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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츠하이머 / 박미선

 

 

어느 날, 나는. 구름이 찔끔찔끔 흘리고 간 볼트를 주워 먹다 돼지우리로 들어왔다 찌지직, 뚝, 뚝

 

<나는 참새> 나는

 

전깃줄 잘라 고무줄놀이를 한다 살찐 돼지, 털로 새끼줄을 꼬아 목에 채웠다 코에 코뚜레를 끼우고 밤의 팬티를 갈아입혔다 가슴살 조금씩 잘라 밥상보를 만들자 앙상해진 두 다리가 콘센트에 꽂혔다 조잘거리던 혀를 뽑아, 나는

 

돼지의 기억들로 수의를 만들고 있다 눈에선 쌀뜨물이 흘러 나왔다 돼지는 머리에 꽃밭을 만들어 나를 유혹했다 뚝배기 안에는 구멍 숭숭한 양말들이 눌어붙어 있다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불러오는 건 배가 아니라 허기였다

 

발등에 무화과나무 한그루 심을 수 없다 머리를 주머니에 꾸역꾸역 쑤셔 넣으며 만원이 되길 기다려 보고, 솜사탕을 손가락에 먹여 보기도 한다 돼지 안의 돼지 한 마리 지퍼를 열고 유치원에 간다 비오는 날 대추나무 가지에 네발 사다리를 올려놓고 싶다 아직은 아니라고 안녕, 안녕, 주머니에 넣어둔 만원이 수염을 낳을 될 때까지 잠시 풍선껌을 씹으며 기다려 돼지야

 

묵은 김치를 꺼내려 김치 냉장고를 연다 숨이 하얗게 끊겨 겨울을 내뿜고 있는, 먼저 돼지와 협상한, 어머니의 손 전화 한 구.

 

 

 

 

 

[당선소감] 꼿꼿이 일어나서

 

난 턱걸이 선수다. 모든 게 까딱까딱... 복도, 행운도, 사랑도... 철봉을 거머쥐고 있는 손바닥에서 어제의 눈물이 고인다. 나의 스테인리스 같은 가슴에 가 닿기 위해 많이 헤매고, 아파하고, 애무했다. 하지만 매번 나에게 달려와 안기는 건 미끄러지는 너의 시선과 온기를 불어 넣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손바닥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손목에 전류가 흐른다. 하지만 이대로 놓아버릴 수는 없다. 내가 선택한 마지막 열정을... 땡볕이 살을 구워도, 바람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도, 잡고 있는 손에 54kg의 희망을 매달고 하늘을 당겨본다. 알츠하이머는 조금씩 지워지는 내 내면의 지우개다. 놓치고 싶지 않은 모든 것들과의 싸움이다. 자존심이란 녀석은 이미 꼬들꼬들 말려 해장국으로 끓여 먹었다. 난 더 밑바닥과 조우할 것이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아니 잘못 온 전화겠지. 끊고 나서 한참을 공룡과 놀았다. 시는 나에게 일기다. 가장 친한 친구요, 배신하지 않는 애인이다. 알츠하이머는 국밥집에서 태어났다. 6달간 인생 공부 많이 했다. 그 곳 지인들과 금보고. 감사 인사 올린다. 경남대 박태일 교수님, 마산대 김륭 교수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못난 딸 걱정에 아파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남동생, 올케, 친구들에게 고맙다. 우리 아들 현준이 현수 사랑하고 항상 노력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다. 끝으로 진주 가을 문예에 깊은 감사드리고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난 이제 질경이가 되려한다. 발길질을 피하지 않겠다.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걸음걸음에 고맙다. 고맙다고 전하겠다. 꼿꼿이 일어나 하늘에 손바닥을 펴 보이겠다.

 

 

 

[심사평] 통념과 보편,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발상의 순도 높은 시

 

오랜만에 다시 진주 가을 문예 시부 심사를 맡게 되었다. 이 가을 문예에 응모된 작품들을 읽는 가운데 확실히 이 상이 시행돼 오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에 실감하게 되었다. 최근 잇달아 공모 시상한 인근의 천강문학상의 흐름과도 다르고 김만중문학상의 흐름과도 달랐다.

 

그렇다면 그 흐름은 무엇일까? 의식이나 발상이나 시상 전개에 있어 응모자들이 매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통념으로부터 떠나고 보편으로부터 떠나고 관습으로 부터도 떠나서 이루는 의식의 끈 자르기, 또는 언어가 하나의 조각으로서 조각을 완성하는 화사한 잔치, 어쩌면 눈물겨움의 실현 같은 환상의 실현, 그런 경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쓴 응모자는 이런 점에서 순도가 높다. 참새, 돼지우리, 전깃줄, 뚝배기, 한 숟가락, 냉장고, 어머니 등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언어들이 언어 독자적으로 뛰고 있다. 우리는 그 뛰기를 보면서 소녀가 땅에다 그림을 그려놓고 칸칸이 뛰는 놀이(사방놀이)를 보는 듯한 경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꼭 의미를 추구하는 분들은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대충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메타새콰이어>를 쓴 응모자나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을 쓴 응모자도 상당한 수련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메타새콰이어와 함께 교보문고까지 걸었다.” 로 시작되는 <메타새콰이어>의 적정한 상상력이나 고시원에 누워 :“불구가 된 한국어를 구사하는” <서울 아이티공화국 그리고 농담>의 상상력 뛰기는 다 시를 허구의 틀로 본다는 점에서 실력이 출중하다. 그렇더라도 이번 수상은 그 허구의 순도 면에서 훨씬 기량을 갖추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 <알츠하이머>를 낸 분에게 돌아갔다. 만장일치다. 상은 한판의 씨름과 같다. 둘째판 셋째판에서는 승자가 어느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자’ 다시 시작하자.

