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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감동시!!!

구독과 좋아요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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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당선소감] "그늘진 곳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 쓰겠다"

 

멀리서 오신 이름, 보름달보다 크고 둥근 뽀얀 박으로 덩그렇게 오신, 아무리 많은 보석이 쏟아진대도 저는 슬근슬근 톱질을 아낄 거예요.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초록초록 옛날 옛날에 말들이 뛰놀던 곳이라서 마리뜰이라고,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떠나 살고 마리뜰을 그리워합니다.

 

까만 말고 하얀 나비고무신을 조르던 여름. 아버지 지게 위에 다소곳 따라오던 까만 머루와 어머니의 정갈하게 널린 하얀 빨랫줄, 오동나무에 걸린 하얀 눈 냄새, 참새 떼 날아오르던 닭장아버지는 눈 가래로 나는 싸리비로 눈을 치웠죠, 쓸다보면 어느새 다시 와서 살포시 앉던 녀석들 늦깎이 공부를 합니다. 한 번도 펴보지 못한 교과서의 잉크냄새가 미안해 휴학을 결심한 적 있지요. 감히 말하라면 저의 시는 오롯이 고향으로부터 옵니다.

 

홍유릉 둘레 길을 걷다가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방방 뛰다가, 뛰다가 날다가, 이렇게 덜컥, 오시다니요. 조용히 설레다가 처절하게 허기지다가 그러기를 10여 년, 많이 기쁩니다. 내일이 동지입니다. 일부러 느긋하게 하얀 밤을 샙니다. 동글동글 새알심을 만들며 빕니다. 제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버팀목 경진 현진 성후 고맙고 사랑해, 동생들아, 조카들아, 이제라도 고봉밥을 차려보자. 도향스님! 존경합니다. 불 켜놓고 자면 해롭다고 새벽마다 불꺼주고 가는 그 정성, 알지요.

 

사유의 힘, 치열하게 들여다보라, 운율 속으로 우렁우렁 명 강의 이지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김동찬 교수님, 시와 길 선생님들, 회장님 덕분입니다. 인사를 빠뜨려서 늘 죄송한 분이 계십니다. 꼭 뵈러 갈게요. 이런 큰 기쁨의 자리 마련해주신 광남일보와 관계되시는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부족한 제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이 순간도 양로원에서, 요양원에서 고독으로 뒤척이고 계실 어르신들의 안녕을 빌어봅니다.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님, 늘 다독여주시던 시어머님, 그리고 저희 7남매 곁을 일찍 떠나가신 친정 부모님께 이 영광된 상()을 바칩니다. 춥고 어둡고 그늘진 곳을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를 오래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차곡차곡, 다시 시작입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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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균일한 울림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과 시. 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런지요.

 

점자책4, ‘트라이앵글4, ‘내 안의 붙박이장4,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 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 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 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 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 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 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주는, 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사위원 곽재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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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스케치 / 유휘량

-기린의 생태계

 

 

우린 목이긴 걸

 

기린이라 불러

 

하필 넌 목이 길구나.

 

누가 널 그리고 있는 걸 아니?

 

그림자를 졸여 만든 잉크로

 

괜찮아.

너는

 

그리는 동시에

사라지는 감각이 좋았다.

 

따듯한 색은 대체로 몸에 좋지 않았던 그때

 

핏줄엔 면역이 없어서, 핏줄에 묶인 몸이 싫다고

목에 핏줄 세우며

 

새가 새를 잡아먹는 건 이상하다. 완벽한 새장을 만들기 위하여 가시밭에 두 손을 넣어두고 돌아왔다. 그 두 손은 그림자놀이를 통해 새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에도 기린이 새를 입에 물고 불타는 머리를 흔드는 걸 보면 이상하다. 나무에 열리는 아가미는 싫어하면서 하루에 새 하나씩 꼬박꼬박 먹는 건 이상하다.

 

몸을 벗고 남겨진 자신을 봐.

 

복도 같이 긴 목에서 빠져 나온

 

 

새를 먹는 게 아니었구나. 기린은, 몸집에서 그냥 목이 길뿐이었다. 그래도 입에 새를 넣고 빼는 것은 이상하다. 새가 거기에 거주하는 것도 이상하다. 기린들은 둥글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뭉쳐 있구나. 자기들끼리 새들을 주고받으면서. 기린은 왜 목이 길지. 새들은 기린을 빠져나가면서 어떤 그림자를 버리고 가지. 기린은 소리 내지 않고 새를 보여준다. 새가 물고 온 아가미는 받아준다. 기린 속의 웅덩이가 너무 깊어서 목이 긴 걸까. 있지.

 

, 사실 네가 쟤를 잡아먹는 걸 봤어.

 

유독 목이 긴 새였잖아. 걔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었어. 거기서 죽으면 누가 묻어줘? 가끔 새가 새를 물고 기린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어. 어쨌든 걔는 고독사는 아니길 바라지만. 기린 속의 새들은 둥지를 뒤집어 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데,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은 어떤건지. 나는 몰라. 나는 목이 짧고 기린은 아닌데,

 

가끔,

가끔 말이야.

 

씹어 먹고 싶지 않니, 새들 말이야. 입가에 머무르면 달콤한 금속성의 눈 맛이 나잖아. 입안 한가득 새들을 내보내지 않고 와득 씹고 싶을 때. 있지 않니. 웅덩이가 말라가도 아가미들은 나무에서 계속 열릴 거고. 묶인 핏줄을 하나 하나 풀다보면, 새들의 둥지는 뭐로 만들까.

 

문 열어.

 

금속성의 눈이 내리잖아.

세상은 자꾸 굳은 물감 같잖아.

 

새알이 든 둥지를

머리 위에 올리면

액체의 금속이 흘러

 

,

 

이제 기린이라 불러라.

 

 

 

 

[당선소감]

 

언젠가, 내 이름을 아무리 발음해도 시인 이름 같지 않았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지금

 

다시 내 이름을 발음했지만, 여전히 시인 같은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이름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세상에 없겠지만 아직도, 시인 같지는 않고, 여전히, 앞으로도 시인 같지 않을 것이다. 호명되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다. 불완전한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서, 무엇으로 완성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늘 속죄하며 살 것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늘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다. 살다보니 나는 많은 이들을 괴롭혔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생각한다.

 

감사한 성함을 감히 올린다.

 

나의 첫 시, 그리고 나의 모든 시를 함께, 사는 것을 알려주신 조하연 선생님. 늘 잘못만 저지르는 저를, 괜찮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산 선생님. 제 세계를 확장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언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의 정교함을 알려주신 이영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김근 선생님, 6년 동안 수업 들으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여기에 제 이름은 없을 겁니다. 같이 했던 한겨레교육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동인 쓸림 분들, 한 분 한 분, 이름을 부르지 않겠습니다. 다 자신의 이름을 단 시를 쓰는 분들이니까요. 5년 동안 저의 원장 노릇을 견뎌주어 감사합니다. 나의 울음을 함께 해주어 고맙습니다.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신, 홍재범 선생님, 김석 선생님, 용석원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김진기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늘 저의 시를 지지해주시고 봐주신 임지연 선생님과 제 시를 늘 응원해주신 신동흔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봉형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나의 아픔을 함께 해주어 감사합니다. 상처만 줘서 미안합니다. 이제 다 갚으며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드릴 분들이 더 많지만, 부득이하게 적지 못한 분들은 개인적으로 소감을 올리려 합니다.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러진 라디오 안테나도 안녕. 48병동도 안녕, 귓속의 앵무새도 안녕입니다. 더 이상 안녕하지 않던 날들도 안녕입니다. 다 안녕하면 좋겠고 그래서 안녕이라 내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이름과도 안녕입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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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영양교환 / 추일범

