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등꽃 / 김형미

 

 

초여름 저녁, 등꽃 향기 밀려온다

 

아아, 배고픈 욕정이여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안주도 없이

술로 채워지는 위를 생각하기엔 나는 아직 젊다

이미 오래전부터 칫솔질을 할 때마다 구토가 일었으나

따지고 보면 고통이 나를 치유하고 있다

묵직하게 젖어오는 아랫도리

아릿한 아픔으로 부풀어오는 유두

담배 한 대로 삭히기엔 무척 오랫동안 굴풋했다*

빈 방에 누워 자위를 즐기는 일만큼 가슴 허한 일 또 있으랴

이불이 마른 땀으로 축축해질 때 쯤

세계가 내 안에서 밑동 째 뽑혀져 나가는 두려움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욕정이라면

내 그리움은 절망인가

절망인가, 술집의 객들은 서서히 비워지고

출구 쪽으로부터 등꽃 향기 밀려와 다시 자리를 채운다

사아랑은 나의 행복 사아랑은 나의 운명

천박하지 않을 만큼만 젓가락 장단 맞추는 등꽃 향기

발끝이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빈 잔을 채운다 결국

세상의 낭떠러지는 매일같이 마주 대하는 술잔 속일지도

살고 싶은 욕망으로 끝내 귀가하고 마는,

 

잔인한 초여름 저녁

등꽃 향기에 젖어 젖어

 

* 굴풋하다 : 속이 헛헛한 듯하다.

 

 

 

오동꽃 피기 전

 

nefing.com

 

 

728x90

 

 

이 세대는 느리다 / 김남용

 

 

486 낡은 세대를 부팅한다

오늘은 느리다

바탕화면에 뜰 워드를 기다리는 동안

시상이 달아나다 쓰러진다.

고장나면 나의 생명도 시든다

많은 작품들이 한꺼번에 손상될 때

말없는 기계에 폭언하는 일은

죽은 친구에게 우정을 말하는 것처럼

싱거운 느림이다.

새로운 시상도 사라진다

결연히,

전원을 끈다

486 낡은 세대를 접는다

첨단 기술이 녹슬지 않은 노트북,

그러나 이미 이 세대는 느리다

586은 돼야신제품이란 있는 것일까?

 

폐지더미에 깔려 있던 색바랜

원고지를 빼내오고

중학교 시절 기초 언어를 연습하던

만년필을 꺼내 잉크를 채운다

잠들었던 선들이 일어나고

맑은 점들이 알알이 번진다

지금까지 이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일은 두려웠고돌아볼

거울이라도 있었던가?

 

새로운 것을 바란다면 잊고 있던

기억의 서랍을 열어 뒤적여 보라

 

486세대를 서랍에 넣는다

 

 

 

728x90

 

 

자정의 비 / 김영산

 

 

순간, 골목 어귀에서 어둠이 비틀거린다 플라타너스와 체르니 사이 흩뿌리는 가랑비에 자정의 목덜미가 젖는다 푸른 선풍기 느리게 돌고 있는 주점은 칠부쯤 눈을 감았다 빗물 낯바닥에 어리는 불빛 아무리 밟아 뭉개도 꺼지지 않는다 우우 데모하여 바람의 꽁무니 쫓아다니는 적막이여 국제건강약국 낡은 입간판에 붐비는 부식의 시간이여 벼룩신문 어느 광고에 중고 희망 매물은 나온 게 없을까 가슴에 꽂힌 향기로운 절망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수천 갈래 생의 교차로에 녹색 신호등 플러그가 빠져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차 보내고 난 장의자에 길게 드러 눕는다

 

 

 

벽화

 

nefing.com

 

728x90

 

 

수인(囚人)번호 5705, 그녀는 애벌레를 키운다 / 유영금

 

 

그녀는 감옥 안에서 노래한다

노래하는 자유만 있을 뿐이다

노래는 자폐(自斃)를 살해하는 힘을 숨기고 있다

간수의 눈빛이 그녀를 옥죄일수록 흑()

