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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꽃피는 의류 수거함 / 유택상

 

아파트 모서리 헌옷 수거함 앉아 있다

혼자 앉아있기에 미안한지 쓰레기통 끼고 있다

조금만 다가서면 배고픔으로 식욕을 가지고

설렘으로 끓고 있는 심장, 반 쯤 열려진 창으로

옷가지를 가지고 손을 밀어 넣으니

따뜻한 살덩어리들이 만져진다

철지난 옷이 들어간 봉지 속옷가지들

때 절은 아이들 웃음이 보름달로 웃고 있다

놀이터에서 할퀸 미소 꽃별로 꾹꾹 눌러져 있다

밤하늘엔 버려지고 잘려진 것이

또 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세상

비정했던 톱날이 비정함을 잊지 않기 위해 파문처럼 번진다

어둠을 잡아 두는 것은 칠흑 같은 환한 세상을 꿈꾸는 일

쇼핑몰마다 날개 달린 충혈 된 옷들이 허공을 향해 서로

등댄 틈새로 모든 벽을 향해 눈물겹게 꽃망울을 매다는 것

버림받아 어이없는 낯빛으로 시름시름 누워 있어도

바들바들 떨면서 모스부호로 남는 일

추락한 개인사의 상처 그대로 피안이다

구겨진 치마 속에 숨겨진 채근담들

아직도 꺼내어 펼쳐보던 노랠 듣지 못했다

살아온 날들이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고

헛기침 하며 어둑어둑해져가는 얼굴들

눈물이 푸르게 반짝인다

철이 지나면 너나없이 던져지는

이삿짐 속 낙관주의들

아파트 공터 앞 헌옷 수거함은 패션도 폐선이다

눈부신 적막의 풍요함속

구멍 난 양말이 무르녹아 살 비비는데

구부러진 것은 실루엣이다

 

수거함 속 헌옷들

살 비벼 살아가고 버려진 마을 어쩌지 못해

떠나고 다시 오는 사람은 품고 시절을 잇고 있다.

 

 

 

 

 

 

 

[우수상] 생몸살 / 황금숙
 
늦봄이었어
벚꽃들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피어났지
바람이 살짝 한번 스쳤을 뿐인데 다 떨구려고 들었어
꽃눈이 쌓여 갈 때
나 멋모르고 아득하게 휘날렸던 것 같아
 
넋을 놓고 바라보았지
아마 그쯤이었을 거야
정신없이 꽃잎은 쏟아지는데
푸른 가지 하나 느닷없이 툭 부러지던 때가
천둥 번개도 이보다 더 요란스럽지는 않았어
 
얼떨결에 나도 덩달아
한숨을 내려놓을 뻔 했지
생가지 꺾인 곳은
해마다 소금 같은 벚꽃을 피워
 
오늘도 늦봄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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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 임유영

 

모자 하나가 멀리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았다. 가벼운 짚으로 만든 모자 같았다.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팽이 크지 않아 보였다. 리본이나 꽃 장식도 없었다. 끈이 달렸는지 모르겠다. 크만큼 시력이 좋지는 않았다. 아케이드의 마네킹 위에 모자가 얹혀 있으면 나는 그것들을 약간 두려워하며 지나친다. 모자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누군가의 머리를. 머리 중에서도 이마를, 땀이 맺힌 이마. 주름이 잔뜩 진 이마. 검버섯이 가득한 이마. 이것은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내 조모의 이마. 조모께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으셨다. 그것이 얼마나 여성답지 못한 일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조모는 개의치 않으셨다. 옅은 이맛빛 잔털로 살짝 덮임 조그만 이마. 이건 내 조카의 것이다. 조카의 머리통은 덜 여문 배를 억지로 나무에서 따온 것처럼 생겼다. 그애는 늘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쓰고 외출한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조모님을 모시고 이 호숫가에 온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조식을 마친 뒤 온 가족이 조모님을 부축해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호숫가로 밀려온 물이 뭍에 닿을 때마다 흩어지고 다시 밀려갔다. 조모님이 중얼거리셨다. 바다......바다......바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이 파도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

 

오년 전 나는 호수에 한 번 뛰어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출렁다리는 출렁거렸고, 내가 뛰어내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눈을 감고, 다른 한 손 끝과 양발 끝을 힘주어 모으던 짧은 순간에, 어, 이건 제대로가 아닌데, 생각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입고 있던 흰색 반바지와 베이지색 티셔츠 대신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휴양지의 병원 응급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나치게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머리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지끈거렸고.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을 끔벅.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흰 것들. 그것들은 긴 벌레처럼 움직였다. 호수에 사는 커다란 기생충이 내 눈알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나를 발견했다는. 얼굴이 새카만 남자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박수를 짝, 짝, 짝 치더니 주먹을 쥐고 허공을 흔들다가. 기지개를 켜며 뒤돌아 떠났다.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자신이 한 일에 흡족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저희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반복할 뿐이었다.