 

 

죽은 고양이를 세 번 봤다

로드킬은 빼고

 

골목에 밥그릇이 엎어져 있다

토한 우유처럼 고양이가 누워있다

빈 그릇에 사료를 붓는다

이런 것도 밥이라고

 

먹을 것 주변엔 개미가 꼬인다

개미를 죽이는 방법은 많다

한 마리씩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고

침을 뱉어 죽일 수도 있다

굴을 찾아 따뜻한 물을 부으면 더 많이 죽일 수 있다

잼이나 설탕으로 반죽한 붕산을 놓는 방법도 좋다

집으로 돌아간 개미들은 빵을 나누어 먹고

배가 부풀어 함께 죽는다고 한다

 

태우는 데 두 시간쯤 걸립니다

고양이는 죽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것도 몸이라고

가는 길이 멀면 내장을 제거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상자에 넣고 리본을 묶었다

 

고양이를 안고 온 사람이 눈물이 안 난다고 했다

자기도 울 줄 아는데 가끔 이러는 거라고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스콘 하나를 나눠 먹으며 기다렸다

 

저도 정말 슬프고 싶어요

 

빈 그릇에 사료를 붓는다

이런 것도 일이라고

고양이 세 마리가 죽는 것으론

끝나지 않는다

 

오래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겨울이었다

 

 

 

 

[당선소감]

 

메밀은 사고로 앞발 하나를 잃은 어린 고양이였습니다. 한여름 수유동의 4.19 민주묘지 광장 근처에서 구조됐습니다. 발견 당시 앞발은 뭉개져 있고 위생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메밀을 식구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보살폈습니다. ‘메밀은 그 아이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 투표로 정한 이름입니다. 메밀은 같이 사는 여러 고양이 중 가장 많이 먹고 가장 열심히 뛰며 누구보다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두 달 뒤, 메밀이 죽었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추석 연휴였습니다. 아주 잠깐 눈을 뗀 사이 사료 포대를 뜯고 놀다가 올 한 가닥이 풀려나왔고 그게 점점 길어져 메밀의 배에 감겼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죽은 고양이를 맨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저는 메밀이 가장 건강했을 때와 죽었을 때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화장하러 다녀온 날만을 썼습니다.

 

메밀을 떠올리면 미안한 일들을 꼭 먼저 말하고 싶어집니다.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신 분에게 죄송합니다. 좀 더 다정하고 기쁘게 받을 걸,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미안합니다. 제가 좀 더 성실하고 부자였다면 보다 맛있고 건강한 걸 사주고 지치도록 놀아주고 좋은 병원에도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어제도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내뱉었던 험한 말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잊지 않고 매일 생각합니다. 모두 정말 미안했습니다.

 

나랑 지내는 게 늘 불안했던 숑. 당신이 화를 낼 때만 나는 겨우 자랐습니다. 오래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아침 일찍 대문 앞을 청소하는 풍경을 남겨주어서 고맙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만 전화하는 저를 매번 받아주시는 혜원 선생님, 영광 선생님, 목형에게도 감사합니다. 배운 건 다 잊었고 어느 한구석을 닮는 것도 실패했지만, 표정이나 목소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하루가 더 살아집니다.

 

그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집과 밥을 고를 수 있는 생활은 대부분 고개엔마을과 성북 친구들 덕에 얻은 것입니다. 특히 시늉만 하는 제 시를 진짜라고 계속 믿어준 미냉. 사실 저는 이걸 핑계로 자주 놀거나 잠을 잤습니다. 좀 더 집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아파도 무너지지 않는 이랑과 아플 줄 모르는 상만, 경청가 잉지, 반짝이는 상언니. <못배운것들>, 고주망태 소영. 당신들이 모두 나의 안전망입니다.

 

부모님에겐 아직 전하지 못했습니다.

 

잘못은 꼭 먼지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 쌓이니까,

 

211224일 추일범 씁니다.

 

 

 

 

[심사평]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의응답 사이에서

 

세계사의 아슬한 난간을 모든 인류가 함께 붙잡고 있는 상황이 과연 당대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상상보다 더 끔찍해진 현실이 섬세하고 정치한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이제까지 그 질문들을 예민한 일부의 사람들만 수용했다면 이번에는 모든 인류가 그 질문을 이해하고 답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투고작들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때문에 시의 행간은 길어지고 시적 경향은 어둡고 다양해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분은 유휘량의 스케치 -기린의 생태계와 추일범의 영양교환,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등이다.

 

유휘량의 기린을 발견한 것은 좋은 일이다. 환상과 서정의 플랫폼에서 울림을 구축한 유휘량의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기린은 시적 화자의 그림자 놀이에서 탄생된 발명이다. 불빛에 제 몸을 맡기면 목이 길어지는 그림자/기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목이 길어진다는 것은 불빛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간절하다는 갈망의 의태이기도 하다. 기린의 파트너로서 라는 키워드 역시 그림자 놀이에서 추출된 두 손의 변주이다. 그 새는 그림자/기린의 돌기이면서 또한 외부로 향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면서 누군가 그림자에게 보낸 메신저이기도 하다. 내부에서 고독사로 향하는 새, 외부로 나가지 않으려는 새를 씹어먹으면서 기린/그림자의 외부는 딱딱한 눈이 내리거나 자꾸 굳은 물감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새알의 둥지에서는 액체의 금속이 흘러내리는 종말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러니 이제 나를 자아와 겨우 연결된 기린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삶이 기린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죽은 고양이를 세 번 봤다 / 로드킬은 빼고라는 맹렬한 도입부는 추일범의 영양교환이다. ‘이런 것도 밥’, ‘이런 것도 몸’, ‘이런 것도 일을 행사하던 죽은 고양이 세 마리는 우리 생활의 공감각 부분이다. 어쩌면 과거, 현재, 미래를 실천하는 중이기도 할 터이다. 누군가 우리를 사육하고 있고, 더 끔찍한 것은 누군가 우리를 고양이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고양이의 주검에 휘발성 냉소가 건너가는데, 다시 끔찍한 것은 그게 차라리 비애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사람의 의무가 있다는, 단호하고 간결한 추일범의 고유성이 눈을 사로잡는 이유이다.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은 관찰의 측면에서 시의 전범을 드러낸 가편이다. 사물과 사람이 가진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라는 안팎좌우를 어김없이 추스리면서 다시 사물과 사람에 대해 되돌아오게끔 한다. 게다가 리듬이 시를 잘 부추기고 있다. 시의 이야기라는 측면에 눈을 뜨게 된다면 이선락의 시적 영토가 어디까지 벋어나가게 될지 짐작할 수도 없다.

 

이은경의 , 세기는 사물이 가지는 매혹에 헌신한다.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물질과 영혼으로서의 ()’을 넘나드는 충분한 존재들이 여기 있다. 때로 눈부시고 때로 끔찍한 것들, 그게 같은 인과율인 것을 소스라치게 깨닫는 지점이 돋보인다.

 

최정민의 껍질에 베인 손, 김희숙의 털실로 얼음 들기에도 우리가 서성거리고 편애했다는 것을 덧붙인다.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의 응답 사이에서 우리는 유휘량의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를 당선작으로, 추일범의 영양교환을 가작으로 선택했다. 당선된 두 분에게 축하를, 여기까지 힘겹게 도착한 분들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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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당선소감] 버티다 보면 다른 것들이 훨씬 더 견딜 만해질지 모른다

 

녀석은 주로 빛이 어스름할 때 또는 밤중에 그리고 가끔은 흐린 날에 물었다.

 

나는 가슴 위에 놓인 녀석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녀석을 위해 책상에 먹이를 놓아두었다. 녀석이 뭘 먹고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내야 했으니까.