 

심사위원: 강희근, 김언희, 이상옥, 유홍준,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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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재정

 

 

1.

꿈꾸는 물질, 나는. 찡그린 관자놀이를 내닫는 핏줄, 혹은 두 개의 혀. 당신 생각으로 타오르는 불꽃. 사월 산자락을 불타오르는, 불길 꿈틀대는 등허리, 홀로그램 속 삼천삼백의 개구리, 등의 얼룩은. 날아오르는 수만 벌레들의 꿈틀, 꿈의 틀인데. 나는

 

이런 밤들의 열병식이라 말하면

그래도 내 행진을 엿보다 끌려드시겠어요?

 

2.

불타는 산을 본 일 있다. 그때 나는 인간계와 통정하는 삼천만 통점의 혀로 세상을 핥는 벙어리 부처를 상상했다. 날개란 지상엔 무효한 양식이므로, 간절히 가벼워지는 연기들의 구도

 

3.

네게 사다리를 놓는 날들이다. 발가락을 자른 발끝으로 걸어가 네게서 붉는 참꽃의 나날들이다 고통만큼 높은 사다리가 있을까.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 손을 놓고 두 발을 뗀다. 추락하는 것으로 거듭 불타오르는 날들이다. 삼천 개 혀를 단 한 입에 달고 나는 침묵한다.

어떤 원시를 불러야 석 달 열흘 너를 타오를 수 있을까. *케찰코아틀, 이 세상 모든 불타는 혀의 총합. 나는 얼마나 작은 불꽃으로 너의 창가를 시작하는가.

 

불타는 산

케찰코아틀

내 심장을 천천히 씹어 삼키시다

 

* 케찰코아틀 : 깃털 달린 뱀. 아즈텍 문명의 위대한 천상 신으로 알려져 있다. 우주의 질서, 세계와 인간의 생멸주기를 결정하기도 한다.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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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만원 고료 '2009 진주가을문예' 당선자가 가려졌다. 시 부문(상금 500만원)은 임재정(46, 경기 남양주), 소설 부문(상금 1000만원)은 이미홍(52, 서울)씨가 각각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진주가을문예운영위원회(위원장 박노정)는 지난 10월 말까지 응모작을 받아 예심과 본심(시 문인수, 소설 이순원)을 거쳐 1일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임재정씨는 시 ''으로, 이미홍씨는 단편소설 '행인3' '유럽풍 테라스가 있는 식당'으로 각각 뽑혔다.

 

'진주가을문예'는 남성문화재단(이사장 김장하)이 기금을 출연해 운영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진주신문 가을문예'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걸쳐 공모를 했는데, 진주신문사가 휴간에 들어가면서 올해부터 이름을 바꾸었으며, 올해로 15회째를 맞는다.

 

남성문화재단은 설립 이래 장학사업과 진주문화문고 발간 등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순수민간재단에서 운영하는 최초의 전국 규모 문예공모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시 부문에 당선한 임재정씨는 "하찮고 부끄러운 돌부리를 눈여겨주신 심사위원과 남성문화재단에 깊이 감사한다"면서 "오래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준 또 다른 나인 아내, 아이, 어머니와 가족들, 오랜 글동무 당신, 당신들에게도 고맙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4시 진주교대 교사지원센터 7 702호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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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연필 / 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슬픔도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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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허허벌판에 詩匠이 되길' 기술은 있되 장인정신이 없는 삶은 망해버리기 마련이다. 장인정신은 어제 써먹은 기술을 오늘 아침에 쓸모없다 버릴 줄 아는 성정 머리가 있어야 좋겠다. 누가 보면 꼭 벌어먹기에 좋은 짓거리를 하는 사람 말이다. 광명의 획득은 그런 짓거리 끝에 얻어지는 것 아닐까.

 

보자, 본심으로 넘어온 편수는 모두 160. 단 응모자의 이름은 모두 빠져있고 응모 번호만으로 대체 되어 있다. '섬망'  9편이 우선 눈에 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종횡무진 오락가락하며 쓴 정신주의 시라고 할까. 그 장대한 사유가 정진, 또 정진해서 우주의 깊이, 우주의 가락을 터득했더라면, 놀라운 대시인의 출현을 알릴 뻔했다. 재기는 살리되, 너무 이른 이상이 되지 말고, 세계의 고전들을 탐독하여 자기화하는 노력의 대가인 이상이 되길!

 

'빙어'  7편이 또 눈에 들었다. '빙어'에서 노숙자의 신세를 "라면 몇 가닥 보이는 내장을 비워냈다"고 본 것이나, '동해(凍害)'에서 "내 어머니 배에 튼 자국은 더 깊어진다"라고 아름답고 섬세하게도 세필화를 그렸다. 하지만 딱히 이 당돌한 시대를 업고 갈 뜨거운 힘과 맞선 찬 지성이 동시에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연필'  8편이 가장 나중에 눈에 들었다. , 돌쟁이 생부의 생사를 잘도나 그리고 있군. 돌 속의 부처를 석공이 불러낸다고 않던가, 돌쟁이의 강철연필이 죽음을 철철 살아있는 돌 육신으로 불러냈구나!