 

 

 

 

아침

 

  새 아이보리 비누를 뜯어 세수했다. 가방에서 튼튼한 주머니 두 개가 달린 푸른 면직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양 소매 끝에 자개로 만든 단추가 세 개씩, 등뒤에 두 개가 달려 있는 옷이다. 단춧구멍이 너무 작아 끼울 때마다 고생스러웠다. 그러니 풀어지지도 않겠지. 누가 일부러 잡아 뜯지 않는 이상. 양말은 연회색 실크 양말을 가져왔다. 검은 구두는 어젯밤 미리 닦아두었다. 구두가 푹 젖을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었다. 비 오는 날엔 결코 신지 않았던 양가죽 구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구두. 졸업식에도, 처음 피어노 연주를 들으러간 공연장에도, 부유하지만 엄청나게 부자는 아닌 친구들을 만났던 시내의 식당에도 신고 갔던 것. 유치한 장식은 없지만 은근히 굽이 높은 구두. 굽의 바깥쪽마다 색이 열게 닳았다. 굽은 두 번 갈았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빨리 닳곤 했다. 구두방에 갈 적마다 멋쩍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더 기울었답니다. 혹은, 저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중 만났던 사람들. 왼쪽으로 스쳐지나갔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말하고 싶지 않다. 고백하고 싶지 않다. 최종 끝.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

  거울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자 했던,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자 했던, 저 갈색 눈동자. 밤의 겉껍질을 둥글게 오려붙인 듯한.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던. 두 개의 논. 죽은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을까?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시체, 시체에겐 비밀이 없다. 시체는 폭로일 거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폭로. 아무래도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 발견될 때를 대비하면 그쪽이 낫다.

 

 

 

 

 

아침

 

오믈렛.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사각사각 씹히며 풋내를 살짝 풍기는 피망의 향기. 아주 잘게 썰린 햄의 질감과......버터. 강렬한 버터의 향기. 불에 충분히 달궈진 버터와 부드러운 달걀의 신비로운 조화. 신적인 것. 강렬한 것. 달걀과 불과 기름, 약간의 소금과 후추. 그러나 어떤 비법에는 아주 적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마치 독약의 이로운 활용법처럼. 설탕이 독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설탕의 혐오자들은 의사가 아니라 알콜중독자들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단맛을 싫어하다못해 거기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달콤한 것은 오직 술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 아침을 만드는 사람의 손. 안주를 만드는 손. 여자. 여자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럼 세계의 손. 여자가 가진 손. 레이디스 핑거. 쿠기의 이름. 알코올 중독자 중에도 여자가 많은데 누군가 그들에겐 각별히 키친 드링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사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알코올 중독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침

 

간밤에 바에서 가벼운 프로세코를 한 병 주문했다. 산듯하고 청량했다. 천천히  두 잔을 마신 뒤에 아페롤과 칵테일 글라스를 청했다. 글라스에 아페롤을 약간 따르고 거기에 프로세코를 가득 채웠다.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초여름의 휴영지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로세코가 다 떨어져서 우아한 동작을 즐겁게 감상했다. 샴페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 나가니 호숫가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스민 향기와 잔디 깎은 냄새, 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호수 위로 잔물결이 부서진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다. 완벽한 밤이었다. 체라스 난간에 올라가 그대로 떨어지고픈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쓰던 중 내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옷깃을 여미고, 글라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의 갈색 트렁크와 푸른 원피스, 잘 닦아둔 검은 구두가 그대로 잘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글을 쓸 뻔했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

 

 

 

 

 

 

아침

 

  손목시계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시계는 내가 가진 가장 무거운 금속일 것이다. 얼핏 보면 번쩍이는 금팔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황동으로 만들어 저미도록 얇은 금박을 입힌 시계다. 나는 과시적인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유행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크고 빛나는 것을 목, 귀, 손가락에 전부 휘감는 대신 팔목에 하나 정도 걸기. 이것이 내가 유행을 따르는 방식이다. 치장의 욕구는 내가 잘 조절해온 충동의 하나다. 갑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죽임당한 여자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여자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지. 장신구를 사는 데엔 돈이 든다. 고귀한 여자는 돈을 쓰지 않는가? 성모님이라면 돈을 쓰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성모상은 얼마나 화려한가! 성모님도 죽은 여자라고 볼 수 있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집에 성모상과 초로 꾸민 간이 제단을 갖추고 있지만, 이제 초를 밝히고 성모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깊은 강바닥에서 댐을 만드는 수부들은 납덩이로 만든 허리띠를 찬다고 한다. 시계를 찬들, 허리띠를 찬들, 내게 손목이나 허리가 남아 있으려나.

 

 

 

 

 

 

아침

 

  멀리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공들이 높이 떠오르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 놀고 어른들은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한다. 그토록 조용히던 밤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다니. 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려 이곳에 왔지. 숱한, 헛된 밤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양산을 쓴 숙녀들의 속삭임도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다.