 

식성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살아있는 내 피 외엔 건드리지 않았다. 배 밑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나의 공포감을 눈치 채고 그것이 녀석을 신나게 한 게 분명했다. 붕 뜬 채 내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녀석은 인류 친척들과 오래 살아 그들을 좋아한다고 했다. 배가 불러 만족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히더니 불멸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둔다며 책더미 속으로 기어들었다. 녀석은 음지에 숨어 지내야 했다. 가끔 마주치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니 녀석에게 자극받으면 늘 반응하는 우리랑 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끈적이는 몸을 비벼대며 혼자 있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우리를 뚫어 내부를 천천히 비워내는 것이 녀석의 목표일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녀석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두고 먹어두고 그래야 녀석에게 영원히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나도 녀석처럼 꼼짝 않고 책장 이음새에 기대서 잠을 자 두는 게 좋겠다. 끈질기게 버티다 보면 다른 것들이 훨씬 더 견딜 만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잠깐 내린 눈송이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뛰어다닌다.

 

33년째 묵묵히 신춘문예를 운영하고 있는 한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내 시가 부족한 만큼 심사위원들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진용진 선생님과 시의 집을 짓는 김기호 대목 그리고 '시와몽상' 시우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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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개성적 시선 돋보여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전국 각지에서 199명이 총 1142편의 작품을 응모하여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 속에서도 문청들의 시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시 부문 199명의 응모자의 작품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는 최종 10편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올해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특징은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산문시 형태가 많았다는 점이다. 내용면에서도 현대인들의 소외와 불안, 서정성이 짙은 작품 등 다양하고 참신한 시적 경향을 선보였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중에서 눈길을 끈 작품은 '엄마 달과 물고기',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 '뜨겁고 흰 유언' 3편이었다.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의 경우,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으며, '구름(담배 연기)''죽음'이라는 이질적인 결합이 시의 비극성을 환기하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다만 시 세계가 확장되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마감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뜨겁고 흰 유언''어미 개'의 죽음을 통해 어미 개가 지닌 모성의 세계와 인간 혹은 공권력이 지닌 폭력성을 포착한 작품이다. 안정적인 시적 구조와 상징을 통해 시의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반면 상상력의 변용과 확장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엄마 달과 물고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엄마 달과 물고기' 외에 ', 어슴푸레한', '오래된 서랍' 등 응모작들도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시각이 개성적이며, 시 창작에 몰입한 고투의 시간이 육화되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점이 돋보였다.

 

당선작인 '엄마 달과 물고기'는 모성의 부재로 인한 비극미와 더불어 ''이라는 매개를 통해 역사인식은 물론 은유와 상징성까지 획득하고 있다. 이때의 ''은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염원하고, 공동체의 의지를 추동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어 '엄마 달과 물고기'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수상자에게는 거듭 축하를, 응모자분들께는 깊은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심사위원 김수열 시인, 서안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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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당선소감]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어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곳에서 작은 틈새를 찾아내는 일. 그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써보는 일.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작은 시작이 모이고 모여 큰 우리가 된다고 믿습니다.

 

저의 시를 읽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언어 하나를 던져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두들 제가 건네는 처음을 꼭꼭 씹어 주기를, 출렁이고 경계를 지우고 명명하고 다시 경계를 지우며 건넨 이야기의 다음과 그 다음을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게 지탱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모두의 이름을 말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만 이름 부르기에서 오는 감사함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언제나 함께 해준 희빈, 서정, 은비에게 함께 시를 써준 태의, 예진에게 함께 웃어주는 정음, 지현, 선영에게 여성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전시를 준비한 여:2단 친구들에게 주말을 함께한 세원에게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현지와 나의 가장 오랜 친구 희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모든 함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김은희, 오인호에게 가장 큰 기쁨을 나눕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수상소감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신 송재학 선생님, 김소연 선생님, 김상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를. 문장 하나하나를 새기며. 내달리는 멋진 호랑을, 존재하는 여성인 라의 이야기를 들어 봐주세요.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심사평]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는 시"

 

본 심사평은 시의 어디어디가 부족하다는 식의 충고를 담고 있지 않다. 자기 작품에 관한 엄혹한 평가를 원하는 분도 있겠고, 적절한 지적은 실제로 창작과 퇴고에 도움이 된다. 다만 투고자에게 필요한 건 비판보다 응원이라고 믿는다. 계속 시를 써도 좋다, 이런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시가 나를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나 없이도 시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싫고 무서웠다. 이번 심사평을 통해 당신들 없이는 우리 시가 별로 안녕하지 못하리라는 예견과 확신을 전하고 싶다.

 

'랠리'의 건조한 문체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때 마음을 쏟았던 대상이 로부터 문득 동떨어져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어쩔 수 없거나 어쩌지 못하는 거리감이 건조한 문장 사이사이로 유출된다. '날개 뒤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4편은 한마디로 거침없다. 하지만 거침없는 중에도 시의 언어는 산만하지 않다. 넘칠 듯 넘치지 않게 제어되는 정념이 놀라웠다. '베네수엘라'는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 깊은 결구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 작가는 자기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듯하다. 작품이 조금만 더 쌓이면 그가 좋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누가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치카의 숲'은 앞으로도 손해를 볼지 모른다. 신인상 심사는 단정한 정념보다는 떠들썩한 감수성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등단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이처럼 넉넉한 분량에 담긴 유려한 문장이 외면당하는 일은 없다.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스로디카즈' 4편은 수많은 소년소녀가 등장하고, 위악적인 정황과 대화가 난무하며,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당연하게도 몇몇 기성 시인이 떠올랐으나 그럼에도 투고자의 연작은 여전히 새로웠다. 이 새롭고 좋은 작품을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 본다.

 

'시드볼트' 4편은 비참한 죽음과 살아남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낸다. 아포칼립스를 예감하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와 종말에 남겨진(혹은 종말을 목도 중인) ‘, 어느 쪽이 살아남았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비참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공평하게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 저 압도적 절망감은 때로 산불, 때로는 깨진 도자기폭풍우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간신히 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폭풍우')로서 분명히 어떤 현실의 환유일 비극적 사태를 생생히 기록한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투고작이 많았음에도 오산하 씨의 활달한 리듬은 단연 돋보였다.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믿음이 갔다. 심사위원단을 대신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송재학, 김소연, 김상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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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당선소감] 도망치긴 싫었다버티다보니 해볼 만했다

 

쓰고 싶은 시와 쓸 수 있는 시가 서로 달랐다. 당선된 시편은 그동안의 기록이다.’

 

고등학교 시절,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작성한 당선 소감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늘 그런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던 내게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준 이가 있었다. 존경하는 동료인 그의 말을 들은 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앞으로의 다짐은, 나를 버리지 않기 그리고 밀어내지 않기, 견뎌보기, 내버려 두기다. 이렇게 여기자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나는 내가 해볼 만한 것 같다!

 

때론 삶이 극도로 평범해 어떠한 사건이라도 각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한참을 골몰해야 했다. 다 쓰기 전까지는 집에 갈 수 없는 기분. 집이면서도 그랬다. 집인데 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건지. 집이 진짜 있기는 한 건지. 그럴 때는 일단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나한테 모질게 굴던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헤아렸다. 우는 게 싫고 부끄러운 것도 싫어서 울고불고하다가 이를 갈았다. 팔뚝을 깨물어 남은 잇자국을 만지면서 내 이야기를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박규현은 그냥 박규현이므로.

