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를 접다 / 송현숙
빈 박스를 접다 보면
오래된 주소가 비어 있거나 찢어져 있다
슬쩍 돌아가거나 뒤돌아섰던 지번들
한 개의 각이 접힐 때면
몇 해의 계절이 네 모퉁이를 거쳐 돌아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면과 면이 만나고
절벽이 생기고 작별하는 순간이 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나는 세상의 문을 하나씩 닫고 있다
검은 벽을 타고 가는 떠난 사람의 뒷모습처럼
우리는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박스를 풀다 보면
지나가는 하루를 버스 손잡이에 보름달을 걸어두고
입석으로 지나가는 달의 노선을 돌면
동쪽과 서쪽이 포개지는
주소 없는 저녁까지 도망 와있다
한 사람이 박스를 열고 나간 뒤
오래된 박스만 남아 있다
네 개의 각도가 이웃처럼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다
[당선소감]
시를 쓰다 힘들면, 배낭 하나 메고 혼자서 훌쩍 떠나곤 합니다. 늦은 시간 공항도착해서 헤매다 노숙도 하고 여행지를 무작정 돌아다녔습니다.
지금도 그 시간들이 오래도록 내면에 그림같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이 내 시의 정서에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 시인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꾸는 듯합니다. 신문사에서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관악산 둘레 길을 걸었습니다.
나무 하나 하나에 의미를 생각하며 한참이나 걸었습니다. 저 소나무 한 그루처럼 나도 어떤 길목에서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혼자 서 있었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는 나의 고독을 덜어주는 가족이자 동반자였으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 무형의 존재였습니다.
때로는 힘들어서 놓아버리고 싶고 멀리 도망 왔지만 저는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시는 절망과 즐거움을 함께 하였습니다. 시와 좋은 인연을 끝까지 붙들고 가려고 합니다.
귀한 지면을 허락하신 전라매일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미진한 시를 선택하여 주신 심사위원님께 마음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모두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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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전라매일 신춘문예에 1,500여 편의 시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투고됐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최주숙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권용례의 「옷장의 계절」, 문진숙의 「불꽃놀이」, 신귀자의 「팔자야 놀자」와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였다.
선자들은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참신성, 독창성, 작품성에 관심을 갖고 가능성을 중심으로 심사에 임했다.
최주숙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는 초월적 우주관, 권용례의 「옷장의 계절」은 ‘겨울의 옷장’과 ‘봄날의 새싹’에 대한 동일시, 그런가 하면 문진숙의 「불꽃놀이」는 신비롭고 역동적인 표현들로 심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용의 공소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신귀자와 송현숙의 작품이었다. 신귀자의 「팔자야 놀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눈뜸의 치열성이 이를 끝내 뒷받침하지 못해 아쉬웠다.
이에 비해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는 패배와 절망 속에서도 연민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는 휴머니즘적 시선이 그 배면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상상력 부족과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은 아쉬움이 크지만,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당선작으로 올렸다.
- 심사위원 김동수 시인, 김기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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