 

 

 

 

 

 

아침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누군가는 알아차려 주리라. 얼마나 지나야 할까? 누군가. 누구일까? 여러 명일까? 단 한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남자일 것 같다. 그이는 뜨내기 순정일까. 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남자일까.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을 수도 있지. 상관없다. 아니, 상관있다. 나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죽은 장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죽은 자의 얼굴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눈썹을 높이 들어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킬까. 경험이 많은 중년의 경감일지도 몰라. 수영을 잘하는 어린 아이라면 어쩌지? 엄마 심부름을 끝내고 한달음에 호숫가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고 날씬한 전갱이처럼 헤엄치던 아이라면 어저지. 그 애가 여자애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달려! 전속력으로 뛰어가렴. 가가운 건물 쪽으로. 옷은 되도록 주워 입고. 네가 발견한 끔찍한 광경을 가장 먼저 만나는 어른에게 알리렴. 너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괜찮아. 털어놓은 다음엔 되도록 빨리 잊어. 전부 잊어버려. 친구들에게 너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떠벌려도 좋다. 그럼 더 빨리 희미해지겠지. 이보다 더 무섭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걱정 마. 금찍한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모두 잊어버려.

 

 

 

 

 

 

차회 예고

 

다음 편에서도 주인공은 죽지 않고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예고,

대신 조연 중 누군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나는 손수건을 꼭 쥐고 울 준비를 하고.

울고 난 뒤의 지루함을 버틸 채비를

과자를 준비한다. 우유를 따른다.

다음 편의 그다음 편에도

예고가 있나? 이야기는 계속

되나? 여보세요.

가다듬은 목소리로 자,

 

왼손 역지 끝마디에

새카만 점이 한 개 생겼습니다.

구두점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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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노래

 

마음은 고여본 적 없다

 

마음이 예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영영 예쁘게 있을 수는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계속 무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은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미주와 미주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책을 읽다가

 

뒷목 위로

 

언젠가 미주가 제목을 짚어주었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미주를 바라보았을 때

미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해도 미주의 마음이 따뜻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없는 것이라서, 마음이 흐를 곳을 내버려둘 뿐입니다.

 

너는 미주의 노래와 만난 적 없다

미주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주의 노래일 뿐이다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낮에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밤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말이 생각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공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진짜 같은 말과 가짜 같은 말들, 아마도. 조금은. 언젠가와 같은 단어는 마음이 숨도록 내버려두기 좋습니다. 진짜 같은 마음에 취하도록 빚으시고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날들.

 

어쨌거나 말은 지금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이곳을 맴돌다가 누구의 귓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이 흐를 때 말은 곧이곧대로 흐르기로 결심한다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얼굴들, 당신이 기억에서 왔다면 이 꿈이 끝난 뒤에는 어디로 갑니까. 누구에게 건넨 말들은 누구의 귓가에 뿌리내립니까. 영영 모르는 이의 귓가로 흘러가는 가요. 평생을 솜털처럼 날아가는가요. 내 뜻과는 상관없네요.

 

사선으로 놓인 빛을 따라 말들이 지나간다 시간보다 이른 속도로 도착하고 있다

 

그 애는 혼자서도 먼 곳으로 흐르며 일렁이고 있다

영원히 오해받을 수 있는 시간들 오해받아야 하는 시간들

언제고 뒤늦은 시간들 속에서

 

 

 

 

 

 

내게 기쁨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우리는 언덕 위에 일렬로 서서 총을 겨누고 언제나 충분히 죽이지 못해서 그 환한 낮이면 다시

 

낮마다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나는 당신을 죽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늘 같은 하루를 살고 당신에게 겨누며

우리는 얼어 죽였고 당신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내게 기쁨만을 알게 해줘요 당신은 언덕을 올라오고 싶지만 언젠가 도착하고 싶지만 않고 조금은 발을 멀리 뗀 채로 그래야만 바다에 떠밀려 짖지도 않고 그렇다고 발 딛고 살아갈 용기는 없는 그렇게 언덕을 닿지는 못한 채로

 

영원히 언덕을 올라가고만 싶은 사람으로

 

그렇게 남아주세요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둔하게 웃어요 영원히 달려요

 

 

 

 

 

 

물 위에지은 집

어젯밤에 삼킨 알약이. 아침까지. 씁쓸하게 맴도는 이유가 뭐야. 몰라. 알 게 뭐야

 

언제부터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이 익숙해졌을가. 외로울가봐 나는 집에도 못 가요. 이상하고 어눌한 사투리로

 

씩씩하게. 올라가는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가방근을 두 손으로 쥐고. 명량만화에 나오는 누구처럼. CCTV를 노려보며. 익숙해지지 않도록. 중요한 느낌이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숲에 물감을 엎질렀는데, 다행히 홍수를 피해서 다시 색칠할 수 있어요. 다시 색칠하면 돼요.(정말?) 오늘은 명량소녀 내일은 말괄량이. 그래도 항생제는 쓰리게 녹고 나는 녹아내리는 그의 집이 되고. 

 

그럼 언젠가는 나 쉴 곳도 내가 될까요?

