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몸들, 몸 둘 데를 모르고 / 조정권
1
뉴욕 소호에서 飮酒死한 화가 정찬승이
그림한테 이혼당하고, 귀국전을 연 전시장을 다녀왔다.
그림은 한 점 보이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까페가 옮겨와 있다.
홍대에서 뜯어온 벽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가에서 싣고 온 툇마루도 생생히 살아 있고
오그라진 화실 소파도 살아 있는
의자에 앉아 신문도 보고 낮잠도 자며
술 마시고 있다.
이게 신성한 전시장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객과 시민들과 잡담하며 술 마시며.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전시장에
세상 술 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인간 한 점.
미리 보여준 삶의 폐업전.
2
싸옹 빠울루 비엔날레 공동출품하기로 한
김구림은 석달 전부터 손톱을 기르고 있었다.
나는 염불 시를 같이 준비하고 있었다.
장 끌로드 엘로아의 염불음악*을 마음에 깔아놓고......
狂僧의 禪음악을 베낀
존 케이지의 7분 45초,
눈 퍼붓는 날 새벽 오대산 상원사 종소리
잡음으로 깨부수려고.
리허설 장소 공간사랑에서 망자를 위한
깽판 시를 내가 웅얼웅얼대면
함께
김구림이 대짜 손톱깎이로 손톱 깎는 소리를 내고
녹음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내가 이 시대의 치매, 계집 음부 더듬는 고승 흉내를 하며
실어증 환자처럼
생쑈를 할 때
김구림은 계동 바닥을 뒤지며
마른 뼈 날카롭게 부러지는 언 책받침을 찾아가지고 오고 있었다.
형님!
나 이 벙어리짓 때려치우고
내 산꼭대기 올라가 앉아 있겠소.
3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나이 나체에
인민복을 입히고 천안문 광장에서
원반을 던지는 模作像을 출품한
중국 조각가를 나는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건
그걸 보고 와서
광화문 세종로 이순신 동상 철거하고
어깨에 화염방사기 멘 채
포신처럼 중화기를 들고 서 있는 반가사유상을 만들고 싶다던,
성대 국문과 친구.
춘천에서 꼬치구이로 주저앉은 친구.
호텔에 납품할 곳 찾아 뻔질나게 서울 올라와 바삐
돌아가다 한잔 하게 되면
동상에 조선 갑옷 벗기고
인민복으로 갈아입히고 싶다고 떠들고 있다.
4
아, 해외로 떠돌다가, 떠돌아 돌다가,
국내로 망명한 생들!
국내망명자들.
5
발레리의 40년 고독 앞에
팔팔할 때 한 번, 고개 숙여봤으면 됐다.
더 이상 난 안 숙이련다.
대신, 문안차 홀아비 정병관 선생한테는
그 무덤 앞에 한번 머리를.
빠리 제8대학 도서관 사서
마른 빵과 커피로만 기숙하며
미술사 박사학위 딴 노인 학생.
누보 레알리슴의 화가들
극사실의 현실을 냉정하게 그린
리베라씨옹패들!
정년 5년 앞둔 연세로 이화여대에 모셔와 죽인.
한번도 술과 장미의 나날을 들어볼 시간을 안 준 세상.
한번 찾아가 뵀어야 했는데.
벽제에나 가야
계실까.
* 쟝 끌로드 엘로아(1938-)는 프랑스 작곡가. 한국 여행차 ‘공간’에 들린 이 현대음악가는 頭音을 이용해 새벽 예불 같은 음악을 들려주며 청중에게 드러눕든지 담배를 피든지 편한 자세로 들으라고 미리 설명을 했다.
6
본처한테 그림 다 빼앗기고
평창동 바위꼭대기에 세 살고 있는 김구림은.
미술사랑문화인협의회 같은 곳에 시간강사로 나가 운현궁 같은 곳이 핀
꽃에다 연지곤지 찍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고.
고승관은 맘 쫓겨 괴산으로 들어가
화양동계곡에 이십년간 돌탑 쌓으며
처박혀 나오질 않고.
나는
포크레인 이빨자국 박힌 채석산 실어다
버린 한탄강 하류
포천군 창수면에 글 쓸 집 최근 얻어놓았는데
가 있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골체 처박혀 떠돌던 목은 이색과 양사언 들이
詩會하던 창수면 金水亭
마음에 들여다놓았다가
내쫓아내고
다시 불러다놓고 기웃대고 있는데
가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1. 수상자 : 조정권
2, 수상작 : 시집 <떠도는 몸들>(창비)
3. 심사위원 : 오세영, 유안진, 이하석, 김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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