노래가 애벌레처럼 쏟아져 나온다

다른 수인(囚人)들도 노래를 부르며 견딜 것이다

[견딤]보다 몸서리치게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아름다움의 끝에 닿으면 노래에게서 버려질 것이다

노래로부터 버려지고 싶은 그녀를 위해

누더기같은 수인(囚人)번호를 가위로 자른다

자르는 순간 다시 엉겨 붙는 속성을 지닌

더러운 번호, 징그럽게 알을 깐다, 오글거린다

그녀는 알았다, 감옥 안의 노래가 감옥 밖의

노래보다 살인적으로 자유롭다는 걸,

 

 

 

봄날 불지르다

 

nefing.com

 

 

 

728x90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 이영수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맑은 날과 희뿌연 날들의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듯 안경은 그 위험수위를 꼼꼼하게 따져 혼돈으로부터 날 구해 준다 내가 안경을 쓰면 안개들이 걷히고 아프리카 코끼리 들소떼가 막 몰려온다 안개가 몰려와 코끼리도 잡아먹고 들소떼도 잡아먹고 아프리카도 잡아먹힌다 내안경과도 흡사한 대식가의 입나도 세상을 먹고 있는 거지 걸신들려

 

안경을 벗으면 세상들이 안개처럼 빠져나간다 건물들이 흔들리고 서 있는 길들마저 꺼져 도시에는 늙은 바람만 몰려다닌다 내가 통째로 삼킨 아프리카 코끼리가 안경알을 깨고 정글 속으로 달아난다 핏줄을 따라 들소떼가 빠져나가자 서 있기가 힘들다 나 흔들리고 있는거니 저 보기 싫은 빌딩들의 정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니? 식인종들의 종친회의는 누가 해골지팡이를 집어던져 난장판이 되었지 미친 사람들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어느파가 몰표를 던졌니 그 무식한 족장들의 추격대가 날 발견했을까 안개의 정글은 흰 나무들만 돋보기 안경을 쓴채 나뭇잎을 읽고 있다

 

안경을 벗으니 배가 고프다 안경을 쓸까 말까

 

 

 

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

 

nefing.com

 

 

 

 

 

728x90

 

 

별어곡[別於曲] 1 / 김일남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하다 천지엔 아득한 눈발을 몰고 길 재촉하는 바람이 언 손 부벼 길들을 부르다 깊은 산울음에 몸 숨기고 너와집집 한 채 눈보라에 떨고 있다

 

그리워할수록 폭설 그치지 않는 내 가만한 그대, 겨운 내가 뚜욱뚝 부러져 실한 가지 한 짐 가득지고 어두운 눈길을 비츨거리며 그대 부를까 불러볼까 무장무장 깊은 산울음 가문비나무 나무 사이로 산은 산을 불러 추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그대 부르던 오랜 내 기다림은 눈과 눈들의 저 한사코 퍼붓는 눈발로 나를 가둔다 바라보면 그대 탁탁 튀는 불꽃 너머로 사위고 어지러운 발자국 함부로 남긴 채 쓰러진 나를 가만히 들추면 아아 잉걸 속, 다시 눈 뜨는 그대

 

그대가 깃들고도 눈 맞는 가문비나무 숲처럼 오래오래 쓸쓸한 것은 내 기다림에 익숙한 숲길과 그 기다림 속에 어느새 지어 버린 너와집 집 한 채 그대에게 내건 등불을 그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가문비나무 나무숲 오오 너와집 내 그리움에 갖힌 오오랜 그대, 그리워할수록 퍼붓는 눈과 눈들의 희디흰 아우성이, 그리움이 지은 집 한 채 허물듯이 허물듯이

 

내 그리움에 갖힌 슬픈 그대

내 그리움이 울어버린 눈보라

눈덮힌 깊은 산 가문비나무숲

내가 지은 너와집

 

 

 

 

주머니 속의 행복

 

nefing.com

 

 

진주신문의 95년도 가을문예공모 당선자로 시부문에 <別於曲 1>을 낸 김일남씨(32), 소설부문에 <언어의 형식>을 응모한 문재호씨(28)가 선정됐다.[연합뉴스]

