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된 일인지 시쓰기의 어려움과 시인으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시를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곤 했던 지훈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생각하며, 시를 잃고 무엇으로 사랑하며,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무기를 삼을 것인가.” 이 말은 도망치려는 저를 다시 시 앞으로 불러 앉혔고,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집 《야생 사과》를 낸 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지훈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사실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과분한 격려인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떤 불편함이 따라붙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상소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되새김질하는 동안 이 상이 저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야생 사과》라는 시집은 독자적인 새로움이나 성취를 보여주었다기보다는 과도기를 지나는 한 인간의 내면적 고백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과도기란 한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자, 파괴와 혼란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 시들을 쓰는 동안 저는 ‘어떤 시’를 써야겠다는 지향보다는 ‘다른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하지만 한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그것을 축조해나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막막한 노릇이었습니다.
시집을 낸 후에 저는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한 삶의 조건이 시에 집중할 수 없도록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편 의도적이고 긴장 어린 직무유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를 완전히 내려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낯선 자신을 붙잡고 끙끙거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의 파편들을 받아적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했지만, 단 한 편도 제가 시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파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료하는 일을, 그리고 시라는 완제품을 여기저기 납품하는 일을 제 안의 또 다른 ‘나’는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부는 완강했고, 그 앞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다른 시’ ‘새로운 시’를 원하고 있는 그에게 저는 예전의 타성대로 따르기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묵묵히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제 내면적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자장(磁場)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 ‘지훈’의 이름으로 다시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등단 이후 제가 줄곧 속해 온 시의 영토는 지훈이 지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에 비교적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균형감각은 저에게 부정해야 할 덕목으로 느껴졌고, 재현적 언어에 대한 회의도 강해져 갔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훈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환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상의 목적은 그 상이 기리는 시인과 아류의 시인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롭게 확장하라는 권유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지훈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지훈을 비롯한 청록파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전통과 현대성의 도식적인 이분법에 기초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훈의 시와 시론을 읽다보면 그가 현대성에 둔감한 시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했던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훈이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전통과 접맥하는 지점에서 논리의 모순을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혼란을 향한 감행이 오히려 안정된 고전주의자의 신념보다 한결 시인다운 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芝薰’이라는 ‘풀초( )’자가 나란히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며, 그의 〈풀잎斷章〉이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한 줄기 바람에 조잘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이 구절을 읽으며, 풀처럼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기에 바위처럼 굳은 정신과 지조 또한 가능했으리라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지훈 선생이 남긴 삶의 자취와 예술적 풍취 앞에서 제 문학의 자리는 아직 볼품없지만, 그 오롯한 길을 따라 걸으려는 마음만은 간절한 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은 저의 재능이나 성취보다는 스스로의 무력함과 싸우면서 통과하고 있는 혼란의 여정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절기를 앓고 있는 제 시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베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나남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훈 선생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드높은 품격과 고아한 향기는 이후의 한국 현대시가 넘어야 할 뚜렷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훈 선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훈 선생의 시가 보여준 품격과 향기는 재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 지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며 풍기는 인품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삶의 품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지훈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이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많은 부박한 시들이 보여주는 깊이의 결여를 걱정하면서 심사에 임했다.