 

나를 늘 응원해준 가족, 친구 그리고 서울과기대 교수님들과 아낌없이 지도해주시는 나희덕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내 시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최선의 최선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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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착란적 비약,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있어요/내일과 같이 여전히라고 기록하는 시.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시는 침묵하기겨우 말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황지우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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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당선소감] 미래의 나, 미래의 에게 이젠 씩씩하게 걸어갈 것

 

나는 늘 어딘가 엉성한 아이였다. 단체 줄넘기를 하면 꼭 줄에 걸리는 아이, 큐브를 맞추는 데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아이, 대답이 느리고 말을 자주 더듬는 아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반드시 긴장해서 실수하는 아이. 자주 망신을 당했다. 내가 엉성한 존재라서 세계도 나를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자의식과 수치심이 비례했다.

 

수치심은 내가 느끼는 숱한 감정들의 형이다.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 같은 동생들을 데리고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그런 수치심과 거리를 두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수치심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사랑을 사랑해서, 세계를 사랑해서, 사람을 사랑해서, 시를 사랑해서 나는 엉성하게나마 살아 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더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 그것마저 사랑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시는 그 사랑에 대한 고백이자 답변이었다.

 

내 엉성한 발걸음과 어울리는 이상한 길을 끝없이 내어주는 시에게 고맙다. 그 길에 첫걸음을 내딛게 해 주신 한양여대 권혁웅 교수님, 장석남 교수님, 양연주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상한 길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려 주신 이영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못생긴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이 더 멀리 나아가도록 힘을 보태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모든 용기의 근원이 되는 수정, 세리, 재아, 지은, 소정, 민경, 효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고맙다. 혜정, 선우에게도 고맙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 준 연수에게 고맙다. 무한한 지지 속 연대감을 알게 해 준 한양여대 동기들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수기 씨, 고동진 씨, 그리고 동생들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래전 누군가는 내가 머문 자리마다 꼭 흔적을 남긴다며 긴 꼬리 인간이라 놀려댔다. 흔적은 영혼의 때, 꼬리는 거추장스러운 그림자 같은 것이다. 내게는 그런 것이 성가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제는 뒷모습 보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다.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 미래의 나, 미래의 시에게로.

 

 

 

 

[심사평]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하는 시적 패기 높이 평가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입국 심사대에 올라온 본심 대상작 열 분 중 네 분이 남았다. ‘폭우’()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감각적 묘사와 시적 통찰이 빛났으나 예견 가능한 시적 구도가 아쉬웠다. ‘팝콘꽃’()은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상처 혹은 폭력을 겨냥한 팝콘처럼 튀는 비유적 상상이 매력적이었다. 튀려는 시적 욕망을 조금만 더 제어했으면 싶었다. ‘’()은 언어를 어떻게 마르고 잇고 매듭짓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어의 압침들이 꽂힐 언어 이전이나 언어 너머의 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졸업반’()을 내려놓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편들은 시가 노래와 만나는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듬감이 좋았고 시의 완성도도 높았다.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기시감이었다.

 

럭키슈퍼’()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통()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문재 시인 정끝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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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당선소감] “시의 길은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 따라가는 것

 

보라색 공원관리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나무 줄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지난 계절을 잃고 바람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 곁에서 문득 내가 줄기 잘린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퍼렇게 뻗어 가는 시의 줄기를 잃고 자꾸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나무를 닮았다며 허전함의 지평을 늘이고 있을 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수변 공원 나무들을 보러 나섰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뭉툭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잘린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저는 제 시가 가야할 길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리고, 꺾이고, 찢겨가면서도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시의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었습니다.

 

저의 움츠러든 손목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우울해 할 때 낙선주라며 담근 술을 따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오산의 문우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제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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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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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당선소감] “앞으로는 내가 세상을 로 위로할 차례

 

패딩점퍼처럼 눈을 껴입은 세상이 고딕체로 서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삶의 목록들이 연착되고 있었다. 측은지심의 영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시 쓰기. 내 가냘픈 노래는 원고지 속에서 자주 익사했다. 악보의 실루엣이 보이면 음정이 삐걱거렸다. 부러지고 흔들리는 것들이 시가 된다고 믿었기에 앞만 보고 계속 노를 저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몇 년 전의 내가 나에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살고 싶어서 시의 소맷자락을 간절히 붙들었다. 시는 나를 살려주시려고 보내준 그분의 언약궤였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위로할 차례이다.

 

한 시도 의 램프를 끄지 않는 시시각각(詩視刻各) 스승님과 따뜻하고 치열했던 나의 도반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도록 응원해준 아내와 두원, 예은 고맙고 사랑합니다. 지난해 하늘로 가신 어머니, 늘 막내아들을 자랑스럽게 믿어주셨는데, 하늘 향해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벼랑 끝에 선 제 시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신 전북문인협회장 김영 시인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음이 춥고 외로운 이들에게 손난로가 되어줄 그런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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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22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 응모작을 읽는 시간은 어떻게 시를 써야 울림이 깊은가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천 편이 넘는 응모작에는 막 시를 쓰기 시작한 듯한 사람의 작품도 있었고, 시적 완성도와 문장의 긴밀도가 만만치 않은 작품도 있었다.

 

각주와 외래어가 난무하는 작품과 언어의 유기적인 연결이 아쉬운 작품도 많았다. 패기나 참신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적었고, 그만그만한 내용이나 익숙한 수사가 버무려진 작품도 많았다.

 

주제 면에서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부터 시대의 불합리에 대한 작품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시국의 영향인지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개인의 어두운 시간을 직조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으로 김선호 님의 빙하의 숲을 걷다’,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과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장성희 님의 폭우’, 김수형의 포스트잇이었다.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었으나, 제목이 내용을 끌고 가지 못하거나 내용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하기도 했다. 시상을 직조하는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제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이었다. 시상을 전개하는 힘이나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좋았으나 아쉽게 되었다. 조금 더 힘을 내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은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삶의 현실에서 시의 뿌리가 발아했으나 주관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솜씨가 시의 밭을 오래 가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인 점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심사위원 김영(시인, 전북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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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속에는 누군가가 사는데 / 소은옥

 

 

언제나

나는

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에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만큼

투명한 기억들로 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것이 격자로 되었는지 석쇠로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햇볕이 가득 차오를 때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황홀한 느낌

어떤 얼굴은 노랗고

어떤 얼굴은 구리 빛에 가깝기도 했지만

당신이 나를 굽어보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

하나의 세상이 무시로 열리거나 흩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김없이 무심한 듯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쩌면

보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

모스부호를 건지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일일지도 몰라

창은 묵직하게 침묵하지만 나는 말해요

어쩌면 운이 좋았다는 말과 동의한 그런 말들이

오늘도 반짝이는 빛이 창으로 들어와요

투명한 살갗 속 깊은 곳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실핏줄과

심장이 두근거리고

하얀 조각달 같은 얼굴도 마주 다가서네요

꼭 그 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을 그려보는 자유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남겨진 입김의 흔적도

틀 안으로 박혀오는 빛의 프리즘도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완충지대도

모두 파장 속으로 들어가요

건조한 햇볕과 거친 바람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까지도

......

당신을 향해서 부풀었던 창이 꼭꼭 문을 닫네요

 

 

 

 

 

[당선소감] 더욱 정진해 훌륭한 시인으로 보답을

 

글을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화답을 하지 않더라도 시를 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거나, 내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본 시선으로 무아(無我)의 얘기들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썼다가 다시 지우고 버려진 기억들을 차곡차곡 담아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어들이 저를 얼마나 뭉클하게 했는지요.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라 당황했었습니다. 비로소 글 속에서만 존재했던 무아(無我)의 세상이 문을 열고 저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릴 분이 아주 많은데요. 우리 문학회 지도교수님, 하재룡회장님, 문진숙, 정인숙, 이정애, 오숙희. 열거하지 못한 동료 문우님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기회를 주신 전라매일과, 심사해 주시고 채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시인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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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수미쌍관의 안정 속에 잔잔한 파장

 

속도와 경쟁의 자본논리가 압도하는 디지털문명 시대에 변방인들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심리가 이번 응모작에서 산견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끝내 인간의 위의와 존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세계가 주목을 끌었다. 그동안 신춘문예에서 보아왔던 세상에 대한 비판적 리얼리즘 성향의 세계에서 존재와 실존에 대한 성찰과 탐구, 곧 인문학적 접근의 자세가 내면화 된 작품들이 최종심에 올랐다. 고경자의 기시감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셋이 되는 우주의 생성원리를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느 영혼의 갈급함에 비유하는 활달한 문장의 흐름이좋았다. 그러나 결구에 가서 시적 여운과 울림을 남기는 메타포적 공소성을 끝내 충족하지 못해 아쉬웠다.

