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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立冬) / 김영미

 

 

아버지가 돌아왔다. 쥐색 바바리가 추워 보였다. 늦겨울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 덕에 집에서는 따뜻한 밥냄새가 났다. 콩비지에 돼지고기를 넣는 어머니의 입가에선 실실 바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저 추워지면 집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밥상 가득 비지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궁금했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뜬내만 풍기고 있었다. 인제 김장도 담아야 할 텐데. 묵묵한 숟가락질. 사람이 무정하기는 연락도 없이. 노라리도 아니고 애가 몇 살인데. 끙, 아버지 등 기댄 벽 틈에서 함부로 연탄가스가 새나왔다.

 

슬레트 지붕 밑 제비집이 텅 비었다. 아버지는 집이 남쪽 나라인가 봐. 쥐색 바바리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힘껏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맨드라미 빛 담요 위에 너겁처럼 흐트러져 자는 아버지, 노루잠 사이로 언뜻 그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보였다.

 

이젠 어머니가 떠나세요. 그저 습성이 다른 철새들이 사는 집이라 생각하면 돼요.

 

창밖으로 비꽃이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반짝반짝 바늘같은 비가 어머니 등에 꽂혔다. 날이 더 추워지겠구나. 탄불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사평] “끝까지 흥분 없이 내면의 슬픔을 드러내”

매양 남의 작품을 보는 일은 두렵고 낯설다. 나의 무식과 성의 없음으로 해서 좋은 작품을 놓치면 어쩌나 싶어서다. 하지만 누군가는 맡아야 할 소임이기에 다부진 마음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다. 그러다가 딱 부러지게 좋은 작품을 만나면 기쁨은 배가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심사하고 그 결과가 발표되고 난 뒤에는 심사자가 오히려 거꾸로 다른 사람들의 심사를 받게 되는 게 아닌가. 어쩔 수없이 나는 응모된 작품을 성실히 읽는 독자의 자리에 서기로 한다. 이런 때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감성을 믿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고 나를 감동시키는 단 한편의 시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는 없게 된다. 이래저래 시라는 양식의 문학은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주관과에 의해 지배되는 예술임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 여러 편의 시작품이 선자의 손에서 맴돌았다. 131번의 「연리목」, 313번의 「옷 만드는 여자」, 164번의 「때늦은 개나리」, 264번의 「풍경의 살해」, 251번의 「立冬」등의 작품이 그들이다. 되돌려 읽어본즉 「연리목-連理木」은 작은 그릇 속에 아기자기한 정서를 담는 솜씨가 좋았고 「옷 만드는 여자」와 「때늦은 개나리」는 삶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면서 시의 꼴을 아름다이 다듬는 점이 돋보였고 「풍경의 살해」는 사물을 날렵하게 다루는 현대적 감각이 뛰어났다. 고민 끝에 한편만을 골라야 한다는 주문에 따라 선자는 그 가운데에서 「立冬」을 고른다. 이 작품은 애달픈 가족사를 담으면서도 끝까지 흥분함이 없이 내면의 비밀한 슬프고도 애달픈 언어를 꺼내어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숨은 눈」「도덕파출소 앞을 지나다」와 같은 작품도 비슷한 수준으로 이 작가의 실력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준다.

시인은 한편의 작품으로 승부되기보다는 보다 많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보다 더 그의 전 생애를 통한 문학적 노력을 통해서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 부디 겸허히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시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이름에서, 그의 삶에서 골고루 향기가 번지기를 기원한다. 간발(間髮)의 차이로 선에서 비껴간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따로이 적는다.

 

심사위원 : 나태주, 박노정, 나희덕,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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