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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저울 / 함민복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계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 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를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 물이 좀 갔잔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슨 페인트 껍질처럼 부러진다.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 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 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높아버릴 떄까지 저울은 저울이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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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대표 박영우)와 종로구가 주관하는 제6회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수상자로 함민복(49)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앉은뱅이저울' 9.

 

윤동주해외동포문학상 부문에는 미국 거주 김은자(53) 시인, 젊은작가상 부문에는 차주일(49) 시인이 선정됐다.

 

윤동주상은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2006년 제정됐으며 대상 수상자에게는 1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시상식은 57일 오후 3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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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켜는 여자 / 도종환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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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정지용문학상의 수상자로 도종환 시인이 선정 됐다.

 

지용회(회장 이근배. 시인)는 충북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이 지역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문학인들의 창작 의욕 고취를 위해 주최한 제21회 정지용문학상의 수상자로 도종환 시인(수상작 '바이올린 켜는 여자')을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심사위원인 김남조 시인은 수상작에 대해 "명민한 관찰과 시정신의 깊고 따뜻함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문체의 순탄한 운행이 이 또한 좋았으니 바로 번쩍거리지 않으면서 광채가 있는 수사법이란 장점이 있어 수상결정이 쉽게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김 시인은 또 "시적 역량의 성숙도와 함께 수상작품인 '바이올린 켜는 여자'가 심사위원들의 찬동을 얻게 돼 무리 없이 전원 합의의 선을 넘었었다"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정지용문학상은 제1회 박두진 시인을 비롯해 김광균, 박정만, 오세영, 이가림, 이성선, 이수익, 이시영, 오탁번, 유안진, 송수권, 정호승, 김종철, 김지하,유경환, 문정희, 유자효, 강은교, 조오현, 김초혜 시인이 차례로 수상 했다.

 

시상식은 제22회 지용제가 열리는 내달 16일 오후5시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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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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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의 문학정신을 기려 지용회(회장 이근배)가 제정해 시행하는 정지용 문학상은 올해 18회째를 맞이한다.

 

강은교 동아대 국문과 교수가 올해 제18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상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문학정신을 기려 지용회가 제정해 시행하는 문학상이다. 수상작은 시집 초록거미의 사랑에 수록된 시 너를 사랑한다이다.

 

시상식은 지용문학축제 기간 중인 오는 513일 오후 230분 충북 옥천 관성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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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 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야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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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찌된 일인지 시쓰기의 어려움과 시인으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시를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곤 했던 지훈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생각하며, 시를 잃고 무엇으로 사랑하며,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무기를 삼을 것인가.” 이 말은 도망치려는 저를 다시 시 앞으로 불러 앉혔고,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집 야생 사과를 낸 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지훈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사실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과분한 격려인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떤 불편함이 따라붙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상소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되새김질하는 동안 이 상이 저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야생 사과라는 시집은 독자적인 새로움이나 성취를 보여주었다기보다는 과도기를 지나는 한 인간의 내면적 고백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과도기란 한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자, 파괴와 혼란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 시들을 쓰는 동안 저는 어떤 시를 써야겠다는 지향보다는 다른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하지만 한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그것을 축조해나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막막한 노릇이었습니다.

 

시집을 낸 후에 저는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한 삶의 조건이 시에 집중할 수 없도록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편 의도적이고 긴장 어린 직무유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를 완전히 내려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낯선 자신을 붙잡고 끙끙거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의 파편들을 받아적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했지만, 단 한 편도 제가 시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파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료하는 일을, 그리고 시라는 완제품을 여기저기 납품하는 일을 제 안의 또 다른 는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부는 완강했고, 그 앞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다른 시’ ‘새로운 시를 원하고 있는 그에게 저는 예전의 타성대로 따르기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묵묵히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제 내면적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자장(磁場)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 지훈의 이름으로 다시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등단 이후 제가 줄곧 속해 온 시의 영토는 지훈이 지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에 비교적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균형감각은 저에게 부정해야 할 덕목으로 느껴졌고, 재현적 언어에 대한 회의도 강해져 갔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훈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환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상의 목적은 그 상이 기리는 시인과 아류의 시인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롭게 확장하라는 권유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지훈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지훈을 비롯한 청록파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전통과 현대성의 도식적인 이분법에 기초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훈의 시와 시론을 읽다보면 그가 현대성에 둔감한 시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했던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훈이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전통과 접맥하는 지점에서 논리의 모순을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혼란을 향한 감행이 오히려 안정된 고전주의자의 신념보다 한결 시인다운 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芝薰이라는 풀초( )’자가 나란히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며, 그의 풀잎斷章이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한 줄기 바람에 조잘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이 구절을 읽으며, 풀처럼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기에 바위처럼 굳은 정신과 지조 또한 가능했으리라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지훈 선생이 남긴 삶의 자취와 예술적 풍취 앞에서 제 문학의 자리는 아직 볼품없지만, 그 오롯한 길을 따라 걸으려는 마음만은 간절한 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은 저의 재능이나 성취보다는 스스로의 무력함과 싸우면서 통과하고 있는 혼란의 여정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절기를 앓고 있는 제 시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베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나남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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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 선생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드높은 품격과 고아한 향기는 이후의 한국 현대시가 넘어야 할 뚜렷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훈 선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훈 선생의 시가 보여준 품격과 향기는 재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 지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며 풍기는 인품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삶의 품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지훈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이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많은 부박한 시들이 보여주는 깊이의 결여를 걱정하면서 심사에 임했다.

