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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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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외 7편.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외 4편.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응, 그런 편이다> 외 5편.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외 6편.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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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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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년 11월.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제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응,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투’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외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외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응,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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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컵 외 4편 / 최은여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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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수상소감]

 

시를 쓰는 몇 해 동안 제가 사는 작은 도시 서북쪽 우리 동네 하천가에는 벚꽃과 접시꽃이 여러 번 피고 지고 수양버들이 새로 심어졌습니다.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하천 둑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를 묻고 새가 불러주는 답을 받아 적었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가끔 시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은 후, 필사하고 습작하던 A4 종이 뭉치를 정리했습니다.

 

나룻배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저에게 크고 깊은 등단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입니다. 그런 저는 하얀 종이배를 꼬깃꼬깃 접고 띄워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깊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종이배가 찢어지면 다음 날 더 두꺼운 종이배를 접어서 올라탔습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면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늘 혼자였고 또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시인과 대화하던 중 ‘작가’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솔직함을 시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작가’라는 단어 풀이는 노가 없는 뱃사공의 거친 손에 노를 잡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강 건너 아름다운 숲에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 다녀왔습니다. 서늘하고 고요한 시를 쓰겠습니다. 성실하고 미련한 글 노동자로 살겠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누군가가 서어나무 같은 시를 만나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허물어 시인으로 빚어주신 ‘수요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안도현 선생님, 김륭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께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시를 더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여기겠습니다.

 

 

 

[심사평]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

 

본심 작품

 

이은정 「생리전증후군」 외

최은여 「머그컵」 외

라환희 「화양연화」 외

이은우 「라라의 창」 외

김나형 「비둘기, 투신」 외

김수형 「야호에 찍는 마침표」 외

 

삼백사십여 명이 응모,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열기가 뜨거워지는 최치원 신인문학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섯 분의 응모작들은 그 가능성 못지않게 편차 또한 뚜렷했다. 모든 시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언제 어디서든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심사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시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생의 새로운 범주 혹은 미지의 세계)으로 만들어지거나 수혈되는 영혼의 양식에 가깝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두 분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이은우(「라라의 창」외) 씨의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음미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흥미로웠고,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설렜다.

 

이은우 씨의「라라의 창」외 4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밀고나가는 패기와 언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만큼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서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부 상투적인 진술들과 맞물려 사고의 깊이와 메시지가 다소 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라라의 창」의 경우 문장을 부리는 능력만큼이나 탁월한 이미지를 전경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마지막 연(“겨울이 노랗게/창을 두드릴 거야”)의 임팩트가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번 심사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제로 오랜 토론을 거쳐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새롭고 다른 시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된 서정을 새로운 시의 표면 위로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만의 세계를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와 이미지로 보여준다.「머그컵」이란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상투적이지 않게 혼융되면서 육체와 정신에 제각기 기댄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저항을 독창적으로 펼쳐 보인다.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서사가 단순히 읽히기보다 보이게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동참하게 하는 극화의 형식이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앵두를 줍는다//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로 시작,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튀어 오르고/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는 결말에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습작시간과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이다.

 

「미러링」, 「예민한 장난」, 「내 이름은 Run」등의 작품 또한 자연스러운 언술과 맞물린 서사의 개성적인 조형능력이 돋보인다. 사소한 일상을 담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같은 작품에서도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확인되듯 그의 시적인식은 얼핏 평범한 언술이지만 주술적이다. 극도로 개인적이면서도 우울(?)할 정도로 합창적인 현실과의 조우를 시적에너지로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더불어 이은우 씨에겐 어쭙잖은 격려 대신 조만간 시의 길을 함께 걷게 될 것이란 심사위원들의 예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글) 유홍준 / 예심위원 김경린 성금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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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 / 최지안

 

가난한 나의 말들은 금세 해졌습니다

 

낡은 소맷부리처럼, 당신에게 닿으면 올이 풀리는 날개들

 

시린 발 비비며 겨울을 읽는 동안

 

통장 잔고가 줄듯 심장의 말도 줄어갔습니다

 

당신에게 빌린 언어들은 붉은 딱지가 붙어 쓸 수 없습니다

 

뒤꼍에서 곱은 손으로 보낼 깃을 짰으나

 

늦가을 기러기처럼 떠나는 것을 시라고 한번 불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끊긴 안부들이 그렁그렁 내려앉은 꿈결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체통들

 

밤새워 계절을 건너간 꿈은 또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야 말고

 

나는 서랍 속에 얼음장 같은 종이들을 밀어 넣습니다

 

겨울 처마 밑에 쩔쩔매던 그런 문장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 끝에서 가끔 똑똑 햇볕이 떨어지기도 하는

 

 

[당선소감] 여기, 발화점

 

발꿈치 들어 살살 걸어봅니다. 지상으로부터 한 뼘 떨어져 걷는 사람이 시인이라지요. 휴대폰으로 건너온 당선이라는 말이 그 저녁을 휘저었습니다. 이름표 받아든 일학년처럼 이래도 되는 것인지, 내가 가져도 되는지 만져도 보고 기울여 보기도 하였습니다. 꿈과 잠 사이가 멀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얄팍한 발목으로 넘겨다 본 까마득한 저쪽. 물렁한 턱이란 없었지요. 한 생을 시만 먹으며 무명으로 소비해도 괜찮겠다 싶었으나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들은 파일 안에서 허옇게 낡아갔습니다.