지훈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송찬호, 나희덕, 최승자, 이병률 등 6~7명의 시인들이 생산한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논의한 결과 수상 후보자를 어렵지 않게 송찬호와 나희덕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는 그의 반성적 상상세계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어구사 능력에 힘입어 한층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으며, 나희덕의 《야생 사과》에서는 ‘나’에 대한 응시와 ‘나’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고통의 시간을 팽팽한 언어로 줄기차게 형상화하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이 두 시인의 시집 중 내용의 깊이와 형상화가 보여주는 미덕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쪽이 수상작이 되든 유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송찬호의 경우 동일한 시집이 중복수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나희덕의 《야생 사과》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20여 년에 걸친 시작생활이 만들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이 시집은 과거를 과거로 만들기 위한, 그러나 과거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반성적 언어의 집합이다. 나희덕의 그 같은 의식을 우리는 “나는 바늘이다/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떨리는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라든가 “나는 박쥐다/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쥐가 되지 못했다”라는 말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또 “나는 이미 지워졌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와 결별하려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안개 속에 숨겨진 형체와 같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을 손쉽게 이루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이런 강렬한 반성적 성격 때문에 주어가 ‘나’이다. 서정시의 일반적 화자인 1인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관적 1인칭으로서의 ‘나’가 그의 시를 지배하는 주어이다. 그리고 이 ‘나’는 반성적인 의식과 자세 때문에 긴장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이 시집의 미덕을 이루는 팽팽한 언어, 팽팽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나희덕이 〈결정적 순간〉이란 시에서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란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고 쓰고 있는 시구가 바로 그런 미덕의 소산일 것이다.
또한 나희덕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반성적 의식이 만들어낸 완전한 결별이며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이번 시집은 이런 완전한 순간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게우는, 그리고 시간과 풍경과 삶을 재인식하고 재정비하는 줄기찬 노력의 성과이다.
시인 조지훈의 시와 정신과 생애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간 시인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은 지훈 선생이 걸어간 길을 편협하게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최근의 경박한 시어에 대응하는 팽팽한 의미의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 상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희덕 시인에게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시인이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를 통해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이시영시인의 시집 <은빛호각>을 읽으면서 내내 스미던 느낌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들을 한 편의 시로 그림처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솜씨가 유유하다. 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그림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그림들 속에는 참으로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묵은 기억들이 은빛호각소리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웃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만큼의 꽃송이들이 봉긋봉긋 피어있다. 소설집 한권을 읽고 난 기분이 들만큼 수런수런, 수많은 얘깃거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칼날 같았음 직한 일들도, 가슴이 에였음직한 일들도....... 그 힘겨웠을 기억들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내다니, 기억이 추억이 되면 이토록 따스해지는 것인가. 시인에게는 저세상마저도 편안하고 따스한 자연으로 보여 지는 가 보다.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 <차부에서> 전문
새벽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추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 플라스틱 수조 얕은 물을 튀기며 미꾸라지들이 아주 순하게 놀고 있다. ─ <삶> 전문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 <잠들기 전에> 전문
삶이란 -새벽녘 추어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도 물을 튀기며 순하게 놀고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이 한 데 섞여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 채, 그저 불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그 떠다니는 것들과 하나씩 입 맞추며 가는 그런 것이 삶이리라. 깊고 추운 겨울날, 은빛호각 한 개 품에 앉고 뜨신 방에 엎드려 펼쳐 보기를 권한다.
존경하는 김종길 선생은 최근 어느 잡지(《시와정신》2004년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른바 시격(詩格)에 관한 격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시비평에 있어서보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간혹 격의 높낮음을 이야기할 뿐”이라며 “옛날의 한시비평에서도 격의 고하, 즉 시적 가치의 위계는 있었다”며 “중국 역대의 격이론을 살펴보면 예쁘거나 기이하거나 강렬한 것보다도 유원(幽遠)하거나 고고(高古)하거나 담박(澹泊)한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야말로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우리 근대시사에서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훈 선생의 모든 시가 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 시 읽기에 눈 밝은 신경림, 정희성 시인이 공편한《한국현대시선Ⅰ,Ⅱ》(창작과비평사, 1985)에 수록된 지훈 선생의〈승무〉(僧舞),〈고사 1〉(古寺),〈낙화〉(落花)는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시는바 시격의 위의(威儀)를 두루 갖춘 기품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적 정서 또한 유원하고 고고하며 담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자유시임에도 마치 고조(古調)의 정형을 연상하듯 2행씩 끊어 쳐서 웅혼하고 유장한 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청년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왔지만 내면을 스치는 어떤 서늘한 기상과 호소하듯 절제된 애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낡지 않은 채 제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후배 시비평가는 저의 이런 느낌을 “실상 모든 시는 그것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미 시계의 시간에서 탈출해”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시간을 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훈 선생의 작품 중 이렇듯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라면 저는 선뜻〈고사 1〉을 들고 싶습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릿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40여 년 전에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제 마음은 제2연의 “고오운”에서 크게 한번 출렁거렸는데, 오늘 그 구절을 반복해 읽어도 제 내면의 리듬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출렁! 합니다.
