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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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쓰기는 제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몸이 배고파서 밥을 찾듯이, 목말라서 물을 찾듯이, 내 몸이 원해서 저 스스로 한 일입니다. 내 몸이 그것을 원한 것은 그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내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뒤척이며 몸 밖으로 나오려고 용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없고 형체 없는 생명체가 자신에게 맞는 언어의 형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입는 순간, 몸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등단 전의 습작기간에, 몸 밖으로 나온 것은 괴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눈뜨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습니다. 내 몸 속에서 충분히 숙성되고 발효되지 못한 것들이 직설적으로 배설하듯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제 습작과정은 그것에 이목구비를 붙이고 피부를 입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주 흉하지 않게 되었을 때 겨우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속에 든 것들에게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맞게 한 것이 지금까지의 제 시쓰기입니다.
내 몸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시쓰기는 자족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자족적인 일이 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 시를 쓸 때의 절박함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니, 그 동안 써온 시들이 하나의 관습이 되어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관성의 속도가 자기에게 편승해서 손바람을 날리며 쓰기를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시가 안 써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저는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내 박약한 의지와 우유부단과 그것을 합리화해 줄 여러 사정에 의해서 억지로 쓴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써지지도 않고 그래서 꽤 오랫동안 쓰지도 않아서 이러다 정말 시를 못 쓰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아예 시가 계속 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삐딱한 생각을 하면 갑자기 시가 솟구쳐 나와서 아슬아슬하게 시인의 이름을 이어가곤 했습니다.
이번 상을 받게 된 시집인 《소》의 ‘시인의 말’에서 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너무 건조해서 불면 먼지가 날 것 같은 머리와 가슴. 도저히 시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그래도 시가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시키기 때문.
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미 제 몸은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물기가 다 말라버렸습니다. 도시와 아파트와 자동차와 온갖 편의시설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 수 없을 만큼 몸은 도시문명에 오염되었고, 많은 본능적인 감각들이 퇴화되었고, 자연과의 친화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제 몸은 시를 쓰기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불구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가 나오는 제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제 몸 속에, 어두운 곳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괴물이든 자신에게 맞는 형체와 이름과 언어를 부여받고 싶어하는, 갇혀 있는 생명체가 있어서 그것이 햇빛과 바람이 있는 곳으로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들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저희들의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내 상상력을 압박하여 몸 밖으로 강제로 밀고 나오는 것입니다.
시쓰기는 자족적인 일이니, 쓰는 행위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상을 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송구스럽게도 여기에 더하여 상을 하나 더 얹어 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일에 ‘지훈’이라는 큰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을 받게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제 시의 왜소함, 부족함, 시에 대한 저의 소극적인 자세가 갑자기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지훈 선생님의 투명하고 엄격한 눈앞에서 다 들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제 시를 보는 눈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저에게 큰 격려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훈문학상이 저에게 주신 반성의 뜻과 격려를 다같이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것들로 새로운 용기를 제 몸에 수혈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 격려해 주신 세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이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는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갈라진다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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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심사위원들은, 지난 2년 동안에 출간된 모든 시집들을 심사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지훈문학상의 규정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기 안에 발간된 김기택의 《소》와 박형준의 《춤》, 이정록의 《의자》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기택은 사물에 대한 독특한 관찰과 치열한 탐구정신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점에서, 박형준은 경쾌한 상상력의 전개와 현대적 서정성을 조화롭게 연결시킨 점에서, 그리고 이정록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개성적인 표현방법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모두 수상자가 될 만한 시인들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수상자를 정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김기택의《소》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시적 진실을 엄정히 추구했던 지훈 선생의 문학정신에 제일 가까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기택의 《소》는 도시적 삶의 비인간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비관하거나 절망하는 어조를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도시생활의 이모저모를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의지로 관찰하는 가운데, 일상인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새와 나무, 평범한 동물과 미세한 벌레의 움직임 혹은 생명력을 통해 우리의 삶과 현실을 냉정히 반성하고 희망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이성적 반성의 노력과 희망의 의지뿐 아니라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긴장된 시적 정신과 진실에의 강한 열정도 예사롭지 않은 시인의 미덕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발간된 지 1년이 지난 이제 뒤늦게나마 이 시집에 지훈상의 영예가 돌아가게 된 것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자 한다.
심사위원 오생근 김주연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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