 

끝동을 만지작거린 9월. 몇 편의 깃을 골라 저쪽 문턱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신 김윤배, 이경철, 안도현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 알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특히 열렬한 지지자인 두 딸과 축하 케이크를 먹고 싶습니다. 마경덕, 박지웅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수원 AK 시창작반과 시담 동지들의 응원 고맙습니다. 수필 스승이신 손광성 선생님 휘하 아가위회원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제 시의 발화점이 되겠지요. 이제부터 뜨거워지겠습니다.

 

40년을 디디고 살다가 얼마 전 떠나온 용인에게 안부 전합니다. 용인을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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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 제4회 남구만신인문학상 본심에 임했다. 용인의 구도심 어느 카페에서였다. 최종심에는 모두 열 사람의 응모작이 올라왔다. 다들 시적 수련의 흔적이 단단해 보였다. 우리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어떤 우연에 의해 시인이 탄생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과 훈련이 좋은 시인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습과 훈련의 흔적이 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가는 발을 만나고 싶었다.

 

새로운 신인일수록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말처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태도를 잘 유지해야 한다. 신인에게는 과거의 것을 본받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응모작들은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에서 망설이고 기울고 빠져나오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민의 자국이 역력했다. 그 고민은 사사로운 것과 공적인 것,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들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만 여러 사람의 작품에서 ‘애인’ ‘문장’ ‘언니’ ‘허공’ ‘언어’와 같은 시어들이 동시에 발견되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상이 시류에 편승하는 말의 패션이 아니기를 바란다.

 

꽤 오랜 토의 끝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압축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외 6편은 현실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시를 진행시키려는 의식이 강해 보였다. 자의식에 대한 편애와 고백의 시들이 넘쳐나는 때에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적잖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다 발랄하면서도 능숙하게 시를 전개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표현의 수사에 기대 멋스러움을 만들려고 하는 기술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롱꽃」 같은 시에서 “월세가 밀린 꽃이 아픈 허리로 비를 밟고 야근을 간다”는 표현처럼 삶의 신산함에 다정한 정감을 부여하면서 선연한 서정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의 긍정적인 세계관이 시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고통에 바늘 끝을 갖다 대고 그 고통을 달콤하게 만드는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올해 ‘제4회 남구만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최지안씨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6편이 선정됐다.

 

용인문학회(회장 이원오)가 주최하고 용인시와 용인신문사, 의령남씨 문충공파 종중이 후원하는 ‘남구만 신인문학상’은 조선시대 문신 ‘약천 남구만(1629~1711)’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시 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지난 2018년 제정됐다.

 

본심 심사위원단은 “최지안의 ‘그것을 기러기라고 부르겠습니다만’ 외 8편은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녔다. 이 사람의 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아주 강한데 그것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약천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등 시조 900여 수를 지어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벼슬을 그만둔 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집 ‘약천집’ 등을 남겼다. 묘역과 별묘 등이 모현읍 초부리에 있다. 

 

당선자에게는 상금 500만 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11월 27일 용인문화예술원 마루홀에서 진행되는 ‘2021 남구만문학제’에서 진행된다.

 

한편, 이번 예심은 용인문학 편집위원회가, 본심 위원엔 김윤배(시인), 안도현(시인), 이경철(시인, 평론가)씨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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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을 수 없는 가만히 동호회 외 6/ 변윤제

 

 

가만히 멈춰라.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시작된 동호회.

 

가만히 멈추는 건 무엇인가요 멈추는 것과 가만히 멈춤은 무슨 차이일까요.

먼지떨이를 쓸어내리며 생각했습니다.

수백 갈래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했습니다. 먼지떨이로 사람을 때리면 회초리가 되고요. 먼지떨이로 반찬을 집으면 젓가락이 되는데.

가만히 멈추면 가만히가 무엇이 되지요?

 

요를 펴면서도 생각했어요.

이불로 나를 돌돌 말아 쥐는 사람아. 김밥 놀이를 시키며 내 숨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아. 어머나.

오이의 기분은 희박하구나? 그래서 안쪽이 창백하구나.

 

그대여.

내게 가만히를 명령한 그대야말로 가만히의 명수.

타르트를 파는 저 세탁소를 보아요.

가루가 떨어져요. 옷걸이엔 밀가루 포대가 잔뜩 걸려 있답니다. 세제 대신 흰 가루 쏟아지고.

 

왜 우리는 항상 가는 곳만 가야 하나요?

이 세탁소에 온 손님은 아무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새하얀 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만이 매일 저 세탁소에 옷을 맡겨요. 검고 푸른 옷마저 희게 만드는 저 세탁소를.

완벽한 하얀색을.

가만히는 그렇게 꾸준한 일. 늘 하는 것을 늘상 반복하는 일. 그런데 제게도 가만히라니요?

 

가만히를 일생 기르면서 가만히를 가만히 가르치는 당신.

제자리에 멈춰 돌아가는 세탁기 군단.

 

진정한 의미의 세탁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었고.

당신이 찾아온 옷가지는 타르트가 되었고. 포도 향이 나고. 어떨 땐 빳빳한 쿠키의 감촉이 제 목젖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

그 말이 제 유년을 하얗게 탈색하는데.

발버둥.

토악질. 새하얀 구토물의 겨울. 가만히 동호회가 발버둥으로 완성되고야 마는데.

 

가만히에게 편지를 씁니다.

가만히야.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종류의 가만히는 원한 적 없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한 가만히 동호회.

가만히 부르는 순간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떨어져나가고.

제 털을 가만히 기르고 있던 먼지떨이가 부서져버리고.

벽에 가만히 스며들고 있던 내 등이 내 척추에서 떨어져나가서.

사방이 저로 가득한.

동호회라기보다는 가만히 의회에 가까워집니다. 가만히로 구성된 제국일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비명에 대해.