 

최민지의 절벽 끝에서 우리는 깊습니다도 보다 차분하고 투명하게 가라앉은 정조와 울림이 선자의 마음에와 닿았다. 울지 않고도 울고,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언외언(言外言)의 간결어법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으나, 결구가 허술하게 처리되어 안타까웠다. 이런 속에서도 소은옥 나의 창속에는 누가 사는데, 당신에 대한 기억의 세계를 거시(입자)와 미시(파장)의 불확정적사유의 세계로 형상화해가는 솜씨가 남달랐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때때로 나타났다 흩어지고’,‘부풀어 오르는잔잔한 그리움이 창()을 열고 닫는 수미쌍관의 안정 구조 속에 뒤섞여 잔잔한 파장의 울림을 주고 있어 당선에 올렸다.

 

심사위원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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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다 / 송종철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집중하고 있다 폭우로 뻘겋게 드러난 교회 언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으로 변했다 몇 해 전부터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리 빈터 여기저기에 경작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

 

물든다는 것은 당신의 책 속 주장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어릴 적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다 오랜 기침이 가라앉는 학하리의 아침은 새로운 습관이 된다 유튜브 내 편이 필요할 때광고 배경음악을 하나하나 찾아 듣는 오후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기, 물들고 싶다는 것은 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당신의 집에 다가가는 일이다 날 저물도록 걸어가는 벗어나기 힘든 길이다 길게 늘어진 주차 행렬이 내려다보이는 벤치 오래 머무르는 풍경이다

 

당신의 색깔로 변해가는 시간 맨 앞에는 두꺼운 기억의 막이 있다 머금고 있는 생각이 단단해진 땅을 흠뻑 적시는 동안 기억 속 이름들을 견딘다 사람들은 유행처럼 곧 지나갈 거라고 말한다 작은 흙 알갱이 사이로 촉촉한 생각이 울먹울먹 배어 나오는 동안 버릇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당신

 

서서히 겹쳐지는 익숙한 화면 나는 나의 손을 놓는다

 

 

 

 

[당선소감]

 

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사인 시인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나날의 형언들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무엇을 무엇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 무엇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표시가 바로 시이다.” 공학을 해오던 나에게 간단해 보이는 이 정의는 시를 쓰는 기본 알고리듬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마음속으로 늘 되뇌고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게 알아주고 불러줄 일상을 찾아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애를 씁니다. 매번 원점, 시를 쓰기 위해 주위와 대면하는 시간은 늘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년에는 소바처럼 낮고 슴슴한 시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쁨보다는 부족한 글을 마지막까지 들고 읽어줬다는 놀라움이 앞섰습니다.

 

지금까지 한남대와 대전문학관에서 시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성은주 교수님, 길상호 시인님, 김영남 시인님, 양예경 교수님 그리고 최은묵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시간 동안 습작을 읽어주고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 최현주, 김미옥, 김광명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소리 내 작품을 읽어주는 아내 한경민, 언제나 우리는 원팀 미란, 미선과 근홍 고맙고, 사랑해

 

어려운 시기에도 기회를 주시고 제 글을 뽑아주신 뉴스라인제주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쓰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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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잔잔하게 발화하는 서정의 향기

 

제주의 중심 인터넷신문 <뉴스라인제주><2022 영주신춘문예>를 공모한 결과 전국에서 예년처럼 북적북적 많은 예비 시인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자본주의 세상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가 문학이라지만,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들의 삶을 만져주는 작품들이 용호상박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최후까지 검토한 작품은 시조 2작품, 3작품이었다.

 

김미진의 시조 콩나물 이력서는 진술의 발상이 상큼하여 매력적이었다. 김미경의 시조 대숲을 읽다는 시상 전개가 깔끔하였다. 송종철의 시 섭지코지 문서물들다는 세밀한 묘사와 진술, 호흡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송문희의 시뜨거운 외출은 땡볕 속에서 말라가는 지렁이의 모습을 펄펄 끓는 오후의 번제로 보고, 그것을 요즘의 구직인(求職人)과 결부시켜 형상화한 수작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신선한 비유,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서정의 향기가 잔잔하게 발화하는 송종철의 물들다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어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일정 수준에 도달함을 확인하고 당선작으로 뽑아 들었다. 독특한 상상으로 N포 세대 청춘들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김미진의 콩나물 이력서와 송문희의 뜨거운 외출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다음 기회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당선자께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춘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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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당선소감] "슬픔 가득한 계절 속 상냥한 등불같은 시 쓰고파"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

 

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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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16,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3,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손진은 시인·안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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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당선소감]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까마귀가 얼어붙은 목청을 녹이자 유자나무가 등불을 켭니다. 노랑은 빨리 달려오는 발목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벨이 울렸습니다. 편두통은 어느 계절을 돌아 여기 와서 끝이 되었을까. 손끝에 모은 0도에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오래된 연인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들이 새 이마를 가지고 수천 번의 질문을 하는 상상로를 걸어옵니다.

 

초승달에 그네를 매 하늘을 날았다는 당신의 태몽이 맞았습니다.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나는, 밤나무 숲을 걸어 나옵니다.

 

길 열어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함축언어적 안정감 탁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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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변 물래실 / 구지평

 

 

어정쩡한 물안개가 저녁 강을 서성이다

속기 벗는 투명함에 산 빛이 검어질 때

실골목 저뭇해지는 내성천을 감싸고

 

굼닐대던 저녁연기 모래톱으로 불러내면

속 깊도록 시에 숨어 우련한 물래실이

갈라진 시간 틈새로 제 몸피를 드러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마당귀에 마른 장작더미

텅 빈 방 잠긴 시간 푸른 여백 문장인데

이제야 적요를 푸는 한 올 한 올 자화상

 

평면으로 구겨지는 빛바랜 담초談草 위에

창문마다 달이 뜨면 거기에, ! 거기에

묏등에 답청하시는 어머니가 서 있네

 

물래실 : 경상북도 예천군 마을 이름

 

 

 

 

[당선소감] “금빛 반짝이는 내성천이 시조의 모태

 

사무실 창밖으로 찌뿌듯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며칠째 일없이 심란하여 맥 놓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시대가 하수상한지라 모르는 전화번호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벨소리에 묻은 예기에 끌려 바로 받으니 당선 소식이다. 가슴에서 머릿속까지 헤집고 다니는 말글들이 뽁뽁거리며 입술을 내밀고, 산란기 무논에 붕어 튀어 오르듯 통통거리며 정신 줄을 튕긴다.