 

모든 시인은 강철연필로 죽음을 불러내는지 모른다. 하여, 가장 믿음직한 시인을 세상에 내보낸다. '새로 쓰는 계곡()' "밤꽃이 허연 눈썹으로 바라보던 식구들 저녁이 있다" 등등 또 다른 시편들이 믿음을 더했다. ,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허허벌판 시장(詩匠)이 되길!

 

심사위원 서정춘 시인

 

 

 

 

바람의 전입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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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만원 고료 '2008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의 영광은 전영관(시 상금 500만원, 경기도 일산), 서은아(소설 상금 1000만원, 경기도 부천)씨가 거머쥐었다. 진주신문가을문예운영위원회(위원장 박노정)는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한 뒤 예심·본심을 거쳐 결과를 발표했다.

 

진주신문가을문예는 남성문화재단(이사장 김장하)이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1995년부터 전국에 걸쳐 매년 가을에 공모를 벌여 오고 있다. 올해는 시 부문 301명, 소설 부문 140명이 응모했다.

 

전영관씨는 시 "아버지의 연필"로 당선했다. 그는 충남 청양 출신으로, 지난해 토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 예심은 박노정·유홍준 시인과 유영금 시인(1995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자)이 했으며, 본심은 서정춘 시인이 했다.

 

서정춘 시인은 당선작에 대해 "돌쟁이의 강철연필이 죽음을 펄펄 살아있는 돌 육신으로 불러냈구나. 모든 시인은 강철 연필로 죽음을 불러내는지 모른다. 하여, 가장 믿음직한 시인을 세상에 내보낸다.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허허벌판 시장(詩匠)이 되길"이라고 평했다.

 

전영관씨는 "지금까지 시 비슷한 조각글을 쓰면서 가족의 온기를 내다팔고 부모의 고단함을 손쉽게 우려먹었다. 퇴근 후 저녁마다 식탁에 앉아 모니터만 보는 남편이 뭐 그리 살가웠겠는가. 어린것들 딴에는 주말마다 시집만 파고 있는 아빠가 얼마나 서운했겠는가"라며 "이참에 고맙다는 마음 전한다.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도 없을 거라 확신한다. 짐짓 모른 척, 커피 한 잔 놔주고 자리 피하던 아내에게 오늘의 맨 앞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3일 오후 4시 진주교육대학 교사교육센터 7층 702호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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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저 / 김현욱

 

 

1

보이저* 의 돌잔치는 지구 밖에서 열렸다

보름달 위에 차린 돌상을 받아

홀로 돌잡이를 하였는데

웬일인지 보이저는 아무 것도 집지 않았다

돌상 너머 파랗게 빛나던 구슬은 이미 멀리 있다는 걸

보이저는 운명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품속으로 무작정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2

보이저는 이제 서른이다

서른 해 동안 한 일이라곤 고작

두리번두리번 걸어간 것뿐이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보이저를 외우며 지나갔다

사춘기와 입시의 블랙홀을 간신히 건넜으나

무한진공의 우주 어디에도

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우울증이라는 소행성과 부딪칠 뻔 했을 때

보이저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주에 취직했다는 걸

죽을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걸

이태백이니 삼팔선이니 이상기후의 지구에서도

용케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대범하게 아이까지 낳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보이저는 애오라지 걸어가기만 했다

내 직장은 우주다 내 일은 나아가는 것이다

남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해도 보이저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지구에서 유행하던 주문을 되뇌이며

무소의 뿔처럼 성큼성큼 나아가기만 했다

 

아직도 보이저

우주 어딘가를 뚜벅뚜벅 걷고 있다

너무 멀리 가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보이저를 놀릴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걸

보이저 조차 모른 채 우주 밖의 지구를 향해

시원(始原)의 자궁을 향해

뚜벅 뚜벅

 

* NASA에서 1977년 발사한 무인우주탐사선.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다.

**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

 

 

 

 

보이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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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뚜벅뚜벅, 성큼성큼

 

예술은 죽어도 개성이고, 예술은 죽어도 스타일이다. 나서 죽는 동안에 벌어지는 희로애락은 거기서 거기, 새로울 것도 남다를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내용도 없고, 하늘 아래 새로운 의미도 없다. 남다를 것 없는 그 무내용과 무의미에 처하는 남다른 태도가 있을 뿐이고, 그 태도를 표현하는 남다른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이 심사 기준이었다. 그래서 보이저   4, ‘나사의 집  4, ‘우크라이나에서 온 신발  4편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나사의 집 시편들은 생의 미세한 결과 틈을 포착해 내는 예민한 감성과 그것들을 안정된 호흡으로 건져 올리는 내공이 녹록치 않았다. 문제는 한 편씩 읽었을 때에는 하나 같이 흠잡을 데 없는 수준작이었는데, 다섯 편을 함께 놓고 보니 다섯 편이 한결 같았다.  한결 같음 흠잡을 데 없음이 문제였다. 어떤 열정의 결여 혹은 어떤 결여의 결여. 매혹은 과잉이거나 결여에서 온다. 크게 넘치거나 크게 모자랄 때.