가만히 나라의 폭군으로서 명령합니다.

 

꺼져.

가만히 꺼져.

세상 모두가 일제히 발버둥친다면, 진정한 가만히가 완성되는 것?

 

시속 칠백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가만히 국민들.

도저히.

도저히.

결정적으로 나는 가만히 있게 되는 겁니다.

 

코끼리가 없는 코끼리 유치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코끼리가 들어오는 순간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무엇을 동경했는지.

육중한 네 다리와.

유치원을 기둥째 뿌리 뽑는 압도적인 코.

우리 귀여움이 바라왔던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힘.

 

그대여.

가만히 멈추라고요?

가만히야.

나는 나의 가만히를 끌어안습니다.

가만히의 기다란 코가 내 목을 살며시 조릅니다.

, 가만히.

그리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가만히 동호회.

 

 

 

 

최류자들

 

 

인도에서 온 아디타

 

냉장고에 넣은 여권은 기한이 줄어들지 않는다 믿는다. 아디타의 여권은 늘 차가운 곳에 케밥을 파는 그는 자신을 터키 사람이라 소개한다. 며칠째 팔리지 않는 양고기에 기름을 덧바르면서. 화전하는 걸 보면서. 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건 편지. 수증기가 올라오자 종이 접히는 소리. 당신 불법으로 온 거 맞잖아. 유통기한 지난 거라고. 배탈이 났다는 남자가 아디타의 뺨을 갈겼다. 두어 번 더 후려갈겼다. 노래를 부르며 양고기에 기름을 바르는 아디타. 기름기름. 고기고기.

 

안부의 나라

 

손님이 정말 많은 시장이었대요. 아무도 없어요. 어떤 날엔 제 가게에만 비가 내려요. 일인용 먹구름, 일인용 우울, 일인용 불법 체류, 일인용 범법자.

단 한 명도 앉힐 수 없는 비좁은 가게. 흰 앞치마를 입고 행주를 위로했어요. 돼지고기 전단지를 위로했고. 뚝뚝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위로했고. 위로를 위로했습니다.

제가 부친 돈은 잘 갔나요. 전화를 걸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제 소식을 걱정하기엔 그곳이 너무 행복해져서. 찬란이 영영 안부가 되어서.

 

일자리 소개소의 창가

 

우표로 쓰기에 적합한 증명사진들. 시장 골목마다 내가 데려다놓은 체류자들. 휴지에 항공권을 그리고 선물해주었다.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한 사람은 앉아서 잠들었다. 힐을 벗겨주었고. 패딩을 벗겨주었고. 또각또각 그 사람의 구두가 그자를 버리고 가는 걸 보았다. 비행기는 대체로 어항 속을 날고 있다.

 

대필

 

아디타는 돈을 많이 벌어요. (받아 적는 척한다.) 어제와 그제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어요. 눈 내리는 식혜 속을 함께 거닐고 싶어요. (??) 오늘은 물론 항상 기분이 좋아요. 잘 안 보이던 눈도 제대로 보이고요 (그는 머뭇거린다.) 정말이에요. 제 걱정은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에요.

 

소개소 창가엔 언제나 뿌연 안개. 제대로 쳐다보면 빼곡히 흰 우표가 붙은 창문. 걱정과 염려가 실질적으로 이곳의 눈을 가린다.

괜찮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속에 어두운 복도가 보이고. 괜찮습니다. 다시 들려오는 소리 속에 복도에 구멍이 뚫리고. 그 복도를 오려내는 건 빛나는 가위. 편지를 부치지 않는다.

 

유통기한

 

어느 날 세계지도가 그려진 거울이 배달되어왔다. 지우개로 가장 먼 나라부터 지우기 시작했다. 한 체류자가 그 거울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 말리지 않았다. 그들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 그들을 더욱 이용한다.

 

 

 

 

기분의 중력과 부력

 

 

혀를 질끈 깨물면 햇살의 방향이 달라지고

좋아

좋구나, 라고 발음하는 일만으로 기분에 부력이 돈다

정신병원에 갇혔던 스무 살 병상이 꼬리 치며 사라지는 뒷모습

 

그때, 꼬리는 의지랑 무관하게 헤엄쳤다

몸통이 꼬리에 매달려

수많은 물속을 여행 다녔지, 포식자를 피해 온 가족이 도망간 외할머니의 수조, 쉬는 시간이면 몰려와 날 때리는 물고기들, 어항을 빙빙 도는 정신병에 걸렸던 스무 살 폐쇄병동, 나를 둘러싼 부모의 동공, 그 물살과, 지느러미 사이로, 힘차게 헤엄쳐 다녔지

꼬리 짓이 더욱 세게, 왜 나에게? 몸통의 의문과 꼬리의 운동은 먼 곳, 온몸이 경쾌한 리듬을 그리다가

 

어느 날 바라던 바처럼 땅으로 걸어올라와

두 팔, 두 다리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밤마다 창밖서 끈적이는 즙이 흘러들고

 

천장에 아가미가 달렸어, 어느새 주억거리는 소리 속

수없이 많은 비늘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때의 몸을 걸어나갔고, 결국 꼬리에게, 왜 그랬어, 그런 여행을 왜 떠나게 했어, 파문이 되돌아오는 결 속

평범하게 잠이 들었지만

 

그러나 그날엔

커튼을 순식간에 젖힌 아침인데도

볕이 주춤거리며, 일렁거리며, 망설이는 파도처럼 밀려들었지

동틀녘 육지에 올라온 생선이

제 안의 초점을 조금씩 되찾는 모습을 보았듯이

 

