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가슴 쿵쾅거리며 심박동이 빨라지는 기쁨으로 마치 먼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은퇴를 하고 이제 그만 좀 쉬어야 한다는 말들이 처음에는 큰 위로로 들렸지만 6개월, 일 년이 지나면서 삶은 메말라지고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는데, 어느 날 문득 취미로 쓴 글이지만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져, 수없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이번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은 더 겸손함으로 진솔한 글을 짓기 위해 성찰과 정진하라는 뜻으로 여기고, 앞으로도 독자가 보다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치와 신념으로 창작에 몰입할 생각입니다.
행복한 즐거움으로 가슴 벅찬 기쁨과 함께 새로운 무게감을 느끼며,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세련되고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의 평가 잣대를 설정하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겨울추위까지 동반한 채 코로나19 보릿고개를 건너고 있는 분들과 함께, 머지않아 마주할 터널 끝의 봄과 희망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이 나이에 신인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그리고 지속적인 문화사업으로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동양일보와 관계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신실한 설렘과 삶의 성찰 돋보여”
28회 신인문학상 공모에 응모한 작품들 중에서 선자에게 넘겨준 작품(387편)을 숙독하면서 느낀 점은 난해하거나 미숙한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그래도 성숙한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띄어서 다행이었다.
끝까지 선자의 손에 남아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 김난수의 ‘봉안담’과 최현숙의 ‘바다에 비가 옵니다’ 그리고, 이재곤의 ‘저잣거리, 노부부의 사랑’이란 시이다.
김난수의 ‘봉안담’이라는 시에서 “영평사 야외 납골당 황련궁 2열 22호” 이곳은 내가 죽어서 들어갈 나의 봉안담, “내 죽음의 집이다”면서 “처음 살림집 장만했을 때보다 더 설레어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면서 납골당을 장만했을 때 “새벽 내내 안주가 되었고” 사람들은 “집들이를 서둘러 하라고 난리였다”라면서 당장 날 잡자는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풀어 술부터 샀다. 황련궁 벤치에 앉아 돌들과 구절초들과 모과나무에게 “눈인사를 나눈다며 ”내가 들어오면 심심치 않게 놀아 달라“고 당부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최현숙의 ‘바다에 비가 옵니다’란 시에서 바다에 비가 오면 “바다가 물배를 채웁나다” 포구에 줄줄이 매달린 어선들과 갈매기호들을 바라보며 “바다가 뻐끔뻐끔 물배를 채웁나다”라면서 우리 “어머니도 육남매를 낳아 키우느라” 바다처럼 삶의 허기로 배를 채우셨다”며 그뿐만 아니라 ”십 리쯤 걸어야 하루 다섯 번 오가는 버스길을 “이고지고 오르내린 어머니의 길” “코빼기도 뵈지 않는 자식들이 있어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만 속이 말라간다.”며 모정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엿보이고 있다.