 

728x90

 

 

배웅 / 박청환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팅기며 목놓아 울어대는 통에

십 리 오솔길 급기야 어미가 동행했다

 

장날 마실 가듯

어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 냄새 맡다가

나비 좇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 겅중겅중 뛰어와

마른 젖통 툭툭 치받던 길

 

아가, 주인 인상 좋아 뵈더라

외양간 북데기도 푸짐하더구나

말 잘 듣고잘 살거라

 

낯선 외양간에 울음 떼어 놓고

돌아선 울음

달빛 앞세워 새끼 발자국

되밟아 오는 길

 

큰 눈에 별 방울 뚝뚝

 

 

 

 

[당선소감] 뜨거운 용광로 보다 따뜻한 화롯불 같은 시 쓰고파

 

좋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늘 생각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화려하거나 심오하게 어렵거나. 이 둘은 일단 내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내게 남은 건 작고 쉽고 가난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좋았습니다. 작은 것일수록 진심을 꽉 채워 담을 수 있었고 가난할수록 따듯했습니다.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거대한 용광로보다 고구마를 묻어 놓고 둘러 앉아 부젓가락 헤집으며 가래떡을 구워먹는 화롯불 같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등단이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지요?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옥천문화원,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물에도 입이 있다는 것과 그 입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시인의 몫이라는 걸 알게 해 준 마경덕 시인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동료이자 선배이자 영원한 글쓰기 멘토인 이한주 시인, 아니 한주형! 고마워요. 오진엽 시인이 그랬던가요. 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내게도 그래요.

 

마지막으로 책 본다고, 글 쓴다고 툭하면 방문 닫고 처박히는 아빠와 남편을 그런대로 방치(?)해 준 두 아들과 마눌님, 고맙고 사랑합니다. 감사할 사람이 많은 나에게 또한 감사합니다.

 

 

 

 

 

 

[심사평] 비백과 약졸의 솜씨가 빼어난 작품

 

27회 지용신인문학상은 316명의 응모자가 총 2120편의 작품을 보내와서 어느 해보다도 양적으로 풍성하였다. 이렇게 시인지망자가 폭발적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현상은 현대사회가 아무리 물질만능의 시대이고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정보만능의 시대이지만 인간이 지닌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는 오히려 더욱 소중한 정신적인 가치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현대시사의 드높은 봉우리인 정지용 시인의 시적 성취는 이미 우리 민족이 지닌 원형적 상징으로 만고불변의 역사적 사실이 된 지 오래다. ‘지용신인문학상은 지용이 도달한 문학적 가치를 되새기면서 그가 이룬 모국어의 시적 성취 앞에 겸허히 경배 드리는 시인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묵밥’(윤영규), ‘구름 수선소’(최영희),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문예진), ‘저 오름으로 가’(김미경)배웅’(박청환)이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이다.

 

메밀묵밥구름 수선소는 시창작의 전형적인 답안처럼 단정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개성적인 파격이 안 보여서 아쉬웠다. ‘버슨분홍빛 소풍을 마치며저 오름으로 가는 개성적인 기교가 돋보였지만 그것이 시의 핵심과 만나 조응하는 시적 의미가 모호하고 평범하였다.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배웅은 너무 쉽고 무덤덤한 작품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잠깐 호흡을 멈추고 찬찬히 읽으면서, 어미 소와 송아지의 울음과 눈물이 행간에 숨어서 시의 영혼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알아채면 깜짝 놀라게 된다.

