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꽃 지폐 / 이선주
무안군 성동리 170번지 임금례 할머니 집에 불이 났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양파밭일 온품 반품 바꾸어 모은 팔십오만 원
빳빳한 저고리 은빛 테두리 두른 단아한 신사임당 한 장씩 장판 밑에 깔아 놓고 늘어진 난닝구 고부라진 등골 부리고 누워도 손주들 학원비도 대주고 용돈도 쥐어 주며 율곡선생을 빌어주는 순간은 알싸한 파스 몇 장이면 무릎뼈 엉치뼈까지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내일 또 어느 밭으로 갈까 노곤달근한 꿈이 깡그리 타버렸다
아침에 나가면서 끓여 먹었던 누룽지 양은냄비 불 끄는 걸 깜빡 잊어버렸던 탓이었다
흙 속에 거꾸로 머릴 박고 살아도 하늘 딛고 땅 속으로 알알차게 살찌우던 양파돈 생각에 연기 자욱한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장판 먼저 걷어보고 까맣게 타버린 지폐를 발견하고는 기가 막히게 서럽고 허전하던 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동네 노인들 하나씩 하나씩 찾아와 성님 잊어부러야제 어쩌겠소 하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양파 냄새나는 사임당 몇 잎씩 꺼내 쥐어 주고는 엉거주춤 펴지지도 않는 다릴 끌고 흰 달빛 속을 걸어 돌아가더라는 밤새 그러고선 다음날 또 새벽같이 날품 가는 경운기에 동글동글 모여 앉았더라는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 하얀 양파꽃도 무리무리 환하게 피었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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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무엇'을 쓰기 위해 관성처럼 다시 일어나기 반복
오랜 시간 문학을 앓으며 열망은 자꾸만 박제되어가고 현실은 단호했으며 나는 무력했다. 무언가 써보겠다고 끙끙댈 때마다 종이가 사람 키만큼 쌓이도록 습작을 해야 뭐라도 쓸 수 있다는 말을 생각했다. 나는 그 ‘뭐’라도 쓰고 싶었지만 그 ‘무엇’도 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좌절해 자주 넘어졌고 그러다가도 어떤 관성처럼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깨진 무릎에 앉는 새 살 속으로 세포들이 무한분열 생장과 치유를 반복하며 나를 지탱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쇳짐같은 하루 노동이 끝난 밤이면 생선냄새 김치냄새 나는 밥상 위에 원고지를 펴고 돋보기 너머로 국어사전을 찾으며 글을 썼던 그래서 내 키의 반 정도는 미리 쌓아주고 정작 당신은 무명 글쟁이로 가신 엄마 김은행 여사의 이름에 이제야 빛을 달아줄 수 있어 기쁘다. 불혹을 훌쩍 넘어선 제자에게 먼 길 찾아와 이제는 글을 다시 시작해라 용기를 주셨던 명기환 은사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시를 가르쳐주신 채수영 교수님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은혜를 입었다. 내 모세혈관처럼 나를 잘 알기에 오래 기다려준 남편과 엄마가 글을 제일 잘 쓴다고 착각하고 있는 세 아이들이 삶의 큰 힘이다.
당선소식을 전하는 목소리를 행여 보이스피싱이 아닌가 의심했고 계좌번호나 비밀번호를 불러달라는 것이 아닌 걸로 봐서 진짜인가봐 할 때 덜덜 떨리던 손의 전율이 짜릿했다. 기쁘고 또 기쁘다. 당선자들이 하나같이 당선 이후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되었다고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과 머니투데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끝없이 발전하는 시인이 되도록 정진하겠다는 약속을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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