 

책상 위에 게으르게 누워있는 책들 속에 갇혀있던 문장도 스멀스멀 똬리를 풀고 제 공()을 자랑하듯 눈앞에 알짱거린다. 그래, 저것들 조탁하며 남은 생 보내라는 부처님 말씀인 게지! 늦깎이 시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째. 연로하신 아버님 둘째아들이 원을 풀었다.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에서 어설프기 그지없는 무지렁이를 야무지게 무두질 해주신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격조 있는 시조 세계와 에스프리의 멋을 깨우쳐 주신 윤금초 교수님과 열린시조학회 문우님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코로나에 발목이 잡혀 텅 빈 손이라고 생각한 신축년 한 해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워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힘든 시기 함께 보낸 사랑하는 가족들과 뇌리를 스치는 많은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하며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졸작의 배경인 물래실은 소백산 등짝을 따라 한참 내려오다 보면 끝자락에 매달린 산골 마을이다. 열 번이 넘는 아버지의 복막염 수술로 형편이 어려웠던 세월이었지만 떠나온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는 물기 머금은 모래사장이 금빛으로 반짝이던 내성천이 흐른다. 그 배고팠던 때도 부뚜막 한 쪽에 조그마한 단지를 두고 아침마다 곡식 한 줌을 모아 탁발하러 오신 스님께 시주하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남에게 건넨 해로운 말이 다 자식에게 돌아온다며 평생 말을 아끼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다던 어머니, 어머니가 20202월에 귀천하셨다.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 기쁨과 영광을 어머님 영전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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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한 감각과 고요한 시심 돋보여

 

불교신문 ‘2022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시조 부문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불교문인의 등용문인 만큼 응모한 작품들의 경향도 예년과 다름이 없이 불교적 소재를 시적인 모티프로 삼은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사찰 공간과 주변 환경, 수행, 불교와의 인연 등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불교의 연기법, (), 무심과 무욕 등을 노래한 시편들은 예년의 시편들보다 깊고 확장된 시심(詩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한 편의 좋은 시는 빈틈없이 꽉 찬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흰 여백에 의지할 때가 많고, 읽는 사람이 개성적인 독해의 내용으로 그 여백을 마저 채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선작 선정을 두고 크게 고민한 작품들은 두고 간 신’, ‘반가사유상’, ‘고목’, ‘내성천변 물래실이었다. ‘두고 간 신은 낡은 구두를 보며 아버지의 일생을 가늠하는 작품이었다. 작고하시기 전 구두를 닦고 끈을 묶어 신발장에 가지런하게 두었다라고 쓴 대목은 감동이 컸지만 술회의 방식이 다소는 산문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반가사유상은 마음이 안정의 세계에 머물게 된 일을 목수의 목공의 일에 견주고 있는데, 시를 짓는 데에 익숙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번뇌의 소진과 맑은 명상을 죽음의 상태인 에 견준 점은 다소 의아했다. ‘고목은 벌판에 선 고목을 노스님으로 여기고 쓴 작품이었다. 고목이 옥빛 낮달 하나 걸치고있고, 스스로 적막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적은 시구들은 깨끗한 시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눈꽃들이 입적해 있다라고 쓴 시구 등은 다소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내성천변 물래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풍경을 응시하는 고요한 시심이 돋보였다. 시행을 따라가며 읽을 때 잡스럽고 탁한 것을 걷어내며 밝고 환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절로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러할 때에 어떤 환희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시어의 선택이나 시상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고 또 신선한 감각을 선보여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가편(佳篇)들을 보여주시길 당부 드린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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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살롱 /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당선소감]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다는 걸 이젠 압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올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봄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똑같이 피어나는 꽃들을 기를 쓰며 보러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꽃들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며 그곳에 그날, 그 시각 거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을 찍는지를 말이지요.

 

아주 오랜 시간 낙방하고 이제 신춘문예는 봄이 오기 전 우체국에 들르는 작은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연례행사를 치르며 나이를 먹고 왜 봄이 오면 사람들이 꽃을 보러 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고 짧은 진통으로 낳은 둘째도 결국은 내 처음의 아이였다는 것을요. 어느 순간 핸드폰 카메라 앨범엔 꼭 찍혀야 할 단풍이 있고,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길고양이가 있으며, 재개발을 기다리는 골목의 장미여관이 가지 말라며 제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 골목을 찍고 있는 순간도 다시 오지 않을 그 하루의 처음이었다는 것을요.

 

시와 함께 한 살 더 나이 먹을 수 있게 해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나의 아픈 손을 잡아 주어 나의 한쪽, 나의 시가 되어가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시

 

506명이 보내온 1903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게감. 당선작을 결정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두의 잠깐’ ‘뱉은 씨앗’ ‘숲에 살롱세 편이었다.

 

모두의 잠깐은 잘 쓴 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일의 틈틈마다 그 잠깐을 배치시켜 놓아요/하루가 연속성의 과정이라면/하루엔 얼마나 많은, 다양한 잠깐들이 있을까요라는 진단은 휴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땅하고 옳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단의 힘은 약해지고, 잠깐의 목록들을 호출,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뱉은 씨앗오물거리는 입속에서 톡톡 내뱉어지는/수박씨들, 저것은 아마도 최초의 농법이자 직파법이라는 발상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발상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심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시를 닫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숲에 살롱은 재미있다.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살롱(미장원)과 어느 동네나 떠돌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요리조리 이야기의 잎사귀들, 시의 잎사귀들을 갖다 붙였다.

 

시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면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첨언 한 가지. 이 시가 만약 잎사귀가 아니고 꽃을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무쪼록 좋은 시는 꽃이 아니라 잎사귀를 보기 좋게 매다는 일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전동균·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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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당선소감] 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출퇴근길,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단한 빙하가 된 것 같다고, 점점 부서지고 작아질 얼음이 되어 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언젠가, ‘얼음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요나 인톤은 팽팽한 빙판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깨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포착했다. 길고 깊은 균열이 생기는 그때, 얼음은 노래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 가는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다. 서툰 나를 받아 주는 아네스와 베드로, 오빠와 두 동생과 다투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 혜지 언니,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곁을 지켜 준 미혜와 수인, 평생 미더운 눈빛 서우종 선생님, 널 믿는다는 말 대신 말없이 손을 잡는 진희, 언니는 시인이 될 거라고 나보다 앞서 믿은 윤혜, 함께 글을 쓰고 사계절의 풍경을 여행한 지혜, 혜배, 혜라에게 고맙다. 무지개책갈피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친구들, ‘SOH’가 있어 일하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쓸 수 있었다. 쭈뼛대며 수업에 찾아온 사범대생을 격려한 한영옥 시인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준 김상혁, 황인찬, 김소연, 김언 시인님과 첫걸음을 응원해 준 심사위원님들께 갓 우린 차처럼 따뜻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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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 /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당선소감] "민슬기, 권미양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델이라는 영국 가수가 컴백 콘서트를 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싶었다고 한다. 너에게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하고 너의 상처가 나의 용기가 되고 너의 용기가 나의 기쁨이 되고 네가 지나친 너를 귀띔해준다. 너로 하여 시간이 휘고 거리도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를 먹이로 먹고 사는 종족인가. 어떤 슬픔으로 벌어진 입은 잘 닫히지 않는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쩌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 벌어진 입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른 입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벌어진 채 버려진 입에 와 닿는 것들의 맛을 느끼게 된다. 아니 그보다 벌어진 입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달고 걸어간다. 도망치려고 뛰어가면 그 소리가 더 커진다.

 

살금살금우리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 사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읊조린다. 내 상처에 아무리 약을 발라도 낫지 않던 것이 너의 상처를 어루만져 나아가는 임상을 겪으며 어디가 상처였는지 깨닫게 되기를 밤 하늘에 흩뿌려본다. 알 수 없음과 실패라는 축복까지.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별은 기억해주리라. 어둠은 속삭여 주리라.