 

우크라이나 시편들 중에서는 플렉트럼이 인상적이었다. 짧았으나, 짧으므로 더욱, 생사의 경계를 타고 흐르는 ‘22000 볼트짜리 직관이 행간에서 백열하는 작품이었다. 피복을 입힌 전선/현실이 아니라, 피복이 벗겨진 자신의 전선/현실에 물 묻은 손을 갖다 대는 집요하고 용기 있는 천착만 있다면 22000 볼트짜리 시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예감을 갖게 했다.

 

그래서 결국 보이저 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무엇보다 우리 시에 차고 넘치는 시적 포즈나 제스처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우리 시도 이제 뚜벅 뚜벅, 성큼 성큼 걸을 때가 되었다. 나머지 네 편을 각기 다른 어조의 작품으로 묶어 자기가 노는 물의 너비와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어법으로 탁월한 시세계를 구현한다고 해도 천편일률은 공산품이 되고 만다. 자신의 작품을 선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시세계를 일괄할 만한 안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상은 덫일 수도 있고, 닻일 수도 있다. 덫에도 닻에도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이미 걸렸다면 죽어라 몸부림치는 수밖에.

 

- 심사위원 김언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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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역 / 이애경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천원역*과 만나네

노령역 지나 송정리역 다음 나주역에서 내려야 하지만

나는 천원역에서 슬쩍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지폐는 애들도 시큰둥 한다는데

차창 밖 들녘은 천 원이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나풀나풀 유혹하고

뻥튀기처럼 부푼 행복이 숨어있을 것 같기도 한

가난한 나는 그만 이 역에서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 먹고

들녘 하늘에 매달린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 먹으며

저 자라는 청보리처럼 살고 싶네

바람을 지집 삼아 옆구리에 끼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고 싶네

나부끼는 바람과 한바탕 몸을 섞고 나면

내 몸도 그만 투명한 날개 한 쌍 달지 않겠나 싶은 게

뚝뚝 번지는 석양 아래 고단한 날개를 접고

긴 잠에 들면

내 생 언저리가 더 없이 부드럽겠다 싶은 게

자꾸만 입 안 가득 초록물이 도는 것이네

 

* 호남선 간이역

 

 

 

 

 

[심사평] 유유자적의 화법

 

당선작으로 뽑은 시 ‘천원역’은 지역신문이라는 문예공모작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앙지의 신춘문예 당선작과 어깨를 겨룰 만한 시의 품격과 함량을 충족시켜 주는 ‘좋은 시’임을 우선 밝히고 싶다. 당선작 ‘천원역’은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여타의 작품을 누르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면모를 보여 당선작으로 뽑는 일이 오히려 쉬웠다.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귀면각 선인장’, ‘민들레’, ‘누에가 사는 방’, ‘낙엽이 사는 집’, ‘천원역’ 이상 다섯 편이었다. ‘귀면각 선인장’은 아열대에서 자라는 중남미산 기둥선인장을 의인화해서 쓴 재미있는 시이지만, 이야기의 구성이 산만했다는 흠을 지녔다. 그러나 화자의 독특한 시각이 눈에 띈다.


‘민들레’는 시가 예민하고 가늘고 섬세하다. 갈라진 옹벽의 길을 깁고 있는, 노란 불 켜고 있는 민들레 몇 포기가 눈에 선명하게 잡힌다. 그러나 가작 수준이다. ‘누에가 사는 방’은 촘촘하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실밥 터진 책들, 혹은 터진 실밥을 밤새 깁던 고시원생들의 고단한 삶의 얼룩이 보인다.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다. ‘낙엽이 사는 집’은 표현이 거칠고 시적 구성이 약하지만, 기발한 상상력이 시의 재미를 채워준다. 섬세함과 치밀함, 시적 응축력이 좀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비해서 당선작으로 뽑힌 ‘천원역’은 한눈에 심사자를 사로잡았으며, 매끄럽고 잘 숙성된 언어의 리듬으로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여유있는 화법을 풀어내고 있다.


이 시에서 ‘천원역’은 가난한 인간이 가보고 싶은, 경제 부담이 전혀 없는 꿈의 역이다. ‘노을이나 아침햇살 주워먹으며’ ‘청보리처럼’ 살아가는 친환경 청정지역이며, ‘내 생언저리가 더없이 부드럽겠다’는 곳이다. 따라서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먹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며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아가는 곳, 가난한 사람이 꿈꾸는 곳이 ‘천원역’이다. 지명地名이 주는 친근감을 이 시인은 시로서 재미있게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함께 투고한 ‘염전’, ‘그녀의 재봉틀’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좋은 시’로 뽑힐 만하다.당선자의 앞날이 기대된다.