이재곤의 ‘저잣거리, 노부부의 사랑’이란 시에서 “짧아진 가을 해” 뉘엿뉘엿 서산에 숨어들고 “온종일 분주하던 저잣거리는 좌판을 거두고 철시를 서두른다.”기억 자 허리 억지로 반쯤 펴며 “통증을 뿜어내는 할머니 신호에 웅크린 채 기다리던 리어카는” 소박한 방석 하나에 “황제의 가마가 부끄럽지 않은 듯” 두 다리를 펴 보면서 안도하는 할머니를 리어카 뒷자리에 태우고” 오가는 인파 속에 묻혀가는 할아버지의 “그 뒷모습 따라가는 그림자에 고된 일상 한 줌 고스란히 흘리며”어둠을 밀어내는 가로등 아래로 “따스함과 쓸쓸함이 숙연하게” 깃든다고 하였다
저잣거리 노부부의 삶 속에서 사랑과 설렘이 번져나고 있다. 늦가을 삶의 구체적 모습 속에서 신실한 설렘과 삶의 성찰이 돋보인다. 이재곤의 ‘저잣거리, 노부부의 사랑’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상을 받은 소감이라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앞으로 쓸 작품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 소감문을 쓰려고 생각하다가 나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이른 아침이었으니, 해가 뜨는 쪽에서 귀인의 목소리를 들은 날이었다. 잠결인가 꿈결인가 했다. 심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꿈을 어렴풋이 꾸었다. 가지에 달린 것들은 지나치게 익었거나 아직 덜 익은 것들이었다. 간밤의 해몽을 오후가 되어서야 생각하다가 마스크 속에 감춰진 입꼬리가 올라갔을 것이다. 상을 받고 기쁘지 아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더불어 기뻐하니, 얼마간 기쁨은 두 배로 지속할 것이다. 기쁜 것은 기쁜 것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언덕을 넘고 산길로 호젓이 나 있는 오솔길을 걸어가기를, 그 ‘홀로 있는 방식’을 유지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마음이 사라질까 봐,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상을 받았으니 그만큼 더 골몰하고 절실해지고 더 겸손해지는 것, 그리고 계속 쓰는 것,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받은 꽃다발은 기분 좋은 무게가 느껴질 것이다.
채우거나 버려야 할 부분이 있을 작품을 눈여겨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시’가 나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자리를 만들어주신 <시인뉴스 포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인 뉴스포엠 시인상의 응모작들을 공들여 읽었다. 응모작은 140분이 보내온 800여 편의 작품이었다. 응모작들 중엔 이미 시단에 등단해 활동을 하고 있는 신진 시인들의 작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미등단자의 작품들 중에도 상당한 시적 수련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분들의 작품이 눈에 띠었다. 현대사회는 IT산업 사회라고도 하고, 대중문화 사회가 되어버렸다고도 한다. 시는 쇄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심사자는 시인뉴스포엠 시인상 심사과정에서 800여 편의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치열한 정신이 불러낸 ‘불꽃의 언어’, ‘목숨의 언어’들을 만났으며, 새로운 힘의 언어를 만날 수도 있었다. 심사자는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한국시의 현재와 미래를 톺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시의 수준을 판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첫째, 시인의 일상사나 현실문제를 서술하고 있는 시. 둘째, 시인의 일상사나 현실 문제를 시적 장치로 표현하되 시적 구조를 이뤄내고 있는 시. 셋째, 깊은 투시력으로 발견한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가 적절한 구조를 지향하고 있으며, 비유의 관계로 원활히 소통되고 있는 시. 물론, 셋째 단계의 시를 만날 때의 환희가 가장 큰 것이라고 믿는다. 심사자는 그런 나름의 기준에서 응모작들을 읽었다.
하기정의 「바순」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바순은 목관악기이다. 목관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라고 한다. 단풍나무나 배나무로 몸통을 만들며 갈대 조각으로 리드를 만든다고 한다. 바순은 갈대 조각으로 만든 리드를 숨으로 불어 울려 긴 울음통이 소리를 반향해내도록 만든 악기라 한다. 시 「바순」의 시인은 이 목질의 리드를 숨으로 불어 울림의 오묘한 소리를 만드는 발성 시스템을 입에서 입으로 숨을 옮겨 생명을 복원시키는 것으로 상정된 시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처한 응급환자와 ‘마우스 투 마우스’ 응급처치를 떠올리도록 배려되어 있다. “두 개의 목이/ 서로의 목구멍에 대고/ 울음을 불어 넣”고 있으며, “침묵이 그를 긴 관에 눕혔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악기 바순은 긴 관에 눕혀져 있다. 관(管)은 관(棺)과도 상통해 쓰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는 몸통은 소리의 죽음이기도 할 것이겠다. “빛나는 관록과도 같이/젊고 마디 굵은/ 청춘의 목을대에 빨대를 꽂”는 그의 시에는 생명회복에의 바램까지 깃들어 있다. 목관악기 바순을 노래한 외피를 벗겨보면 이토록 큰 함축이 내재해 있다.