이제 헤아릴 수 있어

물고기였던 사람의 기분엔 언제나 중력과 부력

 

침대에 누워 또 한번 혀를 깨무는 거야

그러면 침대 속 남아 있던 물결이 출렁거리고

좋은 게 뭔데? 까먹고 살면 안 돼? 그런 중얼거림도 꼬리 칠 수 있지

 

죽어가던 비늘이 태양을 향해 솟구치고, 보여

우릴 둘러싼 것 중 가장 강한 중력을 가진 저 별

태양 곁엔 늘 쏟아지는 비늘

눈부신 물결 속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등을 마주대고 잔 밤과, 그런데도 무사히 졸업하던 날의 기억, 강박당한 나를 둘러싼, 다정한 폐쇄병동 환자들, 어느새 꼬리가 그곳을 헤엄치고

잊고 있던 기분의 중력이 나를 계속 끌어당기면

 

아니야, 역시 오늘은 기분이 좋아

발음하며

날 뒤덮은 비늘을 하늘로 솟구치게 해

그들은 하늘에 침잠하고, 짙푸른 아침 물살의 색을 빚어내지

창공, 내 기억으로 출렁이는 수면

다시 혀를 질끈 깨물면

 

 

 

 

민트초코가 유행이라서

 

 

치약을 넣고 라면을 끓입니다

유행이라면 뭐든 해보고 싶으니까요

제겐 적당한 동질감이 필요할 뿐

치약에게도 따뜻함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국물까지 마셔도 죽진 않을 거예요

한때 흰 국물 라면이 유행일 때도 있었잖아요

이 면을 마지막으로 저도 퇴장할게요

꿈이 생기고 말았잖아요

민트초코의 결정타를 날리겠다는 야심까지가,

 

라면을 들고 지하철에 탈 거예요

가스버너에 불을 지피고 역무원이 출동할 때까지

흰 연기 피어오르는 눈앞에서

도시 괴담처럼 살아남는 거죠

화가 날 때마다 저는 이를 닦던 사람

칫솔과 치약에게 성을 내던 사람

민트초코가 유행이라니

치약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온 게 고마울 따름

이제 위장은 잘 닦인 치아처럼 번쩍일 테고

참신하다는 말은 모욕적일 뿐

치약 라면이라 해서 칫솔을 들 필요는 없죠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곳에서

젓가락을 들고 치약 거품 속으로

하얀 구멍 구멍의 더 구멍 아래로

자꾸 그렇게 곁눈질하지 말아요

세상에 대한 안목이 생겨버릴 것 같잖아요?

한 가락도 나눠주지 않을 거예요

 

 

 

 

귀신고래의 마을

 

 

애초 증조모가 내게 맡긴 일은 고래의 귀지가 될 만한 파도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녀와 같이 고래 귓속을 걸으면 천장의 선홍빛이 귀지에 내려앉고.

부스러기마다 불이 들어와 밤에도 사방이 어둡지 않았다.

 

고래 귓속에 무엇이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장소가 발견되곤 하였다.

씨앗이 닿아 초원이 된 고막.

귓바퀴 소용돌이를 하릴없이 걷자 트랙이 되었고.

그녀와 함께 그곳을 종일 걸으면 사지에 소용돌이 문양이 돋기도 했다.

 

나는 불이 들어온 귀지를 들고 고래의 외이도를 탐험했다. 파도 무늬 그려진 귀지.

처음엔 푸른빛이나, 점차 황금빛이 감도는.

혈색이 닿으면 핏줄아 돋는 그것에게.

내가 부스러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면 두 볼에 붉은 기운이 선명해졌다.

 

광대 안쪽이 마그마가 흐르는 것처럼 뜨겁다가, 이내 온몸이 싸늘해졌다.

증조모는 그럴 때 내 목덜미를 낚아채 고래 귀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그 밖은 노을의 너머와 맞닿은 곳, 나는 지평선 아득한 곳에서 집까지 헤엄쳐왔다.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며 매타작이 쏟아지는 집.

지붕을 휘감은 넝쿨이 허름한 집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증조모를 만나고 왔단 얘기에 부모가 고개를 저으면.

그들 귀에서 귀지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모의 안쪽에도 누군가 걸어가고 있을까.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나의 아이라거나.

그들 귓속엔 회초리 소리가 몰아치는 숲. 칼날 서걱이는 정원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다만 그들의 귀지를 모아 고래 귓속에 데려가보고 싶었다.

그러면 고래는 어떻게 될까. 나를 받아들인 고래가 처음 만든 장소가 어디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그곳이 무척 궁금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귀지가 필요해졌다.

고래 귓속에서 증조모는 더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고. 내 몸은 커져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늘었기에.

 

좁은 곳에 몸을 밀어넣을 때. 이런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왔다. 고래 귀지에 꽃이 피는 계절이야.

이파리가 무성할 때. 고래는 숨을 거두고 대신 심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고래가 가라앉은 바다에 빛이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선홍빛이 유자형을 그리며 내려앉고. 물살이 불이 붙은 것처럼 환해질 때.

멀리서 보면 물결 사이 새로운 핏줄이 생긴 듯, 빛이 들어오리라고.

나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고래 귓속으로 내 큰 몸을 힘껏 밀어넣었고.

 

 

 

 

알파카 부인의 안데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뇨, 전 주방세제가 다 떨어진 날에 태어났는데요. 행주를 비빌 때 나는 마찰음. 푸른 열 자국에서.

수세미에 불어터진 살갗이 벗겨질 때. 밑에 발굽이 보일 때에. 그릇 두드리면 과일 향 번지고.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챌 때.

