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
백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
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
세상의 저녁은 소리없이 스며들고
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
나는 바싹 가물어 있었지요
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
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던 시간들
그대의 다급한 호흡은
어떤 이의 애달픈 기록이었을까요
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
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
경판에 서려있는 푸른 맥박소리
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
먹물보다 진한 핏빛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
오래 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
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
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지고
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어서는지
골짜기마다 산벚나무는 절뚝이며 피어나요
팔만의 꽃잎들이 봄의 한복판을 걷고 있어요
* 산벚나무 :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 조성된 팔만대장경의 경판으로 쓰였으며
벌채한 나무를 판자로 자른 후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린 후 옻칠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 대상수상소감 - 최재영 >
다시, 가을입니다. 맑은 하늘과 형형색색으로 가득 채워진 들녘과 자연은 많은 문학인들에게는 가슴 벅차게 도전하고픈 소재를 안겨주고도 남겠지요. 물룬 단순히 풍경을 노래하는 것이 “시”가 될 수는 없으므로 표면적 소재의 내재화를 위해서는 많은 밤시간을 할애하여야 할 것입니다.
김포문학상 응모를 하면서 망설이기를 여러 번, 몇 날을 뒤척이기도 했는데요. 등단 햇수도 십 수 해가 되어가니 스스로 부끄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시”를 쓴다는 일이 어떤 문학적 성과를 담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언가를 도모하고 싶어지는 졸렬한 성정을 무엇에 비유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습니다만 최소한 시는 졸렬하거나 치졸하지 않으려 나름의 노력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 내지는 박수를 보내려 합니다.
산벚나무를 글감의 소재로 쓰면서 오래 전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벌어진 치욕과 살육에 몸서리치며 저항했을 우리의 조상을 떠올려 보는 일은 참으로 가슴 뻐근한 일이었습니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그들은 얼마나 애닲은 심정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만 뼈를 깎는 고된 과정을 거쳐 만든 팔만대장경판은 고스란히 우리 민족의 절박한 심정, 그 자체였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하여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산벚은 해마다 가슴 한 켠으로 아프게 파고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시를 써 온 날보다 앞으로 써야 할 날이 더 많이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래야 하겠지요. 또한 그 사실에 한껏 안도하면서도 은근히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주시는 상은 그에 상응하는 작품으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기에 부단히 갈고 닦으라는 채찍이라 생각합니다. 염원하던 주택으로 이사를 하며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느라 분주한 가운데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몇 계절을 소비하면서 잠시 소홀했던 내 시를 돌아보고 어루만질 수 있도록 따뜻한 기회를 주신 것만 같아 기꺼운 마음입니다.
다시 뜨겁게 “시”를 품겠습니다. 그리하여 생의 어느 한 곳은 “시”로써 채워지기를, “시”의 한복판을 즐거이 고뇌하며 걸어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시”로 인해 기뻐하고 분노함에 주저하지 않기를 겨울 쪽으로 기울어가는 숲과 바람을 마주하며 되뇌어 봅니다. 용기를 북돋워주신 김포문협과 관계자분들, 심사위원들께도 큰 절 올려 감사드립니다.
[우수상] 파키라 여인 / 이용호
사람을 멀리하던 그녀는 오늘도
화원 한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새벽에 길을 묻고 물어 걸어온 출근길
바오바브나무처럼 굵어진 팔뚝으로
화원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간밤에 아프지는 않았니
네 상처도 이제 곧 뿌리를 내리겠지
일일이 식물들과 눈을 맞추고 살피는 건
하늘이 부여해 준 그녀의 책무
말없이 앉아 공상하거나
가끔씩 물을 마시고
밖에 나가 하늘을 보고 볕을 쬐다 보면
어느새 발바닥이 간지러워
이제 뿌리가 돋는 것일까
각질이 뚝뚝 떨어지는 발부리에서
거친 황야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나도 식물처럼 이 지상에 정박하고 싶어
어머니, 이제 저를 이곳에 뿌리 내려 줘요
아마 너도 발부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선
먼저 모든 걸 스스로 버려야 한단다
어머니의 지청구가 화원에 매일 가득차면
이제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바람 한점에 슬픔을 놓아 주고
적당하게 흔들리는 줄기와 가지를 지닌 채
말없는 파키라 한 채로 화원에 눕는다
< 우수상 수상소감 - 이용호 >
수상 소식을 전화로 받은 때는 공교롭게도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전화기 너머 건너온 반가운 목소리의 감흥을 뒤로 한 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봉우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저마다의 단풍으로 가을을 물들이고 있는 산의 모습이 처연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렇게 세상에 아름답게 물들어 갈 수 있는 시를 과연 나는 지금 쓰고 있는가하고 제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습니다. 지금은 번잡한 일상의 시간을 마치고 저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이번에 제출했던 제 시를 다시 읽어 보는 밤입니다.
예년 같았으면 시월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하며 지인들과 약속을 잡거나 산을 찾아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일상의 삶은 단풍처럼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만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문학은, 시는, 나의 시는 과연 무슨 존재 의미가 있을까 고민해 보는 시월의 마지막 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자기의 일터에서, 가정에서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 제 시는 바로 이런 분들께 바치는 마지막 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게 있어 시 쓰기는 세계와 인간의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지상의 포유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기대고 자신의 영혼에 힘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세상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따스한 시를 쓰겠습니다. 언어 미학이라는 허울 아래 정작 시를 쓴 시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 날선 이미지와 감각의 전위 등으로 포장해 소수의 사람들만 읽는 시가 아니라 인간의 진심과 이 세상을 아름답게 읽어 내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도록 밤을 새워 읽고 또 쓰겠습니다.
상을 주신 김포시의 여러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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