심사과정에서 박성우의 「가정」, 조현순의 「돌배나무 모퉁이」, 박찬익의 「파레이돌리아」, 이명윤의 「안녕 하셉」, 김형태의 「쪽방촌」 등이 시적 재질을 보여준 분들이다. 이분들의 정진의 모습을 보고 싶다.
폭포 아래에는 지구의 명치가 있어서 지구와 같은 시간을 흐르고 지구와 같은 기억을 간직하고 지구와 같은 길이를 짊어지고 지구와 같은 두통을 앓는다. 지구의 이마를 짚는 폭포. 쏟아지는 이유를 들어보자. 움푹하게 패인 곳을 더 움푹하게 파는 낙하가 그곳에 있으니, 움푹하게 패인 곳을 치는 주먹들이 있으니.
그곳에 소란이 있으니.
폭포 위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건 떨어지는 물보다 더 빠른 죽음이었겠지. 그건 쏟아지는 하늘보다 더 파란 죽음이었겠지. 순간이 있었다면 치솟는 일 같은 건 생각도 않고 아래로 아래로 순응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바닥을 천명으로 여기고 손안의 주먹밥이 식은 걸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올려다 본 곳엔 두 손에 묶인 채 위로 위로 끌려 올라가는 폭포가, 파랗게 질려서 밑동까지 덜덜 떠는 폭포의 귀청들이,
폭포를 보고 있으면 계속 흐르는 중인지
계속 치솟는 중인지 모를 때가 있다.
함께 흐르는 듯 함께 치솟는 듯 해 폭포에게
무엇을 봤냐고 물어본다.
귀가 어두워서 모른다고
못 들었다고
못 봤다고 하고
바닥에서 다시 튀어 오르는 물은 마치 무명천이 펄럭이는 것 같다.
흘러간 물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폭포. 이미 흘러간 물줄기는 천 리를 지나고 만 리를 지나고 지금쯤 어느 별에 닿았을 것인데.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낮마다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폭포는
그 옛날의 물줄기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네.
[심사평] 폭포와 죽음의 역동적인 대비에 성공해
제주4·3평화문학상은 공모주제를 미리 제시하고 작품을 모집하는 문학상이다. ‘4·3의 진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창작자들은 제주 4·3의 역사성에 기반을 둔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언어로 형상화하려고 궁리를 하게 된다.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재를 선택하고 작품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부터 사전에 미리 제시된 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주제에 매달리면 문학성을 의심받고 주제로부터 멀어지면 진정성을 의심받게 되므로. 시는 어떤 정답을 그대로 드러내는 양식이 아니라 정답을 숨기면서 정답에 근접하는 양식이다. 그것이 설사 옳다 할지라도 4·3이라는 사건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은 읽기가 거북했다. 민간인 희생의 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제주 방언을 몇 차용한다고 해서 4·3이 문학적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시는 그 매너리즘을 넘어서서 인식의 새 지평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올해 10회째를 맞은 이 문학상이 더욱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으려면 줄곧 희생자의 입장에서 현실을 드러내던 방식을 이제는 좀 수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희생자의 상처와 고통을 직정적으로 토로하는 방식은 수없이 봐왔다. 가해자의 입장, 가해자의 반성과 자기 극복의 관점을 보여주는 시는 어찌해서 단 한 편도 만날 수 없는가? 역사적 사실과 시적 심미성은 별개가 아니다. 4·3은 상처를 추념하는 예술이 돌파하기 어려운 굴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4·3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의 전복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31의 「폭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 작품은 폭포라는 소재를 죽음과 대비하면서 역동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후반부로 가면서 힘찬 긴장감이 더해지는 이 시는 폭포가 “그 옛날의 물줄기를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식으로 발전한다. 시인의 인식이 독자에게 충분히 전이되어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다. 이분은 제주에 경사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삼십 도는/ 후회하기 좋은 경사인가”(「경사」) 묻기도 하고, 망자가 누운 관속의 빈 공간을 “허방을 짚는 일”(「발끝의 사례」)로 파악하면서 유보를 통해 고통을 드러내는 방식에 능하다. 구문의 적절한 반복으로 시의 가독성을 높이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수상작과 함께 오래 검토한 73은 구어체적인 진술이 능숙했으나 4·3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개괄하는 듯한 목소리가 아쉬웠다. 시에 각주를 지나치게 나열하고 있는 점도 거슬렸다. 29는 시적 정황에 대한 실감 어린 묘사가 볼 만했으나 ‘작시(作詩)’의 의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