세상에는 상도 많고, 좀 외람되이 말씀드리자면 아예 없었으면 하는 상도 많지만 이렇듯 고매한 인품과 기풍이 서린 지훈상을 받는 제 마음 또한 “조찰히” 기쁩니다. 65년 전인 1939년에 지훈 선생의 시를 세상에 처음 내보낸 지용 선생의 어느 시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를 한 느낌입니다. 그토록 두껍고 완고한 동토(凍土)에도 이제 막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여기 오신 모든 분들께도 새로운 기운이 가득 생동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느라 애쓰시는 분들, 심사하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조지훈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지훈상의 심사에 임하면서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도《조지훈 전집》에서 볼 수 있듯이 청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술적 성취와 호한한 학문적 탐구, 그리고 준열한 지사정신을 통해 이 땅 정신사와 예술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2003년 4월부터 2004년 3월까지 출간된 주요시집 100여 권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다음 세 권이었다.
먼저 조창환의《수도원 가는 길》(문학과지성사)은 자연에 대한 그윽한 명상이 종교적 영성(靈性)을 느끼게 할만큼 맑고 깊은 것이어서 관심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지훈시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의 준열함이나 치열성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김영석의《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시와시학사)는 정련된 시어와 정신의 지향성이 매우 높은 성취를 보여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씌어진 시들이 흔히 그렇듯이 굵고 깊은 울림을 던져주는 데는 다소 아쉬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시영의《은빛 호각》(창비)은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섬세한 예술의식이 탄력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정신의 울림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이시영 시인이 등단 이래 견지해온 지사적 기품과 성정이 서정성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어서 지훈정신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심사위원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앞의 두 분도 지훈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과 업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어차피 수상자는 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유보되었다. 앞으로도 지훈상이 더 훌륭한 분들에게 주어져서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는 큰 상으로 자리잡아가기를 희망한다.
전아하고 선미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조지훈선생의 문학의 뜻을 기리는 ‘지훈상’을 받게 된 것은 저로서는 의외의 일입니다. 그 의외 속에서 문득, 까마득한 옛 시절을 간신히나마 건져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무한으로 분열되고 경사가 가팔라지는 듯한 세계의 현실과 환상 속에서〈승무〉,〈고풍의상〉,〈낙화〉의 시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분쇄된 듯한 시대는 저항하다 못해 이젠 버려진 형국으로 치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불현듯이 “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지는” 산사의 “고우운 상좌 아이”가 부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미 외면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논리, 변명, 대안은 있는 것 같지만 우리를 안심시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훈의 정치하면서 고풍한 언어가 살아 있는 세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럼으로 하여 그의 시풍은 우리 시에서 몇 안되는 시적 추억으로서 제 가슴속에 살아서 불고 있는 혼과 바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별이 있는 밤의 깊은 하늘을 향하는 ‘눈’을 통한 구도적 혹은 구애적 시경이며 이 지상의 아침에 낙화함으로써 보여지는 ‘꽃’의 인연상은 점점 깊어지는 화두처럼 저에게 새롭게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너무나 험한 지경에 다다랐을지라도 더 이상은 파편화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어느 마음이든 지훈 시를 찾아 읽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란한 세상 속에서 지훈 시풍을 다시 기억하며 조용해지는 시간을 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꽃을 떨구었던 그 나무에게 있었을 법한 이름 지어지지 않은 성품을 느끼면서 다름 아닌 저 자신의 품속에 잠시 머물라고 위로하며 독려하고자 합니다.
