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 김승희
친절한 사람
꼭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아
친절한 사람은 피하고 싶다
진실한 사람
내가 들킬 것만 같아
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
나는 친절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하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본심을 모르는 사람은 무섭고
진심으로 오는 사람은 진실의 무게만큼 무겁다
변심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변심이 너무 없는 사람도
박제.... 아니다, 아니다, 다 아니다
차라리 빨리 나는 단무지나 베이컨이 되고 싶다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
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
내장과 자궁을 발라내고
단무지나 베이컨은 온몸이 조용한 진심이라고 한다면
진심은 한낱 고결한 사치다
말하자면 본심의 배신이자 돼지머리처럼 눌러놓은 꽃이다
프로이트의 박물관처럼 본심은 어둡고 원초적이고
진심 뒤에는 꼭 본심이 도사리고 있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본심이다
거기까지는 가보고 싶지도 않고 숨겨진 본심이 나는 무섭다
과녁에서 벗어난 마음들을 탁 꺾어버릴 때 나오는 진심,
허심이란다
적어도 단무지는 뼛속까지 노랗고 베이컨은 앞뒤로 하양 분홍 줄무늬다
무엇을 바라는가
내일이 없는 지 오래되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진심이 바래 섬망의 하얀 전류가 냉장고 속에 가득 차 있는데
무엇을 바라는가
단무지와 베이컨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무엇을 무엇을 무엇을 더 바라는가
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께서 출간한 시집을 소개합니다.
올해 제21회 고산문학대상 수상자로 현대시 부문에 김승희, 시조 부문에 김일연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각각의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과 시조집 ‘깨끗한 절정’(서정시학)이다.
열린시학이 주관하는 고산문학대상은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시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제정됐다.
심사위원들은 김승희 시인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에 대해 “진리가 부재하고 진실을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에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면서도 다층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며 날렵하고 재기 넘치는 언어로 독특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이번 시집은 ‘모더니스트’ 김승희를 ‘리얼리스트’로 불러도 손색없을 다채로운 시 세계를 품고 있다”고 평가했다.
‘깨끗한 절정’에 대해서는 “운율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해 극서정을 최고치로 끌어올린 점과 정형시의 기품에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로 더욱 깊고 넓은 시 세계를 보였다”며 “짧은 시조에 화룡점정 자안(字眼)이 박혀있다”고 호평했다.
이밖에 신인상에는 현대시 부문에 김미향 시인, 시조 부문에 김재용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상금은 본상이 각 2000만원, 신인상은 각 300만원이다. 시상식은 오는 10월 15일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 있는 전남 해남군 고산유적지 땅끝순례문학관 문학의 집 ‘백련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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