다. 본인의 유려한 목소리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길을 모색해보기 바란다. 2월 말의 제주는 ‘먹쿠슬낭’으로 부르는 멀구슬나무 열매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벚나무에 봄비가 맺혀있는 오전 이삿짐 사다리가 올라갑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의자는 치워지고 누구의 의자는 채워집니다. 지난달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 출근 준비하던 중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겹벌이하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생활 앞에서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또 다른 세계에 한 발 내딛습니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기에 남들보다 두서너 배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단어를 찾고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좌절과 끈기로 버텨온 시간에 첫 번째 봄꽃처럼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봄비처럼 언 땅에 낮은 자세로 더욱 정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위안과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기택 교수님의 찰진 회초리가 무서웠지만 그게 보약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울음나무’ 문우님들 채율, 재순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이 고맙고, 두 딸 수연, 수아 사랑한다.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신 박덕규 교수님과 김흥기, 최대순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예심을 통과해 올라온 작품을 또 한 번 거르고 나니 <돌고래> 외, <노이즈마케팅> 외, <맑은 엄마> 외, <중심> 외, <새벽틀> 외, <오늘의 운세> 외, <골목에 스위치를 켠다> 외, <목화> 외, 그리고 <달밤愛 미용실> 외, <바지랑대> 외, <파릉> 외, <책장 다비(茶毘)> 외 등 12인의 응모작이 남았다. 전반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어서 여러 차례 다시보기를 했다. 그 결과 뒤에 남은 4인 작품으로 좁혀졌다.
<책장 다비(茶毘)>는 낡은 책장에 있던 책들을 버리는 내용이 새로워 보였는데 ‘비워야 비워지는 것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필연적 과정이 부족해 보였다. <파릉>은 ‘파릉’ 등 봄작물을 경작하는 광경이 실감나게 그려졌지만 시상의 일관성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바지랑대>는 ‘젖어 늘어진 생의 무게를 떠받치는’ 바지랑대의 형상이 볼 만했지만 언어의 중복이 심했다.
<달밤愛 미용실>은 직장인을 위해 야간에도 문을 여는 미용실의 분위기를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그 미용실이 ‘우주역 1번 출구’에 위치한다는 공간설정, 미용사가 ‘달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 같다’는 직유, 솜누스(잠의 신)가 출렁일 때 “달의 뒷면에서 은하수가 쏟아”진다는 환유 등이 단순히 재치에 그치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해학에 맞닿아 있었다. 미용실을 들어갔다가 나오기까지의 경과를 흐트러짐 없이 형상화한 데서 만만찮은 역량이 느껴졌다. 함께 보낸 시 <움푹 들어간 곳> 등도 안정감 있는 시였다.
예심을 거쳐 최종 단계에 오른 심사대상은 도합 10명의 작품이다. 근자 우리 시단의 시적 ‘기질’이 발휘된 탓일지는 모르겠으나,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들은 대체로 이른바 탈(脫)서정 혹은 다른 서정의 개념이 포괄하는 의미의 영역을 거침없이 횡단하고 있었다. 그만큼 전통서정시의 문법으로는 21세기적 삶의 정서와 체험을 온전히 담을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어법과 양식이 필요하다는 시적 자의식을 공유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런 경향은 기존 전통서정시의 평면성과 경직성을 거부하고 나름의 다양한 형식실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일부의 작품들은 여전히 자극적이고 파편화된 언어로 ‘실험을 위한 실험’의 시도, 즉 시류 추수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시와 언어철학의 상관성에 관한 고민이 모두에게 필요할 듯하다.