언제나 부족할 뿐인 저를 수상자로 선정한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시 한번 이 나라의 어느 산중에서 “한개 별빛에 모두우는” 눈동자를 기억하고 당대마다 소란한 정황 속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스스로에게 울고 싶은 아침이 없지 않았다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서 저는 꽃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꽃이 또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 바람들이 몸을 뒤집어주는 잎사귀 뒤켠에서 열매가 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집니다. 허전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네 자식들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이 걸리기를 다 자라야만이 갈 수 있는 지훈의 “서역 만릿길”이 이제는 초단위로 변하는 세상이라도 저는 더 먼 길을 골라 걸어서 갔으면 하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어찌해서라도 완전에 다가가는 누림을 얻고 느끼고 몸에 담고 알아서 건너가기를 또한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芝薰의 이름이 붙은 문학상의 수상자로는 선생의 인품과 학덕에 걸맞는 업적과 개성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작은 지훈’이나 ‘뒤에 온 지훈’을 찾아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지훈이 뒷세대에게 기대하였을 창조적 활력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선생의 웅혼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001년 4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지난 2년간에 발간된 200여 권의 시집 가운데 심사 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주목한 시집은 모두 네 권이었다.
홍신선의 《자화상을 위하여》는 삶의 방식과 윤리적 기준이 뿌리부터 바뀌는 우리 시대에 자아의 자리를 역사적으로 정립하려는 한 선비 시인의 노력이 담긴 진지한 시집이다. 오랜 시력을 증명하듯 시어 하나하나에서 높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학자적 조심성에서 기인했을지 모를 강한 자기검열과 번잡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이 시집의 장점이 상쇄되고 있지는 않은가 느꼈다.
함성호의 《너무 아름다운 병》은 문명 비판적 시선과 실험 의욕, 그리고 시적 서정이 긴밀하게 어울려 있는 특이한 시집이다. 재치가 깊은 감정을 자극하고 언어는 빗겨 달아나면서도 힘차다. 안타까운 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화적 코드들을 너무 자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담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이 형식과 언어의 실험들은 시인을 사로잡고 있는 문명의 허황함을 흥겹고 애잔하고 어지럽게 증명하는 지점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유종인의 《아껴먹는 슬픔》은 저자의 첫 시집이다. 젊은 날의 고통과 상처와 좌절을 높은 탄력으로 노래하는 이 시집에는 이른바 ‘잘 빠진 시’가 많다. 말이 색깔과 선율을 아울러 누리고 있어 이 시인의 타고난 재능을 드러낸다. 심사위원들은 이 젊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리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저자는 두 번째 책부터라는 프랑스 속담도 있다.
수상자로 선정된 고형렬의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는 ‘쾌적한’ 장치가 없어 그 장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유에도 상징에도 크게 의지하지 않는 그의 시들은 자주 산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집을 천천히 주의 깊게 읽는다면 삶의 깊은 슬픔과 사물에 대한 고양된 사랑이 아프게 전달되어 오며, 항상 앞서 나가는 말을 막고 시가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우직하게 진실에 천착해온 이 시인을 존경하게도 된다. 한 걸음씩 천천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이 시인에게 지훈상을 주게 된 것이 기쁘다.
우리가 세운 세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찬장의 그릇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명을 지르고 전등이 불빛과 함께 휘청거릴 때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몰랐다 우리가 지은 집 우리가 세운 마을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폐허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여진이 몇 차례 더 계곡과 강물을 흔들고 갔지만 먼지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풀이 돋기 전에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종을 울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숲과 새와 짐승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노천 물이 끓으며 보내던 경고의 소리 아래로부터 옛 성곽을 기울게 하던 미세한 진동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햐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 충격과 지진은 언제든 다시 밀려올 수 있고 우리도 전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등을 밝히고 떨리는 손을 모두어 힘차게 못질을 해야 한다 세상은 지진으로 영원히 멈추지 않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