 

이토록 목이 길고 귀는 쫑긋 서 있고. 침을 잘 뱉는 내가 누구인가를 마주볼 때.

핥으면 죽는 과일인데요. 먹어보겠어요. 그저 과일을 흉내낸 냄새. 눈을 감았다 뜨면.

 

어쩌면 부엌은 가짜들의 골목. 줄기가 자라버린 그릇. 사과 냄새 매달린 접시까지.

그러니 탄생이 가능합니다.

두 팔을 두 다리로. 온몸에 털이 자라고. 부엌의 바닥. 아니. 거의 맨틀이라 볼 수밖에 없는. 지옥이라 불러도 될 지하에서. 땅이 융기하면.

더 가능해지는 네 개의 다리.

 

사이에서 남미식 키친에 당도한다면. 얼룩을 지우고 있는 자. 얼룩을 사라지게 하는 자.

그러니까 불가능해지는 얼룩. 희미해지는. 투명이 되는 얼룩. 그것은 바로.

더욱더 오세요. 그게 나. 우리가 사람이었다고요?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믿어요?

 

그런 말은 알파카나 줘버리라고요. 목젖 뒤에 거리가 있고 거기까지 넘어오세요. 오세요. 눈에서 연기를 뿜으며.

가능해지세요. 이 부엌은 골목의 봉우리. 솟아올라 도시를 산맥으로 만들 정상. 능선을 잇댄다면. 당신의 어깨 곁에.

우리들의 모든 손목 능선에. 이 능선이 가닿는다면.

 

식칼을 쓰며 나는 손을 베였습니다. 사실 안 쓸 때도 베였습니다. 당신을 마주볼 때.

극장에서. 거리에서. 동사무소. 뒷골목에서. 카페에서. 개가 짖는 노을 옆에서 꽃무늬 담벼락과 들쳐지는 바지와.

막말을 내뱉는 택시와 식당에서. 곁과 곁.

물에도 날이 달린 이 도시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목이 긴가요? 침을 왜 뱉나요? 왜 그렇게 우나요?

나의 털 속으로. 서슴없이 파고든 무수한 손가락.

 

이런 건 안 좋은 습관이라니까. 깨끗하게 부엌을 관리해야지.

 

퉤퉤- 이 침 뱉기는 설거지를 위해 쓰입니다. 뱉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봉투 벗겨지고. 내가 알파카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

다시 퉤, 소리에 맞춰 씻겨나가는 것. 내 방식대로 깨끗해지는 것.

 

* 세사르 바예호

 

 

 

 

망고가 아닌 모든 이유

 

 

망고를 태운 부드러운 재.

칠흑의 가루 곁에 누워 생각한다.

 

세상의 어떤 별은 망고에 매달려 그대로 과육의 색이 되지만. 그 빛이 과일의 유일한 색인 것처럼 한사코 맺혀 있지만.

 

태웠을 때는 검구나.

태양이 어떻게 끝날지 알 것도 같다. 이건 우주 한 알의 색.

 

귓속에 어두운 설탕이 쏟아진다. 한 번도 닿은 적 없지만, 영원히 오고간 어떤 지옥이.

 

검은색. 오히려 남국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적도 아래. 혀를 내밀면 자오선 녹아내리고. 소금기와 물빛. 혀뿌리부터 옮겨 적히는.

 

바다 밑엔 늘 몇 점의 어둠이 가라앉아 있다. 내 머릿속 꼭 세 개나 네 개 이상은 들어 있는 누군가의 해골처럼.

그때 나의 기분은,

두통약이 밀려들어올 때 내 두통의 마음. 백사장에 닿아 꺼져가는 포말의 심경.

망고를 온 가지에 매달고 썩히는 나무를 본 적도 있지. 지나치게 익은 과실은 뚝뚝 물을 흘리고.

처음 보는 종의 개미떼는 항문이 노랗게 젖어 있다. 줄지어 잇닿는 행렬은 마치 벌레가 되었다고 할 수밖에.

 

버켄스탁으로 긴 줄을 짓밟을 때. 저마다 다른 명도로 빛나는 솜털만큼의 볕이.

바삭바삭 부서질 때.

 

심장은 뛰고. 두근거림에 맞춰 몸에서 무언가 새어 나왔다. 파도처럼 흩어지는 벌레떼.

그때 벌레는 부드러운 물. 그래. 과육의 성질.

 

망칠수록 익어가는 부위는 어디에나 있었어.

망고 나무가 내 정수리에 자신의 물을 흘리고 있을 때. 순간 달콤해지는 고민들에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 타들어가는 게 느껴지고 달콤하고 유려한 재가 되어갈 때.

두피마저 부드럽고 따뜻한 재로 변해갈 때.

 

그건 내가 내 생각들에게 적어 내린 답장.

결심이라 말하진 않겠다.

평범한 사람의 불행이 내게 닿지 못한다는 것. 평범한 사람의 행복도 결코 내가 맛볼 수 없다는 얘기.

머릿속엔 온통 망고 굴러가는 소리. 나 자신이 타오르는 한 그루 망고 나무 일 적에. 이건 망고가 아니어야 하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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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외 4/ 남현지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결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퇴근

 

 

첫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사과 상자 안에서

더 붉어진 사과 이야기

 

나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만큼의 붉은색을

중개인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모자라요?

