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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김명인 「가을에」 외 7편

 


2. 수상작품

「가을에」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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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고려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김선학(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4.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인들은 이건청, 이하석, 김명인, 최승호, 송재학 등 5명이었다. 데뷔 10년을 전후로 한, 그리고 작품상의 성격을 띤 것이 월하문학상의 선정조건이라면 위의 5명의 시인들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 아닐까. 김명인, 최승호 두 분을 먼저 골라 보았는데, 이는 심사에서 행하는 ‘먼저 두 사람 추천하기’라는 관례를 따른 것이자 그 이상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이 이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데, 곧 시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 그것.

(A) 떠도는 길이 길로만 분주하듯/마음은 늘 솟구치는 바람에 스쳐 자즈라져/나는…(<물 속의 빈 집 Ⅰ>)
(B) 저문 강물 갇히면 어디에 묻어두려고/나는…(<물 속의 빈집 Ⅱ>)
(C)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가을에>)

이러한 시구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나’와 ‘너’만으로 구성된 사유형식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나’만을 세계의 중심에다 두고 세계를 인식할 때 세계란 특이한 모습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으리라. 거기에는 타자가 없는 만큼 자기 황홀증으로 치닫게 마련이 아닐까. 이 경우 언어는 자기 회전을 되풀이 할 것이며, 또 그것은 마침내 빈곤에로 향하지 않겠는가. 정신이라니, 당초 정신의 관여를 배제했던 것이 아닐까. 그 순간 비로소,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미의 표정이 감지된다. 이 미의 표정이란 정신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진 열매가 아니었을까.
만일 이 열매를 정신의 운동, 헤겔투로 말해 부정의 운동 앞에 세우면 어떠할까.

(가) 그리마 한 마리가 수 많은 다리를 끌고/벽을 달린다/수많은 그림자 다리들이 벽을 달린다/벽을 타고 달리는 저 놈의/눈알이 누워 있는 나를…(<무일물의 밤 4>)
(나) 외할머니의 꿀을 지켜야 한다/핏줄은 끈적거리고/지긋지긋한 나라에서도 애국심은 발동하여/나는…(<벌통 옆에서>)
(다) 나는 날개 없는 사람/긴 터널을, 거리를, 회전문을/지나가지만…(<골리앗개구리>)

정신이 관여하는 세계란 그리마의 그 파충류 같은 눈알의 감시하에 놓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부정의 정신이란 자기자신까지 그 해를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란 타자인 까닭이다. 그 때 ‘나’는 자기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이 부조리한 세계의 적대관계에서 ‘나’의 생존방식을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전략개념의 도입이 그것. 환각(자기황홀증)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가 그것. 그 전략은 그러니까 ‘나’에게 기운나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

추억들이 쓸쓸하게 지나간다./붙잡아 두려하지 말아야 한다./망령들을 따라가 귀신굴에 살림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관능도 텅 빈 껍질이다.(<공터에 풀벌레 울 때>)

이는 일체를 부정하는 저 空의 세계의 흉내일까. 다시 말해, 정신이 부정의 운동을 본질로 한다면 그 한계란 무엇일까.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쪽이냐, ‘망령들을 따라가 귀신굴에 살림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쪽이냐. 이런 물음은 또 감각쪽이냐 정신쪽이냐로 바꾸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환각(에로스)의 형태로 넘어서고자 하는 일과 이 환각조차 부정해 버리고자 하는 일 사이에 벌어지는 인간존재의 딜레머 자체가 아닐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당황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지금 너는 무슨 철학을 하고 있느냐라는 목소리가 그 하나.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겠는가. 철학에로 이끌고 간 것은 정작 김명인, 최승호 두 사람의 작품이 아니었던가라고, 이 목소리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회를 맡은 김선학 씨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지 않겠는가. 어두운 시절 우리의 어느 민족시인 모양 ‘표할 하늘도 없다’라는 시늉을 하지 말라는 눈초리로, 그 순간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좀더 공부를 한 뒤엔 철학쪽에 표를 하겠지만 지금은 시쪽에다 표하기가 그것.(김윤식)

 

 

 

파란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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