 

놓인 것은 열하나. 약은 물에서 느리게 녹고, 쉽게 삼킨다. 너도 위로가 필요하니. 고개를 숙이면 쏟아지는 하루. 혼자 돌아오는 길도 모르는. 저 너머의 수도꼭지

 

 

 

 

 

 

식도염

 

집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가장 괜찮은 기억을 낚으러 가는 일입니다

 

닫힌 문을 열며 머뭇거립니다 생경한 예감입니다

 

안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만큼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 방으로 들어갑니다 저 방에 들렀다가 다시 나와도 됩니다

여전히 내 방이거든요

 

손님이 끊긴 지 오래인지라 가지고 있는 기억은 조약합니다

 

해묵은 독에서 어제의 쌀을 길어 올립니다

낡은 가구를 고쳐 쓰는 일이 즐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이 안에는 오직 내가 걸어온 무구한 길

손수 만든 발자국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초대하지 않은 그림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누구 여기에 있으라 한 적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이곳을 지깁니다

 

묵은 쌀의 까끌함이

살아 있다는 괴로움을 쏟아붓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의 쌀을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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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4편 / 정성원

 

 

일정한 무게를 가진 안개

폐가 부풀어 하늘로 붕붕 뜬다면 누구 배 좀 눌러주실 분?

 

허공에서 소녀가 뿜는 안개는 단조로운 모양이야

 

이를테면

 

안개공장장이 소녀로 가득 찬 옷장을 가졌다든지 한 명씩 꺼내 속을 갈라본다든지 겉은 늙고 속은 생생한 아이러니를 마주한다든지

 

옷장의 소녀가 갈라지는 건 단추야

그럼에도 심장이라 우겨볼까

 

상관없고,

 

소녀는 달마다 죽은 태양을 낳는다

 

죽은 태양에 뿌리내린 안개나무, 온기를 흡수하지 못한 꽃송이, <찾습니다> 전단지가 소리 지르며 피어나는 계절에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수많은 실종이 만개하는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멈추지 않는 는개,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멈추지 않는 노래,

 

상실은 자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노래를 뿜어내는 굴뚝에서

 

포식자가 된 안개를 모른 척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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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잠들지 않는 밤엔 해바라기를 생각해요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양털베개를 벤다 양은 찢어진 입과 긴 손가락을 가졌다 숨을 마시려 배를 달싹일 때마다 밀쳐둔 잠이 일렁인다

 

해바라기 뿌리에 숨겨둔 태양은 집으로 갔을까

어리석은 글자를 쓴 날엔 더욱 허기지는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입속으로 쏟아진다 단단한 글자가 심장을 찌른다

손가락을 펼치니 한낮이 보이고 한밤이 보이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나를 빼곡히 알아가는 밤

불면은 불멸이 될 것이고 내 몸엔 양털이 돋을 것이고

 

해바라기가 허공으로 길을 내는 곳에서

 

눈을 감는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꽃이 핀다 꽃잎이 흩날리는 벽지에 잠이 뒤척인다

 

점점 두꺼워지는 어둠

기분을 굽힌 잠이 어둠을 삼키다

 

일흔아홉 여든 마리,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다가

 

빙글빙글 도는 해바라기 벽지를 본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

 

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시를 배운다

시의 해석을 받아 적는 것은 신물 나는 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네모난 창

위로의 말이 창밖에서 서성인다

 

이팝나무와 나비를 구분 못 하는 눈이 나에게 필요할까요 눈을 바람에게 주고 깊은 잠에 빠질까요

 

수척한 바람이 손짓을 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구름 쪽으로 가닿는다

 

구름 너머 보이는 아버지

바다에서 출렁여야 할 당신이 햇볕물살을 그물에 담고 있다

 

빌어먹을 아버지,

나는 지금 푸른 비늘이 필요하다고요

 

이쯤에서

아버지에게 날개를 입혀주면 흥미로울까

 

. 생각 말고 잘- 생각하라던 문학 수업은 순전히 말장난

형식적인 문학 선생은 건조한 기호

아버지와 나는 아빠와 구름이라는 단조로운 공감각

언어를 탐색하는 우리는 일그러진 교실의 자화상

 

끝나는 종이 울린다

날개 입은 아버지가 손을 뻗는다

 

구름이 곡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가락선인장

 

장마가 시작되면 마르는 것을 생각해

비의 그림자가 버석거린다 냄새는 말캉하고

 

죽으면서 경쾌한 비

 

젖는 곳이 있다면 한쪽에선 증발하는 마음

 

공평한 방식으로 비가 내린다

 

비의 얼룩이 지워지면 백단이 핀다

오아시스로 가자, 서로의 손가락을 깨물며 광활한 모래 언덕으로 가자

 

갈망은 처음부터 목이 마르는 목적을 가졌지

그것은 행선지를 방황하는 모래알갱이처럼 우리의 방황이 깊어진다는 말

 

등을 구부릴 때마다 굴곡진 생의 촉수를 달고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는 너를 생각할래

 

백단 숲에 손가락이 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흔들린다

비의 내용을 기록하는 손가락이 버석거린다

 

 

 

 

 

 

혼자 울어야 해서 시시한 상상만 해요

 

 

비밀을 도모했대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을 갖기로 했다는 말이래

비둘기 깃을 빌려 입고 하늘에 가까워질 때 시력을 나눠주기로 한 거래

 

꽤 기분 좋은 날이었대

 

손바닥을 펼치면 별의 잔해가 빼곡했대

그런 날은 많은 문을 그렸대

반짝이는 것을 보면 다 열 것 같았던 문은 종일 닫혀 있었대

 

뒤를 보아야 하는 순간을 모른 척한 거래

그렇다고 앞을 보는 것이 쉬웠다는 말은 아니래

 