 

지훈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송찬호, 나희덕, 최승자, 이병률 등 6~7명의 시인들이 생산한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논의한 결과 수상 후보자를 어렵지 않게 송찬호와 나희덕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는 그의 반성적 상상세계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어구사 능력에 힘입어 한층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으며, 나희덕의 야생 사과에서는 에 대한 응시와 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고통의 시간을 팽팽한 언어로 줄기차게 형상화하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이 두 시인의 시집 중 내용의 깊이와 형상화가 보여주는 미덕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쪽이 수상작이 되든 유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송찬호의 경우 동일한 시집이 중복수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나희덕의 야생 사과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20여 년에 걸친 시작생활이 만들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이 시집은 과거를 과거로 만들기 위한, 그러나 과거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반성적 언어의 집합이다. 나희덕의 그 같은 의식을 우리는 나는 바늘이다/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떨리는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라든가 나는 박쥐다/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쥐가 되지 못했다라는 말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워졌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와 결별하려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안개 속에 숨겨진 형체와 같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을 손쉽게 이루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이런 강렬한 반성적 성격 때문에 주어가 이다. 서정시의 일반적 화자인 1인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관적 1인칭으로서의 가 그의 시를 지배하는 주어이다. 그리고 이 는 반성적인 의식과 자세 때문에 긴장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이 시집의 미덕을 이루는 팽팽한 언어, 팽팽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나희덕이 결정적 순간이란 시에서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란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고 쓰고 있는 시구가 바로 그런 미덕의 소산일 것이다.

 

또한 나희덕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반성적 의식이 만들어낸 완전한 결별이며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이번 시집은 이런 완전한 순간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게우는, 그리고 시간과 풍경과 삶을 재인식하고 재정비하는 줄기찬 노력의 성과이다.

 

시인 조지훈의 시와 정신과 생애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간 시인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은 지훈 선생이 걸어간 길을 편협하게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최근의 경박한 시어에 대응하는 팽팽한 의미의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 상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희덕 시인에게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시인이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를 통해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오생근 정현종 홍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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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시인의 시집 <은빛호각>을 읽으면서 내내 스미던 느낌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들을 한 편의 시로 그림처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솜씨가 유유하다. 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그림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그림들 속에는 참으로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묵은 기억들이 은빛호각소리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웃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만큼의 꽃송이들이 봉긋봉긋 피어있다. 소설집 한권을 읽고 난 기분이 들만큼 수런수런, 수많은 얘깃거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칼날 같았음 직한 일들도, 가슴이 에였음직한 일들도....... 그 힘겨웠을 기억들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내다니, 기억이 추억이 되면 이토록 따스해지는 것인가. 시인에게는 저세상마저도 편안하고 따스한 자연으로 보여 지는 가 보다.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차부에서> 전문

 

새벽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추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 플라스틱 수조 얕은 물을 튀기며 미꾸라지들이 아주 순하게 놀고 있다. <> 전문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잠들기 전에> 전문

 

삶이란 -새벽녘 추어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도 물을 튀기며 순하게 놀고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이 한 데 섞여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 채, 그저 불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그 떠다니는 것들과 하나씩 입 맞추며 가는 그런 것이 삶이리라. 깊고 추운 겨울날, 은빛호각 한 개 품에 앉고 뜨신 방에 엎드려 펼쳐 보기를 권한다.

