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젊은 문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쳐내고 있는 가운데 이런 상을 받게 돼 기쁘기도 하지만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더욱 열심히 지역문단을 위해 노력하라는 선배 문인들의 마음이 담긴 상으로 여기겠습니다.”
(사)전북작가회의(회장 임명진)가 올해 처음으로 제정한 ‘제1회 불꽃문학상’에 시인 유강희(38)씨가 선정됐다.
‘불꽃문학상’은 ‘선운산 복분자주 흥진’의 후원을 받아 전북작가회의 회원 중 문학적 활동이 활발하고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는 작가를 올해부터 매년 선정해 격려할 예정. 상의 이름처럼 어둠과 혹한 속에서 빛을 발하는 불꽃처럼 뜨거운 청년 정신으로 문학의 길을 밝혀 주기를 바라는 선배 문인들의 마음이 담긴 상으로 상금은 300만원이다.
올해 처음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은 유강희 시인은 전북작가회의에서 청년분과 분과장을 맡아 젊은 작가들을 이끌어 왔고, 첫 시집 ‘불태운 시집’에 이어 지난해 출간한 ‘오리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순결한 눈과 치열한 시 정신으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만들어 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8년 전북 완주 출생인 유 시인은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 2권의 시집을 출간하는 등 많은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불꽃문학상 운영위 관계자는 “이번에 처음 제정된 이 상을 앞으로 전국의 많은 문학상 중 우리 지역의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갈 상으로 이어나갈 예정”이라며 “특히 지역 기업의 메세나 환원의 좋은 사례가 되는 상으로의 의미도 깊다”고 말했다.
한편, 전북작가회의는 오는 25일 오후 5시 전주한옥생활체험관에서 올해 전북작가회의 정기총회 마련, 제1회 불꽃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시상과 함께 올해 펼쳐질 전반적인 사업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장옥관은 삼년 전쯤 허물을 벗은 시인이다. 그전에도 그의 시는 사물과 사실들의 자상한 묘사와 배치로 매력이 있었지만, 이것이 그의 시 세계다 라고 딱이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지난번 시집 『하늘 우물 』의 앞 절반을 채운 시들 예를 들어 「다시 살구꽃 필 때」같은 작품에서 환상과 현실이 역동적으로 만나는 비전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번에 예심을 거쳐 올라온 그의 시들은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가오리 날아오르다」의 첫 2연을 읽어보자.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서 둥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대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현실과 환상의 이렇게 역동적으로 만나는 시를 따로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뒤에 나오지만 옥개석이 가오리라니! 달밤에 날아다닌다면 그 모양새가 틀림없이 가오리일 것이다.
「오줌꽃」에서 자신의 오줌버캐가 꽃으로 변모되어 무덤까지 따라오는 비전도 같은 맥락이고, 「지렁이」에서 지렁이를 춤추게하는 상상력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상력의 역동성을 누그러트리지 말고 다음에 새로 허물을 벗을 때까지 든든히 등에 메고 가길 바란다. 축하한다. (황동규-시인)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창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뜻밖의 수상 소식을 듣고, 몹시 민망하고 당황하여 예전에 써놓았던 편지 한 통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 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치열하게 매순간을 살겠습니다. 못난 작품을 혜안으로 밝게 읽어주신 유종호, 신경림, 정진규, 조정권,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은사는 없다 감포 바다가 눈 높이까지 밀려와도 감은사 스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들을 쌓아 놓은 두 개 석탑이 감은사를 변명한다 지도에도 감은사로 적혀 있고 길을 물어보면 모두 아 감은사 말이지요, 감탄한다 시커먼 찰주까지 남아 있는 감은사 탑과 탑의 균열은 감은사의 부재와 더불어 꽃핀 현호색을 에워싼다
저 연보라빛 현호색을 가로질러 감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절은 늘 가파르다 계단과 회랑과 높은 천장의 가파름은 삶과 절의 경계인 것 현호색은 감은사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보라빛인 양 내 속에서 번진다