마지막까지 검토된 작품은 조은숙 씨의 <도미 레지스탕스>와 <똠얌꿍빛 과수원>, 김미연 씨의 <잉여의 습관>과 <손에 쥔 것>, 그리고 이영란 씨의 <꿈꾸는 장례식장>이다. 세분의 작품은 오랜 습작의 세월이 단박에 느껴질 만큼, 시적 구성이 안정적이고 견고하다. 또한 사유의 깊이가 감지되며 발전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다만 앞선 두 분의 경우, 오래 걸러진 말들 대신에 불필요한 언어의 노출이 이번에 간혹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이영란 씨의 <꿈꾸는 장례식장>은 비교적 소박한 시어를 구사하면서도 특유의 개성이 엿보인다. 시상의 전개도 유연하며 독자 상상력을 견인하는 힘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선정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영란 씨의 손을 들어줬다. 무엇보다도 시적 사유의 진지함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청년의 어떤 날이었다. 삶의 기근을 원망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태어나고 싶냐고.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태어나고 싶지 않아. 나는 벽에 주먹질하며 소리쳤다. 그럼 왜 살아야 해? 엄마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어머니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순간 알 수 없는 분노와 침묵이 뒤엉켜 방 모서리를 적셨다. 어머니가 내 손을 어루만졌다. 고요한 목소리가 울음을 끌어안았다. 사랑해라.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그때 즈음이었다.
시작의 난제는 동일성의 시학에 있었다. 모든 비유가 세계에 대한 폭력이거나 나에 대한 자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지켜 온 신념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내가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내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분열을 앓았지만 이 또한 불가해한 삶을 향한 변명이거나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명치 가득히 차오를 때면 마음의 저편에서 어머니의 말이 불효처럼 떠내려 오곤 했다.
김수영은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며 그것이 시의 형식이라 했다. 나는 수많은 시의 형식을 연습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곳에 사랑하는 자의 어쩔 줄 몰라 함이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를 그만 쓴다는 건 사랑을 멈춘다는 뜻이었고, 사랑을 멈춘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절필을 다짐하면 늘 누군가가 찾아오곤 했다.
이재훈 형이 그랬고, 길상호 형과 강재남 누나가 그랬다. 김산과 기혁 시인이 그랬고 김지명 시인이 그랬다. 리안 형, 박민혁, 김대진, 변혜지와 같은 소중한 문우들 역시 따뜻한 온기로 곁을 내주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건 당신을 사랑하기 원한다는 의미였으며, 아직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남아 있다는 선언이었지만, 정작 나는 나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고마운 이름들이 많다. 김영국, 조영애, 현근, 영근, 준근, 은경, 애상, 은희. 나는 이들의 아들이자 동생이며 형이고 오빠이지만 매 순간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고마움과 애틋함을 전한다. 그리고 은사인 박형준 교수님과 김춘식 교수님, 박판식 시인께도 고개를 숙인다. 제자로서 한 번쯤 근사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고 싶었다. 끝으로 마음속에 간직한 이름들을 호명할 수 있도록 행운을 선물해 준 상상인 편집진과 심사위원께도 감사를 표한다. 나에게 주신 행운에 보답하는 길이 온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의 모습을 살아내는 일임을 다시금 기억하겠다.'
