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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션현혹이론 / 김해리

 

 

어쩌다가 얼룩을 들여놨군요

온순하게 풀을 뜯던 계절을 지나면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냄새를 맡게 되죠

 

치료는 단순합니다

얼룩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되짚어 보세요

 

눈을 감고 동물원에서 보았던 얼룩무늬를 불러보세요

처음 본 무늬는 어댔는지 언제 가슴이 뛰었는지

흰색과 검정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서로 먼저라고 우기는 모습이 회색으로 보일 대는

그냥 웃어주면 됩니다

 

우울한 날에는 얼룩무늬를 걸치고 외출하는 것도 한 방법이죠

줄무늬는 날시에 민감하니까

굵거나 선명하게 혹은 가늘고 희미하게 바귀는

마치 시각을 교란하기 위한 모션현혹이론처럼

온기란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달라지죠

 

검은색은 흰색보다 온도가 높다고 합니다

죽으면 더 깊어지는 사람처럼 말이죠

 

선생님, 그런데 이 말은 언제 멈추죠

말에게도 먹이와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제야 정신과 의사는 말을 멈추었다

 

검은 바지에 하야 ㄴ가운을 걸친 얼룩말

거침없이 달려와 표류 중인 보호색

갈기를 세운 열기가 주춤거리다가 숨을 고른다

 

 

 

[당선소감]

터널을 건너는 중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함께 가던 그가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엔 타박타박 말없이 앞서가던 그가 허방에 빠졌다. 손을 내밀었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헛손질뿐이었다. 지쳐 눕고 싶을 때 병상에 있던 그가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일어서야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허방 깊숙이 들어갔다. 그제야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절망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나를 꼭 잡아주던 시는 희망이고 구원이었다. 시가 있어 숨을 쉴 수 있었고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손짓하며 다가오는 빛 한줄기, 천천히 일어선다.

제 마음을 읽어주시고 부족한 작품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넘어져 훌쩍거릴 때마다 마음 잡아주신 이경림 교수님 감사합니다. 가르침대로 시의 바른길로 걷겠습니다. 자상한 마음으로 이끌어주신 이종섶 선생님 감사합니다. 흐트러지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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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은 총 174명의 750편이었다. 신춘문예라는 성격을 고려해 작품의 완성도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내밀한 인식과 도전적 문체에 관심을 갖기로 하고 심사에 임했다. 예년에 비해 응모작 수준은 높았으나 개성적인 목소리가 없어 선뜻 만족스러운 작품 찾기가 쉽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거론된 작품은 장윤덕의 「그늘의 역사」, 김종태의 「소행성 STGR」, 방미영의「고드름」, 김해리의「모션현혹이론」등 4편이었다.

먼저 장윤덕의 「그늘의 역사」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있는 ‘그늘의 역사’를 고즈넉한 산문체에 담담하게 엮어내는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시대적 풍경들을 묘사하면서 전제된 사유의 진술과 서사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김종태의 「소행성 STGR」은 시적 발상에 있어 독특함을 보여줬지만 후반부에서 평이한 낯익은 문법들로 인해 문장의 탄성이 떨어져 아쉬움이 컸다. 방미영의「고드름」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밀도 있는 접근으로 작품의 안정감과 완성도가 돋보였으나 소재면에서 새롭지 않고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해리의「모션현혹이론」은 얼핏 시공을 뛰어넘는 사유가 난조를 보이는 듯하나 시적 압축과 끝까지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곧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끝내 떨칠 수 없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가 사유의 세계로 튼튼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응모작들도 선명한 이미지로 고른 수준을 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당선작으로 선했다.

- 심사위원 김동수, 김기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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