 

 

 

 

은빛 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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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존경하는 김종길 선생은 최근 어느 잡지(시와정신2004년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른바 시격(詩格)에 관한 격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시비평에 있어서보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간혹 격의 높낮음을 이야기할 뿐이라며 옛날의 한시비평에서도 격의 고하, 즉 시적 가치의 위계는 있었다중국 역대의 격이론을 살펴보면 예쁘거나 기이하거나 강렬한 것보다도 유원(幽遠)하거나 고고(高古)하거나 담박(澹泊)한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야말로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우리 근대시사에서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훈 선생의 모든 시가 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 시 읽기에 눈 밝은 신경림, 정희성 시인이 공편한한국현대시선,Ⅱ》(창작과비평사, 1985)에 수록된 지훈 선생의승무(僧舞),고사 1(古寺),낙화(落花)는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시는바 시격의 위의(威儀)를 두루 갖춘 기품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적 정서 또한 유원하고 고고하며 담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자유시임에도 마치 고조(古調)의 정형을 연상하듯 2행씩 끊어 쳐서 웅혼하고 유장한 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청년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왔지만 내면을 스치는 어떤 서늘한 기상과 호소하듯 절제된 애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낡지 않은 채 제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후배 시비평가는 저의 이런 느낌을 실상 모든 시는 그것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미 시계의 시간에서 탈출해”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는영원의 시간을 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훈 선생의 작품 중 이렇듯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라면 저는 선뜻고사 1을 들고 싶습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릿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40여 년 전에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제 마음은 제2연의 고오운에서 크게 한번 출렁거렸는데, 오늘 그 구절을 반복해 읽어도 제 내면의 리듬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출렁! 합니다.

 

세상에는 상도 많고, 좀 외람되이 말씀드리자면 아예 없었으면 하는 상도 많지만 이렇듯 고매한 인품과 기풍이 서린 지훈상을 받는 제 마음 또한 조찰히기쁩니다. 65년 전인 1939년에 지훈 선생의 시를 세상에 처음 내보낸 지용 선생의 어느 시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를 한 느낌입니다. 그토록 두껍고 완고한 동토(凍土)에도 이제 막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여기 오신 모든 분들께도 새로운 기운이 가득 생동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느라 애쓰시는 분들, 심사하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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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조지훈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지훈상의 심사에 임하면서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도조지훈 전집에서 볼 수 있듯이 청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술적 성취와 호한한 학문적 탐구, 그리고 준열한 지사정신을 통해 이 땅 정신사와 예술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20034월부터 20043월까지 출간된 주요시집 100여 권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다음 세 권이었다.

 

먼저 조창환의수도원 가는 길(문학과지성사)은 자연에 대한 그윽한 명상이 종교적 영성(靈性)을 느끼게 할만큼 맑고 깊은 것이어서 관심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지훈시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의 준열함이나 치열성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김영석의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시와시학사)는 정련된 시어와 정신의 지향성이 매우 높은 성취를 보여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씌어진 시들이 흔히 그렇듯이 굵고 깊은 울림을 던져주는 데는 다소 아쉬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시영의은빛 호각(창비)은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섬세한 예술의식이 탄력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정신의 울림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이시영 시인이 등단 이래 견지해온 지사적 기품과 성정이 서정성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어서 지훈정신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심사위원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앞의 두 분도 지훈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과 업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어차피 수상자는 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유보되었다. 앞으로도 지훈상이 더 훌륭한 분들에게 주어져서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는 큰 상으로 자리잡아가기를 희망한다.

 

심사위원 김재홍(경희대 국문과 교수)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홍기삼(동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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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에서 / 고형렬


  이상한 집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외진 口字 한옥
  두 남자가 설거지를 하다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오후 5시였다.

  여자는 어색하게 5호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뒤따라
  구두를 벗고
  몸을 감추듯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안고.
  돌아앉아서 신을 가지런히 밖으로 세워두는
  여자는 얼굴이 작은 편이다.
  한참 뒤

  젊은이가
  물과 물수건과 메뉴판을 가지고 돌아왔다. 남자는 소머리
국밥을 시켰다.
  여자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물러나갔다.

