 곳에서 집까지 헤엄쳐왔다.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며 매타작이 쏟아지는 집.

지붕을 휘감은 넝쿨이 허름한 집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증조모를 만나고 왔단 얘기에 부모가 고개를 저으면.

그들 귀에서 귀지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모의 안쪽에도 누군가 걸어가고 있을까.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나의 아이라거나.

그들 귓속엔 회초리 소리가 몰아치는 숲. 칼날 서걱이는 정원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다만 그들의 귀지를 모아 고래 귓속에 데려가보고 싶었다.

그러면 고래는 어떻게 될까. 나를 받아들인 고래가 처음 만든 장소가 어디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그곳이 무척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귀지가 필요해졌다.

고래 귓속에서 증조모는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고. 내 몸은 커져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늘었기에.

 

좁은 곳에 몸을 밀어넣을 때. 이런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왔다. 고래 귀지에 꽃이 피는 계절이야.

이파리가 무성할 때. 고래는 숨을 거두고 대신 심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고래가 가라앉은 바다에 빛이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선홍빛이 유자형을 그리며 내려앉고. 물살이 불이 붙은 것처럼 환해질 때.

멀리서 보면 물결 사이 새로운 핏줄이 생긴 듯, 빛이 들어오리라고.

나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고래 귓속으로 내 큰 몸을 힘껏 밀어넣었고.

 

 

 

 

알파카 부인의 안데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뇨, 전 주방세제가 다 떨어진 날에 태어났는데요. 행주를 비빌 때 나는 마찰음. 푸른 열 자국에서.

수세미에 불어터진 살갗이 벗겨질 때. 밑에 발굽이 보일 때에. 그릇 두드리면 과일 향 번지고.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챌 때.

 

이토록 목이 길고 귀는 쫑긋 서 있고. 침을 잘 뱉는 내가 누구인가를 마주볼 때.

핥으면 죽는 과일인데요. 먹어보겠어요. 그저 과일을 흉내낸 냄새. 눈을 감았다 뜨면.

 

어쩌면 부엌은 가짜들의 골목. 줄기가 자라버린 그릇. 사과 냄새 매달린 접시까지.

그러니 탄생이 가능합니다.

두 팔을 두 다리로. 온몸에 털이 자라고. 부엌의 바닥. 아니. 거의 맨틀이라 볼 수밖에 없는. 지옥이라 불러도 될 지하에서. 땅이 융기하면.

더 가능해지는 네 개의 다리.

 

사이에서 남미식 키친에 당도한다면. 얼룩을 지우고 있는 자. 얼룩을 사라지게 하는 자.

그러니까 불가능해지는 얼룩. 희미해지는. 투명이 되는 얼룩. 그것은 바로.

더욱더 오세요. 그게 나. 우리가 사람이었다고요?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믿어요?

 

그런 말은 알파카나 줘버리라고요. 목젖 뒤에 거리가 있고 거기까지 넘어오세요. 오세요. 눈에서 연기를 뿜으며.

가능해지세요. 이 부엌은 골목의 봉우리. 솟아올라 도시를 산맥으로 만들 정상. 능선을 잇댄다면. 당신의 어깨 곁에.

우리들의 모든 손목 능선에. 이 능선이 가닿는다면.

 

식칼을 쓰며 나는 손을 베였습니다. 사실 안 쓸 때도 베였습니다. 당신을 마주볼 때.

극장에서. 거리에서. 동사무소. 뒷골목에서. 카페에서. 개가 짖는 노을 옆에서 꽃무늬 담벼락과 들쳐지는 바지와.

막말을 내뱉는 택시와 식당에서. 곁과 곁.

물에도 날이 달린 이 도시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목이 긴가요? 침을 왜 뱉나요? 왜 그렇게 우나요?

나의 털 속으로. 서슴없이 파고든 무수한 손가락.

 

이런 건 안 좋은 습관이라니까. 깨끗하게 부엌을 관리해야지.

 

퉤퉤- 이 침 뱉기는 설거지를 위해 쓰입니다. 뱉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봉투 벗겨지고. 내가 알파카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

다시 퉤, 소리에 맞춰 씻겨나가는 것. 내 방식대로 깨끗해지는 것.

 

* 세사르 바예호

 

 

 

 

망고가 아닌 모든 이유

 

 

망고를 태운 부드러운 재.

칠흑의 가루 곁에 누워 생각한다.

 

세상의 어떤 별은 망고에 매달려 그대로 과육의 색이 되지만. 그 빛이 과일의 유일한 색인 것처럼 한사코 맺혀 있지만.

 

태웠을 때는 검구나.

태양이 어떻게 끝날지 알 것도 같다. 이건 우주 한 알의 색.

 

귓속에 어두운 설탕이 쏟아진다. 한 번도 닿은 적 없지만, 영원히 오고간 어떤 지옥이.

 

검은색. 오히려 남국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적도 아래. 혀를 내밀면 자오선 녹아내리고. 소금기와 물빛. 혀뿌리부터 옮겨 적히는.

