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스윙 / 여태천

 

 

커피 물이 끓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2637,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2654,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스윙

 

nefing.com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여태천(37) 시인이 28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스윙' 49.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 중인 여 시인은 2000'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후 2006년 첫 시집 '국외자들'을 냈다.

 

심사위원들은 "여태천 시인은 말의 최소화로 여백을 창조하는 시, 의미의 증식이 아니라 의미의 붕괴를 통해 여백을 창조하는 시를 씀으로써 무기교의 기교를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상금은 1천만원이며 시상식은 내달 10일 오후 서울 강남출판문화센터 내 민음사에서 열린다.

 

 

728x90

 

 

검은 표범 여인 / 문혜진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 프러시아의 스킨헤드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도 좋겠어 우리는 무엇이든 공모하기를 좋아했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 마음껏 놀았다 무례함을 즐기며 인스턴트 커피와 기타의 선율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망칠 수 있을까 골몰하며 야생의 경전을 둘러보았지 그러나 지금은 이산의 계절 우리는 춥고 쉬 지치며 더, , , 젊음을 질투하지 하지만 네가 잠든 사이 나는 허물을 벗고 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벨트를 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이힐 벗어 던지고 사로잡힌 자의 눈빛으로 검은 표범의 거처에 스며들거야 단단한 근육을 덮은 윤기 흐르는 검은 밸벳 흑단의 전율이 폭발할 때까지 이제 동굴보다 깊은 잠을 자야지 도마뱀자리 운명, 진짜 내 목소리를 들려줄까?

 

 

 

검은 표범 여인

 

nefing.com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국내 최대의 시문학상인 '김수영문학상' 26회 수상자로 문혜진(31) 시인이 30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표범약사의 비밀 약장' 49.

 

추계예대 문창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문씨는 1998'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해 시집 '질 나쁜 연애'를 펴냈다.

 

심사위원단은 "시인의 시는 이론의 틀에 맞춰 생산되는 작품들과는 다르다"면서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또는 자신의 여성상을 의식하고 쓰는 시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발아되거나 태어나거나 발효한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수상자에게는 1천만 원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되며 수상작품들은 조만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시상식은 내달 17일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열린다.

 

 

728x90

 

 

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바다로 가득 찬 책

 

nefing.com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제25'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강기원(49)씨가 4일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바다로 가득 찬 책'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은 지난해까지 매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올해부터 등단 10년 이내 기성 시인은 물론 등단하지 않은 예비 시인으로까지 문호를 넓힌다는 취지로 공모제로 심사 방식을 전환했다.

 

올해 수상자 강씨는 1997'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2005)를 냈다.

 

민음사 측은 "최근 시의 경향이 일반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강씨는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뚜렷이 나타냈으며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도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강씨는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천형의 고통이라 하지만 내면에 구멍을 뚫고 내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평범한 무명시인이 상을 받아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18일 오후 5시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릴 예정이며 상금은 1천만원이다.

 

728x90

 

 

제비꽃 여인숙 /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이나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잇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빈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한다

문득 내 손가락의 실반지 그 해묵은 뿌리에 땀이 찬다

제비꽃 아래의 고운 숨결에 동참하고 싶어

내 마음 감나무 새순처럼 윤이 난다

 

흙 속에 살되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잘 주무시고 계신다

이미 흙을 지나버린 차돌 하나,

살짝 비껴간 뿌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 훗날의 제 울음주머니만 굽어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해살이라고, 그리하여

차돌 같은 사리로 마음 빛나는 것이라고

 

 

 

제비꽃 여인숙

 

nefing.com

 

 

민음사가 주관하는 제2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에 시인 이정록(李楨錄·37)씨의 제비꽃 여인숙이 선정됐다.

 

유종호 황동규 최승호씨 등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대해 말의 맛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살가운 상상력이 넘치는 시편이라고 평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현재 홍성여고 한문교사로 재직 중인 이씨는 충남 홍성여고 한문교사로 재직중인 이씨는 이제 내 옷에도 단추 하나가 매달리게 되었으니 옷깃을 여미는 자세로 문학을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간 벌레의 집은 아득하다3권의 시집을 냈다. 시상식은 12월 초 예정이다.

 

 

728x90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백주은

 

 

세상이 하 수상하여

도 닦는 기분으로 두문불출,

면벽하다 간만에 집을 나섰더니

거리에서 누가 묻는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길에서 마주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무슨 어색한 질문일까.

점잖게 타이르려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과

놀거나 쉬고 있다는 대답들이

그 무슨 시류가 된 듯싶네.

 

하 수상한 세월 탓에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버린 것일까?

주고받는 대화들이 온통

선문답(禪問答)이 아니면 동문서답형이니

시대가 만드는 게 영웅만은 아닌가 싶네.

 

그래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풍파여, 부서지거라.