가게 주인은 상한 사과를 덤으로 넣어주고

나는 충분하다고 다시 빼낸다

 

한밤중에 사과는

검은 봉지 안에서 조금 더 붉어지고

나무는 멀리서 눈을 맞고 서 있다

뭘 잘못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버스를 긴 줄로 기다리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 집으로 가지 못한 차들이

눈을 맞고 서 있고

떨어진 사과 하나는

붉은색을 들고 굴러갔다

 

 

 

 

앙코르 와트의 버섯 상인

 

 

간에 좋아요

살이 빠집니다

 

상황버섯을 팔던 상인은

실은 돈을 모아서

포카라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인류의 멸망을 기다릴 거라고

관광객들에게

포카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히말라야의 산기슭

 

나는 기쁩니다

버섯은 얼마입니까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 응모에는 총 1138명이 귀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많은 편수와 비례하여 미덕을 갖춘 작품이 많았기에 벅찬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팬데믹을 맞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많은 분들의 언어의 밭에선 시가 이토록 풍성하게 가꿔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사위원들뿐 아니라 시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응모작들을 검토한 뒤 4인의 작품을 최종 검토작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했다.

 

변신의 귀재9편의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언뜻 시적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진술이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개성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작품 간의 편차가 있었는데 조련등이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트럭등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시라는 장르가 무조건 하나의 정념을 보여주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지니는 울퉁불퉁한 가독성의 영역이 있다면 이 응모자가 앞으로 보여줄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 앞의 동경 씨 내 뒤의5편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의 능란함이 눈길을 끌었다. 한행씩 떨어뜨려 놓으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행과 행이 만나서 연을 이루고 한편의 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만들어지고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졌다. 그것은 편안한 방식으로 시를 이끌어가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시행의 운용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한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에 세련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결합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쯤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 미더움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빛의 정원4편이었다. 투고된 시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 있는 시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고유의 시적 서사와 정서가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다만 시들이 기대고 있는 이미지나 세계가 다소 좁고, ‘이나 미래등 시적인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방식이 상투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넓은 방향으로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분명 단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해서 써달라는 응원의 말을 보탠다.

 

호수공원4편은 언뜻 수월하게 읽히는 말을 맵시 있게 엮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현실에 닿은 채 출발한 시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 정박해 있기보단 멀리까지 나아갈 줄 알았고 그를 다 경유하면서도 처음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던 어긋남을 응시할 줄 알았다. 매 작품마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생활에 깃드는 외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침착하게 궁리하는 이의 면모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시가 다가왔다가 물러날 때마다 남기는 감정의 파동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 탓에 논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모든 심사위원들이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한 작품이다. 시에도 독자가 다시 돌아보도록 만드는 장력과 그를 유지하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편들은 그 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호수공원4편을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한 세계를 의심하지 말고 시로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더욱 자유로이 해주었으면 한다. 낙선을 하게 된 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보내주신 작품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감히 예감하게 해주셨다. 다른 무엇이 아닌 를 마주하는 태도가 이토록 치열한 이들이 함께 쓰고, 읽고 있으니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옥고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양경언, 유병록, 이근화, 주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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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 / 혜원

 

 

당신은 손의 윤곽이 열쇠와 닮아서 아침에 손을 떨어뜨린 사람

 

내 손은 정오의 구멍처럼 환하고

V자로 깎아 낸 아홉 개의 벤 자리와 여덟 개의 이가 있는 당신의 열쇠는

부드러운 곡률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쉽게 통과하네

타인의 주머니에 쉽게 손을 맡기고

 

열쇠를 만지듯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백 년 동안 열쇠가 녹고 있지

 

녹은 자리가 예뻐서

당신이 또 손을 어루만지면

 

너무 헐거워

 

당신은 한 번도 내 손을 열지 못했지

다른 손이 필요하다고 믿었지

윤곽이 녹아서

 

백 년 동안 열쇠만 깎았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최선을 다해 손을 오므렸던 일

 

손을 펴면 열쇠의 깎은 자리가 사라지고

내 주머니에서 손이 사라지고

 

주머니에 타인의 열쇠가 가득하네

 

어느 날 모르는 손 하나를 쥐면

자물쇠의 깊이만큼 긴 구멍이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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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편이다 당선작 / 나종훈

 

 

우리 엄마들은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금 간 식탁을 버릴 때도 그들의 누렇고 긴 이야기를 파란 봉투에 담을 때도 가느다란 바람이 간결하게 불었다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턱이 빠진 창문을 넘었다 그럴 때면 매미 대가리가 가득한 지붕에서 우아한 고양이들이 말을 더듬었다 머리부터 나오지 못한 사생아는 주인 없는 의자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곤 했다 반복되는 요일은 흔들리는 요람처럼 소문을 토해냈다 그런 편이었다 토스트가 만드는 소리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 난생처음 먹은 계란 프라이엔 거짓 맛이 노랗게 뒤엉켜 있었다 전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된 조류의 춤 같았다. 오후의 텅 빈 놀이터와 요리가 멈춘 부엌에 똑같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롱 위엔 회초리가 장롱 안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거의 그런 편이었다 먼지 쌓인 책장처럼 계절은 고요히 다가왔고 중립을 지키던 남자들의 입술에도 눈이 쌓였다 의자에서 떨어진 노을은 높임법을 자주 틀렸다 아이들은 사진 속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말을 배웠다 대부분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옥상에 누워 수를 배웠다 얼어붙은 도마를 두드리는 수는 계절보다 한 수 위였다 반사적인 칼질이 그랬다 그런 편이었다

 

 

 

[당선소감]

 

 

일기장 같은 친구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있겠지만 용기가 없었다.

날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러웠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정을 들킬까 도망가기도 했다.

몇 년을 말없이 지내기도 했다.