그곳에 감은사가 있어야 하는지 저녁 예불 소리를 듣거나 석등의 불빛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몇 백 년 동안 감은사는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감은사에서 바다까지 수로의 기록과 석탑을 찾았다 내가 감은사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밀어닥칠 해일의 기미와 내 마음을 본뜬 수줍은 현호색 무더기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감은사에서 너무 지체했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이나 바람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도 한다
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장호(시인),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4. 심사평
「참신한 시상과 활달한 상상력운동」
본심에 회부된 일곱 분 모두가 수상시인으로 뽑힐 만한 능력과 자질을 지닌 분들이기에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30대로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60년대에 데뷔한 시인부터 80년대 시인까지 각기 경륜과 특징이 있어서 한 사람을 뽑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다소 연륜이 있는 시인으로 임영조씨와 보다 젊은 시인으로는 송재학씨를 추천했다. 임영조씨의 작품들은 비교적 깊이가 있고 완성도가 높았으며 작품의 수준이 일정해 보였고, 송재학씨의 시는 참신한 시상전개와 활달한 상상력 운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임영조씨의 시들은 안정돼 있는데 비해 생동력이 덜해보였으며, 송재학씨의 시들은 완성도가 다소 덜했지만 시적 패기와 열정이 신선하고 뜨겁게 다가오는 게 장점이었다. 심사위원들의 경우 두 분은 완성도 쪽에 점수를 후하게 매겼다. 이 과정에서 김달진 문학상의 선격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 높은 평가를 주어 왔던 상의 성격을 고려하여 나는 송재학씨를 수장작으로 미는데 적극 동의하였다. 제5회 김달진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송재학씨의 「감은사에 가다」외 5편들은 참신한 시상과 활달한 상상력 운동이 돋보이는 게 특징이다. 광물적 상상력과 식물적 상상력이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부딪치면서 현대적 삶 속에서 마모돼 가는 인간성과 위축돼 가는 생명력을 복원해내는 힘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도 장점이다. 〈산의 터널 공사가 시작되었다/ 햇빛과 소나무가 무너진다/ 는개와 푸른 새순/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의 길이 갈라지고 부딪치는/ 그곳에는 절벽이 없다/ 늙은 여자의 化粧은 봄날을 힘겨워 한다/ 다홍치마 아이가 목덜미를 봄볕에 맡긴다/ 〔중략〕/ 늑골을 뜯고 비집고 올라오는 노루귀 흰 꽃 옆/ 우레와 폭우가 서성대는 봄밤〉(「봄날」)과 같은 시에서 보듯이 광물심상과 식물심상이 빚어내는 날카롭고 부드러운 화음 속에 따뜻한 생명의 울림과 율감을 섬세하게 포착해서 형상화해내는 힘과 눈이 돋보이는 것이다. 다만 비교적 긴 산문시 호흡을 지닐 경우 시상의 중첩과 동어반복적 요소 및 율감의 매끄럽지 못한 것들이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곳곳에 튕겨 오르는 신선한 시정신의 건강성과 감각의 신선성은 앞으로의 더 큰 발전에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인의 앞날에 더욱 정진이 있어서 대성해 가기를 빌면서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김재홍)
입추 지나고 광복절 지나고 추적이던 빗물 끝 아릿하게 번져오는, 생량머리가 묻혀온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못 받은 척 쭈그려 앉아 말쑥하게 새로 올라온 쑥 한줌 실하게 뜯어 뜯던 자리에 도로 뿌린다 오너라 슬픔, 쑥 이파리 태워 매운 눈 비비며 꺽꺽 같이 죄다 울어버리자
아주 가끔은 우울하고 대부분은 명랑해요 사람들은 내가 명랑한 걸 좋아하지 않아요 명랑은 우울보다 격조가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명랑하고 싶어요 무엇에든 광적으로 집착하는 체질이 못 되거든요 광적인 집착은 병적인 우울을 낳지요 언제나 노심초사 전전긍긍 어디에서 불행이 오는지 어디로 행복이 달아나는지 쉴새없이 탐색하고 추적해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점점 명랑에서 멀어져 우울한 괴물로 변해버리죠 정말이지 나는 그런 거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단것보다 쓴 것을 더 좋아한 탓인지 여하한 고통 위에 또 고통을 세워 그 안에 아무리 사나운 북쪽 창을 달아놓아도 내 열병은 시들 새도 없이 하루 만에 거뜬히 끝나버려요 쓸데없이 진지하고 쓸데없이 합리적이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값비싼 망원경 따위는 집착 강한 우울한 사람들에게나 모두 줘버려요 나는 그냥 바람 