 

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 친구 민슬기 뚜벅뚜벅 권미양 김병용 모스부호 노치성 김희섭 김경수 신애영 박경만 환한 서영채 최두섭 임철우 최수철 주인석 높은 먼먼 나희덕 안도현 박남준 복효근 이희중 가파른 장창영 한정화 최기우 미소 짓는 김의수 뜨끈한 전성진 섬세한 꾸준한 튼튼한 함한희 이정덕 예리한 윤중강 조명환 멋진 박윤지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맑은 비스듬한 화사한 포근한 숯검댕이 먹먹한 그렁그렁한 무던한 칼칼한 글썽글썽한 부르지 않아도 서운타 않을 빛이 빚임을 안다. 길이 아직 식지 않았다.

 

 

 

 

떠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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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뉴튼 사과와 이 시대 일상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당

 

시는 언어예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가 박제된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언어는 화자의, 그리고 시인의 목소리가 실린 ''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이 살아 독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시인이 되고자 꿈꾼다는 것은 또 언제나 이 언어와 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시인을 찾기 위해 1,000편이 넘는 응모작을 만났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증이 시 쓰기에도 가위 누르기를 한 까닭일까,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패기 넘친 작품보다는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또 상투적인 언어와 생경한 이미지의 나열로 인해 박제화 되어버렸거나, 최소한의 형상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기억과 일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응모작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일차 걸러낸 후 남은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심사자의 감식안을 시험한 응모작에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도 있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낸 작품도 있었다. 홍여니의 를리외르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책 제본 과정에 빗대어 쓴 작품이었다. 그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진술을 중첩시킨 어법에서 몇 군데 억지스러운 이미지가 정서적 몰입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고경자의 끈의 방식은 직장인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 체험과 사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적 긴장이 유지되지 못한 채 느슨하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응모작은 최형만의 새들의 삽화와 양승수의 만유인력이었다.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삼아 무방할 시품을 갖추고 있었다. 새들의 삽화는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숙련되고 단단하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그 단단함 때문에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활달함이 덜 느껴졌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만유인력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거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부피를 응축시키는 상상력의 힘이 있었다. 뉴튼의 '사과'와 이 시대의 '일상'이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특히 꽤나 긴 호흡으로 끌고 간 작품인데도 끝까지 시상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적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다. 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동근(전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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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당선소감]

 

중복 투고 여부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은 지 11일이 지나서야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확인 전화 이후 거의 바로 당선 고지 전화가 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이 큰 행운이 스쳐 지나간 줄 알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확인 전화와 당선 고지 통화 사이 열흘 남짓한 시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들을 정리했다. 그중에 가장 큰 성과라면 '계속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확인 전화를 받고도 떨어진 줄 알았던 나는 그 불운을 이겨내기 위해 언제라도 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최근에 '사무사'(思毋邪)에 대해 생각도 많이 했다. 이 말이 맑고 고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진심'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진심이 담긴 시를 앞으로 계속 쓰도록 하겠다.

 

나의 시에 성장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묵묵히 행로를 지켜봐 주셨던 최두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나는 속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주 조바심이 났었다. 시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도해 주셨던 임동확 교수님, 생각을 많이 깨우쳐 주신 서영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란 정의에 조금은 어울릴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온 나의 선배님들 권오영, 엄기수, 신성률 시인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당에서 함께 한 시간이 없었다면 시를 어떻게 익혀가야 하는지 몰라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엄마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허망함으로, 아빠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읽으셨다. 그렇게 읽히는 것에 수긍이 가면서 이렇게 각자의 생각대로 시가 읽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조카 규민이에게는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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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자 연령,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라다양성이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심사위원: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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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찾다 / 김종숙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수상소감] "마흔 중턱 늦깎이 해거리 공부, 뚜껑 열린듯 결실"

 

뚜껑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의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결국 열지 못했던 뚜껑, 그건 내가 아직 미끄럽고 땀이 많이 나는 손을 가졌다는 뜻이었겠습니다. 어쩌다 뚜껑이 열리는 패는 늘 허수였지만, 꽉 잠긴 한계에서 한 호흡을 더 힘준 덕분일까요, 열린 뚜껑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 지경입니다.

 

한때 삶을 견딜 수 없어 신을 찾았고, 신은 내게 자유와 시를 주셨습니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애착이 떨어져 나갔고 또 공허했지만, 마흔 중턱에서야 늦깎이로 시에 입문했습니다. 바쁜 직장 일들로 해거리 시 공부를 했습니다. 절실한 시간을 할애한 만큼 모든 결실들이 생긴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예부터 시인은 신과 인간의 메신저로서 삶 자체가 구도의 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시를 쓸수록 와 닿는 말입니다. 때로 '신은 시인에게 인간의 오관으로 느낄 수 없는 초감각 계들을 몽환처럼 열어 보이기도 한다' 고 생각합니다.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런 감각조차도 벼려 이 시대에 일익을 해 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앞서 걸으며 방향이 되어 준 분들이 계십니다. 졸고를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맹문재 선생님과 문우님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명서 선배 시인님, 그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신춘문예 공고에서부터 당선자 고지까지 한 번도 나이를 묻지 않아 주신 머니투데이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두보, 소동파, 이백, 김삿갓의 한시(漢詩)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와 솜씨를 물려주신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곁에서 알게 모르게 외조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응원해 준 세 아이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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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인 삶의 깊이 에 고스란히

 

올해엔 시 부문 응모작품 수가 적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많았다.

 

<도배사>는 여자 도배사의 아슬아슬한 삶과 닮은 작업 과정을 통해 "벽이 꽃그림자 속으로 환하게 스며드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종결어미가 모두 "~"로 계속 이어지면서 시가 둔탁하고 리듬감이 부족했다.

 

<어머니 몸 속에는> 작품은 뼈마디마다 삶의 무게로 점철된 통증들이 신음소리인 비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애정이 잘 담겨져 있다. 다만 응모작 대부분이 시의 주제나 의도와 달리 너무 길어 산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목수의 딸>은 목수였던 아버지의 삶을 아련하게 반추하고 있다. 목장갑을 빨면서 아버지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따뜻하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선정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고요를 찾다>였다. 벼 낟알이 쌀이 되고 밥이 되기까지, 하여 고요해지기까지 과정을 그야말로 '반듯하게' 그리고 있다. 잘 익은 따뜻한 밥을 앞에 대하듯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작품 중에 "가령", "또는" 같은 추임새도 시적 긴장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이순원 소설가, 이희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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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당선소감] 괜히 글 쓰고, 괜히 혼자 여행하고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됐다

 

채윤희 씨당선 연락을 받았다. “엄마!” 비명을 지르며 따뜻한 품을 끌어안았다. 엉엉 울기에 이상적인 순간이었고 거의 그럴 뻔했다. 그러나 끓는 물에 들어간 지 10분을 훌쩍 넘긴 파스타를 걱정하는 마음이 울컥 치미는 마음을 기어코 짓눌렀다. 퉁퉁 불어버린 파스타를 소스가 담긴 팬으로 옮겨 담았다. “어휴, 비명이 들리기에 사실 벌레가 나온 줄 알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우가 그릇마다 세 마리씩 배분되었는지 살폈다. 지금 새우가 문제인가. 그러나 새우가 문제이기는 했다. 내가 네 마리를 먹으면 누군가는 두 마리를 먹게 될 테니까. 회심의 파스타였는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새우가 세 마리이기는 했다, 다행히도.

 

당선작의 제목을 알려드렸다. “, 너 비행기 놓친 곳!”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그편이 재미있었을 텐데 괜히 정정했나 싶었다.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은 늘 일어났다. 괜히 글을 쓴다 그랬다, 괜히 다른 공부를 한다 그랬다, 괜히 혼자 여행한다 그랬다. 그렇게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되었다. 조촐한 당선소감을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만의 괜한 순간을 긍정하게 된다면 좋겠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우선 언제나 응원해준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에게 사랑을 보낸다. 예술을 한답시고 빌빌거리는 친구 셋의 술값을 턱턱 내준 이 선생. 이제 갚을게. 나의 6. 응어리진 애정을 풀기엔 나의 언어가 모자라다. 마지막으로, 항상 무언가를 그르치고 있다는 감각으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은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열심히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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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간-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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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당선소감]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 나올 때까지 정진삶 속 어둠이 시 자양분 돼 스승과 가족·문우들에 감사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새벽녘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막장으로 가던 바퀴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주말에는 사과밭에 농약을 치던 그의 젖은 등이 선연합니다. 노동의 무게로 아버지의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성실이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평범한 나에게 시를 붙잡고 있게 했습니다.