쉽게 죽어야 하는 것들과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대

하늘이 내일이라는 말 같아서 내일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대

 

비둘기는 어쩌다가 인간의 눈을 탐내게 되었을까

 

비둘기 깃을 빌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눈이 흐려졌대

비둘기는 자기가 사람 족속이 다 된 줄 알았대

 

뜸뜸하게 운 것 같기도 했다는데

 

별 냄새가 진동하는 밤에는 눈이 먼저 아파왔대

 

비둘기가 눈알을 쪼아 먹는 상상을 했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활짝 펼쳤대

 

비둘기 깃을 입었대

날아야 하는 순간에도 발은 그대로 땅이더래

 

우리는 비밀에 침묵해야 했대

침묵할수록 또렷해지는 순간이 스펙트럼으로 터지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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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  4편 / 문이례

우리(We)와 우리(Cage) 사이

 

 

밖은 우리의 함정이었다

 

울타리를 친다는 건 거부의 표시일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게 관계망이라면 문 안쪽은 안전하다는 거겠지, 포식자가 걸어온 길엔 왜 자꾸 문이 사라지는 거니! 서로를 겪는 방식이 달라 곳곳에 우리가 필요했지 우리는,

 

우리가 있어 슬프다가도 우리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생각

 

아이들과 동물원에 온 인솔교사는 호랑이보고 귀엽다를 난발하고

발톱을 감춘 호랑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들의 뇌 속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해는 척, , , 돌아가고

 

어제는 아버지랑 실랑이하다가 휴지통이 날아왔지

변화구를 던지듯 심각하게 노려보던 눈

 

누군가의 내일이 여기라면

사각이 좀 더 안전한 방법이길,

 

모서리는 깎이더라도 우리의 안전이 될 수 있다는 모순!

 

매일매일 갇힌 동물처럼

어느 것 하나 함께라 부를 수 없는 나의 우리를

동물원 가서 묻는다, 갇힌 슬픔이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것

물려받은 유전자가 그렇다는 걸

 

동물은 왕국을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는 우리를 훌쩍 뛰어넘지 못하는데

밖은 여전히 우리를 뛰쳐나간 아이들의 뒤집기가 한창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가끔 내 눈에만 보이지만

선뜻 먹이를 주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는

 

목숨을 건

네모 속 갇힌 최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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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넛방, 그 숲

 

홀연 문을 밀면 나무의 말이 들릴까요

 

꽉 닫힌 그의 서랍을 열 때는 무엇을 먼저 꺼낼까

누구도 예측 못 한 새들의 변명은 겨울이명으로 남아

두 귀는 뾰두라지처럼 감정을 부풀리고 있어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지고 마는 폭설의 위협

어디까지가 그 서랍의 내면인지

 

자물통을 채우지 않아도

종종 열리지 않던

서로의 걸음은 그렇게 갈무리되죠

 

말의 눈꺼풀을 들춰보면 바람의 문자들이 적혀 있을 거예요

 

입을 닫고 각자의 방으로 흘러간 물관처럼

누구라도 소리 지를 것 같은 계단의 침묵

 

새벽녘, 초인종이 울리면 두려워요

숲을 훔쳐 사라진 달이라도 품어야 할지

아무 뜻 없이 읊조리는 후렴을 읽을 수 없어

모래폭풍이 지나간 빈방만 쳐다보죠

 

나무의 냄새를 좇고 있는

서랍 속엔 꺼내지 못한 말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냥 문을 닫기 두려워

내 귀가 열릴 때까지

 

새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죠 

 

 

 

 

 

청춘들

  

1교시

 

실제처럼, 어설픈 엉덩이라도 흔들면

 

가벼운 손뼉쯤을 받을 수 있을까 구령이 반복되면, 어쭙잖은 농담들은 계속해서 따라붙고,

애인은 묻지 않은 내 엉덩이만 놀리지

하나 하면 둘이 아닌, ‘ 하고 걸어가는 발맞추기

 

-여긴 민방위 훈련장입니다!

 

아무도 뛰지 않는

저 밀림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가는 공상으로

뒤뚱뒤뚱 엉덩이는 훈련 중,

술만 마시면 떠들던 옛 애인은

수영도 못하면서 해병대 나왔다 자랑질이고, 특수부대 나온 그 친구의 친구는 여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돈만 털리고 차였다지

어정쩡한 하루

발이 묶인 우린 별수 없이 애인이랑 훈련 같지 않은 훈련으로 뒹굴고 나면, 온몸에선 땀이라도 나야지

하루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지, 서로의 총구 갖고 장난치듯

가슴 향해

빵야…… 빵야…… 하고 싶은

 

2교시

 

모든 지하는 구멍으로 통한다는 걸,

버스를 탈출해 지하로 흘러든 날

암흑 속에 갇힌 짐승도 웃음꽃이 피었지

지하를 지하고

올라오면

지켜야 하는 게 뭔지도 모를

주어 없이, 주인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뿌루퉁해진 빨간 입술들

차라리 교복이라도 입고 뛸 걸 하는 생각

내가 똥개가 된 듯, 훈련 뒤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책상다리라도 있었으면

굴러가는 바퀴처럼, 치워진 책상다리 밑으로

이 도시의 착란을

 

민방위는 없고, 민간과 방위만 있는 21세기

 

교실로 들어서면 훈련보다 더 한 세상이 펼쳐지던 그때로 고! ! !