심사위원 김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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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부처님 / 김애리나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써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 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셔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生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꼬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헛.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아,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당선소감] 


신문사에 작품을 부치던 날이었다. 그날, 꿈에서 부처를 만났다. 거대한 부처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목이 아프도록 부처의 얼굴을 올려보다가 얼른 합장을 했다. 합장을 하면서 어떤 소원하나를 빌었는지 가물가물 했다. 꿈속에서도 소원을 비는 철부지가 가여웠는지 부처는 빙그레 웃으셨다. 그리고 얼마뒤에 당선통보가 왔다. 너무 기뻐서 터진 웃음이, 곧 눈물로 바뀌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을 막상 듣고 보니,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빠를 힘껏 안아드렸다. 내가 글을쓰겠다는 꿈을 품게 된것은 순전히 부모님 때문이었다.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나의 유년시절, 아버지는 서점의 직원이셨고 어머니는 책 세일즈를 하셨다. 날마다 무거운 책 짐을 나르는 아빠와, 추운 겨울에 코가 발갛게 얼어도 책 한권을 팔기위해 거리 집집을 누비는 엄마. 나는 한번도 부모님이 부끄럽거나 챙피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다만, 당신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그 책들이 너무도 지겨웠었다. 그래서 생겨난 나의 꿈은, 훌륭한 작가가 되어서 내 책만 파는 서점을 부모님께 지어드리고 싶다는 황당한 바람이었다. 다행히도 나의 황당한 바람을 현실로 옮기기 전에, 부모님은 서점을 개업하셨다. 이제, 우리 서점에 내 이름으로 된 시집 한권 놓을 바람으로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감사드려야 할 분이 너무 많다.


고등학생 시절,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많은 힘이 되어주신 땅끝문학회 김경윤 선생님. 모교의 곽재구, 송수권, 김길수, 안광진 교수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지금쯤 눈 동그랗게 뜨고 자기 이름 찾고 있을 친구들아. 한결같이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왕자 창성선배와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더욱더 정진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심사평] 신선한 신인 작품을 읽는 즐거움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넘겨진 작품들 중 몇몇은 서정적인 밀도와 수사적 개성이 남달랐다.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응모해 온 것은 해를 거듭할구록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진주신문 가을 문예’의 저력이 아닐까 짐작했다. 마지막까지 되풀이해서 읽었던 시편들은 아래 여섯 분의 작품들이다.

 

‘검은 열매를 먹는 새’ 등은 상상력의 다양성과 깊이가 살펴졌으나, 촘촘한 심상들이 한 시편 속에서도 파편화이 되어 있어서 작품의 집중력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행간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시를 주밀하게 끌고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리라.

 

‘딱따구리 경전’ 등은 견고하게 지어진 시의 집을 대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구옥이 되어버렸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작시를 어떤 울타리 안에만 가두려 애쓰지 말고, 예측 불가지한 상상력의 들판으로 과감하게 방목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를 탐독하지 마라’ 등은 잘 짜여진 시적 구조에 실린 탄탄한 사유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골격만큼 심상 또한 선명하게 부조되었는가는 의문이었다. 스스로를 전환의 자리로 내몰아야 할 것으로 믿어졌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등은 시의 내밀함이 돋보이지만 관념에 기대는 실험은 결국 공허할 수 밖에 없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신체를 처절하게 관통해가는 내출혈적인 경과가 더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킨카주’ 등의 시편 앞에서 선자는 오래 망설였다. 불행한 이들을 꽃으로 받아 안음으로써 스스로 만개하는 사랑의 시화도 감염적이었지만, 그것을 건사하는 언어 또한 나무랄 데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선이 굵은 서정과 강건한 문체적 마력도 쉽게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다만 심상과 심상 사이의 삐꺽거리는 단층들이 수상자의 뒷자리에 이 분을 서게 한 것이리라.

 

‘봄날의 부처님’이 수상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즈넉한 절간 속에서 춘정을 불러와 부처님까지 노곤한 봄의 색정 속으로 밀어 넣는 능청이 선자의 입가에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기 때문이다. 돌연한 이 파격은 풍경을 압도하는 상상력의 힘일 것이다. 이 응모자는 또 다른 시편인 ‘A컵의 우주’, ‘안녕? 물고기!’등에서도 섬세한 시적 교직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수상을 축하하며, 큰 시인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해 가시길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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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차계 정씨 / 김영수

 

 

7번이 시내 열기를 가득 달고 돌아옵니다

짤랑거리는 입금 통이 가볍습니다

배차계 정씨는 점심시간을 악착같이 쓰고

일어나 동네번호 판을 바꿔 답니다

반환점이 이번엔 꽃 단지라

향기가 종점까지 묻어올지 의문입니다

견인차에 업혀 돌아온 55번이

정비공장에서 킬킬거리고

사장이 먹다 남은 생수 통을

마당으로 집어 던집니다

기름 밥 먹던 기사들이 연착한 55번처럼

주춤거립니다

"쎄루모타 하고 뿌라그 바까"

그의 발음엔 언제나 자음이 두개씩 달립니다

아니면 입이 싱겁다나요

정씨의 손에는 아직 배차 안 된

나른한 오후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모종 부어 논 꽃 뿌리처럼 무좀이

그의 신발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햇빛 노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

빈 버스의 재생 타이어를 툭툭 차봅니다

사장 말마따나 아직 빵빵한 구석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신은

55번이 살아 쿠릉거리고

7번은 떠나갑니다

때 절은 목장갑과 욕지거리 몇 마디로

시동 걸어 보내야 하는 하루가

지금도 빈 마당에 가득합니다

 

 

 

 

 

[당선소감] "무한한 책임감 시로써 보상하리"

 

휴대폰 액정판에 055-×××-××××라는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당선통보였다. 그 후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전화 소리에 나는 그저 “예, 예, 감사합니다” 라고 건성 대답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지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시의 세계에 빠뜨려 주신 김용락 선생님, 힘찬 매질을 아끼지 않으시던 대구교대 강현국 선생님, 계명대 이성복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 김원우 선생님, 손정수 선생님, 향토의 김양헌 선생님, 그리고 동인 활동하는 여러 문우들에게도 감사의 절을 올린다. 또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진주신문 심사위원님들께도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을 동시에 전한다.