부는 길가에 앉아 무언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릴래요 무언가가 다가와 황홀하게 나를 감동시켜주길 원할래요 로댕의 대성당처럼 가우디의 카사 밀라처럼 언제든지 떠나고 싶은 지중해처럼 지로나의 내밀한 구시가지처럼 고야의 검은 집처럼 김정희의 아름다운 세한도처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뒤뚱뒤뚱 해맑은 어린아이의 단순 명쾌한 웃음소리처럼 오성의 드높은 담장 단번에 밀치고 들어오는 놀라운 명랑에 자연스레 내 온몸 빠져들기를 원해요 아주아주 오래된, 처음과 끝 같기를 원해요 너도나도 창백한 백합꽃 같은 우울에 매달려 격조 있던 본래의 심연 구기고 구겨 뒤틀린 철갑 같은 고상 찬란한 신종 우울증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자랑스레 뻐기든 말든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언제나 명랑하고 싶어요
전후 신서정파의 기수이며 1969년 [현대시학-창간:전봉건, 발행:전기화, 편집주간:고형렬02-701-2341] 창간하여 한국시단의 위상을 드높인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제정한 ‘제3회 전봉건문학상’과 새로운 사유와 감각으로 미래 한국시단을 이끌어갈 인재를 발굴하는 ‘2007년도 현대시학 신인상’ 시상식이 ‘2018년도 현대시학 총회’와 함께 2월 23일 종로구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는 시집'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펴낸 김상미 시인이 선정되었다.전봉건문학상은 지난 한 해 발간한 중견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와 평가를 통해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심사위원(이경림 시인, 이숭원 문학평론가)들은 심사평에서 “김상미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생의 진실과 비밀에 마주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화법, 유사한 시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과 변화를 창조하는 그의 매혹적인 표현법은 이제 어떤 경지에 이른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자인 김상미 시인은 1957년 부산 초량동에서 출생하였고, 1990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하였다.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가 있다.
휴대전화를 통해 수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첫 마디가 ‘무겁습니다’ 였습니다. 저에게 조지훈 선생은 오래 전부터 크고 무거운 이미지였습니다.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만나뵐 수가 없었지요. 선생께서 돌아가시던 1968년, 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9살 짜리 코흘리개였습니다), 우연찮게도 제게는 고려대 출신 선배 문인이 많았습니다.
제가 나온 경희대 국문과가 황순원, 조병화 선생 운운하는 것처럼, 연배가 지긋하신 고대 출신 선배들은 지훈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가령, 두루마기 차림으로 혼자 정문을 가로막고,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호통을 치셨다는 삽화 같은 것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오래 쌓여 ‘크고 무겁다’는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거운 상을 받으면서, 상이란 벌과 대단히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했습니다. 문화의 전 국면은 물론, 개별적 삶의 진전도 상과 벌 사이로 난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과 벌은 우선, 공개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몰래 주는 상이나, 아무도 모르는 데서 받는 벌은 없습니다. 상과 벌은 대 사회적이고 또 매우 직접적입니다. 죽은 자에게 주는 상이나 벌은 없습니다.
상벌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을 받는 자는 박수를 받고 벌을 받는 자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수상자나 수형자 모두 진지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고 들여다 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얼마큼 와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와 타자, 나와 자아는 서로 편안한가, 아니면 불편한가. 그리하여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순간, 당사자는 삶의 중심, 우주의 중심입니다. 상과 벌은 사랑이나 질병, 죽음처럼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상과 벌의 본질일 것입니다.