배가 고픈 아이처럼 매점으로 뛰어가던,

 

도로는 버스를 재촉하고

내 뱃속 훈련이라도 마치기 위해

이제 뛰어야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여전히 훈련 중인

어정쩡한 오후를 씹고 있는

청춘들

 

 

 

 

 

입양

   

250가지의 항목을 꼼꼼히 표시하고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

 

거품은 제거해주시고

속은 냉정하고 겉은 부드럽게

 

뜨거운 심장도 추가해주세요

 

커피에 샷 추가를 외치듯, 그 느낌만 품고 가족을 원하던 그녀

유리잔처럼 투명한 낯빛에도 가끔 그늘이 지듯

 

받아 든 주문서에 걸크러쉬한 속내를 내비치더니, 인큐베이터 속 빛이 들어오면 모르는 세계가 쿵, 떨어질 것 같아 조바심을 쳤다

 

카페 안엔 정자를 구하는 많은 여자가 주문서 들고 줄을 서고

 

아이 1, 2, 3, 4는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한 여자가 투덜거리며 카페를 나서도

서로의 감각은 아닌 척,

주문서를 뽑으면 다시 샷 추가할 수 없다는 경고문만 입구에 나풀거리는데

 

커피 그라인더에서 나온, 단맛과 신맛이 혀를 마비시킬 동안

씁쓰레한 세상은, 우리의 웃음과 눈물까지 걸러내는지

 

아빠가 없어도 찾지 않는다. 체크

혼자서도 척척 일을 잘한다. 체크

놀이동산에 가자고 떼쓰지 않는다. , 등에 체크를 하고 있는 이들

 

아이는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는

아직 잘!

차차 입맛에 적응되겠죠!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엄마가 내 첫인상을 견디는 것처럼

난 태어나 한 번도 울지 않는 나를 견디는

 

여전히 카페 안은 샷 추가로 붐비고 

 


 

 

 

반사거울

  

걷는 것이 서툰 아이에겐

주춤거리는 억양은 집에 두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숨겨진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아기일 때도 어른일 때도 항상 나는 없는, 난 나일 때가 제일 좋은

 

침대 밑에서 종일 입을 뾰족하게 만들지!

 

친척들을 만날 때는, 복사에 복사를 반복하는 입꼬리는 없어도, 거울만 툭, 툭 내밀면 난반사된 얼굴들 튕겨 나가는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제의 대화는 어디에 박혀 있는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그들의 궁금증

 

자고 일어나면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가 된 이야기, 입을 벌린 내게 쏟아지는 엄마의 알 수 없는 얼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나라는 아이는 하얗게 포장되어 침대 밑에 두고

사진 속 그는 책상에 앉아 고개만 끄떡이네,

 

울렁증을 앓듯 허파가 벌렁거려 쓸데없이 손톱만 뜯고 있는데

 

착한아이라서 그래,

그런 쪽팔리는 말 이제 사양할게

 

주머니 속 거울 꺼내 가십거리 얼굴 닦아내면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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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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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CTAL / 장미도

 

바이닐은 붉은 색이다 너는 신중히 지문을 고른다 그때의 PRM은 33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겹겹이 두터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날에는 45가 되기도 했다

 

바 자리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헤드 셸이 바이닐 위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떤 마음은 물속에 손을 넣어 물거품을 만지는 것 같다

 

통유리 창 안으로 햇빛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나날이 익어가는 얼굴이 앉아 있다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 경계를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왜 여기와 저기가 나뉘는 걸까

너는 빈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만지면

무언가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하수구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누군가는 뜰채로 죽은 벌레를 건져낸다

 빗방울이 수면을 뾰족하게 부수며 낙하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찾아가는 발걸음보다 빨랐다

옆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랑

폭이 좁은 허공에서는 왼발을 헛딛게 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

손이 허공을 휘저어도 밤은 무너짖 않고

 

음악은 뒷면에서도 가능했다

아주 천천히 개미는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한다

 

헤드셀은 늘 같은 부분에서 음 이탈을 했다

 

 

 

 

 

젤리의 사생활

 

포장지는 완성되었고 젤리는 불숙 끼어들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동하는 회색 구름

 

젤리는 그저 어느 날 툭 하고 나타난 것이다

영양 정보 설명서는 젤리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

 

포장지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불필요한 긴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젤리를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 철학자는 젤리에게 사회적인 성분이 함유되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나 그 성분이 어떤 맛을 내는 알 수 없었다

 

젤리는 고체도 액체도 아니었으므로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더 말랑말랑한 젤리를 고른다

 

젤리와 손가락을 햇볕에 전시해두면

방부 처리 되지 않은 손가락이 먼저 썩어갈 것이다

 

이것은 젤리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젤리는 혓바닥을 파랗게 물들이거나 이빨의 틈새를 파고들 수도 있겠다 미각을 뒤엎은 젤리는 질리지도 않고 포장지와 함께 늙어갈 수도 있겠다