 

무던히도 사물을 사랑하고 애 닳아 했던 한 사내가 이젠 눈을 뜬다. 나는 사물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들은 항상 조용했으며 혼자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았다. 나는 여럿이 있어도 외로웠다. 언제나 나는 내 방식대로 그들을 내 몸 속에 구겨 넣었고 함부로 내뱉고 다녔다. 내 깊숙한 곳에 혼을 빌려 준 그들에게 난 아직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시로써 보상하고 싶다.

 

나의 문학에 이정표가 되어준 진주신문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한층 더 열심히 하여 우리 문학에, 우리 시사에 남을 수 있는 시인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

 

 

 

 

 

 

[심사평] 삶의 건강성과 시적 형상화

 

본심에 회부된 작품은 모두 34사람의 작품 300여 편이었다. 예심을 거쳐 온 작품들이기에 일정한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오늘날 우리 현대시의 서정시적 성향, 민중시적 특성, 모더니즘적 취향성을 골고루 대변해 주는 내용이었다. 시가 시대정신의 안테나이면서 중추신경에 해당한다는 뜻이 되겠다.

 

최종적으로 선자의 손에 남겨진 작품들은 김륜희의 「동티가 서는 마을」외, 조성란의 「민무늬 하얀 외이셔츠」, 그리고 김영수의 「배차계 정씨」외 등 세 사람의 시들이었다.

 

먼저 「동티가 서는 마을」은 「자귀나무가 있는 방」 「수국이 피면」 「복사꽃」과 같이 식물적 상상력과 고전적 정서를 바탕으로 전통서정의 한 모서리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보여준 가작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작품들이 좀더 참신성이나 파격성과 결합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을 갖게 만들었다.

 

「민무늬 하얀 와이셔츠」는 「사각지대」「오래된 골목」 등과 같이 산문시적인 흐름을 주조로 하면서 미시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산문적 호흡이 좀더 탄력 있는 긴장력을 확보하는데는 다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배차계 정씨」외는 오늘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도 삶에 관한 넉넉한 시선과 개성적인 표현을 결합함으로써 시적 형상화를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소외된 삶과 세계에 보다 집중된 관심을 표출하면서도 그것을 분노나 저항이라는 도식적ㆍ기계주의적 민중론에 함몰되지 않고 개성과 건강성으로 이끌어 올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도 예감케 해주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서 당선작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하였다. 앞으로 상투성이나 도식성에 빠지지 말고 참신성과 서정성을 강화해 나아간다면 씨 특유의 시적 건강성이 더욱 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정진을, 그리고 이번 기회에 유보된 분들에게는 새로운 분발을 기대하면서 진주신문의 발전을 축원한다.

 

심사위원 김재홍(문학평론가ㆍ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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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立冬) / 김영미

 

 

아버지가 돌아왔다. 쥐색 바바리가 추워 보였다. 늦겨울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 덕에 집에서는 따뜻한 밥냄새가 났다. 콩비지에 돼지고기를 넣는 어머니의 입가에선 실실 바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저 추워지면 집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밥상 가득 비지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궁금했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뜬내만 풍기고 있었다. 인제 김장도 담아야 할 텐데. 묵묵한 숟가락질. 사람이 무정하기는 연락도 없이. 노라리도 아니고 애가 몇 살인데. 끙, 아버지 등 기댄 벽 틈에서 함부로 연탄가스가 새나왔다.

 

슬레트 지붕 밑 제비집이 텅 비었다. 아버지는 집이 남쪽 나라인가 봐. 쥐색 바바리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힘껏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맨드라미 빛 담요 위에 너겁처럼 흐트러져 자는 아버지, 노루잠 사이로 언뜻 그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보였다.

 

이젠 어머니가 떠나세요. 그저 습성이 다른 철새들이 사는 집이라 생각하면 돼요.

 

창밖으로 비꽃이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반짝반짝 바늘같은 비가 어머니 등에 꽂혔다. 날이 더 추워지겠구나. 탄불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사평] “끝까지 흥분 없이 내면의 슬픔을 드러내”