[심사평]
제1회 ‘상상인작품상’ 후보로 1차 심사를 거쳐 올라온 11편의 작품들은 고루 미학적 품격과 개별성을 갖추고 있어서 우선 본심으로 올릴 세 작품을 고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심사를 맡은 우리는 「가변차선」, 「목련의 방」, 「잎사귀」 이 세 작품을 본심에 올리자는 데 모두의 의견이 빠르게 일치했다. 난관은 지금부터였다. 최종에 오른 시편들은 하나 같이 완성도가 높아서 어느 한쪽에만 점수를 주기가 애매했다. 무엇보다 세 작품의 언어가 가진 경향이나 성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는 있어도, 각각의 문학적 가치를 놓고 본다면 그 미학적 위상이나 의미심장함의 경중을 따지는 자체가 부질없이 느껴졌다. 이는 ‘선정 이유’를 변辯하는 여타의 글에서 흔히 만나는 푸념을 여기서도 반복하듯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선택을 치열하게 번복한 끝에 제1회 상상인작품상 수상작은 김은상 시인의 ‘목련의 방’이 선정되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목련의 방」은 두 개의 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밤마다 술에 취해 식구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아비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어미, “얼굴보다 큰 뻥튀기를 깨물며 흙벽 모서리에 난 구멍을 긁”고 있는 아이들. 이처럼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가족 서사가 시의 배경이라면 신산한 삶의 비명과 울음이 전경화된 것이 ‘목련의 방’이다. ‘방’은 가족 서사 속에 갇힌 고통과 울음을 바깥으로 외재화하는 동시에 네모난 “흙벽” 안으로 그것을 투영시켜 가둔다. ‘방’은 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그녀’의 방이자 삶이고, “햇빛과 엉켜/ 킥킥대며 방바닥을 뒹굴”던 아이들의 공간이자 생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마음은 방에 갇힘으로써 극복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마음이 회복되지 않은 시는 그것을 읽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구체로 드러나는 타자의 서사가 보편적 슬픔을 획득했음은, 극복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미적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극성은 한국인에게 꽤 보편적이다. 그리고 이 보편성이 지닌 공감의 힘이 존재의 슬픔을 승화시킨다. 넉넉한 보편성의 미학과 더불어, 김은상의 시가 의식의 고투로 더욱더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할머니와 나들이를 갔다 흰 머릿두건을 두른 할머니는 꼬신내 나는 콩고물 묻힌 주먹밥과 호미 담은 대광주리를 옆에 끼고, 나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재 너머 할아버지 묘가 있는 콩밭
할머니 묏등 위 다보록이 돋은 성깃성깃 자란 띠풀을 뽑아 들고 가만히 봉숭아꽃물 진 얼굴로 저 먼 데 하늘을 점두룩 바라봤다 해 들면 덥다 여기서 놀거라 잎 큰 아주까리 아래 나를 데려놓고 예닐곱 이랑이랑 콩밭을 맸다
가끔 때까치들이 할머니가 김을 매는 밭고랑 사이를 푸르릉 푸르릉 다녀갔다 나는 혼자서 붉은 흙을 쑤시고 파고 다독여 아주까리 이파리로 지붕 얹은 개미집도 만들고 달개비꽃 따다 꽃밥 짓고 콩이파리 따다 콩잎자반 재고 새금파리 그릇 삼아 상을 차렸다 맛나지 할머니, 우리 할머니 냠냠 묵자 할머니가 내게 그러듯 할머니께 밥 떠먹이는 숭내를 냈다 이도 저도 시장스러지면 아주까리 그늘에 엎드려 콩고물주먹밥을 오물거렸다 되새김질하는 우리 집 누렁소처럼 입을 놀리다가 거물거물 잠이 들었다 꼼지락꼼지락 콩밭귀로 내려오던 산그늘이 두툼해지면 젖은 등더리에 업혀 어느덧 집으로 돌아왔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할머니는 색동원삼 명주옷 곱게 차려입고 꽃상여 타고 혼자 나들이를 떠났다 믈그름 감또개 툭! 툭! 떨어지는 고샅길을 돌아 나랑 다니던 나들잇길로 재 넘어 할아버지한테 가버렸다 새벽부터 는개가 듣던 그날 삼베두건을 쓴 상두꾼 직동할배가 그날은 할머니를 따라가면 못쓴다고 타일렀다 오호오 오호오 상엿소리가 나 대신 재 너머까지 할머니를 길게 길게 따라갔다
아주까리 너른 그늘로 때까치 왕개미 떼지어 놀고 할머니 백목 치맛자락 꼭 쥐고 콩밭으로 나들이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