상벌은 또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분명하게 나뉩니다. 스스로 상을 주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고, 또 스스로 벌을 내리면 신경정신 계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 쉽습니다. 큰 상일수록, 또 큰 벌일수록 그것을 받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는 것은 아늑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선사가 말했듯이 ‘진실이란 우리가 두려워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상과 벌은 바로 그런 진실과 대면하게 합니다.
가장 성숙한 수상자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릇된 가치와 제도가 내리는 벌을 기꺼이 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교자나 혁명가, 예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돌아보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거나 시대에 브레이크를 건 정신이나 운동들, 기왕의 질서와 개념을 뒤흔들며 끝끝내 인간과 생명을 옹호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벌을 받기로 작정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과 벌은 연속과 단절의 전위입니다. 상을 통해 기왕의 미덕이 전승, 유지되고, 벌을 통해 기왕의 악덕이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오늘 저는, 제가 받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굴착하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무거운 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조론’과 무관한 작은 삶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지적했듯이, 저는 선비, 즉 지사이기보다는 겨우 한 사람의 시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작은 시인입니다. 제가 짧은 소견으로 이해하는 선비란, 자기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고, 세계에 대해 대단히 예민한 존재입니다. 글과 삶 사이에 시차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량과 여유를 갖고 있는 ‘향기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선비가 못 됩니다. 글과 삶 사이가 아득하게 멉니다. 신념이 많지도 않고, 있다 해도 분명하지 못합니다. 삶 또한 구차하고 옹색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선비적 삶은 저에게 유예될 것입니다.
지훈은 시 <낙화>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라며 바람으로 대표되는 외부적 요인을 일거에 일축하며 ‘꽃’ 즉 자기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가 있지만, 저같이 미욱한 시인은 꽃이 지지도 않았는데 바람을 문제 삼곤 했습니다. 낙화의 원인을 끊임없이 외부에 전가해왔습니다. 꽃이 지지 않는 아침에도 울고 싶다며 감상에 젖곤 했습니다. 지훈은 <낙화> 이후 전쟁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시대의 전면으로 나섭니다. 시 <터져오르는 함성>에서 ‘권력의 구둣발이 네 머리를 짓밟을지라도/(...)/절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라며 민주주의를 희구합니다. 저는 지훈의 이 전환에 주목합니다. ‘목어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하던 청록파의 감수성이 어떻게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와 맞서는 사자후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지훈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이번에 지훈상을 수상하게 된 제 시집 《제국호텔》은 제가 40대 초반에 쓴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시집의 상당 부분은 지사적 사유와 삶이 불가능한 시대에 대한 질문이고자 했습니다. 시의 사회적 효용이 용도 폐기되었다고 하는 판정에 대한 문제 제기이고자 했습니다. 갈수록 시가 작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시는 형용사와 부사의 울타리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는 곧 서정시였고, 어느 사이엔가 시인은 변방으로 물러난 인간문화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는 세상과 무관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적 삶, 실존적 삶의 안쪽을 깊숙이 파고드는 시도 많지 않습니다. 시는 외치지 않았고, 그렇다고 속삭이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시가 시인과 독자, 언어와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 문학에 대한 언어, 문학을 위한 언어에는 패배주의적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낙화’하는 시는 ‘바람’만 탓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탓하며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구둣발’이 시의 머리를 짓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호텔》은 사실 제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제목입니다. 요즘 우리 시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이미지입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인문학이 내팽개쳐버린, 이른바 거대담론입니다. 저의 치기, 저의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거스르고 싶었습니다.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형용사, 부사도 우리 시를 구성하는 주요한 유전자이지만, 그것은 우리 시의 뼈이기 보다는 살이었습니다. 살만 있는 몸은 없습니다. 연체동물은 홀로 서지 못합니다. 저는 《제국호텔》에서 우리 모국어의 척추, 즉 명사와 동사의 힘을 구축해보고 싶었습니다. 거칠게 말해, 커다랗고 무거운 상상력을 동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 ‘제국’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을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려 해도, 우리는 제국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냉전시대를 갈라 놓았던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는 이 무수한 벽을, 우리 안에까지 들어와 있는 저 제국의 벽에 대해 발언하지 않습니다. 