 

살면서 어둠이 나를 늘 따라다닌다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았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었으니까요. 어둠을 끄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천연염색은 여러 번의 색 입힘이 필요합니다. 고운 색을 얻으려면 먼저 불순물을 걸러내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저는 겨우 초벌염색을 통과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공을 들여야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더 정진하며 늘 남은 염색을 생각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둠에 있는 나에게 빛을 주는 존재라 여깁니다. 빛을 좇아가려고만 했던 저에게 빛이 찾아오게끔 길을 만들어준 존재였습니다. 평소에 많은 시를 읽어주시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가족과 문우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서툰 저에게 고마운 빚을 남겨준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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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 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 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 <꽃누르미-그들의 압화> 4, 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6, 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 <어떤 필기체> 4, 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 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나희덕,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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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당선소감] “시의 길에선 남과 다른 내가 더 나일 수 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다. 의지가 개입할 겨를이 없이 바깥을 향해 열린 모든 세포를 걸어 잠갔다.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정지된 시간을 다독여 수면 위로 올라와 녹슨 세포를 깨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갇혀 있던 감각 촉수가 언어와 결합하며 나를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다.

 

기억처럼 지워졌다가 되살아난 진실이 시어가 되어 꿈틀거린다. 하얀 종이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잠이 든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곁눈질하면서 달린다. 이 둘에게서 언제나 허둥대지만, 그래도 나는 나아간다. 시와 사랑을 향해. 세상을 향해...

 

시의 길에서는 남들과 다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다르니 내가 더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광주일보와 이병률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이재무, 오봉옥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윤천, 이대흠 시인님께 감사드리고 첫눈 시빚기반 회원들, 시를 향해 탄탄한 근육을 보여준 선배 시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작년과 올해 바삐 곁을 떠나신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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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쨍하고도 명징한 시, 탁한 세상에 차려놓는 기쁨

 

시가 반드시 고통을 통과한 형태의 무엇은 아닐 것이다. 번민과 고뇌를 통과한 흔적을 날것의 형태로 그려 놓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라거나 더군다나 그 누구도 홀릴 수 없는 시라면 신춘문예 같은 공모에선 감점법으로 접근하게 된다. 장점이 충분한 작품을 두고 고민을 했다.

 

진영심의 꾸미지오 미용실은 제목부터 즐거운 이야기의 향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여러번 읽게 되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늘에 비유했다는 사실에 일단 선자는 놀랐다. 하지만 바늘을 연상하고 바늘귀까지 끌어와 착상에 성공했다면 바늘귀에 뭐라도 꿰어야 하는데 그것이 빠진 채 후루룩 시를 맺고 말았다.

 

결국 강희정의 조퇴를 당선작으로 선한다.

 

새해에 여는 시 한 편으로서의 자격과 미덕을 찾자면 단연 양명함이었다.

 

동시(童詩)의 마스크를 쓴 시라고 가볍게 평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아름다움은 시 속에서 자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과감할 정도로 배제시키는 능력으로 완성도를 일으켰고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을 과잉하게 드러내려는 수많은 응모작들 속에서 분명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쨍하고도 명징한 시 한 편을 골라 탁한 세상의 공기에 차려놓는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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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당선소감] 혹독한 겨울 흔들어 봄을 일깨워준 시

 

나의 오늘은 어제와 닮아있다.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 오후, 나는 핸들을 잡고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도 앞이 흐려 답답하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국제신문 최승희 기자라고 했다. 갑작스런 당선 소식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왈칵 눈물이 흘렀다. 자동차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갓길에 잠시 나를 정차시키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가만히 있는 나를 자동차가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자동차 대신 구름 모양의 시를 타고 있었다. 그동안 오래 문학과 시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래서 늦게 시작한 공부였고, 20218월에 허수경 논문이 통과되면서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늦은 공부에도 응원해주고 끝까지 등을 밀어준 가족에게 감사한다.

 

시의 압축미를 강조하셨던 이승하 지도교수님과 시가 잘 안 풀릴 때는 미술관을 가라고 말씀하셨던 이수명 교수님, 대학원 분과 수업시간에 시를 쓴다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고 묘사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던 조동범 선생님, 좌절을 느끼며 시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셨던 박남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시를 쓰면서 나만의 독창성으로 남이 할 수 없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 이제야 시의 끝자락에 빗방울 같은 나를 들여놓는다.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다.

 

끝으로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고 있던 제 시를 신춘의 봄 뜨락으로 성큼 불러내주신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 세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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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유쾌한 상상으로 생명의 의지 캐낸 수작

 

국제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보내온 작품들을 읽었다. 어느 해보다 전반적으로 서정적 색채가 두드러져보였으며, ‘어머니의 존재를 포함한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아 눈에 띄었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가족이라는 두터운 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가는 정감에 시심(詩心)이 쏠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이 토론을 이어간 작품들은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4, ‘흔들렸다2,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2편이었다.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질서 있게 꽂힌 도서관 서고와 검색대가 있는 열람실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공간에서의 작은 균열과 소란과 술렁거림과 이탈 욕망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시상 자체가 빛처럼 번득였으나 시어들의 선택과 활용이 다소 평이해 아쉬웠다.

 

흔들렸다는 하나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는 다른 존재, 즉 존재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주목한 작품이었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돌연한 충격을 주어 신선했지만,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과는 편차가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에 주저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시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 이 시는 회복되는 어떤 생명력의 강인한 힘을 사물인 침대에서 발견해내는 수작(秀作)이었다. 봄의 절기가 갖고 있는 환함과 꽃핌과 탄력을 침대의 공간과 끊어지지 않게 미묘하게 연결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개성적인 신예의 출현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시단에서 특별한 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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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감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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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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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당선소감] 기억과 기록오래 써나갈 것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쓰는 것이 시일까, 내가 시를 쓸 자격이 있을까? 경향신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울먹이는 제가 선뜻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게 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 하찮아 보일 때, 사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싶을 때 쓰였습니다.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 그런데도 살아보겠다고 꿈틀대는 욕망이 시 속에서만 비로소 쓸모를 찾았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더 어두운 생각을 톺아보고 그보다 어두운 곳에 있을 존재에 기대어 썼습니다. 그랬던 시가 살면서 가장 빛나는 자리로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을 것 같은 두려움에 꿈속에서도 문장을 중얼거립니다. 좋은 시란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으로 덤벼봐도 된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속으로 마음껏 몸을 던져도 된다고, 길을 잃은 곳에서 더 길을 잃기 위해 난장을 부려도 된다는 목소리였습니다.

 

함께 시를 써나간 김미라 언니, 양송이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오래 들어왔던 시 수업이 갑작스럽게 폐강한 후 임시저장이란 이름의 작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쓰고 서로의 것을 읽었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에 모니터 화면 너머로 표정을 나누고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낭독을 들으며 저는 써나갈 힘을 가까스로 얻었습니다. 어느 우스갯소리가 기억나네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Ctrl+S만 차리면 산다고요. 계속, 습관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저장한다는 임시저장이란 기능처럼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 돌아보아야 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시에 저장하며, 오래 써나가겠습니다.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혼불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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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줘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능동과 살아지는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준, 김행숙,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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