 

손끝의 기교만을 뽐내면서도 실상 시적인 알맹이가 부족한 작품들에 비하면,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 노래한 지용의 시세계를 지그시 눈을 감고 연필로 그려낸 원근법(遠近法)이 예사롭지 않다. 비백(飛白)과 약졸(若拙)의 솜씨가 긴 여운을 남기는 빼어난 작품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오탁번 시인

 

728x90

 

 

창문 / 차호지

 

 

오전이 다 가도록 누워 있었다 몸을 뒤척이고 이불을 걷어내고 다시 덮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서 열차가 들어오며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천장에 창문 무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방 안에는 필요한 것이 모두 있었지만 한번 사용하고 난 것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어서 새 것을 가지려  누군가 나가야 했다 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와야 했고 돌아오면 다시 누워야 했다 누워서 창문을 보다가 창문을 창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묻고 아직 그래도 되겠지요? 그래선 안 된다고 대답한 사람이 창문을 찾으러 나갔다가 바깥에는 창문이 여러 개 있어 어느 것을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며 무엇이 새 것인 창문입니까?  창 밖으로 보이는창문을 가리키며 이것이다 저것이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말했던 사람이 창문을 향해 나가고 열차에서 내린 사람이 열차에 타기 위해 열차가 멈추는 동안 창문을 통과한 새가 방으로 들어오고 새 것이었던 새를 찾으려 천장으로 걸어오는 사람이었던 이들과 천장에서 멀어지는 열차를 보며 침대에 누워 말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통과해온 창문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안은 너무 좁고 들어온 것들이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모험 / 차호지

 

 

친구는 떠났다. 내게 책을 맡기고 갔다

 

나는 책과 함께 떠났다

 

품에 안긴 책은 자구 흘러내린다. 나는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

 

친구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책을 데려갔으면 좋겠다

 

집을 찾아갈 수 있겠니?

 

책을 안고 구부정하게 걷는다

 

집에 가자. 책에 대고 말한다. 계속 말한다

 

책이 말을 하면 친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도망간다. 내가 왜 도망을 가고 있지?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책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서점 직원이 나타나 내가 책을 훔친다고 말한다

 

 

 

 

 

 

카운터포인트 / 차호지

 

 

방금 총성이 들렸다고 아침 조깅을 즐기던 외국인이 말했다. 나는 해변에 넘어져 있었다. 아직 개와 산책하는 주인도 없는 모래사장에. 없는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는 척을 했는데 정말 넘어져버렸다. 파도치는 해변을 보고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기 봐요. 무릎에 모래도 조개도 묻지 않았어요. 아가 깨진 유리를 발로 밟았는데 상처도 없어요. 밝히는게 없었거든요. 느낌이 이상해서 신발을 벗었는데 여기 바닥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래사장에서. 그렇게 여기서 같이 걷기로 한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서 같이 와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은 춥다고 말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느냐고 물으니 밖ㅔ 눈이 내리고 잇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여름이고 그 삶과 나는 같은 호텔에 묵고 잇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거짓말이 속상해 울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달랩니다. 그렇지만 눈이 오고 있는데 눈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잖아. 그렇지. 눈이 오지 않는데 오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지.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왜 언제나 이럴까 왜 만날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인에게 말하고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총성을 듣고 생각이 났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발사되었던 것이다.

 

 

 

 

 

 

 

캉기 / 차호지

 

 

캉기 씨는 유명하다. 친구와 나는 종종 캉기 씨 이야기를 한다. 그날도 캉기 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 캉기 씨 아니야? 친구가 말했다. 창밖을 보니 캉기 씨처럼 생긴 사람이 걷고 있었다. 세상엔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많지. 그런데 그건 정말 캉기 씨였다. 친구와 나는 창문 너머 캉기 씨의 걷는 옆모습을 보며 캉기 씨의 본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친구는 그걸 알고 있고 나는 모르고 있다. 나는 멋쩍어하며 진자 이름이 캉기 씨인 캉기 씨에 대해 생각한다. 캉기 씨는 나의 먼 친구와 함께 본 단편 영화제의 단편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캉기 씨의 이름을 보지 않았다면 주인공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이 캉기 씨였다는 걸 몰랐을 거였다. 펄럭이는 하얀 이불 빨래를 배경으로 캉기 씨의 옆얼굴이 정지해 있다. 친구는 울기 시작한다. 작년에 죽은 친구 캉기 씨 생각이 난다고 했다. 친구가 핸드폰에 저장된 캉기 씨 사진을 보여주었다. 캉기 씨는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다. 친구와 나는 캉기 씨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한참 이야기했다. 그동안 친구와 나는 자리를 계속 옮긴다. 좌석은 텅텅 ㅂ비어 있다. 캉기 씨는 무척 천천히 걷고 있다. 걸으면서 가가워지고 있다. 친구 얼굴에 캉기 씨 옆얼굴 모양으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캉기 씨의 이마와 캉기 씨의 코와 코가 닿아 있다. 그림자는 점점 둥글어진다. 얼굴 위에 얼굴이; 덮인다. 캉기 씨가...... 우리는 계속 이야기한다. 캉기 씨는 이쪽을 보고 있었을까?