분단 현실도 그대로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40대는 물론, 우리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 합니다. 일이 없으면 꿈도 없어집니다. 이 사태는 치명적입니다. 여기에 종교 갈등, 민족 분쟁, 인종 차별, 문화 충돌, 그리고 이 모순과 갈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생태 환경 문제가 들씌워집니다. 저는 이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이 우리의 구체적 일상을 좌우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더 이상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단위 국가가 아닙니다. 강대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국의 황제가 아닙니다. 국가 위에, 초국적 기업이라는 새로운 제국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정치적 동맹은 없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제휴의 포장지일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강대국의 국가 비전이 아닙니다. 초국적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세계 정책입니다. 초국적 기업의 현지 법인이 총독부입니다. 개별 국가는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영토는 시장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간의 시대는 벌써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백성과 국민, 시민의 시대를 거쳐 소비자로 진입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비자입니다. 소비 능력이 있는 인간과 소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간. 인간은 소비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거칠게 파악하고 있는 제국의 풍경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시는 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그리하여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제국의 거대한 그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시대에 유일하게 소비자이기를 거부하고, 마지막 개인이기를 주창할 수 있는 인간이 시인입니다. 시는 자본주의 유통 구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종교와 학문, 그리고 예술이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시대,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시인입니다. 시인이 서 있는 위치가 시인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시인은 제국의 안에서 제국의 전모를 조망하는 이중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소비자이면서, 자립하고 자존하고 자긍하는 시민이기를 고집하는 분열증적 상상력입니다.
'몰락의 길은 평이하고 향상의 길은 간고하다'는 지훈의 금언을 되새기며 무거운 수상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훈 선생님의 유족 분들,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는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님과 지훈상 운영위원회 선생님들, 그리고 시가 아니려고 애쓰는 어설픈 시에 후한 점수를 매겨주신 세 분 심사위원 황동규, 김인환,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무거운 상을 무거운 벌로 달게 받겠습니다.
지훈 조동탁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지훈 문학상이 어언 제 5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에 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도를 중요한 척도로 삼아 논의하였으나,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조형성, 전통성, 사회성도 간접적인 기준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월 18일에 모여 심사위원 각자가 세 권의 시집을 추천하기로 하고, 4월 8일에 추천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우수한 시집 한 권을 선정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중복 추천된 시집들을 중심으로 최근에 다른 상을 받았다든가, 등단 시기가 얼마 안 되어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든가, 반대로 노대가에게 상을 드리기는 편안하지 않다든가 하는 이유를 제시하여 대상 시집의 수효를 줄여나가면서 작품의 질에 대한 평가를 병행하였습니다. 최후로 남은 시집은 이문재 시인의 《제국호텔》이었는데, 이 시집을 선정하기로 한 데 대하여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합의하였습니다.
강인한 자기반성과 심오한 비판의식으로 이문재 시인은 우리 시사의 한 맥을 새롭게 탐구해 왔습니다. 이미지를 애써 만들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체는 언제나 일반화된 도식을 떠나서 발생상태의 감각적 인상을 참신하게 포착하였습니다. 자기표현을 극도로 절제하여 자신을 작게 나타내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마음을 열어놓는 비판적 애정이 이문재 시인의 시에 견고한 의미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지만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문재 시인의 질문은 우리 시대와 우리 시대의 불교에 대한 예리한 비판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파악하려고 하면 자기를 전보다 더 모르게 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자기와 다른 존재가 허위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초월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면에서나,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세계화를 비판하는 면에서나, 이문재 시인의 시는 전통문화와 불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훈 선생의 시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훈 선생의 선비의식에 대비되는 이문재 시인의 시민의식에도 유의하였습니다. 우리들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그의 시를 통하여 우리 시사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도록 이문재 시인이 자기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기를 기대하면서 이문재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