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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보다 / 유종인

 

 

버드나무는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줄기 가지로 옅은 바람을 탄다

흰 말이 곁에 있었지만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버들은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말은 예민한 짐승, 잘못 건드리면

주인도 태우지 않고 먼 들판으로 달아난다

거기서 말의 고삐와 안장은

들꽃들의 우스갯거리에 불과하다

이 흰말에 죽은 말벗을 태우려 했나니 이 흰

말의 잔등에 앉아 영원을 달리려 했더니

 

버드나무는 고삐도 없이 수백 년 한자리에 묶이고

잠시 매인 흰 말은 무료한 투레질로

오월 허공에 뜬 버들잎에 허연 침버캐를 묻힌다

가만히 버들가지가 말의 허리를 쓸어준다

흰 말은 치뜬 눈동자가 고요해지며 제 눈의 호수에

버들잎 몇 개를 띄어준다 눈이 없는

버드나무는 말의 항문을 잎끝으로 간질이자, 말은

()이 안 든 허공에 뒷발질을 먹인다 허공은 죄가 없으므로

멍이 들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는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 말과 버드나무

사이에 능수(能手)와 능란(能爛)의 연리지(連理枝) 고삐 끈이 늘어진다

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

흰 말은 꽃 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

친연(親緣)의 한나절이 주인을 빼먹은 일로 갸륵하다

 

* 공재 윤두서의 그림. 보물.

 

 

 

숲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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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부끄럽고 일천한 얘기지만,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지리산을 와 보지 못했다. 지리산은 문학과 관념 속의 지리산이었고 같은 한반도 안에서 언젠가는 가봐야 할 막연한 명산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지리산이 내게 하나의 의미있는 존재로 서서히 그 명암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어떤 글이나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기운에 가까웠다.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돌올해졌다. 무엇이든지 하나의 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만한 높이와 넓이와 그늘의 바다를 거느려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라면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은 내게 하나의 전환기적인 분수령으로 다가드는 드넓은 품일지도 모른다.

 

아득한 세월 저편에 나를 유목하듯이 내버려두고 이제와 이 높은 뫼의 자락에서 다시금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나의 바람이자 실제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온몸으로 다가와 이 산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땅이 내게 전해준 서기(瑞氣)를 예전부터 감지하고 있었고 그 막연한 도움 속에서 내가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친의 관계로 이 땅에 살아있음을 확인해준 산이 있다면 그 맨 앞자리에 지리산을 두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쩌면 이 순간의 만남 속에 지리산에서 무엇이든 회복할 수 있고 소멸된 그 어떤 것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런 면에서 지리산은 내게 가장 늦된 만남이자 가장 원초적인 선험의, 아니 영험의 큰 뫼로 이미 우뚝했음을 선선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지리산의 기운이 잠재돼 있음을 일깨워주시고 그 문장의 연분이 이제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있음을 보여주신 함양의 모든 분들과 지리산에게 그리고 시문이 또한 지리산 같아야 함을 부족한 글에 독려해 주신 정일근 선생님과 송수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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