 

바다 밑엔 늘 몇 점의 어둠이 가라앉아 있다. 내 머릿속 꼭 세 개나 네 개 이상은 들어 있는 누군가의 해골처럼.

그때 나의 기분은,

두통약이 밀려들어올 때 내 두통의 마음. 백사장에 닿아 꺼져가는 포말의 심경.

망고를 온 가지에 매달고 썩히는 나무를 본 적도 있지. 지나치게 익은 과실은 뚝뚝 물을 흘리고.

처음 보는 종의 개미떼는 항문이 노랗게 젖어 있다. 줄지어 잇닿는 행렬은 마치 벌레가 되었다고 할 수밖에.

 

버켄스탁으로 긴 줄을 짓밟을 때. 저마다 다른 명도로 빛나는 솜털만큼의 볕이.

바삭바삭 부서질 때.

 

심장은 뛰고. 두근거림에 맞춰 몸에서 무언가 새어 나왔다. 파도처럼 흩어지는 벌레떼.

그때 벌레는 부드러운 물. 그래. 과육의 성질.

 

망칠수록 익어가는 부위는 어디에나 있었어.

망고 나무가 내 정수리에 자신의 물을 흘리고 있을 때. 순간 달콤해지는 고민들에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 타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달콤하고 유려한 재가 되어갈 때.

두피마저 부드럽고 따뜻한 재로 변해갈 때.

 

그건 내가 내 생각들에게 적어 내린 답장.

결심이라 말하진 않겠다.

평범한 사람의 불행이 내게 닿지 못한다는 것. 평범한 사람의 행복도 결코 내가 맛볼 수 없다는 얘기.

머릿속엔 온통 망고 굴러가는 소리. 나 자신이 타오르는 한 그루 망고 나무 일 적에. 이건 망고가 아니어야 하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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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홍직이 고개 / 강신월

 

[차상]

박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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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외 4/ 남현지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결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퇴근

 

 

첫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사과 상자 안에서

더 붉어진 사과 이야기

 

나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만큼의 붉은색을

중개인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모자라요?

가게 주인은 상한 사과를 덤으로 넣어주고

나는 충분하다고 다시 빼낸다

 

한밤중에 사과는

검은 봉지 안에서 조금 더 붉어지고

나무는 멀리서 눈을 맞고 서 있다

뭘 잘못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버스를 긴 줄로 기다리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 집으로 가지 못한 차들이

눈을 맞고 서 있고

떨어진 사과 하나는

붉은색을 들고 굴러갔다

 

 

 

 

앙코르 와트의 버섯 상인

 

 

간에 좋아요

살이 빠집니다

 

상황버섯을 팔던 상인은

실은 돈을 모아서

포카라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인류의 멸망을 기다릴 거라고

관광객들에게

포카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히말라야의 산기슭

 

나는 기쁩니다

버섯은 얼마입니까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 응모에는 총 1138명이 귀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많은 편수와 비례하여 미덕을 갖춘 작품이 많았기에 벅찬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팬데믹을 맞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많은 분들의 언어의 밭에선 시가 이토록 풍성하게 가꿔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사위원들뿐 아니라 시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응모작들을 검토한 뒤 4인의 작품을 최종 검토작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했다.

 

변신의 귀재9편의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언뜻 시적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진술이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개성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작품 간의 편차가 있었는데 조련등이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트럭등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시라는 장르가 무조건 하나의 정념을 보여주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지니는 울퉁불퉁한 가독성의 영역이 있다면 이 응모자가 앞으로 보여줄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 앞의 동경 씨 내 뒤의5편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의 능란함이 눈길을 끌었다. 한행씩 떨어뜨려 놓으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행과 행이 만나서 연을 이루고 한편의 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만들어지고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졌다. 그것은 편안한 방식으로 시를 이끌어가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시행의 운용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한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에 세련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결합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쯤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 미더움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빛의 정원4편이었다. 투고된 시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 있는 시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고유의 시적 서사와 정서가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다만 시들이 기대고 있는 이미지나 세계가 다소 좁고, ‘이나 미래등 시적인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방식이 상투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넓은 방향으로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분명 단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해서 써달라는 응원의 말을 보탠다.

 

호수공원4편은 언뜻 수월하게 읽히는 말을 맵시 있게 엮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현실에 닿은 채 출발한 시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 정박해 있기보단 멀리까지 나아갈 줄 알았고 그를 다 경유하면서도 처음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던 어긋남을 응시할 줄 알았다. 매 작품마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생활에 깃드는 외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침착하게 궁리하는 이의 면모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시가 다가왔다가 물러날 때마다 남기는 감정의 파동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 탓에 논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모든 심사위원들이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한 작품이다. 시에도 독자가 다시 돌아보도록 만드는 장력과 그를 유지하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편들은 그 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호수공원4편을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한 세계를 의심하지 말고 시로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더욱 자유로이 해주었으면 한다. 낙선을 하게 된 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보내주신 작품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감히 예감하게 해주셨다. 다른 무엇이 아닌 를 마주하는 태도가 이토록 치열한 이들이 함께 쓰고, 읽고 있으니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옥고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양경언, 유병록, 이근화, 주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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