이 몸은 남겠노라, 나의 벽 앞에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nefing.com

 

 

1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백주은씨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민음사)가 선정됐다.

 

지난 83년 단편소설 어떤 귀향으로 등단한 백씨는 방송평론 등으로 활약해 오다 올해 처음 발표한 시집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쓰고 싶었던 소재들을 시라는 개념보다는 쓸 거리, 읽을거리 개념으로 썼다""독자들에게 이 시집이 소화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심사진은 "백씨의 시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언어의 유희를 배제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세계에 대한 넉넉한 인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728x90

 

 

산정 묘지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산정묘지

 

nefing.com

 

 

 

728x90

 

 

햄버거에 대한 명상 / 장정일

 

 

-가정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오늘 내가 해 보일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나 손쉽게, 많은 재료를 들이지 않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명상

그러면서도 맛이 좋고 영양이 듬뿍 든 명상

어쩌자고 우리가 <햄버거를 만들어 먹는 족속> 가운데서

빠질 수 있겠는가?

, 나와 함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행하자

먼저 필요한 재료를 가르쳐 주겠다. 준비물은

 

햄버거 빵 2

버터 큰 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달걀 2

빵가루 2

소금 2 작은 술

후춧가루 ¼작은 술

상추 4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

 

위의 재료들은 힘들이지 않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믿을 만한 슈퍼에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슈퍼에 가면

모든 것이 위생비닐 속에 안전히 담겨 있다. 슈퍼를 이용하라

 

먼저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곱게 다진다.

이 때 잡념을 떨쳐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 명상의 첫단계는

이 명상을 행하는 이로 하여금 좀더 훌륭한 명상이 되도록

매우 주의깊게 순서가 만들어졌는데

이 첫단계에서 잡념을 떨치지 못하면 손가락이 날카로운 칼에

잘려, 명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장치되어 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끝난 다음,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 빵가루, 달걀, 볶은 양파,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골고루 반죽이 되도록 손으로 치댄다.

얼마나 신나는 명상인가.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그곳을 만지는 일만큼

우리의 촉각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은,

곧 이 순간,

음식물을 손가락으로 버무리는 때가 아니던가

 

반죽이, 충분히 끈기가 날 정도로 되면

4개로 나누어 둥글납작하게 빚어 속까지 익힌다.

이때 명상도 따라 익는데,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반죽된 고기를 올려놓고 1분이 지나면 뒤집어서 다시 1분 간을 지져

겉면만 살짝 익힌 다음 불을 약하게 하여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 가스레인지가 필요하다뚜껑을 덮고 은근한 불에서

중심까지 완전히 익힌다. 이때

당신 머리 속에는 햄버거를 만들기 위한 명상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머리의 외피가 아니라 머리 중심에, 가득히!

 

그런 다음,

반쪽 남은 양파는 고리 모양으로

오이는 엇비슷하게 썰고

상추는 깨끗이 씻어놓는데

이런 잔손질마저도

이 명상이 머리 속에서만 이루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명상도 하나의 훌륭한 노동임을 보여준다.

 

그 일이 잘 끝나면,

빵을 반으로 칼집을 넣어 벌려 버터를 바르고

상추를 깔아 마요네즈 소스를 바른다. 이때 이 바른다는 행위는

혹시라도 다시 생길지 모르는 잡념이 내부로 틈입하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버터와 마요네즈를 한꺼번에 처바르는 것이 아니라

약간씩, 스며들도록 바른다.

 

그것이 끝나면,

고기를 넣고 브라운 소스를 알맞게 끼얹어 양파, 오이를 끼운다.

이렇게 해서 명상이 끝난다.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nefing.com

 

 

 

728x90

 

 

백 년 너머, 우체국 / 조정인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릴 낼 때, 유리의 일이

나는 아팠으므로

 

이마에서 콧날을 지나 사선으로 금이 그어지며 우주에 얼굴이 생겼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던 일

 

그의 무심이 정면으로 날아든 돌멩이 같던 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물이 부어지며 길게 금 가는 유리잔이던 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질문: 영혼은 찢어지는 물성인가 금 가고 깨어지는 물성인가, 하는 물음 사이

 

명자나무가 불타오르고

유리의 일과 나 사이 4월은 한 움큼, 으깨진 명자꽃잎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나에게 붉은 손바닥이 생길 때 우주에는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12월로 이동한 구름들이 연일 함박눈을 쏟아 냈다 유리병 가득 눈송이를 담은 나는 자욱한 눈발을 헤치고 백 년 너머, 눈에 묻힌 우체국 낡은 문을 밀었다

 

나에게는 달리 찾는 주소가 없고 우주는 하얗게 휘발 중이다

 

 

 

 

사과 얼마예요

 

nefing.com

 

 

 

14회 지리산문학상에 조정인(66) 시인이 선정됐다.