  방안은 정적이 있었다. 뜯어진 도배지 틈이
  붉은 황토를 내보이는 흙벽돌집이다.
  김포 석양이 동편 벽을 비추고 있었다.
  작은 창을 가린 처녀아이 속치마 같은 하얀 커튼 사이로.

  '현대식 건물이 아니다.'

  남자는 나그네, 여자는 돈 받고 따라온
  색시 같았다.
  그녀는 중매를 두고 처음 따라온 사람처럼 쳐다보고
  웬일인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얼마 만의 둘만인가.
  계속 둘이 말없이 뭔가를 기억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음식상을 마루에 내려놓고
  노크를 한 것이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롭고 즐거웠다.

  "예."
  잠시 후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나더니 드르륵
  문이 열렸다. 청년은 상 앞에 예바르게 앉는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살이 흰 김치와 삭은 깍두기
를 올려놓고
  뚝배기를 올려놓고,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여자 같았다.
  그때 둘은 합장하듯 총각을 쳐다보며 "예." 하고 얼른 대
답했다.

  여기가 한국인가 싶었다. 웃음이 나왔다.

  뽀얀 사골 국물에
  삼베 쪼가리같이 얇게 베어 넣은 소머릿살
  접시에 담아온 썬 파를 한숟갈 넣고 굵은소금 한스푼 넣
고 맛을 보았다.
  국물이 진하다.
  소 사골은 어쩌면 이렇게도 사람의
  젖처럼, 뽀얀 국물을 내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작은 스테인리스 그릇은 뜨거웠다.
  뚜껑을 여니 김이 나는 김포 하성의 하얀 쌀밥
  김포 땅은 어쩌면 이렇게 백미를 만들어내는 걸까.
  그랬더닌 다시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진 쌀밥은 잘 익어서도 반짝이고 곤두서 있었다.

  '이런 식사도 참 오랜만이구나.'

  여자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술 사이로 가져가고,
남자는
  후루룩 시끄럽게 떠먹는다.
  여자는 참하고 남자는 짓궂다.
  남자는 소리까지 지른다. "아 맛있다. 시원하다. 정말
달다."
  여자는 말이 없다. 누님같이.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자
는 다 그렇지.

  다 먹을 때까지 국그릇이 따뜻했다.

  밖엔 간혹 낙엽 궁구는 소리뿐
  둘이 조용한 방에서 수저 소리만 딸가닥이며 국을 뜨고
있었다.
  바람의 기척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웬 두 남녀가 5호실로 들어가서 말없이 가만히 밥만 먹
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른 생각도 생길 만한데 머리는 조용하다.
  허리띠를 묶으며 여자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
은데
  가방에서 잘 접혀진 냅킨 한장을 꺼내 입을 닦는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하룻밤 자고 갈까?" 여자는 웃기만 한다.

  하룻밤 자고 가고 싶은 곳이었다. 정말 하룻밤을 자고 나
가는 사람들처럼
  둘은 해가 지는 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을 나왔고,
  남자는 음식값 만원을
  지갑에서 꺼내 아쉽게 계산했다.

  집 안과 길이 서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작은 대문을 배웅
하듯 따라나오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은 웃으며 "예, 안녕히 가십시오." 하였다.

  오랜 세월을 그런 에티켓으로 살아온 사람 같았다.

  남자는 저만큼에서 운호가든집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그냥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보지 앉았다.
  코트를 입은 그녀 허리가 행복해 보였다.
  주인은 들어가고 없고
  운호가든집만 거기 서 있었다.

  먼 훗날 어느 겨울 저녁, 혼자 운호가든집을 찾아갔더니
주인은 바뀌고 하얀 수박등 하나가 눈발 속에 서 있었다.
상 건너편에서 소머리국밥을 맛깔 있게 먹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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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전아하고 선미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조지훈선생의 문학의 뜻을 기리는 지훈상을 받게 된 것은 저로서는 의외의 일입니다. 그 의외 속에서 문득, 까마득한 옛 시절을 간신히나마 건져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무한으로 분열되고 경사가 가팔라지는 듯한 세계의 현실과 환상 속에서승무,고풍의상,낙화의 시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분쇄된 듯한 시대는 저항하다 못해 이젠 버려진 형국으로 치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불현듯이 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지는산사의 고우운 상좌 아이가 부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미 외면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논리, 변명, 대안은 있는 것 같지만 우리를 안심시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훈의 정치하면서 고풍한 언어가 살아 있는 세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럼으로 하여 그의 시풍은 우리 시에서 몇 안되는 시적 추억으로서 제 가슴속에 살아서 불고 있는 혼과 바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별이 있는 밤의 깊은 하늘을 향하는 을 통한 구도적 혹은 구애적 시경이며 이 지상의 아침에 낙화함으로써 보여지는 의 인연상은 점점 깊어지는 화두처럼 저에게 새롭게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너무나 험한 지경에 다다랐을지라도 더 이상은 파편화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어느 마음이든 지훈 시를 찾아 읽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란한 세상 속에서 지훈 시풍을 다시 기억하며 조용해지는 시간을 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꽃을 떨구었던 그 나무에게 있었을 법한 이름 지어지지 않은 성품을 느끼면서 다름 아닌 저 자신의 품속에 잠시 머물라고 위로하며 독려하고자 합니다.