젤리는 모든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

 

어제의 구름이 지나가고 오늘의 구름이 되돌아왔다

구름의 뒤통수가 같은 색이었던가 젤리는 알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틈에서

젤리는 당신과 함께 썩어갈 것이다

젤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델타의 방

 

0

삼가가형의 방 안에 D와 D'와 모르는 사람이 있다

 

0

나는 세 개의 꼭짓점 안에있다 D와 D'사이 기울어지는 선 안에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0

나는 세 개의 상상 속에 있다 어제의 밤도 휘어지는 새벽도

창밖에는 비가 온다고 하자 비가 내린다

 

0

D가 눈알을 굴린다 죽은 척을 하자 그날처럼 D의 칼끝이 심장을 찌르면 이미 찔렀다 하자 어쩌면 동공에 힘을 풀자 우리는 이미 사각형이라고 하자 D의 정수리에 칼끝을 찍어서 D'를 만든다 D''를 만들어 D와 엮는다 당신은 하나의 점이 된다고 하자

 

허공에 꼭짓점을 찍고 점과 점 사이를 접는다 방을 구긴다 우리는 방금 사랑했다고 하자 방은

 

0

45도 기울어 있다 파이프를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0에서 델타로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타원형의 손잡이를 돌린다

 

0

또 다른 삼각형의 방에서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입을 반만 벌리고서

 

델타와 O사이에 D가 있다

 

0

벽을 부수자 파이프 속으로 도망가자 아래에서 O 위로 추락하는 원

 

1

거리를 걸을 때마다 세계를 거대한 방이라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거리에 무수한 꼭짓점을 찍고 있다

 

 

 

 

 

사이에 선

 

선은 사이에 있다 선은 선을 넘어 사이는 단발머리

 

나의 선은 노랑, 품 안에서 잠들고 멀리서 깬다 줄무늬를 삼키는 선, 어둡고 습한 탁자 밑에서 토악질을 한다

 

선은 제일 늦게 뽑힌다 머리를 넘기는 손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아프지 않게 자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프지 않은 건 다 남의 것이다 주머니에 가위를 자기고 다닌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 없는 시계는 나뭇잎을 떨구고 벌레는 동그란 허공을 먹고 몸에 동그라미를 새긴다 선은 서서 그네를 탄다 무릎을 굽히고 도약하는 자세가 된다 선은 뛰어오르고 몸은 남는다

 

모래로 만든 케이크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열은 부러지고 하나만 남는다 생일은 한 번 분이라서

 

손가락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는 지워지고 손가락은 몸으로 돌아온다 손가락을 자르려면 손가락이 필요해서 자르지 못한다

 

가을과 몸은 등을 돌리고 잔다 아무렇지 않게 전구를 갈고 쏟아지고 엎어진 것들을 주워 담는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몸이 자란다 몸은 벽에 기대어 잠들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죽은 것에는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죽은 선을 죽은 선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오늘을 어제라고 부르듯이 손가락 끝에 동그라미가 남듯이

 

초가 타오르고 촛농이 남는다 왜 케이크에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 초를 꽂는 걸까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뛰어오른 건 무엇일까 이번 생은 한 번뿐이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은 생일 전후에 떠오른다

 

바다에 가기로 했었잖아 속눈썹이 눈을 자른다

 

무기명으로 발소리가 도착한다

선, 안 밟았어

 

 

 

 

 

레이스와

 

호수는 얼어붙고 쉽게 한 방이 된다 열린 창문 안족에는 레이스 레이스 커튼, 커튼을 찢으며 햇빛이 들어온다

 

커튼을 뚫리는 벽 실금이 뿌리 내린 흰 벽에 커튼의 그림자가 인쇄된다 접을 수 없는 페이지 벽은

 

움직이지 않는 커튼 정지한 수면

창밖이 흔들리고 갓 태어난 그림자의 얼굴이 뒤섞인다 그림자는 아니 벽은 서늘해서

 

고양이가 고양이의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다 3시에는 없었고 방문까지 닿을 것 같다가, 벗어날 것 같다가, 4시에는 약간

 

어떻게 약간이 가능하니 약간은 숨을 쉬는 내가 말한다

고양이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림자는 거대해지고 고양이를 거대하게 삼키고 옷장을 거울을 씹어 먹는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림자의 눈은 심장에 붙어 있다 가장자리는 모두 이빨

방을 삼키고 굳은 벽을 핥아 먹는다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부터 탄생한 혀로,

 

벽에서는 폐허의 맛이 난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레이스

레이스는 쓸모없고 출구도 없이 쉽게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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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세계 / 유국환

- 김경철을 기리며

 

들을 수 없어도 나는 보았지요

꺼칠한 손으로 애교머리를 쓸어내리는 여동생의 꿈을

 

말할 수 없어도 나에게도 꿈이 있었지요

기와를 굽더라도 어무이 배곯지 않게 하겠다고

 

갸가 어릴 때 경기가 왔는디

나가 뭘 모릉께 마이싱을 많이 맞아 부럿제

그 이후로 귀가 먹어 버렸어

 

사람들이 유행가에 어깨를 들석이는 날이었지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안고서 흘러만 갑니다

 

너 데모했지, 연락병이지?