 

지리산문학회와 계간 시산맥은 오는 929일 경남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제14회 지리산문학제에서 시상식을 가질 지리산문학상에 조 시인의 백년너머 우체국4편이 최종 확정됐다고 23일 밝혔다.

 

조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1998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사과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악등이 있다.

 

또 같은날 시상하게 될 제14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문이레(50)씨의 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4편이 선정됐다.

 

계간 시산맥과 지리산문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지리산문학상은 지난해부터 상금이 1000만원으로 인상됐다.

 

지리산문학상은 지난해 발표된 기성 시인들의 작품 및 시집을 대상으로 하는 심사제로 명실상부한 문학상으로서 높은 품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리산문학상은 함양군과 지리산문학회가 제정해 첫해 정병근 시인이 수상한 것을 비롯해 유종인, 김왕노, 정호승, 최승자, 이경림, 고영민, 홍일표, 김륭, 류인서 ,박지웅, 김상미, 정윤천 시인이 각각 수상했다.

 

지리산문학회 관계자는 상금이 인상되면서 전국 규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도약하게 됐고 수상자의 시창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728x90

 

 

우연이 아니다 / 신달자

 

 

북촌으로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할아버지 노방저고리 단추만 한 이 한옥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되돌아서서

 

다시 되돌아서서

느리게 느리게 북촌을 걸으며 되돌아서서

걸어온 내 생을 본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을 마을 거창

가끔 하늘이 열리며 서울을 그리워하던 곳

어머니라는 말 친구라는 말 사랑이라는 말을 배운 일

그렇게 산에서 부산 바다로 다시 서울 한강으로

그게 어디 우연이겠는가

되돌아서서 바라보면 다 예쁘다

 

다시 돌아가진 않겠지만

결코 돌아가진 않겠지만

 

나는 지금

다시 되돌아서서

지난 시간들을 어루만진다

 

어루만지다가

노후의 계단을

 

시큼하게 본다

 

 

 

 

북촌

 

nefing.com

 

 

 

신달자(75) 시인이 시집 <북촌>(민음사, 2016)으로, 고려대 심경호(63) 교수가 학술연구서 <김삿갓 한시>(서정시학, 2018)로 각각 제29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달진문학상은 진해 출신으로 한학자이자 시인인 김달진(1907~1986) 선생을 기리고자 타계 1주기인 1990년 6월에 제정됐다. 창원시와 서울신문사 후원으로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주최하는 전국 단위 문학상이다.

 

대상은 매년 3월을 기준으로 최근 2년 이내 발간한 시집, 평론집, 학술서다. 올해부터는 저자 문단 경력을 10년에서 20년으로 늘리고, 시와 평론에다 학술연구를 포함했다. 시는 매년, 학술과 평론은 격년으로 선정할 예정이다.

 

시집 <북촌>은 신달자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이다. 2014년부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 열 평 남짓 작은 둥지를 틀고 살면서 계동이며 가회동 구석구석 골목을 누빈 발걸음이 담겼다. 시인이 '가슴으로 썼지만 발로도 썼다'고 표현한 이유다.

 

북촌에서 삶은 시인에게 그의 고향 거창 같은 편안함과 그리움을 줬다.

 

"거창을 다녀오면 한 사흘 콧노래가 나오지/원서동은 거창의 대동리 같다고/아니아니 계동이 거창 같다고/그건 아니지/가회동이 거창 같다고/좋은 것은 무도 거창 같다고/아니 북촌이 거창이라고" ('거창을 다녀왔다' 중에서)

 

지난해 수상자이자 올해 심사위원인 유안진(77) 시인은 특히 북촌의 내력이 담긴 시들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말을 쓰는 시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역사와 민속 사랑이라는 것이다.

 

 

728x90

 

 

국물 /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살 흐르다

 

nefing.com

 

 

28회 정지용 문학상에 신달자 시인의 '국물'이 선정됐다. '향수(鄕愁)' 시인 정지용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옥천 지용회는 제28회 정지용문학상에 신달자 시인의 '국물'을 선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심사위원인 유종호 시인은 "17행의 경어체 시편이 일생의 경험을 오래 동안 반추하고 고아서 우려낸 진국 같은 작품이다""'국물'을 천거하는 소리에 아주 쉽게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근배 심사위원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을 감았지' 라는 대목에서 사랑이 시에 어떻게 포개지고 시가 사랑을 얼마나 진하게 '몸을 섞으며' '간질이는 맛을'내는지 알싸하게 느꼈다"고 평했다.

이 상은 내달 14일 제29회 지용제가 열리는 옥천군 구읍상계공원 특설무대에서 시상된다.

 

신달자 시인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64'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다시 부는 바람' '백치애인'등이 있다.

 

+ Recent posts