 

언제나 부족할 뿐인 저를 수상자로 선정한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시 한번 이 나라의 어느 산중에서 한개 별빛에 모두우는눈동자를 기억하고 당대마다 소란한 정황 속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스스로에게 울고 싶은 아침이 없지 않았다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서 저는 꽃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꽃이 또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 바람들이 몸을 뒤집어주는 잎사귀 뒤켠에서 열매가 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집니다. 허전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네 자식들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이 걸리기를 다 자라야만이 갈 수 있는 지훈의 서역 만릿길이 이제는 초단위로 변하는 세상이라도 저는 더 먼 길을 골라 걸어서 갔으면 하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어찌해서라도 완전에 다가가는 누림을 얻고 느끼고 몸에 담고 알아서 건너가기를 또한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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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芝薰의 이름이 붙은 문학상의 수상자로는 선생의 인품과 학덕에 걸맞는 업적과 개성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작은 지훈이나 뒤에 온 지훈을 찾아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지훈이 뒷세대에게 기대하였을 창조적 활력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선생의 웅혼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0014월부터 20033월까지 지난 2년간에 발간된 200여 권의 시집 가운데 심사 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주목한 시집은 모두 네 권이었다.

 

홍신선의 자화상을 위하여는 삶의 방식과 윤리적 기준이 뿌리부터 바뀌는 우리 시대에 자아의 자리를 역사적으로 정립하려는 한 선비 시인의 노력이 담긴 진지한 시집이다. 오랜 시력을 증명하듯 시어 하나하나에서 높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학자적 조심성에서 기인했을지 모를 강한 자기검열과 번잡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이 시집의 장점이 상쇄되고 있지는 않은가 느꼈다.

 

함성호의 너무 아름다운 병은 문명 비판적 시선과 실험 의욕, 그리고 시적 서정이 긴밀하게 어울려 있는 특이한 시집이다. 재치가 깊은 감정을 자극하고 언어는 빗겨 달아나면서도 힘차다. 안타까운 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화적 코드들을 너무 자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담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이 형식과 언어의 실험들은 시인을 사로잡고 있는 문명의 허황함을 흥겹고 애잔하고 어지럽게 증명하는 지점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유종인의 아껴먹는 슬픔은 저자의 첫 시집이다. 젊은 날의 고통과 상처와 좌절을 높은 탄력으로 노래하는 이 시집에는 이른바 잘 빠진 시가 많다. 말이 색깔과 선율을 아울러 누리고 있어 이 시인의 타고난 재능을 드러낸다. 심사위원들은 이 젊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리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저자는 두 번째 책부터라는 프랑스 속담도 있다.

 

수상자로 선정된 고형렬의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쾌적한장치가 없어 그 장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유에도 상징에도 크게 의지하지 않는 그의 시들은 자주 산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집을 천천히 주의 깊게 읽는다면 삶의 깊은 슬픔과 사물에 대한 고양된 사랑이 아프게 전달되어 오며, 항상 앞서 나가는 말을 막고 시가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우직하게 진실에 천착해온 이 시인을 존경하게도 된다. 한 걸음씩 천천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이 시인에게 지훈상을 주게 된 것이 기쁘다.

 

심사위원 황현산(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혜순(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이성원(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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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발 / 정호승

 

 

비가 온다

집이 떠내려간다

나는 살짝 방문을 열고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는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신발이 떠내려간다

나는 이제 나의 마지막 신발을 따라

바다로 간다

멸치 떼가 기다리는 바다의

수평선이 되어

수평선 위로 치솟는 고래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당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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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시작과 계간 '시작', 지리산문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지리산문학상의 제4회 수상자로 정호승 시인의 '물의 신발' 4편이 선정됐다.