어디서 벙어리 흉내 내?

손사위질 위로 햇살보다 몽둥이가 먼저 쏟아졌습니다

까마득한 곳에서 어무이 말소리가 들렸지요

 

내일 하고 모레면 부처님 오신 날인디

 

갸가 기와를 굽다가 가운데 손가락이 짤렷 부렷어

다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 요래조래 찾아봉께

가운데 손가락 없는 애가 딱 눈에 들어오던 걸

 

올해로 마흔 번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지만

울 어머니가 아들을 쓰다듬을 때마다

시커먼 땅속에서는

파란 잔디와 뜨거운 햇살이 살아난다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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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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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인드라망 / 이선

 

 

차 한 잔 들고 창가로 가면

맞은편 101동이 성큼 다가온다

먼 나라에서 내려오신 함석지붕들

푸른 하늘 모래알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자글자글 삼매에 빠졌다

꼼꼼하게 써 내려간 경문들

구절구절 기왓장마다

흐르는 법문이 팔만이겠다

이렇게 우리 마주 보는 거울이듯

모든 동과 세대들

주고받는 선문답이 무량이겠다

구구절절 날아드는 비둘기들

벽에 갇힌 창문들도 틈틈이 귀를 열고

질서정연하게 밖으로 향해 있다

한 치 흔들림 없는 수평의 감각으로

층층이 견뎌내고 있을 천장들

모두 하나같이 바닥으로 존재할 터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아래층에서 받쳐주듯

위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

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

누겁의 업장을 녹이듯

하루하루 달게 받들어 모시는 일

삼키고 삼켜도 끓어오르는 솥단지 삼독을

식어 버린 한 모금의 찻물로 달래는 지금은

녹음이 독물처럼 퍼져나가는 상심의 계절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들

수미산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 인드라망: 인드라(인도 신화의 천신)가 사는 궁전에 쳐져 있는 그물. 부처가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

 

 

 

 

[당선소감] “하루하루 견뎌내야 하는 일에 대한 시 쓰고파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고군분투하는 삶의 진실 앞에 누구나 절대적인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동네 작은 공원을 찾아 걸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동무들과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먼저 생기 가득한 화원 한 귀퉁이에 매어 체념한 듯 짖지 않는 개의 하루에 대해. 길머리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철부지처럼 피어 있는 꽃. 대책 없이 퍼져 나가는 신록의 잎사귀들. 개천가에 이르면 켜켜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처박힌 채 생을 건너고 있는 크고 작은 돌부리들. 뿌연 하수 물도 푸른 은하수를 찾아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존재의 진면모란 티끌 하나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별들도 반질반질 자기 궤도를 닦으며 돌고 도는 일. 어둠 속을 떠도는 외톨이별에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잊지 않는 일. 그의 등 뒤에서 잠시 불 밝혀 주는 일. 우주라는 망막한 거소에서 밥을 나누며 그렇게 우리 함께하는 사이. 거기 진땀을 흘리고 좌절하는 일.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앉아 고배를 마시는 일. 밤하늘 금송화처럼 피어나는 별을 바라보며 일어서는 일. 하루하루 다만 견뎌내야 하는 일에 대해 더듬더듬 쓰고 싶다.

 

무엇보다 졸작을 뽑아주신 유종호 선생님과 오탁번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용신인문학상에 성원을 아끼지 않는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 옥천군에도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또 외롭게 글을 쓰며 좋은 시를 출품했을 많은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평] 따뜻한 삶의 모습 형상화놀랍도록 참신해

 

지용신인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더해가는 것 같다. 올해 응모자는 300명을 훌쩍 넘었고 응모작품은 한 사람이 열편 스무 편도 응모한 경우를 포함해서 2000편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요즘 날로 더해 가는 시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당선의 영예를 놓고 겨룬 작품은 염종호의 금강초롱’, 윤계순의 그늘들은 가볍다’,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이었다.

 

염종호의 작품은 아주 정밀한 시적 장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내딛는 시창작 주체의 치열성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관습적인 창작 방법을 탈피하여 과감하게 만의 시세계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다. 윤계순의 작품은 느티나무그림자의 대조를 개성적으로 형상화한 시적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느티나무 그늘이 일렁거리는 모습을 온갖 사건 사고를 보도하고 비평하는 일간지의 페이지와 비교하는 재치 있는 수사가 너무 작위적인 비유라는 점이 아쉬웠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은 신인이 지녀야할 독창성과 새로운 시창작 방법을 고루 갖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햇볕 밝게 비치는 아파트의 지붕과 창문들의 풍경을, 엉뚱하게도 제석천의 궁전 위에 펼쳐진 보배구슬 그물인 인드라망으로 순간적으로 기막히게 변용시키고 있다. 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따뜻한 삶의 모습이 곡진하게 형상화되고 있는 놀랍도록 참신한 작품이다.

 

우리 삶이 아무리 고되고 험난할지라도 시인은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를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이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아래층에서 받쳐주듯/윗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지녀야할 시 의식의 첫째 자리가 되는 것이다.

 

심사위원 오탁번 시인, 유종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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