 

화목제로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부족한 저의 시를 좋게 봐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진지한 태도를 가르쳐주신 이승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온 새해 이글루를 아이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다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전화였지만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놀랐다.

만들고 온 직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해 주는 아내와 아무것도 모른 채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고맙다.

나를 만들어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드린다.

 

 

 

 

 

배춧잎이 시들어간다 / 박희연

 

 

1.

먹다 남은 배추 겉잎이 시들었다.

속잎이었던 그 겉잎은 싱싱했다.

싱싱한 것을 시들게 만드는 내공은

내게 있을까 시간에 있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혐의로 가득 차

어깨가 움츠러들고 손이 오그라든다.

불안은 종종 표면적을 작게 만든다.

배춧잎이 조글조글 말라붙었다.

 

 

2.

가까이서 보면 크고 멀리서 보면 작다.

표면적을 작게 만드는 방법 하나

당신과 거리를 두는 일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인류애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균자라는 혐의를 두는 것

 

3.

오래된 습관처럼 해가 뜨고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배춧국을 먹는다.

TV에 비친 한 정신병동에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죽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어나간다.

저 죽음의 이면에도 아랑곳없이

당신과 나는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우린 너무 많이 배양되었고

너무 오래 변이를 거듭해왔다.

 

4.

남은 배춧잎이 또 시들었다.

속잎마저 이울어 더 이상 시들 일이 없을 때

난 헛헛한 마음에 기침을 한다.

불안이 고조된 열차 안에서

어느새 오래된 습관처럼 사람들이 물러선다.

배추는 배추의 불안과 혐의로

나는 나의 불안과 혐의로

당신은 당신의 불안과 혐의로

세계는 세계의 불안과 혐오로

아주 작아져버린 당신이 때때로 그리울 수도 있겠다.

 

 

 

[당선소감]

 

제가 있는 사무실은 지하예요. 아주아주 커다란 빌딩의 지하여서인지 겨울이 긴 곳이지요. 처음 근무를 하던 5월에도 난로를 옆에 끼고 있었어요.

 

여기 추위는 칼날 같은 매서움이 아니라, 싸늘하게, 아무도 모르게 뼛속까지 채우는 기운이에요. 이 기운이 갉아낸 제 뼈마디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요. 마치 바람 속에 사라진 마꼰도처럼요. 욕심이 앞서 마르께스의 또 다른 책이 없을까 뒤적이는데 딱히 끌리지 않네요. 하나 무작정 읽고 싶었던 건 절판이고요.

 

늘 마음에 걸리던 몽테뉴 수상록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태 책꽂이에 꽂아두고 답답하기만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읽고 싶더라니까요. 처음과 달리 어려움도 덜하고요.

 

며칠 전 제가 별 감흥도 없이 무뎌진다고 했잖아요. 씁쓸하던 참에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때기를 씌워 나의 감수성을 둔하게 만들고 있다.”

 

어디다 갖다 붙이냐 하겠지만 그냥 그 말로 제 아둔한 감수성을 위로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사변할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정신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줏대 없이 방황을 한다는데, 딱 제 꼴입니다.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 몰라 쩔쩔맵니다. 아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나요? 그리고도 아님, 제가 당당히 맞설지 모르는 비겁자인가요?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바이. 200511. K에게. 희연드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되는 옛날 영화처럼 자료를 찾다 발견한 메일 하나.

난 아직도 모르기만 해서

알 때까지 읽고 써보기로 한다.

 

알 때까지 써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상상인 신춘문예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졸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이병률 시인님, 권혁웅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변덕스러운 내 시를 한결같이 읽어주신 이산하 시인님, 권미강 시인님, 조연희 시인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K! 난 과연 알 수 있을까?

 

 

 

 

[심사평]

 

1회 상상인 신춘문예 응모자는 330여 명이었다. 그 중 9명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올랐다.

 

시의 세계는 시 쓰는 자들의 아우성으로 완성된다. 신인들의 시를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그 생각이 더 치민다. 폭발력이라든가, 자유로움을 기대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지를 바랄 수 없는 내 안경으로 뭘 고르겠다는 것인가 싶어 나를 누른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읽게 된다.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되 나도 모르게 신뢰하기. 나는 이런 마음으로 원고 앞에 앉았다.

 

권혁웅 시인과 나는 본심에 오른 시들 가운데 좋았던 시들과 좋았던 응모자들을 거론했다. 그 가운데 겹쳐 호명된 두 사람의 이름은 심사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우선 나종훈은 분위기를 충족시켰다. 읽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분위기는 누구나,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닐 것인데 전체 시를 꼼꼼히 읽게 만드는 전개 방식이 호감이었다. <, 그런 편이다>은 섬세했으며 <타락한 교집합>에서는 패기가 출렁였다. 신춘문예에 어울린다 할 수 있는 시격을 만나게 해준 신인의 면모 또한 궁금해지는 시였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감히 애정을 기울여 꺼내자면 다만 몇 편의 시에서 안정적인, 입체적이지 않은, 갇힌 듯 답답한 몇몇 줄의 위태로운 가 걸렸다는 것이다.

 

배춧잎으로 그가 몸담은 시대와 그가 고통하는 세계를 그리는 데 성공한 시,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는 열거의 촘촘함이 매력이었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역시 나뭇잎이 등장하는데 나뭇잎이 전면에 주도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데도 나뭇잎이 없다면 이내 시가 허물어지고 마는 아찔함이 닥쳤다. 시에서의 감동이라는 것은 그런 등짝이 있어야 제 맛인 것 아닌가.