 

지리산문학상은 그동안의 공모제에서 기성 시인들의 지난 한 해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심사제로 전환했다.

 

특히 올해부터 지리산문학상은 ()천년의시작.계간 '시작'과 지리산문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문학상의 새로운 도약에 걸맞는 수상자 선정을 위해 유안진 시인 등은 심사위원들의 고심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격론 끝에 근자에 들어 삶과 죽음, 바보와 성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 의식의 심화와 확장을 보여주고 있는 정호승 시인이 제4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시인으로 선정됐다.

 

한편 제4회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이은희의 '달의 아이' 4편이 선정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수상을 하게 된다.

 

한편 지리산문학제를 주관해 왔던 지리산문학회는 전국에서 드물게 올해로 30년을 맞고 있는 문학회로 그동안 매년 '지리산문학' 무크지를 발행해왔으며 김륭시인을 비롯해 문병우, 정태화, 권갑점 등의 시인과 노가원, 곽성근 작가와 정종화 동화작가 등을 배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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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  도종환

 

 

우리가 세운 세상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찬장의 그릇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비명을 지르고
전등이 불빛과 함께 휘청거릴 때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줄 몰랐다
우리가 지은 집 우리가 세운 마을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났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폐허만이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여진이 몇 차례 더 계곡과 강물을 흔들고 갔지만
먼지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풀이 돋기 전에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종을 울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숲과 새와 짐승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노천 물이 끓으며 보내던 경고의 소리
아래로부터 옛 성곽을 기울게 하던 미세한 진동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햐 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
충격과 지진은 언제든 다시 밀려올 수 있고
우리도 전능한 인간은 아니지만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로 등을 밝히고
떨리는 손을 모두어 힘차게 못질을 해야 한다
세상은 지진으로 영원히 멈추지 않으므로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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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55 ·사진) 시인이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계간 서시가 선정한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지진9편으로, 시상식은 57일 서울 부암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열린다.

 

도 시인은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작품을 발표한 이후 그동안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해인으로 가는 길7권의 시집을 냈다.

 

윤동주문학상은 자유와 생명, 민족사랑 등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6년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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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의 시작(詩作) / 안도현

 

 

고니 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 꽁무니에 물결이 여럿 올올이

고니 떼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 물결이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다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수면의 검은 화선지 위에

고니 떼가 붓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있지만

웬일인지 썼다가 고요히 지워버리고

또 몇 문장 썼다가는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저 문장은 구차한 형식도 뭣도 없으니

대저 만필(漫筆)이라 해야 할 듯,

애써 무릎 꿇고 먹을 갈지 않고

손가락 끝에 먹물 한 점 묻히지 않는

평생을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얇은 서책 한 권 내지 않는 저 고니 떼,

이 먼 남쪽 만경강 하구까지 날아와서

물 위에 뜻 모를 글자를 적는 심사를

나는 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쓰고 또 쓰는 힘으로

고니 떼가 과아니, 과아니, 하며

한꺼번에 붓대를 들고 날아오르고 있다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

나는 어찌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간절하게 참 철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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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예지 '서시'()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가 주관하는 제2'윤동주 문학상'의 문학 부문 수상자로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사진)10일 선정됐다.

 

민족상에는 박문일 전 옌볜대학 총장, 평화상에는 오스트리아의 마가렛·마리안 수녀, 자유상에 김현길 지리학 박사(시애틀 거주), 해외동포문학상에 이성호(캘리포니아 거주) 씨 등이 각각 뽑혔다.

 

문학 부문 수상자에게 1천만 원, 나머지 부문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200~300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29일 오후 6시 서울 열린극장 창동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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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을 말하는 일은 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처럼 끔뻑일 때

 

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

허공의 연못인 의 골짜기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천년은 가지 않고 묵는 것이니 옛 명부전 해 비치는 초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

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

 

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

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는 유일한 사료이므로

 

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

 

허공을 쳐 연못을 판 의 골짜기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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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천년의시작과 계간 '시작(詩作)'이 주관하는 제2'시작문학상' 수상자로 신용목(34)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인의 자의식을 어금니 꽉 깨물고 인내하는 듯 토해 낸 시집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창비).

 

상금은 1천만원이며, 시상식은 530일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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