매양 남의 작품을 보는 일은 두렵고 낯설다. 나의 무식과 성의 없음으로 해서 좋은 작품을 놓치면 어쩌나 싶어서다. 하지만 누군가는 맡아야 할 소임이기에 다부진 마음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다. 그러다가 딱 부러지게 좋은 작품을 만나면 기쁨은 배가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심사하고 그 결과가 발표되고 난 뒤에는 심사자가 오히려 거꾸로 다른 사람들의 심사를 받게 되는 게 아닌가. 어쩔 수없이 나는 응모된 작품을 성실히 읽는 독자의 자리에 서기로 한다. 이런 때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감성을 믿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고 나를 감동시키는 단 한편의 시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는 없게 된다. 이래저래 시라는 양식의 문학은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주관과에 의해 지배되는 예술임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 여러 편의 시작품이 선자의 손에서 맴돌았다. 131번의 「연리목」, 313번의 「옷 만드는 여자」, 164번의 「때늦은 개나리」, 264번의 「풍경의 살해」, 251번의 「立冬」등의 작품이 그들이다. 되돌려 읽어본즉 「연리목-連理木」은 작은 그릇 속에 아기자기한 정서를 담는 솜씨가 좋았고 「옷 만드는 여자」와 「때늦은 개나리」는 삶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면서 시의 꼴을 아름다이 다듬는 점이 돋보였고 「풍경의 살해」는 사물을 날렵하게 다루는 현대적 감각이 뛰어났다. 고민 끝에 한편만을 골라야 한다는 주문에 따라 선자는 그 가운데에서 「立冬」을 고른다. 이 작품은 애달픈 가족사를 담으면서도 끝까지 흥분함이 없이 내면의 비밀한 슬프고도 애달픈 언어를 꺼내어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숨은 눈」「도덕파출소 앞을 지나다」와 같은 작품도 비슷한 수준으로 이 작가의 실력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준다.

시인은 한편의 작품으로 승부되기보다는 보다 많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보다 더 그의 전 생애를 통한 문학적 노력을 통해서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 부디 겸허히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시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이름에서, 그의 삶에서 골고루 향기가 번지기를 기원한다. 간발(間髮)의 차이로 선에서 비껴간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따로이 적는다.

 

심사위원 : 나태주, 박노정, 나희덕,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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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젖줄을 토해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놓인다 격자무늬 그물 사이로 굵은 바람만 빠져나갈 뿐, 거미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2

 

모두 마을을 떠난 후, 여뀌며 끈끈이주걱, 바랭이가 무성한 빈집엔 도둑고양이와 생쥐가 떠나고 없다 밤이면 달빛을 풀어 추녀와 젖은 굴뚝 사이 무당거미가 슬그머니 나와 집을 짓는다 연통의 온기가 식어가면서 거미들은 재빨리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기고 이 집의 새 가장이 된 것이다 이제 거미는 썩은 대들보 살집을 파고 들어가 이 집의 내력과 가훈을 갉아먹는다 이 집엔 원래 실직한 사내가 귀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밤 기차를 타버리고 그때부터 허물어진 집터를 배경으로 거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농장을 이루고 산다

 

3

 

무너진 것들을 배경으로 투명한 젖줄 풀어 길을 내는 저 무당거미의 삶, 여전히 팽팽하고 가파르다

 

 

 

 

재단법인 남성문화재단(이사장 김장하)에서 출연해 운영하는 '1500만원 고료 진주신문 가을문예'의 여덟번째 수상자가 가려졌다. '가을문예운영위원회'(위원장 박노정)는 다음과 같은 심사 결과를 내놓았다.

 

'진주신문 가을문예'1995년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남성문화재단에서 상금을 비롯한 일체의 운영기금을 출연해 오고 있다. 시와 소설에 걸쳐 단 한 명만 당선작을 뽑아, 각각 500만원과 1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해 오고 있다.

 

'진주신문 가을문예'는 매년 가을에 공모를 마감, 심사를 거쳐 운영한다. 매년 시는 수백명이 수천편씩, 소설도 수십명이 수백편을 응모해 명실상부 전국 최고 수준을 인정받아 왔다.

 

당선작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신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능숙한 솜씨로 우리 시의 평균적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심사위원들로부터 "투고한 거개의 작품들은 오랜 숙련의 손길이 느껴질 만큼 안정적이며, 수준이 고르다"면서, "무엇보다 묘사가 적확하고 이미지 또한 선명하다. 말을 매만지는 솜씨로 보아 이미 기성 시인 아닌가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올해 시 부문 '가을문예' 본심은 원구식(월간 <현대시> 발행인 겸 주간), 예심은 박노정(진주문인협회장) 정일근(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진영(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씨가 했다.

 

김승원씨는 안양 평촌고를 나와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다. 2002 '한국여성문학상' 시 부문에 입상하고, 2002 여수해양문학상 시부문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뜻밖에 당선 소식을 받았다. 10월에 작품을 보내놓고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당선이라니 부끄럽고 설렌다", "이번 당선은 아름다운 글만 써온 저의 글쓰기에 대한 경고라 생각한다"고 당선소감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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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 김애란

 

 