 

일단 나종훈, 박희연으로 압축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놓치는 것은 없는지 세세한 살핌을 시작했다. <검은 개> 6편을 응모한 이은희의 시는 제목들이 시선을 끌었다. 제목부터 대작의 포즈가 압도적이어서 집중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좋은 이미지들이 서로 붙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거나 잘려져 있었다. 좋은 시가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뒹굴며 전진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러기엔 끊겨 있음으로 그저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즐거웠다. 마지막 시를 응모원고에 포함시킨 건 제 살을 깎아내리는 판단이었다. 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먼 작품이었다.

 

낯설지만 신선하다고 볼 수 없는, 시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시로 향하고 있는 향일성이 좋았던 <별똥별> 5편을 투고한 한경훈의 시들은 날것의 느낌이 팽팽하고 지성의 결도 딴딴한데, 상체 앞쪽에다 힘을 빡 주고 있는 것이 거슬리기도 하면서 또 이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세공 연마를 거친다면 곧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시인이 될 거라 기대한다.

 

결국 우리는 두 분의 당선자를 모신다. 나종훈의 <, 그런 편이다>에서 펼쳐 보인 미의식과 박희연의 <배춧잎이 시들어간다>의 삶을 향한 시선의 순도는 이번 상상인 신춘문예의 성취이자 시세계로의 참신한 진입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두 시인에게 당선 소식이 도착한다면 책상 위에 생기와 활기 또한 내려앉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이병률(시인)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다음 네 분의 작품을 추천했다.

 

<No.4> 7. 말을 세공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통념과 달리 시는 인공어의 일종이다. 일상적인 말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들과 비슷해져야 한다. 반대로 시의 말은 다른 말과 제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며, 바로 거기서 미적 효과가 생겨난다. 시편마다 구사하는 말놀이(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자리다)가 자연스럽고 싱싱하다. 다만 (응모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는데) 다른 시인들의 소출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별똥별> 4.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와서 썼는데, 그게 또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시의 역사가 일러주는 것은 시의 지평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유머와 우화가 이과 출신 쌍둥이처럼 구별할 수 없이 한 몸이다.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 시의 특별한 개성이 될 것이라 믿는다.

 

<, 그런 편이다> 5. 문장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만들어내는 유장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능수능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능수能手이고 능란能爛이다. 유려하게 문장을 엮어가는 손과 화려하게 펼쳐지는 말들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가꿔온 말들의 정원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쉽게도 장시에서는 장력張力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다.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6. 시편마다 세상의 모습이, 살아온 내력이, 사람들의 사연이 촘촘한데, 그 풍경과 이력과 이야기가 한 지점에 맺혀 있다. 이 지점이 시가 발화發火, 發話, 發花하는 지점이다. 모티프라고도 부르고 은유라고도 부르는 그 곡절에 정확히 스타카토가 찍혀 있다.

 

이 가운데 두 분의 작품이 다른 본심위원의 추천과 일치했다. 논의 끝에 두 분의 작품 모두 선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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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초라는 사건 / 정월향

 

 

오로라로 부릅니다. 양파 속에 앉아 있는 당신과 당신 속에 앉아 있는 양파의 조합. 껍질 사이로 터지는 흰빛의 회오리, 이글루라 부릅니다. 천년 전에 내린 비가 기다리고 있는 집. 오래된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집. 얼음과 얼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거대하고 동그란 악수. 반갑습니다! 평화로운 저녁을 만들었습니다. 얼음이 얼음일 때의 공포와 얼음이 얼음을 버릴 때의 쓸쓸함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누이트라는 말은 선뜩한 날고기. 길고 느린 석양의 조합. 결론을 알면서도 오늘의 손가락을 구부리는 이유.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를 놓지 못하던 엄마와 손바닥을 빨갛게 태우던 아빠의 시간. 양파의 흰 피는 화끈거리고 양파 속에서 찬바람 부는데 손 안의 오로라가 자꾸 미끄러집니다. 흰빛의 현란함이 위대, 라거나 장엄으로 불릴 때 한 방울의 내가 흘러내리던 사건, 걸쭉하게 웅크린 이글루 위로 위대와 장엄이 쏟아집니다. 

 

 

 

 

'진주가을문예' 당선작 발표... 27년 운영, 올해로 종료

시 정월향, 소설 기명진 당선... 1995년부터 운영, 남성문화재단 해산 따라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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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 / 이영미

헤엄쳐서라도 뭍 너머 섬과 섬 건널 만큼

눌러도 솟구치는 바람, 비늘로 덮을 만큼

거대해져라 주문을 걸었으나

제 살 태워 얻은 것이 겨우 나무 몸뚱이라

삼켜 채웠던 비릿한 한 살이, 게워낸 텅 빈속

뼈대 긁어 귀 열라 들려주는 붉은 속울음

티끌 걷어내려 아가미 시리도록 울어 보는 것인데

바당보름 불어 건져올린 심해의 말씀

눈 푸른 운수납자 깨워 풀어가는 님 앞에서

더 갖지 못해 속 끓이던 욕심 들킨 양

미안하오 미안하오, 오래된 기약만 되뇌며

늙었으나 견고한 결 주름 매 만지던 봄날

화암사 우화루 마당이 그토록 환했던 이유는

오색 옷 한 벌 걸치지 못했어도 잠 못 들며

꽃비 나긋이 바라보던 님의 그 눈빛 때문

 
 
 

28회 지용 신인문학상 이영미 ‘목어’ 선정 - 동양일보

[동양일보 엄재천 기자]28회 지용신인문학상에 이영미(57·청주시 서원구)씨의 ‘목어’가 선정됐다.12일 옥천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김재종 옥천군수,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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