 

 

 

 

 

 

 

의인법 / 차호지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일찍 죽을 거야 죽겠다는 말이야?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친구는 건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종일 어딘가 아프다고 했다 다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거나...... 친구는 물병 뚜껑을 열지 못할 만큼 힘이 약했지만 그렇다고 애를 스면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내민 물병을 나는 열어 왔다 그런 말 하지 마 말하면서도 친구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게 정말일 것 같았다 깨어 있는 대부분 시간에 친구는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 친구의 친구들이 친구를 찾아왔다 친구는 아직 자고 있어 아직도? 곤란한 얼굴로 친구의 친구들이 떠나갔다 그들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친구를 찾아왔었다 다음에 또 올지는 모르겠어 새벽녘 잠시 눈을 뜬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친구는 알겠다고 말하고 금방 다시 잠들었다 친구는 이제 잘 깨어나지 않는다 나는 친구 대신 친구의 일을 보는 게 익숙해진다 뚜껑을 돌려 여는 것처럼 내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 대신 친구의 옷을 사고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 몫의 밥을 먹었다 친구의 일을 하고 친구가 받아야 할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누워 있는 이불을 바꿀 것이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따뜻한 이불이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친구는 점점 늦게 눈을 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친구가 일어나게 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일찍 죽게 될 거야 나를 노려보며 말할 것이다         

 

 

 

 

 

  

728x90

 

 

[우수상] 희망 / 복연금

- 거미 한 마리

 

 

고층 아파트 계단 꼭대기에

집 한 채 지은 거미 한 마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나

바람에 떠밀려 왔나

 

마실 이슬 한 방울도

향긋한 들꽃내음도

눈부신 햇살도 느끼지 못할텐데

 

가늘게 짜놓은 거미줄이 흔들린다

어두컴컴한 사각 모서리 끝에서

생존의 찌가 흔들린다

 

깔끔하기로 소문난

1901호 젊은 새잭 눈에 띈 날

죽을힘을 다해 지어 놓은 무허가 집 한 채

 

한순간 먼지털이에

울울 감겨 사라지고

놀란 거미 한 마리

계단 난간 사이로

몸을 숨긴다

 

거미 한 마리

등짝에 희망 하나 들쳐 업고

아래층으로 아래층으로

기어 내려간다

 

 

 

 

 

 

[우수상] 어느 날 / 이재홍

 

 

찬란한 해 뜸에도

몸둥이는 굼벵이가 되고

두발은 지네다리가 되어 부산을 떨지만

갈 길은 멀다

 

해지면 검은 어둠이 허망해져

땅만 보고 퇴근 하지만

서산은 언제나 해를 기다리느라

저 만큼이다

 

가까워지지는 않지만 만정이 서린 동네 어귀를 돌아설 때

어둠은 도베르만처럼 달려오는 데도 매미는 운다

 

 

 

 

 

 

 

728x90

 

 

[우수상] 고물선풍기 / 김금숙

 

 

다 안다고 하셨다

 

툭 누르면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말을 건다

 

고맙다,

고생이 많다,

에고 좀 쉬어야지,

 

귀도 있고

눈도 있고

얼굴도 있다는 것을

 

다 알았다고 하셨다

 

 

 

 

 

 

까치밥 / 김금숙

 

 

누가

할아버지 까만 차에

똥을 사놓고 갔다

 

바로 위

전봇줄에 앉은

까치밖에 없다고

 

감나무 곡대기

빨갛게 익은

 

모조리

따버리겠다고

긴 막대기 들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