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氏 / 김현욱
1
보이저* 氏의 돌잔치는 지구 밖에서 열렸다
보름달 위에 차린 돌상을 받아
홀로 돌잡이를 하였는데
웬일인지 보이저氏는 아무 것도 집지 않았다
돌상 너머 파랗게 빛나던 구슬은 이미 멀리 있다는 걸
보이저氏는 운명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품속으로 무작정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2
보이저氏는 이제 서른이다
서른 해 동안 한 일이라곤 고작
두리번두리번 걸어간 것뿐이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보이저氏를 외우며 지나갔다
사춘기와 입시의 블랙홀을 간신히 건넜으나
무한진공의 우주 어디에도
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우울증이라는 소행성과 부딪칠 뻔 했을 때
보이저氏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주에 취직했다는 걸
죽을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걸
이태백이니 삼팔선이니 이상기후의 지구에서도
용케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대범하게 아이까지 낳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보이저氏는 애오라지 걸어가기만 했다
내 직장은 우주다 내 일은 나아가는 것이다
남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해도 보이저氏는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지구에서 유행하던 주문을 되뇌이며
무소의 뿔처럼 성큼성큼 나아가기만 했다
아직도 보이저氏는
우주 어딘가를 뚜벅뚜벅 걷고 있다
너무 멀리 가버려서
이제는 아무도 보이저氏를 놀릴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걸
보이저氏 조차 모른 채 우주 밖의 지구를 향해
시원(始原)의 자궁을 향해
뚜벅 뚜벅
* NASA에서 1977년 발사한 무인우주탐사선.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다.
**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사
[심사평] 뚜벅뚜벅, 성큼성큼
예술은 죽어도 개성이고, 예술은 죽어도 스타일이다. 나서 죽는 동안에 벌어지는 희로애락은 거기서 거기, 새로울 것도 남다를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내용’도 없고, 하늘 아래 새로운 ‘의미’도 없다. 남다를 것 없는 그 무내용과 무의미에 처하는 남다른 태도가 있을 뿐이고, 그 태도를 표현하는 남다른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상이 심사 기준이었다. 그래서 ‘보이저 氏’ 외 4편, ‘나사의 집’ 외 4편, ‘우크라이나에서 온 신발’ 외 4편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나사의 집’ 시편들은 생의 미세한 결과 틈을 포착해 내는 예민한 감성과 그것들을 안정된 호흡으로 건져 올리는 내공이 녹록치 않았다. 문제는 한 편씩 읽었을 때에는 하나 같이 흠잡을 데 없는 수준작이었는데, 다섯 편을 함께 놓고 보니 다섯 편이 한결 같았다. 이 ‘한결 같음’과 ‘흠잡을 데 없음’이 문제였다. 어떤 열정의 결여 혹은 어떤 결여의 결여. 매혹은 과잉이거나 결여에서 온다. 크게 넘치거나 크게 모자랄 때.
‘우크라이나’ 시편들 중에서는 ‘플렉트럼’이 인상적이었다. 짧았으나, 짧으므로 더욱, 생사의 경계를 타고 흐르는 ‘22000 볼트’짜리 직관이 행간에서 ‘백열하는’ 작품이었다. 피복을 입힌 전선/현실이 아니라, 피복이 벗겨진 자신의 전선/현실에 물 묻은 손을 갖다 대는 집요하고 용기 있는 천착만 있다면 22000 볼트짜리 시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예감을 갖게 했다.
그래서 결국 ‘보이저 氏’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무엇보다 우리 시에 차고 넘치는 시적 포즈나 제스처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우리 시도 이제 ‘뚜벅 뚜벅, 성큼 성큼’ 걸을 때가 되었다. 나머지 네 편을 각기 다른 어조의 작품으로 묶어 자기가 노는 물의 너비와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어법으로 탁월한 시세계를 구현한다고 해도 천편일률은 공산품이 되고 만다. 자신의 작품을 선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시세계를 일괄할 만한 안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상은 덫일 수도 있고, 닻일 수도 있다. 덫에도 닻에도 걸리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이미 걸렸다면 죽어라 몸부림치는 수밖에.
- 심사위원 김언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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