엄마 지난 주말 백화점 쎄일 때 주문한 빨간색 원피스 어디 있어요? 글쎄 네 책꽂이에 보렴 책꽂이는 모름지기 삼단이 제일인데 네 지능은 너무 높아 내 가방엔 노란색 미니스커트 밖에 없어요 간밤에 성옥언니가 먹다 남긴 가스통 바슐라르는 내가 입기에 너무 무거운 걸요 미니스커트는 지나치게 가볍죠 큰언니 언니가 아끼는 주름치마 빌려줘 그거 철공소에 맡겼어 주름좀 피려고 한 시절 바람 잡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니 분식집은 오거리 분식집이 제일이야 거기 한쪽 말이 짧은 남자는 오늘도 화단 아래로 출근했어 작은 애야 그러지 말고 네 머리에서 좀 꺼내 입으렴 네 머리엔 문학 음악 설탕 쌀 없는 게 없쟎니 아니에요 엄마 제 서랍은 요즘 부재중이에요 이 나팔바지는 왜 이래요? 그거 너무 오래돼서 그렇다 자고로 사랑이란 건 오래 되면 빛이 바래거든 아니다 서글플 거 없다 세월이 흘렀거니 하면 그만인거야 얘 막내야 머리 좀 올려라 작은애 넌 손가락 좀 펴고 큰애는 얼굴 들어 안돼요 엄마 난 긴 문장이 좋아요 무릎이 안 펴져요 엄마 빨간색 메니큐어 좀 주세요 자꾸 발바닥이 갈라져요 모자를 써야겠어요 노란색 모자는 싫어요 엄마도 노란색은 싫어하쟎아요 우리 식구 모두 노란색이라면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잖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쟎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다른 집으로 잘못 배달되었나 봐요

 

햇살이 조명탄처럼 터지는 사월

나는 무도회 준비가 한창인 화단 옆을 지난다

개나리 가지가 나를 만진다

올해는 좀 색다른 옷을 입고 나올라나

혹 또 노란 미니스커트?

 

 

 

 

보란 듯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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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개미 한 마리 길을 잃었는지 백지 위에서 긴 더듬이를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하는 내 혀처럼 황망히 움직이고 있다. 개미라는 움직이는 검은색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연필을 질질 끌며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따라다니고 있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지는 온통 검은 색 길로 덮인다. 그물처럼 깔린 이 검은 색 길에 놀란 걸까. 개미가 갑자기 꼼짝도 않는다. 그래, 아무데로나 뻗어가던 내 이 물컹거리는 사유도 자주 검은 돌덩이처럼 굳어지곤 했지. 자신이 뱉아낸 길이 백지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낀 걸까. 개미가 곧장 가느다란 허리를 질질 끌며 백지 밖으로 사라진다.

 

개미처럼, 내가 따라다니고 있는 누군가가 무엇이 내 생 밖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두려울 때가 있다. 내가 뱉아낸 길이 원점으로만 회귀하는 길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믿으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불면의 밤을 지켜준 내 안의 밖의 사물들이 웃고 있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기쁘다. 이제 웃음을 질질 흘리며 살아도 될까.

 

늘 꽃밭을 가꾸시던 어머니, 내 시는 그 꽃밭에서 싹텄다는 걸 새삼 말씀드려야 하나. 꽃밭 옆에 지게를 세워두시던 아버지, 그래요 지게 가득 흙을 져 날라야지요. 이 작은 몸 속 태초로부터 그리움의 소용돌이를 휘돌리시는 어머니 아버지께 드릴 것이 부유하는 꿈밖에 없다.

끈질기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두 아이들과 따뜻한 손으로 그 행복마저 재워주는 남편에게 고맙다.

 

무엇보다 지도해주신 선생님과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진주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할 것을 감히 약속 드리면서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난 학교 밖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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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서른 네 분의 300여 작품 중 시선을 끌었던 작품은 박진성의 <론강의 별밤><빈집>, 김애란의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매미가 나를 읽는다>, 강예림의 <7월의 도남리><산문(山門)이 열리다>, 그리고 박선영의 <냉장고> 등 네 분의 작품이었다.

 

이중 <론강의 별밤><빈집>은 금년도 선자가 타 문예지 심사에서 세 번 이상 만났던 작품이고 또 당선의 영예도 얻었던 분이다. <7월의 도남리><산문(山門)이 열리다> 또한 3회 걸쳐 만났던 작품이다. 사적 재산이 아니라 이미 유통화된 공적 재산이란 점에서 쉽게 부담 없이 제외시킬 수 있어 좋았다.

 

결국 맨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냉장고><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두 편이었다. 두 편 다 개성도 있고 자기 정체성도 뚜렷하며 현실을 보는 눈이나 이미지를 정박(定泊)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러나 시는 무엇보다 정서반응의 언어고 지극히 사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란 점에서 <냉장고>의 경우는 그 주제 즉 곡즉전(曲卽全)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해도 사물을 장악하는 표현의 묘미가 다소 뒤져 심미적 정서를 일으키는 쾌감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은 시에 나오는 그대로 바슐라르의 이른바 물질적 상상력을 통하여 인간 존재태를 꽃밭으로 가져가 본 것인데 감수성도 신선하고 표현의 능력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햇살이 조명탄처럼 터지는 사월, 무도회의 준비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조명탄처럼 터지는 새로운 언어와 도발정신은 늘 신인의 몫이다.

끝으로 당선자에게 드릴 말씀은 재능박덕이란 말이 있는데 요즘 시류를 타고있는 패러디나 재치놀음의 감각 유형에서 덫을 스스로 걷어낼 줄만 안다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한국시는 지금 두 가지 방향에서 크게 오도되어 본말이 전도되어 있음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현대시가 노래에서 비평의 체계로 넘어와 있다고 해도 결국 시는 노래일 수밖에 없고, 그 둘은 기발한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로 선의 인지적 충격보다는 민족 정서를 회복하는 말가락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기대하며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송수권, 박노정 송희복 김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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